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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딤후 3:10-17
10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11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13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0-17 / [마지막 명령] 그대는 내가 무엇을 믿고 어떤 생활을 하며 무엇을 희망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신앙과 또 내가 겪는 고난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그대를 사랑하는 내 마음과 또 나의 인내도 알고 있습니다. 11) 복음을 전파했다는 죄로 내가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를 방문했을 때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던가도 그대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런 고통 가운데서 나를 건져내 주셨습니다. 12)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그리스도 예수를 기쁘게 해드리기로 결단한 사람들은 반대자들의 손에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13) 그러나 많은 사람을 속이는 악한 자들이나 거짓 교사들은 결국 그 자신도 사단에게 속아서 더욱더 악한 자리에 빠져 들어갈 것입니다. 14)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굳게 믿고 있는 그 진리를 지켜 나가시오. 그대는 그 진리를 가르친 우리를 신뢰하고 있으므로 그것이 진리라는 데 조금도 의심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15) 그대는 어릴 때부터 성경을 배워 왔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믿음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 지혜를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을 것입니다.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 받은 영감으로 쓰여 우리 손에 주어진 책이며 진리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우리 생활에서 악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주는 데 유익한 책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을 바르게 하고 옳은 일을 행할 힘을 줍니다. 17) 하나님께서는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모든 면에서 온전하게 하시고 남에게 착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해주십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모데에게 어려서부터 배운 성경과 확신한 믿음에 거하라고 당부합니다.
박해를 받으리라(10-13) 바울은 자신이 당한 핍박을 이야기합니다. 자신이 핍박받았던 구체적인 장소까지 밝힙니다(11). 안디옥에서는 유대인들을 선동한 죄로 쫓겨났고, 이고니온에서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돌에 맞아 죽을 뻔했고, 루스드라에서는 돌에 맞고 성 밖으로 던져졌습니다. 바울은 자신처럼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이들도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12). 복음을 위해 당하는 고난과 핍박은 바울과 같은 특정 인물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보편적으로 겪는 일입니다. 반면에 13절은 복음을 위해 박해받는 자들과 대조되는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을 이야기합니다. 이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자들입니다(5). 그러나 예수 안에서의 경건을 가진 자들은 필연적인 핍박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은 바울의 간증처럼, 주께서 그 모든 고난과 핍박에서 건져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14-17) 바울은 디모데에게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자는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권면합니다(14).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에게 성경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었습니다(15). 이렇게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거하라”는 것은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핍박을 당하는 자에게 이러한 권면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인 성경의 유익 때문입니다.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유익이 있습니다(16). 그리고 이것의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는 것입니다. 지금도 성도가 경건한 삶을 지켜가기 어렵게 하는 거짓 교훈과 핍박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권면을 통해, 경건하게 살기 힘든 때 일수록, 더욱 성경의 진리를 확신하고 그 속에 힘써 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핍박 속에서도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춰 성도답게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적용: 복음을 위해 어떠한 고난과 핍박을 당하고 있습니까?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성도답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의 인생이 어떤 의미에서는 생존경쟁, 전쟁하는 인생입니다. 더 많은 것을 차지하기 위해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전쟁을 하며 살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싸워서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승패는 어디에서 결정이 난다고 했습니까? 기도의 골방에서 결정이 납니다. 기도의 무릎에서 결정 나는 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승리자가 되어서 우리의 신앙과 모든 삶에서 승리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설 교 >
구원받고 온전한 사람 되는 길
디모데후서 3:10~17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다시 한 번 디모데에게 교회 안의 거짓 교사들에 의한 속임수와 선동과 박해를 끝까지 잘 견디고 이겨내기를 권면하는 글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가 받을 박해와 고난을 극복하라고 말하기만 하지 않고 극복할 수 있는 방법까지도 일러줍니다. 그 하나는 자기를 보고 배운 대로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에서 배운 대로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의 자기의 가르침과 삶의 모든 모습을 디모데에게 상기시킵니다. 본문 10-11절을 봅니다: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여기서 바울은 디모데가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 등 모든 면에서 자기를 본받기를 바라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바울은 디모데가 박해와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봅니다. 11절에서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하는 말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는 모두 사도 바울이 그의 1차 전도여행 때 복음을 전하고 쓰라린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세우는 데 성공한 로마령 갈라디아 지방의 도시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안디옥은 수리아의 안디옥이 아니라 비시디아의 안디옥이고 “루스드라”는 디모데의 고향입니다.
바울 일행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전도할 때는 유대인들이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했으며(행13:45) 경건한 귀부인들과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고 그 지역에서 쫓아냈습니다(행13:50).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난 바울 일행은 이고니온으로 갔습니다. 거기서도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바울 일행에게 악감을 품게 했고(행14:2)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바울 일행을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는 바람에 도망을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행14:5-6).
이고니온에서 도망친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로 가서 전도했습니다. 그런데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의 충동을 받은 무리가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그의 몸을 시외로 끌어 내치기도 했습니다(행14:19).
그러나 사도 바울 일행은 그런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놀라운 복음의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말을 들은 비시디아 안디옥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들의 말을 듣기를 원했고(행13:42)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게 되었으며(행13:43). 시민들이 거의 다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행13:44) 기뻐 찬송하며 믿고 구원받는 이들이 많았으며(행13:48)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습니다(행13:49). 이고니온에서도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게 되었으며(행14:1)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셨습니다(행14:3). 루스드라에서는 나면서 걷지 못하는 사람을 일어나 걷게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행14:8-10).
사도 바울은 그가 받은 박해와 고난을 디모데에게 상기시키면서도 그 끝에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하는 말을 덧붙이기를 잊지 않습니다. 디모데가 위기와 위험에서 건져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박해와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 것을 권면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본문 12절의 말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그리고 더 나아가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박해는 한 때로 끝나지 않고 언제나 있을 것임을 암시합니다. 왜냐하면 악한 자들과 거짓된 자들은 갈수록 더 악해지고 더 거짓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3절에서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한 것은 그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악한 사람들은 더욱 더 악하여지고 속이는 자들은 더욱더 속이게 되리라고 말한 것은 디모데를 낙심케 하고 포기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더욱 강하고 담대하게 하며 물러서지 않게 하기 위한 것임은 두말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본문 14절) 이 말은 디모데에게 그가 배워 알고 있는 것이 참되고 확실한 것이며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은 속임수일 뿐이고 결코 승리할 수 없는 것이니 용기를 잃지 말고 싸우라고 격려하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디모데가 배워 알고 있는 것이 참되고 확실한 것이라는 근거를 제시합니다. 그 근거의 하나는 디모데에게 가르쳐준 사람들이 줄 수 있는 신뢰감입니다. 그 신뢰감을 불러일으키는 말이 14절 하반절의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하는 말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디모데야, 너를 가르쳐준 이들이 누구냐?” 하는 말입니다. “바로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그리고 나 바울 아니냐? 우리가 가르쳐준 것보다 더 참되고 확실한 것이 무엇이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딤후1:5에서 쓰기를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한 바 있습니다. 디모데는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에게서 거짓이 없는 믿음을 물려받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디모데의 지식과 확신의 가장 확실한 근거는 성경이어야 함을 말합니다.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가 디모데에게 전해준 믿음과 지식도 성경으로부터 온 것이며 바울이 가르쳐준 것도 모두 성경에 따른 것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일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디모데의 목회와 그 투쟁을 위한 궁극적 권위와 힘으로서 성경을 제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의 말을 들어봅니다. 본문 15절입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유대인 부모들은 그들의 아이들이 다섯 살이 되면 율법을 가르치기 시작해야 했습니다. 디모데의 외조모와 어머니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을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성경은 구약성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당시는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대로의 신약성경이 아직 형성되지 않은 때였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은 바르게 해석되기만 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전체적인 계획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역할을 이해하도록 인도한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확신이었습니다. 즉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모든 내용을 밝혀주는 빛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성경 전체를 바로 이해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성경을 디모데의 목회와 그 투쟁을 위한 궁극적 권위와 힘으로 제시한 사도 바울은 이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성경이 무엇인가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이해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 그것이 복음의 핵심이고 우리의 신앙의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성경이 아니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온갖 것들,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아닌 것들, 성경이 계시하는 구원의 진리가 아닌 것들에 귀 기울이고 따라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 성경만이 그런 권위를 지니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이 그 이유를 말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본문 16절 상반절)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는 바울의 말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은 아마도 벧후1:21에서 베드로가 쓴 글일 것입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성경은 비록 사람들이 썼지만 하나님이 그 원천이시며 궁극적 저자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내용이 그것을 기록한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성령께서는 성경의 저자들이 그들이 기록한 것들을 듣고 깨닫고 기록하는 전 과정 속에서 역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성경이 읽혀지고 해석되고 선포되고 받아들여지는 과정 속에서도 역사하십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쓴 것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성령의 감동하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르게 깨달아지고 진정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함이 성경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이 다는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의 남은 말을 들어봅니다. 16절 하반절과 17절입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해지고 그리스도인답게 행하며 사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 모든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성경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도 성경 안에서입니다. 오늘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도 성경말씀과 함께입니다.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열심히 배우며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그 말씀대로 살기를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한국교회가 사는 길입니다. 성경말씀으로 배 부르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건강해지며 내적 성장을 이루는 길입니다. 성경으로 무장해서 온갖 이단들을 이기고, 성경말씀으로 어두운 세상을 밝히며, 성경의 진리로 온 세상의 거짓을 물리치는 이 땅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려면
딤후 3:10-17 / 송기성 목사
“아 하나님의 은혜로”
존 오트버그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내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는 문제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공지향적인 가치관의 치열한 경쟁속에서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하느냐’에 관심을 집중하곤 합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가치관을 중요시 하는 사람들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곤 합니다. 좋은 나무가 되어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3:17에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임과 더불어 구원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게 하기 위한 것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모든 선한 일을 하는 것보다 우선적인 것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일인 줄 믿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려면 경건하게 살고자 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3:10-12의 말씀입니다.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사도 바울은 그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기를 바라며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사는 것은 경건하게 사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합니다. 바울의 제자이며 동역자인 디모데는 사도 바울과 동행하면서 보고 배운 것이 많았습니다. 그는 스승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을 따랐으며, 스승의 믿음과 사랑과 오래 참음과 인내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박해 받음과 고난 당함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놀라웁게도 주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을 이 모든 박해와 고난 가운데서 건져내 주신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크고 작은 고난과 시련을 많이 겪다 보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흔들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바울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난과 역경, 박해와 죽음의 위협을 통해 오히려 신앙의 연단을 강화시켜 나갔으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최악의 역경 속에서 복음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해냈으며,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의 승리를 선언하고 그의 생애를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 것을 권면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고난은 있어도 절망은 없다」라는 책에서 할렐루야교회 김상복 원로목사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겪는 고난과 승리에 대해서 자신의 간증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초등하교를 다닐 때, 저는 어렸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 땅에서 잠시 편하게 사는 것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심한 매를 맞고 고통 받는 것이 너무 힘들어 어린 나이에 ‘하나님, 저도 순교하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드린 적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넌 아직 아니야’ 라고 말씀하셨지요. 비록 어렸지만 제게는 이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매 맞아 죽더라도 하나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이 땅에서 사는 70~80년은 영원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이 땅에서의 안위를 위해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사는 것보다 잠깐 고통을 당하더라도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속담에 “될성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 본다” 라는 말이 맞습니다. 어릴 때 담임목사님이던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하신 교회에서 자란 소년 김상복, 그는 비록 어렸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곧 이 땅에서 잠시 편안하게 사는 것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의 안위를 위해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사는 것보다 잠깐 고통을 당하더라도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고난을 받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가운데서 건져주심을 체험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3:1-5의 말씀입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보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아멘!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에게는 박해와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모든 것에서 건져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경건의 모양만 갖추고 경건의 능력을 부인함으로 고통하는 말세 교인이 되지 말고 경건의 능력을 시인하므로 승리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온전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려면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3:13-15의 말씀입니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그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기를 바라며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사는 것이며, 아울러 배우고 확신한 일, 곧 진리 안에 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거하라’(메네)는 것은 ‘끝까지 그 상태를 유지하며 머무르라’ 는 뜻입니다. 당시 신자들 중에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은 그들의 율법을 고집하기도 하였으며, 이방 출신 개종자들은 영지주의 등 이단의 유혹에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애써 전도한 교인들이 거짓 교사들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다원주의나 안일주의에 빠져드는 것이었습니다.
