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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20: 27 손가락을 내밀어 - 요 20: 31 그리스도를 믿게 하려 함.
요 20: 27 손가락을 내밀어 -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
예수께서 이곳에 나타나신 것은 '도마' 한사람 때문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다른 제자들에게는 이미 나타내셨던 적이 계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마가 제시한 믿음의 조건들에 대해서 허락하셨다.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기독교의 믿음에서 부활의 믿음을 빼고는 믿음이 존재할 수 없다.
기독교에서 믿는다는 것은 '곧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1]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주님의 이번 현현은 마치 도마 한 사람을 위함이었던 것처럼 도마와의 대화만이 언급되고 있다. 주님께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도마가 믿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제시한 사항들에 대해 증명해 보일 용의(用意)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의심을 나타내었을 때 예수는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으므로, 도마는 예수께서 자신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을 듣고 놀라움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2]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주께서는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고 말씀하셨다. 주의 부활은 영이나 정신세계의 현상이 아니고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질세계의 사건이었다.
그는 몸으로 부활하셨다. 우리는 죽은 자들의 몸의 부활을 믿는다.
* 고전 15: 13-15 –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도마 같은 합리주의자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해 의심하겠지만, 하나님께는 능치 못함이 없으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요 또 증인들의 증거의 진실성을 믿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라고 말씀하셨다. (마 22: 29).
3]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믿음 없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피스토스'(*)는 고전 6: 6. 14: 22과 고후 4: 4 등에서 '믿지 않는 사람' 즉 '그리스도교인이 아닌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도마에게 그 단어가 문자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여기서의 강조점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의 핵심이라 할 만큼 중요한 내용이라는 사실에 있다. 주님의 분명한 요구는 '믿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명령이다.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명령은 그가 보여준 회의에 대한 책망이 아니라 아직 온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가 굳건한 믿음을 갖게 되기를 간곡히 원하는 주님의 애정에 근거한 것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주님의 태도는 마침내 도마를 감화시켰고 그로부터 위대한 신앙 고백을 끌어냈다. (28절).
본문에서 '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누'(*)에 대해서 몇몇 학자들은, 가끔 사용되는 용법 즉 '자신을 보이다'의 의미로 해석한다. (고전 15: 58. 골 3: 15. 살전 1: 5. 2: 7, Lenski, Barrett).
이러할 경우 믿는 자가 되라는 말은 '네 믿음을 보이라'로 바꿀 수 있다. 이런 해석도 의미는 있다. 참다운 믿음을 가진 자는 그 믿음의 참됨을 내보여 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요 20: 28 도마의 고백 -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
도마가 예수님의 상처에 손을 넣어 보았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으나 분명한 것은 도마가 이미 예수님을 확인했고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의심 많았던 도마는 그에게 대답하였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는 이제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하나님으로 고백하였다.
1]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가 주님이 허락한대로 그분의 손과 옆구리의 상흔(傷痕)을 확인해 보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됨이 없이 바로 감격에 겨운 신앙고백이 서술되고 있다. 아마 도마는 너무나 분명하고 확연한 현실을 보는 것으로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본 절의 고백은 원문상 '나의 주,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라고만 되어 있다. 그렇다면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번역한 공동 번역이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My Lord and My God!, RSV).
한때 도마가 증거를 요구하며 믿음이 없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지금 그의 입을 통해 나온 신앙고백은 과거의 실수를 만회할 만하며, '나의 선생님'이라고 고백한 마리아의 신앙고백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16절).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의 모습 속에서 생전의 주님을 재발견한 것이 아니라(16-17절 주석 참조)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한 것인데, 이는 곧 예수의 부활의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했다는 의미이다.
본서 마지막 부분에 기록된 이 결정적인 고백은, 처음 예수의 본원적(本源的) 정체가 하나님이심을 밝혀는 것으로 시작했던 것과 병행되면서(1: 1), 예수 그리스도의 진면모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는 인간이기 이전에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으셨던 영원한 말씀. 곧 로고스였고 지금은 아버지 곧 하나님과 함께 가졌던 영광으로 다시 영화롭게 되신 분이다.
* 요 17: 5 -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 20: 29 본고로 믿느냐?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
주님의 말씀은 도마의 믿음의 동기에 대해 지적하지만, 그것은 책망이 아니라 교훈적인 의미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에서 일단은 도마의 믿음이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본 것에 근거해 있다.
