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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호 학밀선사진영
1912년大正元年10월 15일 조선총독부 인가를 받은 '봉은사본말사법'에 따르면 당시 봉은사는 '선종갑찰대본산봉은사禪宗甲剿大本山本思寺'로 칭하여 '조선불교 선종의 본산'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당시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에 속하여 경기 동남부 지역을 관할했던 것으로만 어렴풋이 알고 있는 이들이 많지만, '봉은사본말사법'의 말사 목록을 보면 고양 · 시흥· 양주 등 서북부 지역에 이르기까지 현재의 서울시와 주변 지역을 거의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수首말사로는 개운사. 흥천사 • 봉원사 · 백련사 · 화계사.진관사(이상 현재 서울), 양평 용문사, 여주 신륵사, 시흥 삼막사 등 9곳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광주 봉국사 · 장경사 · 청계사, 고양 대원암(현재 서울). 적조암· 경국사 · 봉국사 · 영화사· 도선사. 승가사 · 옥천암 · 삼성암 · 미타사, 시흥 연주암(현재 서울). 호압사, 양평 사나사, 이천 영원사. 영월암, 양주 천축사. 회룡사 · 수종사와 고양 흥국사 등 말사 77곳이 있었습니다.
당시 봉은사 말사였던 위 사찰들은 오늘날에도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곳임을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봉은사는 일제 강점기에 서울과 경기도 주요 지역의 주요 사찰을 산하 말사로 두었으면서도 몇몇 다른 본산들처럼 내부 갈등과 분규를 일으키는 일이 없었으며, 1925년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 당시 수많은 인명을 구해 온 국민의 칭송을 받았던 사실을 자부심으로 여겨야 합니다.
'🎈을축년 대홍수'와 봉은사
99년 전 전인 1925년 7월, 전국에 많은 비가 내려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서울에서는 한강 둑이 터져 물길이 숭례문 앞까지 몰려와 배로 타고 다녀야 했다니, 그 상황이 어땠을지 짐작하실 것입니다.
당시 봉은사가 있던 지
청호스님이 1925 을축년 대홍수 때 사람들을 구제하는 모습(봉은사 법왕루 벽화)
역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이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광주군에 속하는 현재의 하남시와 강동·송파 지역에 들이닥친 물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위태로워졌습니다.
당시 신문에서는 긴박했던 상황을 이렇게 전하였습니다.
"뚝섬 상부에 있는 신천리 · 잠실리 두 동리는 약 1,000호에 약 4,000명이 전부 물속에 들어서 모두 절명 상태에 있다는데, 그곳은 무인고도無人孤島와 같이 되어 배도 들어갈 수가 없으므로 구조할 도리가 전혀 없으며 17일 밤 10시경부터 살려 달라는 애호성이 차마 들을 수 없이 울려왔는바, 그동안 모두 사망하였는지도 알 수 없더라." 《조선일보》 1925. 7. 18. 호외
"17일 밤 뚝섬과 왕십리 사이는 완연한 바다로 변하야 사면이 양양한 물천지요, 더욱이 전기까지 끊어져서 암흑세계를 이루었는데, 비는 그대로 퍼붓고 밤은 더욱 깊어지고 구할 길이 없던 바 배를 부리던 사공조차 제 몸 위험을 느껴 출동을 거절하며 출동하였던 백 명의 공병대도 사나운 물결에 어느 곳에 피난민이 있는지 알 수가 없을뿐더러 나뭇가지와 전선줄이 장애가 되어 배를 운용하지 못하여 수재민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동아일보》 1925.7.19
당시 홍수로 떠내려온 사람들이 현재 서울 송파구 잠실5단지에 있던 커다란 느티나무에 매달려 "살려 달라"고 절규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구조에 나설 엄두를 못 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봉은사 주지 청호스님이 뱃사람을 수소문하여 "사람을 구해 오는 사람은 후한 상금을 주겠다"고 설득하고 독려하며 직접 뱃사람과 함께 배를 타고 현장으로 가서 노약자와 어린이부터 차례로 배로 옮겨 총 708명을 구해서 봉은사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광주군 언주면 봉은사 주지 라청호씨는 목선木船 3척을 주선하여 부리도浮里島민 114명을 구호하여 자기절에 수용하고, 18일에는 목선 두 척을 사서 잠실蠶室里 주민 218인을 구하는 등 현재 봉은사에 수용된 자만 404인이라더라."