일찍이 예수님이 경고하신 말세의 현상 중의 하나는 바로 이단이 성행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특징은 속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 이라고 했습니다. 악한 자들과 속이는 자들은 갈수록 더욱 악해지며,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 속임에 잘 속아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속임을 당한 결과는 파괴적이고 치명적이라는 것입니다. 그 원인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무지와 후회는 소위 성경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 같은 제자에게까지도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라며 주의를 주었던 것입니다. 사실 디모데는 성경의 기본적인 진리들을 그의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배웠으며(딤후1:5),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진리는 바울로부터 배웠습니다.(딤후3:10,11)
성경이 만든 사람 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John Wanamaker, 1838-1922)씨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8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성경을 사랑하고 주일학교 사역과 YMCA사역 등에 크게 헌신한 신앙인의 모델입니다. 그는 67년간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며 세계 최대의 주일학교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많은 교회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YMCA 사역에 65년 동안이나 헌신하며 1903년 종로2가 YMCA 건물을 비롯해서 세계 곳곳에 수 많은 YMCA 건물을 지어 주었습니다. “소비자는 왕이다” 라는 경영자세로 세계 최대의 백화점을 이루면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은 그는 최고의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필라델피아 시청 앞에 동상까지 세워졌습니다. 가난한 벽돌공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사업가로서의 꿈을 크게 달성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제 평생에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지금 제가 갖고 있는 건물과 땅값만도 200억 달러가 됩니다. 하지만 제 소유물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11세 시골 소년이었을 때 산 2달러75센트짜리 조그마한 성경입니다. 저는 이 성경 덕분에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오늘의 제가 되었지요.” 후에 체신부 장관으로 임명되고 한창 그 직책을 감당할 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장관님은 큰 기업의 회장으로서 비즈니스 뿐 아니라 국가에 대한 봉사자로도 눈코 뜰새 없이 바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4천 명이나 되는 주일학교 학생들을 돌보실 수 있습니까?”
그러나 존 워너메이커씨는 지체 없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에게는 주일학교가 가장 중요한 비즈니스입니다. 다른 비즈니스는 주일학교에 비하면 그저 하나의 일에 불과합니다. 45년 전에 저는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이 말씀이 저의 헌신의 비밀입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최대의 투자는 성경이었다고 고백한 사람 존 워너메이커, 그는 2달러75센트 성경을 살 때 37전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잔금 2달러 38센트를 갚기 위해 1년 반 동안이나 벽돌을 날랐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배우고 확실한 일에 거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했기에 그는 “장관은 부업이고 주일학교 교사가 본업입니다” 라는 말을 할 수 있었고, 모든 것을 더해 주시는 하나님의 복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된 줄 믿습니다.
디모데후서 3:16-17의 말씀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아멘!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려면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배우고 확신한 일 곧 배우고 확신한 진리 안에 거하는 사람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을 알고 말씀을 배울 뿐만 아니라 확신한 진리 안에 거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헤럴드 W. 에릭슨은 “하나님은 장식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을 찾고 계신다” 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이 찾고 계신 그리스도인은 경건하게 살고자 하며,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될 뿐만 아니라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고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며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을 찾으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딤후 3:10-12 / 양향모 목사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참 힘든 일임을 계속해서 배우고 있습니다. 우선 사탄이 장악하고 있는 악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만 가지고 미워하면서 비난하고 공격합니다.
그리고 그 사탄이 교회 내에도 양의 탈을 쓴 이리를 들여보내서 우리를 공격합니다. 온갖 이단들 거짓 선생들 가라지와 같은 가짜 교인들이 진리를 변질시키고 자기들의 생각대로 다른 복음을 전하면서 우리의 믿음을 공격합니다.
또 하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가지고 삽니다. 그런 우리 속에도 타락한 죄의 습성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우리의 믿음도 흔들리고 사탄과 그 부하들의 유혹에 넘어가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먼저 세상의 악한 사람들의 모습을 소개하고 그 악을 이기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침투한 이단이나 거짓 선생을 경계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선한 척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척하지만 그들 마음은 부패해 있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따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자신의 마음의 태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어떤 상태로 하나님을 섬기는가에 따라서 잘못하면 믿음이 변질되기도 하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다른 복음 거짓 복음을 믿는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론으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바른 믿음을 가지고 바르게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면 누구든지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박해가 올 때 어떤 마음 자세를 갖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자신이 복음을 전하면서 받은 고난들을 상기시키면서 이런 고난이나 핍박을 이기기 위해서 자신이 가졌던 마음 자세를 가지고 이기라고 했습니다.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라고 한 바울의 충고가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말씀을 잘 들으시고 어떤 박해가 와도 믿음을 지킬 수 있는 마음으로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박해를 당할 때 가져야 할 마음 자세
본문 10절에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11절에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와 연결된 말입니다. 원어에서는 이 문구가 앞에 나옵니다. 그러나 너는 내가 한 교훈이나 행실이나 의도 등을 잘 살펴보고 알았다는 것을 확인시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모세를 대적한 얀네와 얌브레와 같이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인데 그들은 바른 정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이 부패한 사람이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너는 그런 사람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너는 나에게서 바른 교훈을 받은 사람이고 내가 행한 모든 일을 잘 보고 안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런 바울의 마음으로 무장하고 믿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1)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의 교훈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전서를 시작하면서 다른 교훈 잘못된 교훈을 가르치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의 교훈이 복음을 따르는 것임을 말씀했습니다.
교회에서 가르쳐야 할 교훈은 율법을 지켜라, 똑바로 살라가 아니라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에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가르쳐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게 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율법은 우리 인간이 지키고 살아야 할 원칙이지만 그렇게 살아서 의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기보다는 그렇게 살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바르게 알고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구약에 기록된 인물들이 그렇게 살아서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보다 그렇게 살지 못한 사람들이 어떤 형벌을 받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는 교훈은 복음을 따르는 것 즉 복음을 따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자부하는 사람들까지도 사실은 율법의 극히 일부만 지키는 것이고 사람들 앞에서 지키는 척하는 위선일 뿐이기 때문에 그런 교훈을 따라 살려고 하기보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신앙이 진실한 신앙인가 거짓된 신앙인가를 확인하려면 그 사람이 어떤 교훈을 좋아하는가를 보면 됩니다. 율법을 좋아하고 공의를 좋아하는 사람은 대부분 교만한 사람이거나 위선자입니다. 자신의 죄가 얼마나 흉악한가를 아는 사람은 공의를 내세우지 못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겸손한 자세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좋아하고 복음을 좋아합니다. 은혜가 아니면 복음이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평신도 때 교만하게 살 때는 목사님의 설교를 잘 안 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제가 설교를 듣고 은혜에 감격하게 된 계기는 사업 실패 후에 겸손하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제가 잘나가서 교만하게 살았을 때 지금 생각하면 그 목사님도 저처럼 교만한 마음으로 설교를 하신 것 같습니다. 목사님 자신은 늘 옳고 성도들은 나쁜 사람으로 취급하고 늘 왜 그렇게 사느냐 좀 더 바르게 살고 좀 더 충성하면서 살라고 했습니다. 나도 똑바로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에게 하는 설교는 아닌 것 같고 그래서 별로 관심 없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업에 실패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서 대전의 어떤 교회에 다녔는데 이 대전의 목사님은 아주 달랐습니다. 이분도 자녀가 불구로 태어나서 자녀 때문에 고통을 당해서 그런지 늘 자신을 불쌍한 처지에 놓고 겸손하게 설교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똑바로 살 수 없고 그래서 세상에서는 늘 고난을 당하고 살 수밖에 없는데 그런 부족한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설교했고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설교하셨습니다. 그 설교가 바로 저에게 하는 설교로 들렸고 그 은혜에 많이 울었습니다. 바울의 교훈이 바로 그 은혜의 교훈이고 복음의 교훈입니다.
이어서 바울의 행실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바울 자신의 행동 생활 살아가는 방법을 말합니다. 바울이 살아가는 방법은 앞에서 말한 세상의 악한 사람들이나 거짓 선생들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남을 속이기 위해서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겉으로만 바르게 사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살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늘 살피면서 그 뜻대로 살려고 노력한 사람입니다.
또 바울은 자신의 의향에 대해서 말합니다.
의향이란 삶의 의도, 삶의 목표, 삶의 목적을 말합니다. 바울은 삶의 목적이 세상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여러 가지 욕심에 이끌려서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삽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욕심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욕심에 끌려서 사는 사람들은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고 마음이 부패한 상태로 살지만 바울은 그런 세상 욕심에 끌려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심이 아닌 다른 사람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서 자신은 오히려 희생하고 헌신하면서 살았습니다. 모든 믿는 사람들의 영혼을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고난도 마다하지 않고 핍박도 기쁘게 당하면서 살았습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욕심에 끌려서 사는 사람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살고 희생하거나 헌신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것을 움켜쥐고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은 참된 신앙인이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최고의 계명인데 자기 욕심만 채우려고 하는 사람은 아직 성숙한 신앙인은 아닙니다.