주께서는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장차 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도 믿을 것이다. 그들은 복된 자들이다. 이것이 교회의 역사요 기독교 확장의 역사이다.
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예수께서는 도마의 믿음은 인정하셨고 이 말씀은 도마에 대한 책망이라기 보다는 교훈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믿음에 있어서 보는 것이 불가결한 요소가 될 수는 없다. 예수께서는 육체적 표적에 의지하지 않고 믿음의 자리로 나오는 자들에게 축복하셨다.
* 벧전 1: 8 -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오늘날의 우리들은 예수님과 같이 다니고 보지는 못했지만, 반면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의 축복'을 가질 수 있다.
2]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
주님이 바라는 바는 믿음이지만 그 믿음에 이르는 과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보아야 믿는 형태이며 이 믿음은 현상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모종의 이적을 요구하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보지 않고 즉 어뗘한 이적적인 사건에 의하지 않고도 믿음을 갖는 것이다. 물론 도마를 비롯하여 제자들은 전자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바람직한 것은 후자의 경우이다. 이것은 요한의 독자들 그리고 이어지는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주는 것이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올 직접 목격하였고 결과로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만 주어진 특정한 상황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보지 않고서도 성도들은 제자들이 가졌던 믿음과 동일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믿음에 있어서 '보는 것'은 불가결의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완성된 신.구약 성경이 예수를 증거하고 또한 성령께서 친히 예수를 증언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의 모습을 직접보지 않아도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 (벧전 1: 8).
사도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도다”라고 증언하였다. (벧전 1: 8).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그를 믿고 있다. 우리는 단지 그를 본 증인들의 증언의 말씀들을 담고 있는 신약성경에 근거하여 그를 믿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이다.
3] 도마의 신앙 (요 20: 24-29)
도마(Tomas) 뜻 : 쌍둥이
(1) 12제자의 한 사람. (마 10: 3 막 3: 18 눅 6: 15).
(2) 요한복음에는디두모란 이름으로 쓰여졌다. (요 11: 16. 20: 24. 21: 2).
(3) 주의 부활하심을 의심하다가 그 못 자리를 보고 믿었다. (요 20: 24).
헬라식 이름으로 [디두모]라고도 불리우는 [도마]("쌍둥이"라는 뜻)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 가장 의심이 많았던 제자로 알려져 있다. 도마가 예수님을 만나 제자로 부르심을 받게 된 경위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도마 역시 하나님을 경외하며 메시아의 강림을 고대하던 중에 예수님의 제자로 택함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갈릴리 출신의 어부였던 도마는 열정적이면서도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예수님께서 충성된 마음으로 헌신하기로 작정한 도마는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위험이라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도마는 예수님께서 병든 나사로를 방문하시려고 할 때 다른 모든 제자의 반대에 맞서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선언할 만큼 담대하고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시는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는 유대 땅에 간다는 것은 곧 생명을 내놓는 행위였다. 그러나 도마는 어떠한 난관이나 생명의 위협도 장애가 될 수 없었다. 오직 사랑하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기를 원하는 도마의 마음은 사지에라도 따라갈 각오가 되어 있던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확고한 도마의 헌신된 마음은 현실적인 데에 머무르고 있었다. 자신이 헌신적으로 사랑하고 따르는 예수님께서는 죽음마저 초월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하고 같이 죽기를 작정한 도마의 비장한 결심은 인간적인 생각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었다.
인간의 이성적인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도마의 사고방식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 사역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십자가에서의 처참한 죽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완성하실 예수님의 길을 알지 못하는 도마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등지고 도망치는 인간의 사랑의 한계를 보이고 말았다.
그 후 예수님을 잃고 비탄에 잠겨 있던 도마는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동료들의 말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손으로 만져보지 않고 믿는다는 것이 도마에게는 불가능했다.
인간적인 사랑과 신뢰의 끄트머리에서 회한과 의혹에 잠겨 있던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진정한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신앙 고백을 하는 도마의 심령에는 모든 의심의 먹구름이 걷히고 기쁨과 감사만이 가득하였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있던 날 도마는 성령충만 함을 받고 인도에 가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의심 많은 도마는 그의 호기심과 의심을 정직하게 표현하고 끊임없이 진리를 간구함으로써 결국 진리를 깨닫고 참된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용기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믿지 못하는 사람 중에는 도마처럼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세상 지식에 얽매여 기적을 행하시는 전능자 하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2천년 전에 도마에게 부드럽게 책망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의심의 장막을 걷지 못하고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자들을 향해 말씀하신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서론 : 도마라고 하면 우리는 에수님의 12제자 중 가장 의심이 많은 회의주의자로 인식하고 있다. 그 까닭은 제자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부활 사실을 믿지 아니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처음으로 문이 잠긴 집에 들어오셔서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 자리에 한 명의 제자가 빠져 있었는데 그가 바로 도마였다.
