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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메르 제국(802~1444)과 앙코르와트
앙코르왓은 캄보디아 서북부에 있는 '앙코르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현재 캄보디아 시엠립 북쪽 6km 지점에 있다. 이곳은 9~15세기에 크메르 제국의 수도였다. 가장 눈에 띄는 기념물은 수리야와르만 2세(1113-50경 재위)가 12세기에 지은 앙코르왓과 자이야와르만 7세가 1200년경에 지은 앙코르톰이다.
앙코르 시는 왕가의 중심지로서, 크메르 왕조는 이곳에서 동남아시아 역사상 가장 크고 번성하고 발달한 왕국을 다스렸다. 890년경 야소와르만 1세가 수도를 앙코르로 옮긴 때부터 13세기초까지 수도가 다른 곳으로 옮겨졌던 잠시 동안과 외세의 침입으로 인한 위기시를 제외하고 앙코르의 왕들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끝부분에서 북쪽으로 윈난(雲南)까지, 또 베트남에서 서쪽에 이르기까지 넓은 영토를 다스렸다. 통치기간에 지배자들은 자신들과 수도를 찬양하기 위한 일련의 거대한 건축사업을 실시하기 위해 막대한 노동력과 국력을 쏟아부었다.
자이야와르만 7세(1181~1215경 재위) 이후 왕국의 권력과 활력은 점차 쇠퇴하여 1431년 타이 군대에게 앙코르를 점령당하여 약탈당한 다음 마침내 버려졌다. 앙코르에서 위대한 건설과 축조는 300년이 넘게 계속 되었는데 이 동안 건축과 예술양식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으며, 종교의식은 시바 신과 위슈누 신을 섬기는 힌두교에서 점차 관세음보살신앙이 퍼져나갔다.
앙코르도 통치의 중심지이자 신격화한 왕을 숭배하던 곳으로서, 인도에서 들여와 지역적 전통에 맞게 고쳐진 종교적·정치적 개념에 의거해 계획·건설되었으며 여러 번 재건되었다. 이 도시에 '야소다라푸라'라는 원래의 이름을 붙인 야소와르만 1세 때부터 앙코르는 인도의 전통적 우주론이 제시한 모델에 따라 세워진 하나의 상징적 우주로 여겨졌다. 그래서 이 도시는 중심부 산, 즉 피라미드형 사원을 중심으로 배치되었는데, 이것은 인도의 우주론에 등장하는 메루 산과 동일시되었으며 동시에 왕국의 번영이 달려 있는 토양의 힘을 집중시킨다고 믿었다. 야소다라푸라로 명명되었을 당시의 중심부 산의 사원은 그 지역에 있는 자연 언덕인 프놈 바켕을 적절히 변형시켜 만든 건축물이었으나 후대에 와서 전적으로 인공적인 건축물, 즉 피라미드 사원이 되었다.
이런 후대의 사원으로는 자이야와르만 5세(968~1001 재위)의 피메아나카스 사원, 우다야디티아와르만 2세(1050~66 재위)의 바푸온 사원 및 불교사원인 바욘 등이 있다. 특히 바욘은 자이야와르만 7세 때의 중심사원이었다. 자이야와르만 7세는 이 도시를 지금과 같은 거의 완벽한 형태로 건립했는데 이 무렵에 도시는 앙코르톰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또 이때에는 앙코르의 주요특징인 방대한 저수지·운하·해자 등이 만들어졌는데, 이것들은 수량조절과 관개를 위한 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인도의 우주론에서 우주 중심부의 산을 둘러싸고 있는 대양의 상징이기도 했다.
13세기말 이 곳을 찾은 중국의 무역사절 주달관(周達觀)의 생생한 기록에 따르면 앙코르는 그때까지도 번영을 누리던 거대한 도시였으며 아시아에서 가장 장엄한 수도의 하나였다. 그럼에도 이 무렵에는 자이야와르만 7세의 재위기간 동안 극에 달했던 거대한 규모의 건축열이 확실히 끝나고, 상좌부로 대표되는 새롭고 보다 절제된 종교적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국 서부에 세워진 타이 왕국의 군대도 이미 크메르의 심장부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16세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경향은 도시의 폐기라는 형태로 절정에 이르렀고, 밀림으로 뒤덮인 고대 사원의 유해와 한때는 장대했던 저수지와 수로망의 폐허만 남게 되었을 뿐이다.