2)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네가 이미 나의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를 보고 알았다고 했습니다.
믿음이라는 말은 여러 의미에서 쓰입니다.
사람마다 다 믿음이 있다고 하는데 잘 살펴보면 그 믿음이 다른 믿음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자기 마음에 원하는 바에 따라서 그 믿음은 다양합니다.
사도바울의 믿음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이시고 날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임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받게 하는 유일한 것임을 믿는 믿음입니다.
오래 참음이란 여기서는 관용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 오래 참고 용서해 주고 관대하게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나쁜 짓을 했을 때 바로 가서 원수를 갚지 않고 잘못을 깨닫고 회개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잘못했을 때마다 벌을 내리신다면 살아남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래 참아주시고 회개할 때까지 기다려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그때그때 정죄하고 뭐라고 하면 우리 곁에 남아 있을 사람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인간인지라 실수도 하고 지나고 나면 잘못을 깨닫기도 하기 때문에 오래 참고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인내는 나 자신에게 오는 고통을 참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에는 이 인내가 필요합니다. 믿음의 결과가 이 세상에서 보다는 영원한 천국에서 크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에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참된 사랑을 하는 것은 참 힘들기 때문입니다.
박해를 당할 때 하나님께서 건지신다는 확신
본문 11절에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는 사도바울이 전도 여행 중 그곳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은 곳입니다. 사도행전을 공부할 다 살펴보았던 부분이고 시간관계상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안디옥은 1차전도 여행 때 들렸던 비시디아 지방의 안디옥을 말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곳에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에게 장시간 동안 복음에 관하여 설교를 했습니다.
구약성경에 일어난 모든 일이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야를 보내서 구원하시기 위함이고 그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심을 전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많은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싫어하는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아서 추방당한 곳입니다.
이고니온은 바나바와 바울이 안디옥에서 추방당하여 오게 된 곳입니다.이곳에 와서도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많은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선동하여서 두 사도에게 욕을 하고 돌로 치려고 달려들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안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로 도망가게 됩니다.
루스드라에서는 사도바울이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을 거쳐서 여기까지 와서 무리를 충동하여 바울을 돌로 쳐서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내쳤습니다. 그러나 죽지는 않고 다른 곳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특별히 루스드라는 디모데의 고향이라고 했습니다. 디모데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었고 바울이 행한 이적도 보았고 또 바울이 당한 고난도 보아서 알았을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바울이 확신한 것은 이런 어려움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주시고 건져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디모데나 후일 이 복음을 전하는 모든 자들도 고난을 당하지만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그 고난에서 건져주실 것을 확신한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복음을 따라 사는 우리에게는 그런 위험한 고난은 없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견디기 힘든 고난도 있고 유혹을 받을 위기도 당합니다. 그런 어려움이 지금은 어려움 같지만 우리의 믿음을 연단시켜서 영원한 천국까지 이르게 하는 귀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최후의 승리를 얻을 때까지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경건하게 살려고 할수록 박해를 받아야 한다는 각오
본문 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라고 했습니다.
경건한 삶이란 하나님께 예배를 잘 드리고 하나님을 잘 섬기면서 사는 삶을 말합니다. 본문에서는 경건한 삶 앞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한 삶이란 복음을 따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나 행복이나 보람된 삶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그래도 믿음을 통해서 비교적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은 부자로 잘사는 믿음, 세상의 고난을 없애고 평안한 삶을 살게 하는 믿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말하고 그 믿음에는 세상에서 사는 동안은 고난이 따르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무릇'이라는 말은 모든 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특별한 사람만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따라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고난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는 믿음을 따라 사는 사람은 이 세상의 행복보다는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더 소중하게 여기고 바라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사는 사람을 보면 그 자체가 고난일 수도 있습니다. 다들 잘 사는데 나만 어려운 삶을 산다고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 세상은 살만한 세상이고 더 잘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비웃을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복음을 따르지 않고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우리가 가는 이 복음의 길을 비웃을 것입니다.
그런 비웃음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핍박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이상한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고난은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각오를 하고 살아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패한 마음을 가지고 악을 행하면서 산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알고 바른 믿음을 가지고 영원한 천국을 향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거절당하고 버림을 받은 불쌍한 사람들을 따라 살지 말고 바른 믿음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믿는 믿음을 따라 사는 길은 고난의 길임을 잊지 말고 비록 어렵고 힘이 든다고 해도 이 믿음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끝까지 지켜주시고 큰 영광을 우리에게 주실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
딤후 3:10-11 / 이수관 목사
10월에는 교회역사상 가장 두드러지는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어떤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종교개혁 기념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인데요. 그 날은 바로 마틴 루터가 당시 면죄부판매의 논리를 반박하는 95개조 반박문을 써서 독일의 비텐베르그 성당 입구에 붙였던 날입니다. 물론 마틴 루터는 처음에는 자기가 하는 행동이 그정도로 심각한 것인지를 몰랐었습니다. 그는 다만 당시에 면죄부를 판매하는 설교가의 신학적 잘못을 지적하고 그 지방 주교에게 시정을 요구하는 순진한 목적으로 시작했고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을 해 보자는 제안으로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그 주장은 얼마 안되어 그 후 유럽 전역을 휩쓰는 엄청난 소용돌이를 몰고 왔고, 그 속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진리를 위해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마틴 루터하면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이름이 되어 버렸습니다.
디모데 후서는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사도 바울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쓰신, 바울 서신들중에 가장 마지막 편지입니다. 그는 내가 곧 세상을 떠날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어떤 사람들보다도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그리곤 자기 아들과 같은 디모데, 오랜 사역을 같이 하면서 동료의 정, 부자지간의 정이 쌓인 그런 디모데에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마지막 말들을 적어 놓고 있어서 이 디모데 후서는 이렇게 읽어보면 구구절절이 아름답고 가슴이 찡한 부분이 참 많습니다. 저는 그 중에서 오늘 특별히 이 3장 10-11의 말씀을 눈여겨 보았습니다. “내 믿음의 아들 디모데야, 너는 나의 어떤 모습을 기억하고 있니?” 하면서 “나의 이런 모습을 기억해 주지 않겠니?” 하는 그런 마음에서 이 구절을 쓰시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한번 다시 읽어볼까요. “그러나…겪었습니다.” 네가 나의 그런 모습을 보았으니 그런 모습으로 날 기억해 주고, 너도 그런 모습으로 살기 바란다 하는 그런 마지막 유언의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한때 이 세상을 살다가 시간이 되면 이 세상을 떠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떠나고 나면 어떤 식으로든지 나를 기억해 주길 원합니다. 그것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지역에 상관이 없이 또 문화에 상관이 없이 동일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그래서 무덤에 가면 항상 비석이 서있고 거기에는 세상사람이 날 기억해 주기 원하는 말들이 적혀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나의 어떤 모습을 사람들이 기억해 주길 원하십니까? 특별히 여러분의 자녀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바울에게 있어서 디모데와 같은 그런 여러분의 신앙의 후배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남기를 원하십니까? 정말 심각하게 한번 쯤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디모데 후서 3장 10-11절을 보면서 바울은 자기의 어떤 모습을 기억해 주길 원했는지 하는 것을 좀 살펴보고, 또 왜 그것이 중요했는지 하는 것을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것인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는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그러면 본문으로 들어가서,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첫번째는 가르침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 가르침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나의 이런 모습을 기억해 달라고 하면서 가장 먼저 거론하는 것이 가르침입니다. 본문에 보면 “그러나 그대는 나의 가르침과…” 하면서 시작합니다. 맞지요. 기본적으로 사람은 그 사람의 가르침에 의해서 기억에 남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그의 인생에 가르침이 없었다면 그 사람은 기억에 남지 않습니다. 물론 어떤 행동으로 기억에 남는 경우가 있지만 가만히 보십시요, 그런 경우도 그 행동에 실려있는 어떤 가르침 때문에 기억에 남는 것이지 그 행동 자체 때문은 아니라고 봅니다. 특별히 그의 가르침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이 되면 더욱 오래 기억이 남습니다.