이같은 일이 있은 후 도마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제자들은 도마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고 말했다. 이때 도마는 그들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십자가에 분명히 못 박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그들 앞에 나타났다고 하는 말은 어느 모로 보든지 믿을 수 없는 말이다.
(1) 도마의 확인 신앙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 그들 앞에 나타났다고 하는 사실은 너무나도 엄청난 사건이기 때문에 도마가 다른 제자들을 향하여 나는 믿을 수 없노라고 한 말은 크게 나무랄만한 일이 아니다.
① 도마가 보지 못한 것을 믿지 않은 일은 당연한 일이다.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말하는 이 부활에 대하여 믿을 수 없는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성령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② 도마가 확실한 일에 근거하여 부활을 믿으려고 한 일은 잘한 일이다.
믿음의 근거는 언제나 확실해야 한다. 사도들의 신앙은 이 같은 믿음에서 복음을 전했다.
* 요일 1: 1-2 –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성경은 우리에게 확실한 것을 잡으라고 말씀한다.
* 히 3: 14 -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③ 도마의 신앙은 순교적인 신앙임을 알 수 있다.
베다니에 살고 있는 나사로가 죽게되어 주님이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셨을 때 다른 제자들은 유대인들로부터 해를 당할 일을 두려워하여 반대했다.
* 요 11: 7-8 –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 제자들이 말하되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그러나 이때 도마는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용기 있게 나셨다. (요 11: 16). 이 같은 도마의 믿음은 귀한 믿음이다.
(2)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이런 일이 있은 후 다시 여드레가 지났다.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 이때는 도마도 함께 있었다. 그 자리에 주님이 다시 들어오셨다. 주님의 인사는 이때에도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하신 말씀이었다. 그리고 주님은 도마를 주목하시고 그를 향하여 말씀하셨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다.
① 예수님은 우리의 신앙을 확인시키시기를 원하신다.
도마의 불신앙적인 신앙을 주님은 그대로 놔두신 것이 아니다. 그간에도 도마는 많은 갈등 속에서 제자들이 말한 주님의 부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그의 부활의 모습을 확인시키시기 위하여 다시 이곳에 나타나셨다.
②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믿음 없는 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신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신실치 못한 사람이 된다. 믿음에 신실성이 없다면 그 믿음은 얼마 안가 파선이 되고 말 것이다.
(3) 보지 못하고 믿는 자의 복
도마는 눈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바라보았다.
① 도마는 주님에 대한 새로운 신앙 고백을 하기에 이르렀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이 도마의 고백은 사도 중에서 도마가 제일 먼저 예수님과 하나님을 동일시한 위대한 신앙고백이었다. 나의 주라고 한 주는 ‘큐리오스’로 주, 주인, 소유자란 뜻이다.
이것은 자기 인생의 주와 소유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에 적용되어 오고 있다.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말한 하나님은 ‘데오스’로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도마의 이 같은 신앙 고백을 들으신 주님은 도마의 고백을 그대로 인정하셨고 오히려 칭찬하신 듯한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② 도마의 고백을 들으시고 주님은 보지 못하고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란 사도들 이후 세대들의 사람들을 말한다. 우리들도 이 무리 중에 들어가 있다. 이 같은 믿음은 사도들의 증거를 통해서, 주님이 친히 보이신 증언를 통해서, 그리고 성경의 예언을 통해서 밝히 들어내시는 데, 성령께서 이 같은 사실을 증언해 주신다.
* 고전 2: 10-12 –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믿는 자라고 하신 말씀은 ‘피스튜오’로 깨닫고 의탁하는 믿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계속적인 믿음을 가리킨다.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도 ‘마카리오스’로 영적인 축복, 행복을 의미하고 있다.
결론 :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다. 주님의 부활의 증거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놀라운 복음이다.
* 롬 1: 4 -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 행 9: 39-43 – 39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43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5. 이 책을 기록한 목적 ( 20: 30 – 31 )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사복음서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과 부활을 증언한다. 복음서들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과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증한다.