고대도시가 멸망한 15세기초부터 19세기말까지 400년이 넘는 동안 앙코르에 대한 관심은 대부분 앙코르왓에 모아졌는데, 앙코르왓은 상좌부 승려들에 의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됨으로써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불교순례지의 하나가 되었다.
진랍 시대(CHENLA PERIOD, 前 앙코르시대, 6세기~8세기)
대륙에서 남하한 진랍이 푸난을 흡수하여 크메르인 최초의 단일국가로 성장하나 자이야와르만 1세가 죽은 후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수(水)진랍(WATER CHENLA)과 육(陸) 진랍(LAND CHENLA)으로 분리되었을때 샤일렌드라 왕조가 수진랍의 왕을 죽이고 종주권을 행사하였다.
앙코르 왕국 최고 전성기를 맞이한 크메르 왕국은 이때 앙코르 유적 중 가장 유명한 앙코르왓을 축조함으로서 불가사의적인 건축물을 완성하게 되었다. 그는 열렬한 힌두교 신자로서 앙코르왓을 세웠고 자신을 힌두교의 보호, 유지의 신인 위슈누(VISHNU)와 동일시했다. 사원들은 우주의 중심으로 힌두교의 신들이 거주하는 메루 (MERU)산을 지상에 재현하며, 사원의 주변은 저수지나 해자로 둘러쌓다. 이는 우주를 감싸는 성스러운 대양을 의미하며 실용적으로는 외적방어와 관개수로로 사용되었다. 앙코르의 전성기로 인구 100만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도시를 건설하였다.
9. 제 22대 왕, 자이야와르만 7세 (JAYAVERMAN Ⅶ, 1181~1219)
수리야와르만 2세의 죽음 후 후계자 다툼으로 혼란에 빠진 틈을 타시암족과 참파국이 침입하고 참족의 지배를 잠시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 이들을 물리치고 격퇴한 크메르 제국의 가장 위대한 통치자가 자이야와르만 7세다. 그는 톤체샵 해전에서 참족을 모두 격퇴하고 대승을 거두는데 이 장면이 바이욘 사원의 벽면에 생생하게 부조로 묘사되어 있다.
이렇게 자이야와르만 7세는 캄보디아 역사에서 영웅이며 부처로 받들어지고 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바이욘 사원이 있는 거대한 앙코르 톰의 건설과 주위에 '타 프롬', '프레아 칸' 등 불교사원을 건립하고 대승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사회사업에도 힘을 기울여 수많은 병원을 전국에 건립하였다. 재임기간 동안 베트남의 해안에서부터 말레이시아 반도와 멀리 미얀마까지 최대의 영토를 구축하여 앙코르 왕조 최후의 번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자이야와르만 7세 이후 크메르 왕국은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14세기 이후 크메르 왕조의 힘은 점점 쇠약해지며 1431년 마침내 서쪽 태국의 아유타야 족에 의해 앙코르는 점령되고 역사의 뒤안 길로 사라지게 된다.
앙코르 시대 개관
기원전 1세기경, 캄보디아의 남부 연안지대에서 인도 상인들과 교역하면서 인도적인 문화와 종교를 토속의 여러 신앙에 융합시켜 받아들인 부남이라는 나라가 일어나 메콩강 델타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부남의 속국이었던 메콩캉 중류지역의 크메르 진랍이 5세기경부터 세력이 강성해져, 7세기초 남하(南下)하여 부남을 멸망시키고 국내를 통일했다.