여러분 예전에 10일 새벽기도때 읽었던 정태기 목사님이 쓴 “내면세계의 치유”라는 책이 생각납니까? 그 책에 보면 욕표 얘기가 나오지요. 안읽은 분들을 위해서 스토리를 대충 얘기하면, 이 저자가 살았던 곳은 섬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섬마을 사람들은 과격해서 그런지 말할 때, 한 문장에 욕을 하나 넣지 않으면 대화가 안된다고 하네요. 예를 들면 “야 민학아” 이렇게 부르면 “응?” 하고 대답하는 것이 아니고, “민학아 야 이새끼야.” 하면 “왜 그러냐 이 오살할 놈아.”라고 하는데 저자에 의하면 이것은 욕이 아니고 그냥 그 지방의 문화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청년 시절에 독립운동을 하던 분이 조국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백성들을 가르치는 일이라고 생각을 해서 섬마을에 들어와서 사비를 털어서 학교를 짓고 가르친 은사가 있었는데 온 마을의 아이들이 이 분을 존경했지만 그 욕하는 습관에 대해서는 아무리 가르쳐도 않되는 거예요. 이분이 “애국하는 어린이는 욕을 하지 않는거다”하고 아무리 설득하고 설득해도 습관이 되어서 안 없어지니까 욕표라는 방법을 썻다고 하지요. 즉, 모든 아이들에게 욕표 10장씩을 나누어 주고 욕을 들은 사람은 욕을 한 사람에게 욕표를 한장 뺏을 수 있는데 일 주일 후에 욕표를 제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그 당시 최고급 공책을 상으로 주고, 제일 적게 가지고 있는 사람은 벌을 준다고 했습니다. 그후 일주일동안 아이들에게는 욕표를 뺏고 뺏기는 전쟁이 벌어졌는데 결국 이 저자가 부진해서 한장도 남지 않았다고 하지요. 그때 이 저자는 교무실로 끌려가 종아리를 맞았는데 좀 봐줄줄 알았던 선생님이 하도 세게 때려서 돌아보니까 선생님이 울고 계시더라는 얘기입니다. “이놈아 내가 널 얼마나 믿었는데.” 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때리는 선생님을 보면서 자기도 울고, 그러면서 나도 크면 선생님같은 애국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하지요. 이 저자는 그 일이 저자의 인생을 한 순간에 바꾸어 놓았다 라고 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의 가르침이 먼 훗날 나의 삶에서 생명의 씨앗이 되었다.” 참 멋지지 않습니까? 우리가 만일 우리의 가르침으로 어떤 사람의 인생에 생명의 씨앗이 될 수 있다면 의미있는 인생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영향력은 바로 가르침으로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떤 식으로든지 가르침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형태로든 가르침이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까? 가만히 보면 우린 우리 주위에 우리가 가르쳐야 하는 사람들로 둘러 쌓여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목장에서는 목장 식구들, 또 직장에서는 아랫사람들, 그리고 또 어디에 가나 있는 우리의 이런 저런 후배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잘 가르쳐 세상으로 보내라고 우리에게 특별히 맡겨주신 우리의 자녀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린 가르칠 수 있는 위치에 있고 가르쳐야 하는 책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가르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 많지요. 부모로서 공부해라는 잔소리만 할 뿐이지 부모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가르치는 일에는 게으른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입니다. 또 목장 식구들을 비롯하여 먼저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로서 우리의 후배들에게 크리스천의 삶을 가르쳐야 하는데 그럴 필요성 조차 못느끼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는 안되지요. 끊임없이 배우고 후진들을 가르치는 것 크리스천으로서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골로세서 3:16에서 서로 가르치라고 얘기합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가르치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우리가 가르침이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가르칠 거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어떻게 생길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지요. 이 가르칠 거리는 우리가 이런 저런 지식이 많다고 생기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대학 교수인데도, 또 아주 박식한 사람인데도 배울 것이 없는 사람은 부지기수로 많지 않습니까? 그러면 뭔가? 사도바울은 그것은 다름아닌 바른 신앙이다 라고 얘기합니다. 본문에서 가르침이라고 번역한 이 단어 ‘디다스칼리아’는 여러분이 한두번 들어본 적이 있는 ‘디다케’라는 단어의 변형인데 이 가르침은 다른 것이 아니고, doctrine, 즉 교리적인 가르침을 얘기합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이 여기서 얘기하는 가르침은 바른 신앙에 바탕을 둔 내가 붙들고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의 원칙같은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다른 어떤 것 보다도 바른 신앙에 근거를 둔 인생에 원칙이 있어야 하고, 확고한 푯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어떤 올바른 원칙을 가지고 그 원칙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힘이 있고, 그래서 배울 것이 있고, 그런 사람들이 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무게가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가진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신앙인이 되신지 상당한 시간이 지나고 이제는 선생이 되어야 할 때인데도 그냥 나는 가르칠 수 없어 하면서 스스로 어린 신앙인으로 머물러 있지는 않으십니까? 이제는 가르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르침이 있는 삶을 살기위해서는 올바른 신앙위에 서야 하고 올바른 신앙위에서 인생의 원칙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바른 신앙위에서 인생의 원칙을 만들어 가시는 그런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신앙적인 원칙은 내가 사는 방법안에서 나타나야 한다
두번째 우리가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는 사람이 되려면, 우리가 가진 그런 신앙적인 원칙들이 내가 사는 방법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가르침’ 다음에 ‘행동’을 얘기하는데 여기서 행동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내가 사는 방법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즉 “디모데야 넌 내가 가진 신앙적인 인생의 원칙과 거기에 근거한 내 삶을 방법을 보았지 않았니?”하는 의미입니다. 자, 가르침 다음에 삶의 방식이 따라오는 것. 당연한 얘기지요. 내가 가진 인생의 원칙이 내가 사는 방법에서 나타나야 그것이 진짜 원칙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배워가는 것들을 어떻게 내 삶과 연관시켜나갈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즉 다시 얘기해서 내가 가진 신앙이 내가 사는 삶이 모습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그렇지가 않습니다. 휴스턴은 워낙 복을 받은 도시여서 덜하지만 보통 다른 지역에서는, 한국을 포함해서 많은 경우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전혀 신앙인 답게 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거리낌없이 술을 마십니다. 술을 마시는 정도가 아니라 여자 나오는 술집에 갑니다. 가는 정도가 아니라 안 믿는 사람보다도 더 할것 다하고 놉니다. 일터에서도 여전히 속일거 다 속이고, 또 지난 주에 목회자 코너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크리스천들이 CD 복사하고, 불법으로 영화 down 받고 하는데 더 열심이고, 또 아무 거리낌 없이 애인과 결혼하기 전에 자고, 그러다 필요가 생기면 동거하고 … 이유가 뭘까? 제가 생각하기에는 믿음이 부족하다기 보다는 신앙을 삶과 연관시키려는 생각이 없어서 입니다. 제가 언젠가 한국에 갔을 때 한국의 어떤 큰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때는 제가 한참 예배의 기쁨에 빠져 있을 때여서 이 교회 사람들은 예배를 어떻게 드리나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리다가 이렇게 돌아보니까 모두들 너무 열심히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눈물을 흘리면서 손을 들고 찬양을 하고… 그래서 생각했지요. “아~ 참 신실한 크리스천이 많구나.” 사실 감격했습니다. 그런데 예배당 문을 나서서 주차장을 빠져나오는데 이상한거에요. 이건 뭐 동대문 시장이더라니까요. 그리고 길건너에 있는 중국집을 갔는데 마찬가지예요. 거기 뭐 다 그 교인들이거든요. 말투하며 욕하는 것 하며, 갑자기 혼란에 빠지더라구요. 아니? 아까 내 옆에서 눈물을 흘리며 손 들고 찬양하던 사람들이 다 어디에 갔지? 그럼 그때 그 눈물을 거짓이었나?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알겠더라구요. 거짓이 아니었어요. 신앙은 있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있는데 그것이 삶에 연결되어 있지 않는거더라구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삶에 연결시키려는 작업을 끝없이 해야 합니다.
저는 31살때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44살인데요. 아직도 옛날 사고방식이 있고, 아직도 예전 흡성이 있습니다. 당연하지요. 우리는 평생을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온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니 여전히 내 삶가운데 옛날의 모습들이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신앙이 내 삶에 나타날 수 있도록 부단히 애를 써야 합니다. 내 생각과 행동 패턴을 성경에 따라 바꾸고, 그러기 위해서는 특별히 성경 공부를 하고, 기독교에 대해서 알아가면서 끝없이 이것을 물어야 합니다. So what? 그래서 이 교리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What does it mean to me? 나는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내가 뭘 적용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끊임없이 묻고 그것을 실천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믿음이 있어도 Practice, 즉 실천이 없으면 소용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야고보도 야고보서 2:19-20절에서 비슷한 얘기를 합니다. 결국 야고보 사도가 하는 말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던 사람은 우리뿐이 아니라는 겁니다. 귀신들도 알고 있었으니 귀신들이 가지고 있던 믿음이나 행함이 없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나 다를 것이 뭐가 있냐는 것이지요.
자 그래서 우리 이 시간에 두 가지만 돌아보고 지나갑니다. 제가 시간을 드릴테니 잠깐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두가지를 생각하시는데요. 첫번째는 나에게 있는 것 중에서 내 아이가 기억해 주고 배우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 한 가지 나에게 있는 것 중에서 내 아이가 내 이 모습을 몰랐으면 좋겠고 배우지 말았으면 좋겠다 싶은 것 한가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이것은 참 자랑스러운 유산이네요 싶은 것이 있으시면 이따 헌신 시간에 하나님 이것은 제가 끝가지 지켜가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하시고, 혹시 이것은 참 부끄럽다 싶은 것이 있으면 헌신 시간에 하나님 참 부끄럽네요. 제가 꼭 정리하겠습니다 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잠깐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내 습성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고 신앙이 삶의 모습에서 나타나게 하려는 노력을 할 때 언젠가는 우리의 자녀가, 그리고 우리의 후배들이 아 그 분, 그 분의 가르침이 내 삶에 살아있다라고 기억해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이 삶으로 연결되게 하셔서 우리 아이들에게 또 후배들에게 훌륭한 크리스천이라는 기억에 남는 그런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3. 목적을 발견하는 삶을 산다
자 세번째 우리가 아름다운 기억에 남는 사람이 되려면, 삶의 목적을 발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0절을 다시 한번 보면 사도 바울은 나의 가르침과 행동과 그 다음에 의향과 라고 하면서 ‘의향’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의향이라고 번역하니까 무슨 의미인지 잘 눈에 안띄지요? 의향, 의도, 즉 인생의 목적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삶의 방향이 뚜렸하고 목적이 있는 사람은 그 삶이 아름답고 그런 사람의 삶은 기억에 남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마틴 루터가 아닌가 싶습니다. 루터는 아주 심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무서운 아버지 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잘못된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평생 그것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 어릴 때부터 마귀에 대한 두려움이 많았고, 실제로 마귀가 나타나서 많이 그를 괴롭혔다고 일기에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언젠가 나는 하나님께 미움을 받아서 지옥에 갈것이라는 그런 두려움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수도사가 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가 대학을 다니던 어느날 친구의 장례식을 갔다 오는 길에 갑자기 퍼붓기 시작한 빗속에서 천둥과 번개가 너무 두려워 그렇게 서원을 하지요. “하나님 저를 좀 살려주시면 제가 수도사가 되어서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수도사가 되고, 또 사제가 되어서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하고, 그리고 또 박사학위까지 받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믿어지지가 않고, 밤마다 자기를 잡으러 오는 마귀의 헛개비와 싸웁니다. 사제가 되고 나서도 그는 한 7-8년은 하나님의 용서를 믿지 못하고 두려움에 떱니다. 그러던 어느날 로마서를 강해하다가 1:16-17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는 결국 죄인인 사람이 어떻게 용서를 받는가 하는 문제와 싸우다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을 이유없이 그냥 용서해 주는 것은 의가 아니지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죄는 약간의 벌로 또는 우리가 가끔하는 선행으로 용서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 죄는 반드시 벌하고 넘어가야 하는 하나님의 의는 그 분 스스로가 이땅에 오시고 우리가 받아야 할 벌을 대신 받으심으로 해결이 되었고, 그래서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내가 예수님으로 인해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뿐이라는 사실. 그래서 구약의 하박국이 “의인은 믿음으로 살것이다.”라고 외쳤다는 것이 깨달아 진겁니다. 인간의 죄는 착한 행실로도 안되며, 고행으로도 안되며, 면죄부로도 안되며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 표현된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라는 것이 깨달아 진겁니다. 다시 얘기해서, 오늘날 우리가 믿는 신앙의 핵심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개념은 1000년이 넘게 외곡되어 있다가 루터에 의해서 재 발견이 된 것입니다.
