- ▲ 조선일보 DB
청중 마음 여는'달변'의 비결은…
발음·사투리는 별문제 안돼'에…' '가령' 같은 습관어가 문제
스피치에서는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상대방의 귀에 들리는 게 진짜 말이다. 말에 대한 '서비스 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얘기다.얼마 전, 한 행사에서 대기업 회장의 연설을 들을 일이 있었다. 강연대에 서서 비서가 써준 원고를 읽느라 1분에 한 번씩 고개만 위아래로 '까딱까딱'했다. 게다가 말의 톤이 일정해 5분 만에 청중을 졸게 만들었다. 그의 말은 사람들의 가슴으로 채 전달되기도 전에 귀에서 막혀버렸던 것이다.
스피커는 준비한 콘텐츠가 청중에게 잘 들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물론 발음을 잘 하기 위해 '구강 구조'를 바꾸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내 장점을 살려 스피치 원고에 몇 가지 채색을 하는 것만으로도 '프로'의 느낌을 낼 수 있다. 음악처럼 스피치에 강약과 템포를 주는 것도 한 방법이다.
- ▲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ps@chosun.com
악상 기호 중에 'f(포르테)'와 'p(피아노)'라는 게 있다. 전자는 '강하게'를, 후자는 '여리게'를 의미한다. 스피치에서 f와 p만 잘 활용해도 청중의 몰입도가 훨씬 높아질 수 있다.
가수 조용필이 〈비련〉의 첫 소절을 부를 때 "기도하는!"을 외치는 순간 객석에서는 "오빠!"가 터져 나온다. 이어지는 "사랑의 손길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게 부른다. f에서 p로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듯 목소리의 세기가 위에서 아래로 뚝 떨어지면서 청중은 강하게 몰입한다.
이 기법을 강연에 활용해 보자.
"오늘 우리가 왜!(f) 이곳에 왔는지 여러분은 아실 겁니다(p)"
청중은 갑자기 숙연해지면서 스피커의 얼굴을 바라볼 것이다. 모든 스피치는 강약이 있어야 콘텐츠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
목소리의 강약 조절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소리의 장단이다. 음악에서는 이를 '리타르단도(rit·점점 느리게)'와 '아첼레란도(accel·점점 빠르게)'로 표현한다. 얼마 전, 한 중견그룹 회장을 지도한 적이 있었다. 이분은 어찌나 말을 느리게 하는지 스피치가 전반적으로 계속 늘어졌다.
"지금 우리 회사 신입사원들에게 필요한 것은 열정과 패기입니다. 그리고 도전정신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존의 틀을 깨는 역발상과 창조 정신입니다."
이 문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느릿느릿 말한다고 생각해보자. 듣는 신입사원들은 답답해서 속이 터질 것이다. 한 달 내내 그를 붙잡고 "좀 더 빠르게!"만 계속 외쳤다. 나중에는 입에 엔진을 단 것처럼 말에 속도가 붙었다. 만약 이 말을 똑같은 템포로 말하면 각각의 문장으로 쪼개져서 들릴 것이다. 그러나 리듬을 살리면 전체 내용이 하나의 문장으로 느껴진다. 특히 아첼레란도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말을 끌고 가는 효과가 있다.
또 하나 기억할 만한 악상 기호가 테누토(tenuto·그 음을 충분히 길게)다. 특정한 고유명사나 단어를 충분히 강조하고 싶을 때 쓴다.
"우리 회사에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핵심 인재입니다(충분히 늘려서)."
'핵심 인재'라는 단어를 말할 때는 원래의 속도보다 약간 더 긴듯하게, 한 음 한 음 충분히 발음해야 한다. 마치 피아노 건반을 하나씩 누르듯이 읽는 것이다. 테누토 기법은 단어에만 쓰지 문장 전체에는 쓰지 않는다.
■습관어는 금물
필자는 지도할 때 발음이나 사투리는 별로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러나 꼭 지적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습관어'다. 무의식 중에 사람들이 습관처럼 쓰는 말들이다. 특히 나이 드신 분들은 '에…' '에 또…'같은 말들을 많이 쓴다. 이런 말은 사람을 올드하고 권위적으로 보이게 한다.
교수, 공무원들은 '예컨대' '가령'을 많이 쓴다. 예컨대는 문어체이지 구어체가 아니다. 예컨대보다는 "예를 들어 말씀드리면"이 훨씬 낫다.
'솔직히'도 많이 쓰는 습관어다. 소심한 사람일수록 자주 쓰는데 이 말을 자주 쓰는 사람치고 솔직한 사람 못 봤다. 물론 듣는 사람에게도 솔직하지 않은 사람, 유약한 사람으로 보인다.
■강연대 밖으로 나오라
또 하나, 스피치 서비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몸짓 언어, 즉 제스처다. 어린아이가 동요에 맞춰 율동을 하면 가사가 더 잘 들리듯 제스처를 썼을 때 말의 전달력은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특히 손을 쓰면 전달 효과가 2배 이상 높아진다.
누군가의 연설문, 혹은 내가 직접 작성한 원고를 놓고 손이 허리에서 한 번도 내려오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계속 움직여 보자. 콘텐츠에 걸맞은 '셀프 지휘'를 하는 것이다. 이걸 자주 연습하다 보면 손이 말보다 메시지를 훨씬 더 강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제스처를 자연스럽게 써왔다. 특히 수다 떨 때의 아줌마들은 '제스처의 달인'이다. 시어머니 욕할 때 보면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환생한 것처럼 생생하게 연기한다. 단지 무대에서만 안 할 뿐이다.
사장님들을 보면 다들 앉아서 하는 스피치는 기가 막히게 잘한다. 손짓, 시선, 표정, 몸의 움직임 등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앞으로 나와서 얘기하라고 하면 대부분이 '광화문 동상'이 돼버린다. 절대 움직이지 않을뿐더러 어색해하며 단상 뒤로 숨는다. 어떤 분들은 단상을 붙잡고 손도 한번 안 움직인다. 많은 분들이 단상이 없으면 죽는 줄 안다. 우리나라 정치인, 공무원들 대부분이 그렇다.
나는 어딜 가든 강연대 뒤에서 말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강연대 위에 가슴만 보이면서 얘기하면 콘텐츠 전달 효과가 반 이상 떨어지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청중을 쳐다보라
표정과 시선도 중요하다. 몇 년 전, 한 여성 정치인이 지역 유세를 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국회의원이 왔다고 주민 50여명이 악수를 하려고 줄을 섰다. 그 국회의원은 손은 이 사람하고 잡는데 눈은 다음 사람한테 가 있었다. 말 그대로 그냥 악수만 했던 것이다.
나중에 그 50명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거, 만나보니까 사람이 차갑고 거만하대. 어째 사람 눈도 똑바로 안 쳐다봐." 그는 악수만 한 죄로 순식간에 50명을 '안티'로 만든 것이다.
악수할 때는 손 잡은 사람의 눈을 보면서 웃는 것이 기본이다. 고개 한 번 까딱하고 눈을 마주치는 데 1초면 충분하다.
스피치도 마찬가지다. 청중이 50명이 앉아있든 500명이 앉아있든 똑같이 시선으로 '마사지' 해줘야 한다. 50명이면 좌우 일렬로 한 열씩 계속 눈으로 훑어준다. 500명은 10개의 블록으로 나눠서 시선을 보낸다. 결코 사각지대가 있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