진랍은 자이야와르만 1세(Jayavarman1, 재위 675~681)가 죽은 후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혼란에 빠져 내륙 쪽의 육진랍과 연안 쪽의 수진랍으로 분열되었으며, 수진랍은 8세기경부터 군웅이 할거하여 혼란해진 틈을 그 일부가 인도네시아 자바세력에게 점령당했다. 자바에 포로로 잡혔다가 8세기 후반 귀국한 수진랍의 자이야와르만 2세(재위 802?835)는 메콩강 델타지역의 지배자가 되어 781년경부터 메콩강 중류지역을 정복하고, 톤레삽 호 동안으로 북상하여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게 되자, 802년 앙코르 북동쪽에 있는 프놈 쿨렌(Phnom Kulen) 산에서 자신을 전륜성왕이라 선포하고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는 자바에의 복속을 거부하고, 왕은 힌두교의 신 시바와 합체된 존재라는 왕즉신의 ‘신왕신앙’에 따라 ‘데와 라자’라는 제의를 집행했는데, 이러한 강력한 종교적 배경이 앙코르 왕권의 기반이 되었다. 그는 앙코르톰에서 남동쪽으로 14km 떨어진 곳에 하리하랄라야라는 도성을 조영하고, 크메르 제국 앙코르 왕조의 위대한 시조가 되었다.
그 후 야소와르만 1세(Yasovarman 1, 재위 889~910경)가 900년경 수도를 앙코르로 정하고, 제1차 앙코르 도성을 건설하여 자신의 이름을 따라 ‘야소다라푸라(Yasodarapura)라 했다. 이 도성은 프놈 바켕(Phnom Bakheng)을 중심산으로 하여 그 위에 신전을 건축하고, 앙코르톰의 서남쪽에 토성을 쌓아 완성시켰다.
그 후 왕위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자이야와르만 4세가 921녀부터 944년까지 코 케르(Koh Ker)로 천도함으로써 이 도성은 잠시 버려졌다가, 라젠드라와르만 2세(Rajendravarman 2, 재위 944~968)가 다시 앙코르로 돌아와 피메아나카스(Phimeanakas)를 중심사원으로 하여 제2차 앙코르 도성을 건설했다.
자이야와르만 5세((재위 968~1001)의 치세는 태평성세여서 문물이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그 후 세 사람이 왕위계승자가 다투어 9년 간의 내전을 치른 끝에, 혈통이 다른 수리야와르만 1세(Suryavarman 1, 재위 1001~1050)가 즉위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그의 아들 우다야디티와르만 2세(Udayadityvarman 2, 재위 1050~1066)는 바푸온(Baphon)을 중심 산으로 하여 제 3차 앙코르 도성을 조영했다.
그러나 새 도성의 무리한 건설이 화근이 되어 반란이 일어나고, 타이의 북동쪽 코라트 고원에서온 유력자가 왕위를 찬탈하여 왕실의 혈통이 바뀐 다음, 수리야와르만 2세(재위 1113~1150년경)가 왕국을 재통일하여 실력으로 앙코르 왕조의 최전성기를 구축했다. 그는 크메르 문명의 상징인 앙코르왓을 건조하고, 적극적으로 외국 정벌에 나서 국토를 크게 확장했다. 그러나 오랜 전쟁과 대사원의 무리한 건립으로 국력이 피폐해져, 1177년 도리어 앙코르 도성은 참파(Champa, 지금의 메콩강 삼각주의 남베트남) 군의 침공을 받아 왕궁과 사원둘이 철저하게 약탈당하였다.
자이야와르만 7세(재위 1181~1219)는 참파를 토벌하여 크메르에 병합하고, 대승불교를 국교를 삼아 바욘(Bayon) 사원을 건립했으며, 앙코르톰을 조영하여 제 4차 앙코르도성을 건설했다. 그는 원기왕성하게 외국을 정벌하여 동쪽으로는 중부 베트남 해안에서 서쪽으로는 미얀마와 타이 사이의 메콩강 상류지역까지, 북쪽은 랑도스의 비엔티안(Vientiane)까지, 남쪽으로는 말레이반도 북부에 이르기까지, 인도차이나반도를 석권하는 캄보디아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대 제국을 구축했다. 이때 크메르제국의 영광은 최고조에 달했고, 그 수도 앙코르 도성은 넓이 약 1백 평방킬로미터, 인구 1백만명을 넘어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앙코르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원인은 세력이 강성해진 시암(Siam, 지금의 태국)의 아유티아(Ayuttaya)조로부터 1353년과 1364년 연거푸 공격을 받은 데 있었다. 그후에도 양국은 격전을 거듭하다 드디어 1432년 아유타야의 침공을 방어할 힘이 없어 유서깊은 앙코르 도성을 버리고, 남동쪽 240km 지점에 있는 프놈펜으로 천도했다.