그날 이후 부터 그의 인생은 당시 카돌릭의 잘못된 가르침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올바른 믿음을 갖게 하는 데 자기 인생의 목적을 겁니다. 그의 인생에 클라이 맥스는 나중에 루터가 종교 재판에 회부가 되었을 때의 얘기입니다. 그는 당시 신성 로마제국 황제와 추기경들 앞에서 종교 재판을 받는데 당시 종교 재판은 사람을 화형시키던 시절이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도였던 황제가 얘기합니다. 여기에 있는 네가 쓴 이 모든 책들과 그 주장을 취소한다면 살려주겠다라고 조건을 겁니다. 루터는 생각할 수 있는 24시간을 달라고 합니다. 24시간 동안 골방에 갖혀 있는데 그에게 마귀가 찾아 옵니다. 밤새도록 마귀에게 시달리고 또 싸우고… 밖에서 듣는 사람은 그의 그 소리지름이 처절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되어 다시 황제앞에 서서 얘기합니다.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다 라고 얘기한 다음에 이렇게 소리치지요. “내가 여기 있습니다. 이것은 내 신앙의 양심입니다. 이것외에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우시 옵소서.”
황제의 한마디면 화형에 처해질 수 있는 그 당시 상황에서 그 겁많던 사람이 어떻게 그런 용기가 생겼을까? 그것은 그가 인생의 목적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그것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아름답고 그런 사람이 기억에 남습니다. 자 그러면, 그는 어떻게 그의 인생에 목적을 발견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그가 그의 고난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그의 인생을 간단하게 얘기했지만 그는 엄청난 고생을 했거든요. 그는 사제가 되고 나서도 믿어지지 않는 그것을 붙들고 정말 처절하게 고민을 합니다. 순례자로 로마를 방문해 보고 시스틴 성당을 무릎으로 한계단 한계단 키스를 하며 올라보고 (그 당시에는 그런 자학 행위가 사람을 구원한다고 믿었습니다.), 정말 믿어 지지 않는 것과 씨름을 합니다. 그런데 그는 결코 그런 시간들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진리를 알고자 하는 씨름을 끝까지 하니까 결국 거기서 그는 인생의 목적을 찾았고, 결국 자기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4. 인내하는 삶을 산다
사실 오늘 설교는 사도 바울이 얘기한 가르침, 행동, 의향, 믿음, 오래참음, 사랑, 인내, 그리고 박해와 고난, 이것들을 다 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시간이 안되겠습니다. 그래서 그 뒤에 나오는 것들 중 인내만 좀 보겠습니다. 오래 참음, 인내, 박해와 고난이 뭐 다 비슷비슷하게 인내얘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인내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루터의 얘기로 돌아가서 그가 그의 고난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결국 그 안에서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는 가장 큰 요인이 뭐였겠습니까? 바로 인내지요. 그가 처절한 고난의 시간들 속에서 인내했기 때문에 결국 그의 인생이 아름답게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는 사람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우리의 고난의 시간을 낭비해서는 않되고 또 그 고난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 시간 속에서 인내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가 사는 세태는 고난은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내하기 보다는 피해버립니다. 그래서 요즈음의 세태는 경박하고 값싼 세태라고 하지요. 만약 루터가 오늘날의 세태에 젖은 사람이었다면 일찌감치 믿음을 버리고 편한 길로 갔을 것입니다. 공부 잘하고 똑똑한 사람이었으니 법학을 했으면 돈과 명예도 얻었겠지요. 인내는 열매를 낳습니다.
따라서 여기 계신 분들 중에 내가 이 점에 관해서 고통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되시는 분들, 한번 견뎌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아무리 견뎌도 계속 어려운 일만 계속되어서 정말 하나님은 좋은 신 분인가? 정말 하나님이 믿어도 되는 분인가 확신이 생기지 않는 분들이 있는 줄 압니다. 믿음 안에서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또 아무리 아무리 기다려도 배우자는 하나님앞으로 돌아올 기미가 보이질 않고 박해만 심해지고 그 안에서 힘들어 하시는 분들이 있는 줄도 압니다. 인내 하시기 바랍니다. 또 가계도 어려운 가운데서, 가짜 물건 팔지 않겠다, 세금보고 정확히 하겠다, 크리스천의 방법으로 사업하겠다 라고 했는데 경제는 어려워지고 수입은 줄어 들고 해서 힘들어 하시는 분들도 있는 줄 압니다. 우리 조금 만 더 버텨 봅시다. 하나님이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안에서 낭비되는 고난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고난의 시간이 언젠가 하나님께 쓰일 날이 올겁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3-4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인격을 낳고, 인격은 희망을 낳는다. 이 말씀이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비록 고난 중에 살았다고 합시다. 하지만, 비록 우리가 힘든 삶을 산다고 해도, 우리가 인내할 때 우리의 인격은 변해 갈 것이고, 적어도 그 인격으로 후진들에게 기억에 남는 그런 사람이 될 것입니다. 얼마전 이곳에서 생활을 하다가 한국으로 돌아간 한 식구가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편지안에 제가 그의 삶에 롤모델이 되었다라고 하면서 자기의 인생에 기준이 생겼는데 그것은 어떤 일을 볼 때, 목자님, 목녀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그분들이 자랑스러워 하실까? 라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마지막에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살도록 노력하겠다며 편지를 마쳤습니다. 그 편지를 읽는데 아무것도 없어도 이렇게 살다 죽으면 의미가 있겠다 싶었습니다. 제가 자랑하려고 이 얘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런 삶을 살 수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제가 뭐 얼마나 잘 살았겠습니까? 그런데도 조금 노력하니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원칙을 세우고, 목적을 발견하고, 가르침의 삶을 살아서 영향을 미치고 기억에 남는 인생을 계속사시는 그런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1)
딤후 3:10-14 / 김태환 목사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저는 바울이라는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자신감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대단한 자신감이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이제까지 이렇게 살아왔다고 자신의 삶을 말할 수 있습니다. 좀 더 부풀려서 자신의 삶을 드라마처럼 꾸밀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삶을 잘 아는 사람들 앞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울이 자기의 제자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부르는 여러가지 이름들이 있습니다. 제자, 믿음의 아들, 동역자, 나의 사랑하는 아들, 형제, 예수 그리스도의 종, 하나님의 일꾼 등 바울은 여러가지 이름으로 디모데를 불렀습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처음 만난 것은 더베와 루스드라였다고 합니다(사도행전 16:1). 디모데의 아버지는 그리스인이었고, 어머니는 경건한 유대인었습니다. 디모데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몰라도 사람들에게 아주 평판이 좋은 청년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바울의 제자가 된 디모데는 많은 시간을 바울과 동행했습니다. 그만큼 디모데는 바울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바울의 삶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디모데에게 지금 바울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대는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르쳤는지, 나의 삶의 방식과 삶의 목적이 무엇이며, 복음에 대한 나의 열정과 나의 믿음과 인내와 사랑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떤 핍박과 고난을 겪었는지 그대는 알고 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런 편지를 쓴 것은 디모데의 흔들리는 믿음을 붙잡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때 디모데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바울이 쓴 편지에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the evil desires of youth, 디모데후서 2:22)”는 말씀이 나온 것으로 보아 디모데는 20살 안팎의 한 창 때의 청년이 아니었는가 합니다. 청년의 때는 아직 모든 것이 확정되지 않은 때입니다. 가능성도 많고, 잘못된 정욕에 빠져서 인생을 망칠 수도 있는 때입니다.
이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신앙의 모델이 될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두는 것입니다. 영어에서는 “soul friend”라고 하기도 하고, “spiritual director”라고 하기도 하고, “멘토(mentor)”라는 말도 씁니다. 자기가 본받고 싶은 영혼의 동반자, 그리고 영적인 삶의 스승을 곁에 두는 것입니다. 좋은 신앙의 모델을 곁에 두고 영향을 받는 것은, 그 사람에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때로는 잘못된 신앙의 모델을 둠으로써 실망도 하고, 상처도 받고, 심한 경우는 신앙생활의 파멸을 가져 오기도 합니다. 좋은 신앙의 모델은 그 사람에게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신앙의 모델은 오히려 그 사람에게 큰 상처를 입힙니다. 어떤 사람이 “멘토”라는 말을 너무 쉽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전혀 아닌 것 같은데, 자기의 멘토는 누구라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닙니다. 지금 두 사람은 관계가 아주 좋지 않습니다. 멘토와의 관계는 결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디모데의 spiritual director로서, 멘토로서, 바울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가르쳐 온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에 대하여 말합니다. 한 사람의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의 가치관입니다. 삶에 있어서 무엇이 가치 있는 일인지, 그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그 사람의 가치관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그 가치관이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을 결정합니다. 그 사람의 가치관이 형편 없으면, 그 사람의 삶의 방식도 형편 없습니다. 그 사람의 가치관이 높고 고상하면, 그 사람의 삶의 방식도 높고 고상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내가 무엇을 위해서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 네가 잘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언뜻 그의 믿음과 인내와 사랑, 그리고 헌신, 복음에 대한 열정, 그리스도를 위해 받은 고난의 삶에 대하여 말합니다. 우리는 지금 바울의 입에서 어떤 말들이 나오고 있는지 눈여겨 봐야 합니다. 믿음, 인내 사랑, 헌신, 열정, 고난, 이런 말들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돈이나, 지위나, 명예나 이런 말들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런 것들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이런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의 말을 한번 들어 보십시오. “나는 태어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도 베냐민 지파의 자손이며, 히브리인 중에서도 히브리인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내 인생의 안내자 역할을 하여, 나는 율법을 가장 엄격히 지키는 바리새인이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에 너무나 열심이었으므로 교회를 핍박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내가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따르는 데 있어서는 그 어느 누구도 헛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때는 이 모든 것이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것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쓰레기처럼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제 압니다. 이로써 나는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빌립보서 3:5-8).”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그는 새로운 가치관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내가 지금까지 알아왔던 가치들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가치들이 있다는 것을 그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이야기가 중요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기 위하여 과거의 삶과 단절(斷絶)을 선언합니다. 그의 크리스천의 삶의 가치관은 이렇게 형성된 것입니다.
짐작컨대,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썼을 때, 디모데는 심각한 생의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알고 배웠고, 알고 있었던 가치관이 흔들리는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이 “그러나 악한 마음을 품고 다른 사람을 속이는 자들은 더 악해져서, 결국 자기 꾀에 속아 넘어가고 말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번영하고,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파멸하고 만다는 충고 아닙니까? 그러므로, 지금까지 배워 온 가르침을 계속 좇아가면 결국 그 가르침들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저의 설교 제목은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입니다. 언젠가는 여러분과 이런 말씀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성경의 가치관을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을 말합니다.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단순히 일요일에 교회에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어에서도 그런 사람은 churchgoers라고 하지 Christians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는, nominal Christians(명목상의 크리스천)이라고 합니다. 명목상이라는 말은 이름만 크리스천이지 사실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중요한 가치들은 하나님의 말씀, 예배, 찬양, 기도, 믿음, 사랑, 소망, 인내, 절제, 온유, 충성, 헌신, 희생, 나눔, 섬김, 변화, 복음에 대한 열정, 이런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세상의 가치관과는 아주 다릅니다. 성경의 가치관은 그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은 그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정말 심각하게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명목상의 크리스천이 되고 맙니다. 전체 크리스천 가운데 명목상의 크리스천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통계상으로는 ¼ 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¾ 이상이 될 것입니다.