<봉은사의 미거>, <《동아일보》
1925.7.23
사이된자만사회사인이라이인을 구하는등 현재봉은 다시 잠실(蠶室山) 주민이다시사명을 구조하야 자리에 용하고 신달말에는 목두각을 신하며 부도(浮型島)인 김백키는 목(木船)佔최윤주 광주군 인주면(廣州都州匠)恩寺文美學지금까지 구호單獨으로救; 오백명을 수용하고, 봉은사 스님들이 그야말로 살신성인 殺身成仁의 원력과 의지로 수백 명을 무사히 구조하여 배가 떠나고 얼마 뒤 느티나무 한 그루가 뿌리째 뽑혀 거친 물살에 떠내려갔고, 한 그루는 남아 있다가 1970년대 잠실개발로 없어졌다고 합니다.
🎈봉은사의 보살행이 불교의 위상을 높이다.
이러한 청호스님의 공덕을 기려 그 당시 내로라하는 석학 . 독립운동가. 예술가를 비롯하여 기독교계 인사들까지도 이런 스님의 공덕을 기리는 시와 그림을 전해왔고, 그것을 '후세에 영원토록 전하자'는 뜻에서 1926년에 《불괴비첩不壞碑帖》으로 엮었는데, 이를 받아본 청호스님은 <괴사愧事(부끄러운 일)>란 글을 통해 겸손함을 보였습니다.
“이와 같이 보시를 행하여, 무쟁삼매의 경지를 얻었노라." (오세창)
"본래 그것(사람을 구한 일)은 불교의 진리이다. 다만 인연에 따랐을 뿐인데 유별나게 공덕이 있는 것이라 말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로써 세상 사람들을 감흥케 하였으니 만치 이 일을 드러내어도 좋을 것으로 생각되어 굳이 사양치 않고 이 글을 적는다." (정인보)
"반야의 거룩한 배 가는 곳마다, 중생들 다 같이 살아나네." (이상재)
"여러 대인들은 그 포상이 실지에 지나쳐서 값진 시와 글과 글씨와 그림으로서 상자에 가득하니, 이것은 참으로 산승山僧을 편달하고 격려하여 장차 어떤 경우를 당하게 되었을 때도 게을리함이 없이 더욱 분발하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스스로 돌이켜 보건대 어찌 얼굴 붉어지지 않을 수 있으리오."(청호스님)
그때 구조된 광주군 선리(현재 하남시 선동) 주민 이준식 씨가 앞장서 1929년 7월에는 '나청호대선사 수해구제 공덕비를 세우게 됩니다. 비문은 훗날 동국대총장을 지내게 되는 퇴경退耕 권상로權相老가 찬하고,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가 글씨를 썼습니다.
이재민 구제공로자들로 봉은사 스님들 법명을 새기고, 다음과 같이 수해구제 공덕 요지를 새겼습니다.
'을축년 7월 홍수로 선리 · 부리 · 잠실의 뽕나무밭이 큰물에 잠기고, 708 인 다급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목숨을 구해 달라 외쳤다.
나청호 대선사가 자비로움으로 이를 구제하니, 그 덕을 잊을 수가 없구나.'.
🎈청호스님의 정신을 이어가는 봉은사
현재 봉은사는 영각影閣 안에 봉은사 역사를 지켜온 스님 일곱 분의 진영과 함께 영단을 설치하여 6.25 한국전쟁을 전후해 희생된 국군장병 영가 201위를 모시고 매년 호국보훈의 달에 그들을 위로하는 위령제를 지냅니다.