또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을 얻는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복음서들을 주신 목적이다.
요 20: 30 다른 표적 -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
요한은 신학적인 주제로서 많이 다루었기 때문에 공관복음에서 나오는 이적과 기사 35개 중 요한은 7개만 다루었다. 자신이 이적과 기사를 중심으로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일부 학자들은 30-31절이 본서의 요약이며 다음 장은 나중에 첨가한 것이라고 본다(Barrett, Tenney, Bultmann).
그 많큼 이 두절은 본서 전체를 훌륭하게 요약하고 있다. 요한은 자신이 쓴 복음서의 끝머리에 자신이 기록한 것은 예수의 행적 가운데 일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요한이 본서를 기록하면서 자신의 집필 의도와 일치하는 것들만 선별(選別)하였음을 입증하는 구절이다.
여기에 미처 기록하지 못한 예수의 행적들이 부활 이전의 일인지 아니면 부활 이후의 일인지는 분명치 않다. 아마 부활까지 포함하여 예수의 공생애 전체에 걸쳐 있었던 일들을 가리킬 것이다.
또한 요한이 이 표적을 설명함에 있어 '제자들 앞에서' 행한 것이라고 표현한 사실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요한은 여러가지 표적들을 비롯한 예수의 행적 가운데 일부만을 선별하여 기록하였지만 그 나머지 사실들에 대해서는 이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 증거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 행 4: 30 -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요 20: 31 그리스도를 믿게 하려 함 -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이 책의 목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다.
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요한은 독자들을 향한 직접 화법으로 자신이 복음서를 기록하게 된 목적을 두 가지로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 첫째 목적이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은 본서의 서론과 부합되는 내용으로서(1: 1-18) 모든 성도의 신앙의 본질과 총체(總體)를 압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는 동격으로 언급된다. 앞의 칭호는 요한의 복음서에 가끔 나타나는데 요한이 예수를 소개할 때(1: 34), 나다나엘이 예수를 향하여(1: 49), 그리고 예수 자신이(5: 25. 10: 36. 11: 4) 이 칭호를 사용한다.
그러나 '기롬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의 '메시야' 즉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드물게 사용되며 특히 예수는 이 칭호를 자신에게 사용하지 않으셨다. 혹자는 예수가 이 칭호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당시에 그 칭호가 지녔던 정치적 의미 때문이라고 본다(Tenney).
당시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메시야는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 및 옛 다윗의 영광을 되찾아 줄 인물로 기대되었던 만큼 예수가 이 칭호를 사용할 경우 자신을 정치적 혁명가로 오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의 나라는 현재의 정치적 왕국과는 전혀 다른 나라였다(18: 36).
2]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는 것은 곧 구원을 얻음을 뜻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자녀 됨'(1: 12), '생명을 얻음'(본문)으로 표현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신앙만이 구원 즉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확인되어야 하는 것은 신앙 그 자체에 구원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을 수 있다는 점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의 특징을 증언한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상하신 그 몸으로 부활하셨다.
그의 손에는 못 자국이 있었고 그의 옆구리에는 창 자국이 있었다. 그 손의 못 자국과 그 옆구리의 창 자국은 만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신비한 몸이었다. 그는 문들이 닫힌 방 안으로 들어오셨다. 그 몸은 닫힌 문을 통과하여 들어올 수 있는 몸이셨다. 그 몸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몸, 천국에서 영생할 몸이라고 보인다.
둘째, 부활하신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기쁨과 평안과 믿음을 주셨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뵈옵고 기뻐했고, 주께서는 그들에게 평안하라고 말씀하셨다.
또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부활시키신 것은 우리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시려 함이었고 또 그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하시려 함이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기뻐하며 주께서 주시는 참 평안을 누리고 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의 복을 누리자.
셋째, 부활하신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셨다.
그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셨다.
또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며 죄 사함의 사역을 지시하셨다. 복음 전파는 죄 사함과 영생을 전하는 사역이다.
우리는 죄 사함의 복음을 만인에게 전파하자. 사람들을 죄와 지옥 형벌로부터 건져내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복된 일이다. 이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세상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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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나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려는 마음은 마음속에 평안과 안식을 준답니다.
진실한 말 한마디로 믿음과 행복을 줄수 있다면 마음의 문을 열어 진실한 목소리로 행복을 주고 싶습니다.
건강하게 사랑과 행복으로 편안한 삶에 만사형통 하시고 즐겁게 아름다운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