며칠 전에는 이집트 발굴 비사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이집트의 소년 왕이었던 투탕카멘(Tutankhamun)의 무덤을 찾는 다큐멘터리였습니다. 대개 이집트 왕들의 무덤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기 때문에 이집트 사람들도 투탕카멘의 무덤이 있는 모릅니다. 다만 “왕들의 계곡” 어딘가에 있을 것으로 짐작할 뿐입니다. 그래서 미국이나 영국같은 나라의 고고학자자들의 도움으로 무덤을 발굴합니다. 투탕카멘의 무덤은 영국인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 1874-1939)라는 사람이 갖은 고생 끝에 발견합니다. 파라오의 무덤의 입구를 막아 놓은 벽을 허물고 들어가면, 먼저 작은 방에 부장품들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진짜 발굴은 그 때부터 시작입니다. 하워드 카터가 1923년 2월 16일에 투탕카멘의 묘실로 들어가는 벽을 망치로 허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은 저에게도 역사적인 날입니다. 지금까지 발견한 것만으로도 이 무덤은 잊혀진 이집트 문명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엄청나게 넓혀 줄 것입니다. 이 벽을 허물면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무 것도 없는 빈 방일 수도 있고, 운이 아주 좋으면 이 방이 파라오가 묻혀 있는 묘실일 수도 있습니다. 묘실이라면 우리는 3,000년 이상 잠들어 있는 파라오를 잠에서 깨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파라오의 잠을 깨우는 목적은 학문이지 결코 돈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에 나와 있는 중요한 가치들을 나의 것으로 삼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잠들어 있는 성경을 잠에서 흔들어 깨우는 것입니다. 성경에 중요한 가치들이 들어 있다는 것만으로는 아무 소용 없습니다. 성경의 가치들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서 숨을 쉬게 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성경의 가치들을 기반으로 해서 그 위에 자신의 인생관을 세우는 것입니다. 인생관은 삶을 바라보는 관점(觀點)입니다. “What is life?” “What is the purpose of life?” “What am I seeking?” 이런 질문들이 인생관을 설정하는데 중요한 질문들입니다. 물론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은 우리의 믿음이 성숙해지면서 조금씩 부분적으로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이런 질문들에 대하여 심각하고 고민하면서 답을 찾는 과정입니다.
며칠 전에 아주 감동적인 글을 읽었습니다. 지난 1월 19일 매사추세츠 상원의원 보궐선거에서 예상을 깨고 공화당 소속 Scott Brown(50세)이 민주당 후보 Martha Coakley를 물리치고 당선 되었습니다. 브라운은 선거기간 중 Boston Globe 신문 기자로부터 “당신은 과거에 범죄를 저지르고 구속된 일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스캇 브라운은 부모가 일찍 이혼한 까닭에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 문제아가 되었습니다. 그가 12살 되던 해 어느 날, 음악 레코드판을 몇 장 훔쳐 옷속에 감추고 나오다가 붙잡다가 붙잡혀 구속되었습니다. 그는 담당 판사 Samuel Zoll에게 불려갔습니다.
판사: 너 음악을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스캇: 네, 음악을 아주 좋아합니다.
판사: 다른 것 좋아하는 건 없느냐?
스캇: 농구도 좋아하고, 달리기도 좋아합니다.
판사: 농구 실력은 어느 정도냐?
스캇: 한 게임에 30점 내지 40점은 올립니다.
판사: 음, 아주 잘 하는구나. 그런데, 형제들은 있느냐?
스캇: 네, 이복 동생이 하나 있고, 이복 누이 동생들도 있습니다.
판사: 그래? 동생들이 너를 좋아하느냐?
스캇: 물론입니다.
판사: 좋아. 그런데, 네가 교도소에 들어가 농구하는 모습을 동생들이 보고싶어 할 것 같으냐?
스캇: (말문이 막힌다)
판사: 지금 대답하기 곤란하면 다음 주까지 글로 써서 제출해라. 1500 단어 이내로 반성문을 써내, 알았지?
스캇: 넵, 판사님!
스캇 브라운은 반성문을 써냈고, 곧 풀려났습니다. 그는 조올 판사의 따뜻한 배려에 감동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정말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 아닙니까? 어떻게 그런 판결을 낼 수 있습니까? 판사 Samuel Zoll의 가치관과 인생관이 돋보이는 판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읽은 글의 제목이 “한국에도 이런 판사가 있을까?”입니다. 만일 그 때 Scott이 Samuel Zoll이라는 판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디모데가 청년 시절에 바울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루스드라의 착한 청년 이상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루스드라는 작은 동네를 뛰어 넘어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주는 그런 사람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이렇게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다음 주일에 같은 제목으로 두 번째 설교를 하겠습니다.)
성경과 현대인
딤후 3:10-17 / 한경직 목사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三·十六-十七)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四·十二)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요 五·三十九)
육신 생명의 건강을 유지함에는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며 영양 있는 음식물을 섭취하고 적당한 운동을 하는 등 이에 대한 법칙을 준수해야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영적 생명의 건강에도 이러한 법칙이 있어서 이를 준수하여야 되는데 그것은 곧 기도와 성경 읽기와 실행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 속 사람의 생명을 말씀한 것이니 속 사람이 성장하려면 영적 영양물인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보편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를 두 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대자연을 통해서 말씀하신 바 이를 신학적 용어로 일반계시(一般啓示)라고 하여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존재와 그 무한하신 지혜와 전능하심과 하나님의 영광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둘째로,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는 특별계시(特別啓示)라고 하여 인류구속(人類救贖)의 진리 곧 우리의 영적「만나」는 이에서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여러 가지 서적이 많지만 오로지 성경만이 하나님의 특별 계시이며 하나님의 말씀 인 것입니다.
왜 신구약 성경을 특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느냐 하면『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번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그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한 히브리 一장 一절로 二절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 히브리 민족을 택하시고 그 중에서 선지자들을 내셔서 그들을 통하여 말씀하셨고 마지막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인격과 생활로써 실제로 말씀하신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一장 一절에 있는『태초에 말씀이 있으니』라는 말씀은 그리스도를 가리킨 말씀으로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에 의하여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과 같이『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묵시하신 바』이니 곧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날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 오견(誤見)이 있음을 압니다. 하나는 성경을 보통 종교적 천재의 기록이라 하여 다른 서적과 동일시하는 자연주의자와 무신론자의 견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류를 사랑하셔서 그 죄악에서 인간을 구속하시려 독생자를 보내신 분이시라 이 소식을 전하는 기록에 관계 안 했을 리 없습니다. 그는 성경 기자들에게 성신으로 감동하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경은 문자적 구수(口授)(Verbal Dictation)로 되어졌다고 하여 성경 저자의 인격과 지식과 연구를 무시하는 견해입니다. 이에 대한 정당한 견해는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의 영감으로 은혜 받은 인물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평시에도 감동 중에 산 이들이요,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수행할 때는 더욱 큰 감동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표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거의 二천년 전에 여러 사람들이 여러 모양으로 쓴 기록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대의(大義)에는 조금도 모순되는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인이 성경을 읽을 때에 의심하기 쉽습니다. 성경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 같은 부분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 중에는 역사와 시와 논물과 잠언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어떻게 이런 것을『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각양 방식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역사가 하나님의 진리를 나타내며 시가 또한 하나님의 진리를 나타냅니다.
『겟세마네의 예수』라는 성화를 보면 한 획 한 획이 다 예수 그대로라고는 할 수 없으나 그 전체가 예수의 얼굴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라』(딤후 四·十三)한 이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일까 생각할 수 있지만, 디모데 후서 전체는 하나님의 계시를 알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시나 논문이나 서신이나 그 전체가 다 하나님의 진리를 나타내므로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음으로 성경은 고대서적(古代書籍)이라는 것입니다. 나날이 진보하는 세상에, 오늘날 같은 원자력 시대에 있어서 새로운 서적을 읽을 것이지 어찌 수천 년 전의 옛 책을 청년들이 읽고 있겠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옛 책이라고 해서 버릴 것은 물론 아닙니다. 철학을 연구하는 자는 지금도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를 읽을 것이요, 동양 도덕을 연구하는 자는 지금도 논어(論語)나 맹자(孟子)를 읽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진리는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알키메데스의 원리는 지금도 역시 물리학상의 진리요, 피타고라스의 정리(定理)도 역시 기하학상의 진리로서 세상 끝까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이 비록 고대인의 인정과 풍속, 사회 제도, 관습 따위의 의복을 입기는 하였으나 하나님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가 입은 의복은 변하나 진리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리는 항상 새롭습니다. 二十세기의 경이(驚異)라는 B 29를 타고 다니는 군인도 회중신약(懷中新約)을 품에 가지고 다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복과 진리 자체의 관계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셋째로, 과학적 지식을 가진 현대인에게 이적에 대한 기사는 난해(難解)의 감을 준다는 것입니다. 자연과학을 배운 사람은 자연 법칙에 대한 이념과 성경과는 상반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이적이라는 것은 고대에는 신앙에 도움이 되었으나 현대에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어떤 학자는 이적을 자연 법칙에 의하여 해석해 보려고 노력하였으나 그러나 이것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의 부활 등을 어떻게 자연적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은 성경에 있는 이적을 그대로 승인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대저 신학적 견지에서 보면 자연 법칙은 하나님의 일반의지(一般意志)의 표현이요, 이적은 하나님의 특수의지(特殊意志)의 표현입니다. 그런고로 성경을 보면 특수한 때에만 하나님의 이적이 나타난 것을 신약(新約)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여기에 무신론자나 유물론자나 맹목적 운명론자에게 이적을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믿으나 이적은 자연 법칙에 벗어난다고 하는 사람에게 말합니다. 그네들은 자연 법칙으로 볼 때 무(無)에서 유(有)를, 무기물(無機物)에서 유기물(有機物)을 낼 수는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연 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곧 천지 창조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최대의 이적은 천지 창조인데 창조주 곧 하나님을 믿는 자는 그 가능성을 부인하기 곤란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혹 창조주의 가능성은 시인하나 하나님께서 이 천지를 한 번 창조하신 연후에는 자연 법칙에 의하여 자연계를 운행케 하셨으니 자연 법칙을 어기어 그리 할 리가 없다고 말합니다(Deism). 그러나 이적은 자연 법칙을 어김이 아니요, 초월합니다.