이는 전국 30본산 중 수사찰 봉은사 주지 취임 2년 만인 1914년에 청호스님이 한강에서 초혼제招魂祭를 개최하여 전쟁 중 목숨을 잃은 군장병들의 혼백을 위로하고,, 천화遷化시킨 보살행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고 해석됩니다.
그리고 스님이 초대 주지 재임 초기부터 함경도에 이르기까지 전국 여러 곳에 봉은사 포교당을 세워 전법에 매진했던 '봉은사의 전법 원력과 의지'는 사중 경제가 어려웠던 1960년대에 대학생불교연합회 수도원을 창립하여 대학생 포교를 적극 지원한 이래 최근의 적극적인 대학생 전법 활동을 주도하는 데에서 그대로 살아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지금으로부터 99년 전인 1925년에 일어났던 처참한 재해,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 당시 주지 청호스님이 앞장서고, 봉은사와 말사에서 힘을 모아 목숨을 살려낸 708명을 현재의 인구 규모와 비교하면 1,770명입니다.
오늘날 재해가 일어났을 때 봉은사가 아니라 한국불교전체가 나서서 이 정도 인원을 살려낸다면 정부와 언론, 국민들뿐 아니라 전 세계 언론에서 대서특필하며 놀란 눈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고 한국 불교의 이미지와 위상이 빠르게 올라갈 것입니다.
'을축년 대홍수'를 전후한 시기는 불교와 출가 수행자에 대한 사회 전반의 예우가 매우 낮았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1919년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한 명인 위창 오세창과 정부 수립 후 감찰위원장을 지내고 이른바 '4대국경일'인 '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노래를 작사한 위당 정인보,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민족운동가 월남月南 이상재 등 당시의 내로라하는 지성인들이 봉은사와 청호스님의 보살행을
찬탄하는 글과 그림 등을 보내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을 기록'이 되어야 한다는 뜻에서 <불괴비첩>을 엮은 일은 청호스님 개인과 봉은사뿐 아니라 당시 전체 불교계의 높아진 위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당시 청호스님과 봉은사의 보살행은 봉은사만이 아니라 한국 불교 전체가 자부심을 가져야할 귀중한 역사 자산이고, 한국 불교계는 100주년이 되는 2025년을 '청호스님의 해'로 정하여 전 불교계가 그 일을 기억하고 자부심을 느끼며 의미를 새기면 좋겠다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이 귀한 자산을 불교 집안 안에만 가두지 말고, 1925년 봉은사와 청호스님이 펼친 진정한 보살행을 주제로 '영화·TV드라마' 등의 제작을 유도하고 전 국민 또는 어린이·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글짓기와 컴퓨터 게임 등 다양한 문화콘텐츠 공모전을 개최하여, 봉은사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전법에 기여할 방법을 적극적으로 시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을축년 대홍수와 청호스님의 자비보살행 100주년이 되는 명년에 한강에서 천도재 또는 수륙재를 지내 그 당시 구조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여 희생된 수많은 영가뿐 아니라 지난 100년 동안 홍수와 성수대교 붕괴와 같은 각종 사건 사고와 자살로 한강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의 혼백을 위로하여 편안하게 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100년 전 그 거룩한 불사가 성취될 수 있었던 데에는 청호스님 개인의 중생구제 원력과 의지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이와 함께 오늘날까지도 수도권 불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서울 전역과 주변 경기도 지역 봉은사 말사들의 동참이 있어서 가능했을 것이고 이들이 함께할 수 있도록 이끌어낸 본산 주지 청호스님의 탁월한 지도력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100년 사이에 상황이 크게 바뀌었지만, 봉은사는 1925년 봉은사의 역할과 위상'을 다시 찾겠다는 원력을 세워 한국불교 중흥을 주도해야 한다'는 교훈과 사명을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출처: 봉은사 판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