찬란했던 앙코르 문명의 가장 큰 붕괴원인은, 반복되는 시암과의 소모전이지만, 거듭되는 전쟁으로 인한 주민생활의 피폐, 과두정치, 왕실의 내분으로 인해 외세의 침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점, 고대 힌두사상과 체제(카스트제도)의 정체, 지방세력의 할거와 그에 따른 왕권의 약화, 새로운 상죄부 불교의 침투(평등사상)등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다시 황폐화의 길을 걷게 된 고도 앙코르는 그 존재조차 망각되다시피 했다.
01. 스테인드글라스(Stained Glas)-유리화의 기원
스테인드글라스의 가치와 기능
오늘날 서구에 있어 스테인드글라스(Stained Glass)가 하나의 조형 예술로 새롭게 인식되면서 그 예술적 가치가 재생 부활, 발전되고 있는 것은 대단히 주목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교회예술이 체계적으로 정립되어 있지 못한 형편이어서 사람들 속에 무관심한 상태로 놓여있는 것은 한편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된다.
서양에서는 스테인드글라스의 기술이 초기 고딕시대로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없이 이어져왔으나 한 가지 근본적인 변화는 종교예술이라는 국한된 의미에서 점진적으로 모든 조형예술 전반에 걸쳐서 응용 발전되고 있다는 점이다. 스테인드글라스는 교회건축에서부터 빛과 색채가 지니는 종교적 개념으로 지속 유지되어 왔지만, 오늘날에는 교회건축의 부속물이리라ᅟᅳᆫ 고정관념에서 탈피하여 교회건축 공간에서 뿌만 아니라 일반 공공건물의 실내외, 공예, 화학, 조각에 이르기까지 파급되어 독특한 예술성을 표현하게 되었다.
또한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은 단순한 기능의 작업이 아니어서 회화적인 묘사법과 조각적인 조형을 함께 지니고 있으므로 색채에 대한 감각과 재료의 화학적 변화 및 물리적인 변화를 파악하여 그것을 건축적 공간조형과 조화시켜야 하는 복합적인 어려움을 지니고 있다.
스테인드글라스는 전통적으로 기능을 지향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다른 순수예술 분야와는 달리“예술이냐? 기술이냐?”하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렇지만 결코 기술로 단정할 수 없는 예술적 가치 인식이 나타났으며 상상력이 필요한 예술로써 스테인드글라스를 재평가하려는 인식이 강하게 부각되고 있다.
스테인드글라스는 현대 조형예술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새로운 예술장르로 점차 이해되고 있다. 또한 그것이 다른 미술 분야에 깊게 침투하여 이용되고 있는 사례를 수없이 볼 수 있게 되었다.
서양에서는 그러한 논란 속에서도 역사적으로 그 작품자체가 예술적 가치를 지닌 채 교회건축물에서 특이한 공간처리 구실을 다하여 왔으나, 우리나라에 있어서 스테인드글라스는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것이 아니라 서구에서 유입된 후 교회건물 속에 극히 간헐적으로 보였을 뿐이어서 스테인드글라스가 지니는 예술적 가치에 대한 이해가 매우 미흡한 평편이다.
2. 스테인드글라스의 발생과 변천
스테인드글라스는 말 뜻 그대로 ‘채색된 유리’라는 말로서 현대에 이르러서는 색칠된(colered) 혹은 미술유리(art Glass)라 불리기도 한다. 독일어로는 Slasmalerei, 불어로 Vitrail이라 한다. 넒은 의미의 스테인드글라스란 색이 들어 있느 모든 유리제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그리스도교 교회 공간과 함께 하는 미적 표현 방법으로 고유명사화 되었다.
스테인드글라스가 이류 역사에서 최초로 나타난 것은 고대 이집트이다. 고대 이집트 왕국의 고분에서 출토된 그것이 1400여 년 전 우리나라 삼국시라 무덤에서 발견된 색유리로 만든 유리제춤처럼 오늘날 우리가 말하고 느끼는 스테인드글라스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기 해도 최초의 색유리의 등장이라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여 스테인드글라스는 역사적으로 교회 건축조형에서 사용한 하나의 표현방법으로서 10세기경을 전후로 하여 교회건축의 창문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져 그리스도교와 밀접한 관계 속에서 종교미술의 예술형태로서 정착하여 전래되어온 것이다.