인격은 자연 법칙을 초월합니다. 또한 우리는 자연 법칙의 제한성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자연 법칙은 과학적 방법으로 발견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한에서 지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실이 발견되는 때에는 정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학이 발전하여 연구하면 할수록 우주는 신비한 것임을 즉 이적임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깊은 연구를 한 과학자일수록 이적을 믿게 되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물질적인 우주에 이적이 많으니 성경에도 이적이 있음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상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데 대한 현대인의 의혹 몇 가지를 들어 말하였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은 결국 내가 읽어보지 않고는 모릅니다. 성결을 읽을 때에 우리가 하나님을 직면하고 그리스도를 직면하는 것입니다.
일찍이 고대 언어학자로 세계적 권위이던 윌손 박사에게 어떤 대학생 두 사람이 가서 성경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느냐고 반대 이론을 전개하여 하였습니다. 이 때에 윌손 박사는 조용히『그런데 이 성경을 몇 번이나 읽어보고 그런 결론을 내렸습니까?』하고 반문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다 서로 얼굴을 쳐다볼 뿐, 아무런 대답도 없었습니다. 박사는 다시 묻기를『그러면 한 번은 읽었겠지요?』그래도 대답이 없었습니다. 사실은 한 번도 읽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 때에 박사는『나는 四十년간 매일 밤 열 시부터 새벽 두 시까지 성경을 연구하였고. 그리고 나는 이 책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데 조금도 의심이 없소, 우선 두어 번 읽어보고 오시지요』두 학생은 머리를 숙인 채로『고맙습니다』란 한마디를 남기고 나가버렸다고 합니다.
一七九0년 영국 정부에서 남양 군도의 하나인 피트카린(Pitcarin)도에 식림(植林)하기 위하여 인부 백여 명을 파송(派送)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 섬에서 선장에 반역하여 작은 배에 선장을 태워 죽으라고 대양(大洋)에 띄워 보낸 후 자기들끼리 절해고도(絶海孤島)에서 돌아올 생각도 못하고 토인 여자와 동거하며 생활하였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선장은 다행히 지나가는 배를 만나 영국으로 돌아가 정부에 보고하여 정부는 곧 해군을 파송하여 이들을 체포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三十년간의 역사를 물으니 대략 이러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선장을 죽게 만들어 놓고 각자 마음대로 놀았습니다. 자연히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마다 시비를 가릴 사람이 없어서 대부분이 서로 싸워 죽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자가 열대 식물의 즙으로 술을 만들어 먹기 시작한 뒤에는 싸움이 더 굉장해 졌습니다. 술 먹고 놀고 싸우고 죽고 하는 반복이었습니다. 이리하여 백인들은 몇이 남지 않게 되었으나 흑인 여자와의 관계로 반종 아이들은 많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어떤 날 이 반역자의 하나인, 술 먹고 싸우고 음란하고 살인하던 이 아담스가 수두룩히 모인 반동 아이들을 바라볼 때에『이 아이들이 크면 역시 우리들처럼 살다가 죽을 태지! 이래서야 될 수가 있나!』하는 생각이 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옛날 자기 가정이 연상되었고 떠날 때에 자기 어머니가 주던 성경책이 생각났다 합니다. 그 책이 지금도 있을까 하고 옛 가방을 뒤져보았습니다. 책은 그냥 있었습니다. 아담스는 읽기를 시작했습니다. 읽고 있던 아담스의 눈에서 눈물이 마를 줄 몰랐습니다. 이리하여 많은 죄는 회개의 눈물과 함께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 때부터 아담스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남은 사람들에게도 회개를 권하였습니다.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글을 가르쳤습니다. 무정부 상태이던 이 섬은 질서가 잡히고 예배당이 서고 학교가 섰습니다. 야만의 절해고도에 문화와 종교의 꽃이 핀 것입니다. 오직 성경 한 권의 감화로 말입니다.
이 성경은 현재 九八七종의 방언으로 번역되어 온 세계인이 읽고 있는데 이로써 죄인은 구주를, 슬픈 자는 위안을, 낙망자(落望者)는 소망을, 타락한 자는 재생을, 정치가는 정의를, 철학자는 지혜를, 예술가는 영감을, 도덕가는 윤리를 찾고 있으며, 청년들은 어떻게 혈기를 제어할까 를, 노인들은 어떻게 여생을 보낼까를, 죽는 자는 참된 영생을 각각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이 퍼지는 곳에 영적 해방이 있고, 도덕적 해방이 있고, 참된 사회적 해방, 정치적 해방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의 바다에 빠지라(4)
딤후 3:10-17 / 김태환 목사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합니다. 새로 생긴 친구 이야기를 할 때도 어른들은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물어 보지 않습니다. “그 아이는 어떤 목소리를 가졌지?” 라든가, “ 그 아이는 어떤 놀이를 좋아하지?” 라든가 “그 아이는 나비 채집을 좋아하니?” 하는 질문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 아이는 몇 살이니?” 라든가, “형제는 몇 명이니?” 라든가 “그 아이 아버지는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니?” 하는 따위의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알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고 생각합니다. 어른들에게 “창 가에 예쁜 화분이 놓여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살고 있는 분홍색 집을 보았어요.” 라고 말하면 어른들은 얼른 알아 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른들에게는 “10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요.” 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하면 어른들은 “야, 정말 굉장한 집이구나!” 하고 감탄합니다.」
정말 어른들의 세계를 실랄하게 비판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많이 소유(所有)한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남보다 큰 집을 소유했다든지, 돈을 많이 소유했다든지, 학위를 가졌다든지, 좋은 차를 가졌다든지 하는 것을 행복의 척도(尺度)로 삼습니다.
정말 불행한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 어디에도 행복을 그런 식으로 말한 곳은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마태복음 19:24)”든지, “네가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마태복음 19:21)” 든지,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너의 소유가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누가복음 12:20)?” 고 합니다. 성경은 인생의 행복이 그 소유의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누가복음 12:15).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성경의 가치관(價値觀)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빌립보서 3:7-8 말씀은 중요합니다. “나는 한 때 대단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모두 내 던졌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외에는 다 쓰레기처럼 여기고 모두 내버렸습니다.” 오늘 우리 입에서 이런 고백(告白)이 나와야 합니다. “I consider everything rubbish compared to the greatness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이런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이런 고백이 일찍 나오면 일찍 나올수록 좋습니다. 중고등학교 때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으면 좋지만, 그러나 그 때는 그만한 믿음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청년 시절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그만큼 나머지 삶을 가치있게 살 수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소망하는 것이 바로 이 것입니다. 이 시대의 풍조를 따라 이리 저리 휩쓸려 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의 입에서 “I consider everything rubbish compared to the greatness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이런 고백을 듣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이 저절로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빠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바다는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고백했지요?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로마서 11:33)!”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식은 그 깊이를 잴 수 없다는(fathomless) 것입니다. 성경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바다는 그 깊이를 잴 수 없는 깊은 바다와도 같습니다. 이 깊은 말씀의 바다에 빠져야 합니다. 말씀에 대한 깊은 연구와 묵상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의 심연(深淵)에서 생명수를 길어내야 합니다.
성경은 놀랍게도 인생의 행복을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시킵니다. 보세요.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편 1:1-2).”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요한계시록 1:3).” 한번은 예수께서 무리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을 때에 한 여자가 소리쳤습니다. “당신을 낳아 젖을 먹인 여자는 참으로 복받은 여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누가복음 11:28). 또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 그런 사람은 바람이 불고 물난리가 나도 끄떡 없이 견딘다(마태복음 7:24).”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14절)!”고 합니다. 그보다 더 놀라운 말씀은 그 다음에 나오는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라는 말씀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습니다. 디모데는 더베(Derbe) 출신입니다(사도행전 16:1). 지금의 터키에 속한 지중해 연안에서 조금 내륙으로 들어간 도시입니다. 디모데는 그 때부터 줄 곧 바울과 함께 있었습니다. 바울 곁에서 바울의 삶을 그대로 지켜 보았습니다. 바울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 그의 희망이 무엇인지, 또 그의 믿음은 어떠한지, 또 그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어떤 고난을 겪고 있는지, 디모데는 바울의 삶을 샅샅이 모두 곁에서 지켜보았습니다.
바울은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 너는 너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너는 내게 배우고 확신한대로 살아가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몇 가지 충고를 합니다. 네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면 반드시 고난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여러분에게도 이런 고난이 있습니까? 정말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기에 너무 힘에 겨운 일들을 겪고 있습니까? 있습니다. 어떤 때는 혼란(混亂)스럽기도 합니다. “정말 성경의 진리가 옳은가?” 어떤 때는 걱정도 되고 고민도 됩니다. “정말 성경 말씀대로 살면서도 비지네스를 잘 할 수 있을까?” 이런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에서 배운 원칙(原則)에 충실하라”고 합니다. “성경의 원칙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를 네가 보지 않았느냐?” 바울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참으로 험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악해지고, 서로 속고 속이는 불신(不信) 사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때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기에는 너무 악하다!” 맞습니다. 이 세상은 너무 악합니다.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악에 물들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바울의 충고는 한가지입니다. “너는 성경에서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무슨 뜻입니까? 세상이 아무리 험하고 악하다고 할지라도 너는 성경에서 배운 진리와 원칙을 가지고 넉넉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구약의 창세기와 출애굽기는 기원전 1,400년 경에 기록되었고, 시편은 먼저 기록된 것은 약 기원전 1,400년에, 나중에 기록된 것은 기원전 400년 경에 기록되었습니다. 4 복음서는 서기 50년에서 90년 사이에 기록되었고, 사도행전은 서기 60년 경에 기록되었습니다. 또 디모데전서, 후서는 서기 63년에서 66년 경에 기록되었고, 요한계시록은 서기 90년에서 100년 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지금부터 계산하면 창세기는 무려 3,400년 경에 기록되었고, 요한 계시록은 1900년 전에 기록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성경 말씀이 진리의 말씀이라고 믿습니까? 성경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충분한 삶의 원칙들을 제공하고 있다고 믿습니까? 여러분은 성경 말씀이 시대를 초월해서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까? 그렇게 믿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이런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성경에서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해야 합니까? 바울은 이 질문에 대하여 크게 3가지로 대답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성경에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배우기 때문입니다. “구원(salvation)”이라는 말은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야구에서도 선발(選拔) 투수가 끝까지 던지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한 6회 정도 던지면 볼의 스피드가 떨어지고 얻어 맞숩니다. 그러면 구원 투수를 내 보냅니다. 영어로는 “릴리프(relief)”라고 합니다. 릴리프 투수가 2회 정도 던지면, 마무리 투수가 나옵니다. 영어로는 “클로져(closer)”합니다. 클로져가 나와서 1회를 던집니다. 레드 삭스의 김병현은 클로져입니다.