스테인드글라스의 색유리는 투과되 빛에 의해 보이는 단순한 색유리로 생각되지만 하나의 색유리ᅟᅳᆫ 규석분, 장석, 석회석, 아비산, 안티몬, 산화크롬, 산화니켈, 형석 등 111~12가지 낱낱의 금속산화물질의 혼합체로 이루어진 것이다.
금속산화물로 이루어진 스테인드글라스의 색유리는 색체가 흡수된 색유리이기 때문에 퇴색되거나 변색되는 일이 거의 없다. 따라서 그 유리으 생명은 거의 영구적이어서 중세기대의 화려하고 신비스러운 색체가 오늘날까지도 경이롭게 빛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스테인드글라스의 색체는 어둠과 밝음의 공간에 빛의 시간적 변화, 즉 빛의 강약, 빛의 좌우, 전후, 상하 방향에 따라 신비한 변화를 보여주며, 동시에 색유리의 면적과 두께에 따라 투영되는 빛이 각양각색을 이루고 가볍고 밝은 빛에서부터 무겁과 심오한 빛에 이르기까지 일대 색체의 교향악이 연출된다.
전통적인 방법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잘려지고 채색되고 불에 구워낸 다음 납틀(Leaded came)이라 불리는 납섭에 의해서 봉홥되고 조립 되어 교회창문에 축소되었지만, 근세에 이르러 고예, 회화, 조각, 건축에서 스테인드글라스를 대담하게 이용하면서부터 두꺼운 평판유리(slata glass)와 유리를 중첩화하여 아름답고 보다 색채의 조화를 충족시키는 기술로 기법과 기술이 더불어 개발되었다.
새로운 기운은 루이스 티파니(Louis C, Tiffany)라는 거장이 출현하여 현대의 기술공학과 결합시킴으로서 새로운 재료와 기법이 개발되었다. 특히 유백색 유리(opalescent)의 개발로 인공조명에 의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시작되면서 동테프(copperfoil)기법이 나타남으로써 일대 전화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1930년경 스테인드글라스 작가들은 전통적인 유리사용에서 벗어나 1인치 이상 되는 두꺼운 색유리에 면처리를 하여 깨어진 색유리의 다각 면에서 파생되는 색의 변화와 신비를 더욱 증가시키는 등 현대적 스테인드글라스의 조형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의 시작은 프랑스에서이며 문자 그대로 유리의 판석을 의미하는 ‘Dalles de Viewer’라는 용어가 생겨났고 Delles 혹윽 Slabs glass로 알려지기 시작하여 스테인드글라스의 새로운 세련미와 현대건축조형 감각과 일치하는 변혁이 이루어져 사용되고 있다. 전통적으로는 시멘트에 금속연봉제를 첨가하여 사용되었으나, 2차 세계 대전 후 항공 산업의 발달로 에폭시(epoxy)라 불리는 강력한 접착체를 개발하여 더욱 견고하고 영구적인 스테인드글라스(slabs glass)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스테인드글라스는 수많은 세월동안 전래되면서 기능과 기법 면에서 많은 변화가 이었지만 결국 그것은 색유리와 그 봉합체(납틀, 동테잎 등)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변화가 없다. 굵고 가는 선에 모자이크된 색유리는 빛의 투사로 납선과 더불어 미묘한 조형을 이루면서 그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이다.
선과 면의 독특한 조화는 각가의 예술세계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화가 루오(Georges Rouault)는 종교정신에 입각한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하였고 샤갈(Marc Chagall) 또한 그의 예술세계를 스테인드글라스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다시 말하여 스테인드글라스는 단순한 기술의 차원을 뛰어넘어, 선과 색채의 신비한 조화로 이루어지는 에술의 뚜렷한 한 장르르로 위치하여 있는 것이다.
스테인드글라스는 투사된 빛의 밝음과 함께 어둠 또한 필요하며, 이 밝음과 어둠이 교차하는 사에서서 빚어진 찬란한 색의 오케스트라이다. 그 빛과 색의 오묘한 향연이 인간으로 하여금 경건한 마음과 더불어 예술적 감동을 느끼게 함으로써 스테인드글라스에 예술적 가치가 부여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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