이것이 꼭 야구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잘 나가던 사람이 뜻하지 않은 위기에 빠집니다. 갑작스런 사고를 당하고 재난을 당합니다. 그럴 때 릴리프 투수가 나와야 하고, 클로져가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인생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배웁니다. 단순히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짐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죄로부터 구원을 얻고, 두려움으로부터 평안을 얻고, 절망에 빠졌던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희망을 붙드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성경에서 얻습니다.
둘째로, 왜 우리가 성경에서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해야 합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感動, inspiration) 으로 기록된 책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바이블(Blble)”이란 말은 책이란 뜻입니다. 성경은 책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다른 일반적인 책과 똑 같습니다. 그러나 그 책에 기록된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씀에 사람의 말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어떤 능력이 있습니까? 창세기 1장에 나오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말씀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세상에 이런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기 이전의 상태(狀態) 대하여 말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좀 어려운 말입니다만, 결국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은 무(無)에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그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책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사람들에게 말씀의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아무 것도 없는 절망의 상태에서 엄청난 것을 일구어 내게 하시고, 말씀의 능력으로 연약한 사람들을 붙들어 주시고, 그 말씀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역자들과 동행(同行)하십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로마서의 말씀에서 “나는 복음(하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얺습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로마서 1:16).” 라고 고백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단순히 “The Gospel is the power of God for salvation of everyone who believes.” 라고 했습니다만, “power”란 말은 희랍어 “두나미스(dunamis)”란 말을 번역한 말입니다.
바울은 선교 현장에서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폭발적인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보통 사람처럼 약한 인간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는 싸움에 이기기 위해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인간의 손으로 만든 무기가 아닌, 하나님의 강력한 무기를 사용하여 악마의 요새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교만한 사상과, 사람들의 눈에서 하나님을 가리우는 온갖 장벽을 부수어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불순종하는 자들을 사로잡아 하나님께 되돌아가게 하고, 그들의 마음을 돌려 그리스도께 온전히 순종하게 할 것입니다. 나는 이 무기를 써서 맨 먼저 여러분을 온전히 그리스도께 순종시킨 다음, 나머지 모든 불손종하는 자들을 처벌하는 데 사용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0:3-5, 현대어 성경).”
여러분, 바울이 손에 들었던 그 강력한 무기(weapon)가 무엇이겠습니까? 의심할 여지없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사람들은 손에 강력한 하나님의 무기를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이 무기를 들어야 합니다. 주일학교 교사들이 이 무기를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들이 이 무기를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사람들이 이 무기를 들어야 합니다.
셋째로, 왜 우리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해야 합니까? 사람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논리(論理)는 아주 간단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씀으로 양육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되는 것입니다. 16절 말씀을 보세요. “교훈(teaching)” “책망(rebuking)” “바르게 함(correcting)” “훈련(training)” 이런 개념들은 모두 교육학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개념들입니다.
사람들 교육하기 위해서는 더 말할 것 없이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가르쳐야 합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은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습니까?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정말 그렇게 배우는 교육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교육입니까?
교육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학교 교육의 위기(危機)를 말해 왔습니다. 학교 교육을 통해서 인간 교육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에버렛 라이머(Everett Reimer)같은 사람은「학교는 죽었다(School is dead, 1971」는 섬칫한 제목의 책을 내 놓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땅한 대안(代案, Alternatives)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사람을 교육하기 위해서는 책망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책망을 해야 합니까? 매로 때립니까? 사람들 교육하기 위해서는 교정(矯正)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합니까? 요즘에는 예전처럼 형무소(刑務所)라고 하지 않고 교도소(矯導所)라고 합니다. 영어로도, prison이나 jail이라고 하지 않고 “A Correctional Institution”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교도소에서 사람이 바른 사람으로 고쳐집니까?
안 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야말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책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을 받고, 잘못된 것을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 말씀으로 훈련을 받을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됩니다.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가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에 만들었던 “홀리 클럽(Holy Club)”을 알고 계십니까? 홀리 클럽은 처음에 4명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6-7명으로 불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저녁에 3-4 시간 씩 모여서 기도하고, 성경을 희랍어로 깊이 연구했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홀리 클럽” 사람들을 “성경 벌레(Bible Moths)”라고 불렀습니다. 좀 벌레가 옷을 갉아 먹듯이, 이 사람들이 어찌나 성경을 파고 들던지 그런 별명이 붙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몇 명 안 되는 사람들 중에서 요한 웨슬리가 나왔지요? 요한 웨슬리 덕분에 영국은 종교개혁 혁명을 겪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요한 웨슬리에게 복음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 동생 챨스 웨슬리가 나왔지요? 챨스 웨슬리는 평생 6,000개의 찬송시를 썼습니다. 그리고 죠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가 나왔습니다. 죠지 휫필드는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와 함께 뉴잉글랜드에서 일어났던 제 1차 영적 대각성 운동(The Great Awakening, 1720-1750)을 주도한 사람이었습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던 몇 사람의 작은 모임에서 이런 영적 거장(巨匠)들이 나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을 받고, 책망을 받고, 교정을 받고, 훈련을 받아야 하나님의 사람으로 길러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교육이야말로 인간 교육의 유일한 대안(代案)입니다.
시편 기자는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시편 119:9, How can a young man keep his way pure? By living according to your word.).”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의 기준이 되게 하십시오. 평생 지키면서 살아야 할 원칙이 되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 교육의 지침으로 삼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the man of God)”으로 자라나십시오. 바울은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로마서 8:19).”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계의 구원의 희망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잘 배워서 확신 가운데 거하라
딤후 3:10-17 / 이정선 목사
우리 말 번역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여기 10절은 ‘그러나 너는’이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말했던 내용과 대비시켜 얘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바울이 앞에서 말했던 내용은 얀네와 얌브레가 그랬던 것처럼 거짓 교사들은 그 어리석음이 드러나 더 나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디모데 너는 보고 알았지 않느냐(11절)는 것입니다. 디모데가 보고 따랐던 것은 바로 바울의 믿음과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좋은 스승을 가진다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누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또 누구에게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배웠는가 하는 것은 우리 인생에서 의미있는 부분 아니겠어요? 그리고 좋은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아주 큰 축복이지요. 좋은 스승 밑에서 좋은 제자가 나오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좋은 스승을 만났을 때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좋은 스승이라고 만났는데 이단에 속한 경우랄지, 또는 신실하지 못하거나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사람을 만나 믿음에 큰 손상을 입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을 스승으로 둔 행운과 축복을 누린 사람입니다. 지금 바울이 그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네가 나의 교훈을 잘 배웠지 않느냐?” 바울의 교훈은 올바른 교리입니다. 이단이 횡행하고 거짓 교사들이 미혹하는 가운데 올바른 교리를 붙잡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바로 그 올바를 교리를 너는 나에게서 잘 배우지 않았느냐는 거예요. 계속해서 바울이 하는 말을 보세요. “또 너는 나의 행실을 잘 보지 않았느냐?” 이것은 바울이 살았던 삶을 말합니다. 자신이 믿는 대로 실천하며 살았던 경건한 삶이지요. 바울은 입으로만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대로 행하며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말과 행실이 달라서는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없고 감동을 줄 수도 없습니다. 바울은 올바른 교리와 그것을 따라 실천하는 삶으로 완벽한 선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러 차례 나를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바울은 효과적인 선생이었고 좋은 선생이었단 말이지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를 네가 보지 않았느냐?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지금 디모데에게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디모데가 바울을 따라다니면서 보고 체험했던 것들이란 말이죠. 우리는 유명한 사람들의 전기나 위인전을 통해서 많은 교훈을 얻습니다. 그렇지만 종종 그러한 교훈들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이유는 그 위인들이 너무나 멀리 있기 때문입니다. 공간적으로 또는 시간적으로 나와 상관이 없는 세계에 있기 때문에 그 교훈들을 체험적으로 습득할 수는 없단 말이지요. 그러나 나와 직접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교훈은 살아 있는 교훈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얼마나 말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우리는 자녀에게 반면교사의 역할을 하는 수가 많습니다. ‘너는 나처럼 하지 말아라.’ 이렇게 말하는 수가 많단 말이지요. 그래서 자기가 못하는 것을 시키려고 하니까 잘 안 돼요. 오히려 반발만 커지지요. ‘엄마도 못하면서 나한테 하라고 해.’ 이런 식이지요. 물론 우리가 누구를 가르치고 감동을 주기 위해서 말과 행실이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거지요. 자신의 실패로 다른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은 참 불행한 일 아니에요?
디모데가 바울에게서 또 보았던 것은 핍박과 고난이었습니다. 바울이 당했던 고난들은 셀 수도 없고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여기서는 단지 디모데가 목격했던 몇 가지 일들만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바울처럼 그렇게 완벽한 선생이 그토록 모진 핍박과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로서는 올바른 교리를 가지고 잘 가르치는데 왜 거짓 교사들이 저렇게 인기가 좋고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거스르는지 이해가 안 갈 때가 많지 않겠어요? 그리고 오히려 진리를 가르치는 자기를 향해서 대적하고 핍박하는 억울하지 않아요?
여기에 대해서 바울이 하는 말은 이렇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사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이 편지의 핵심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네가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네가 잘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더 많은 고난과 핍박이 와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1장에서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복음이 있는 곳에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직접 몸으로 체험한 것이기는 하지만, 원래 이 말씀을 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셔야 할 시간이 다가왔을 때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마지막으로 긴 설교를 하시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요 15:20). 진리이신 예수님 자신이 핍박을 당했다면 그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핍박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어요?
그럼 누가 핍박을 한다는 것입니까? 핍박을 한다는 것은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진리가 아닌 것이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진리와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을 핍박한다는 말이 되겠군요. 기독교가 처음 세상에 전파될 때 그저 기독교라는 이름만으로 무조건 핍박을 당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힘이 없었고 기독교를 대적하는 이방종교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과 핍박은 동일시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기독교가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를 점령하고 권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제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박해를 받게 되었어요. 핍박을 받던 기독교가 이제는 핍박을 하는 기독교가 되었단 말이지요. 과거에 핍박을 받으며 설움을 당하다가 이제 핍박을 받지 않게 되었고 마음껏 찬란한 기독교 문화를 꽃피우게 된 것까지는 좋은데, 힘을 갖게 되고 핍박하는 자리에 서게 되면서 기독교가 올바른 기독교의 길을 갈 수 있었을까요? 주님은 세상이 나를 미워한 것처럼 너희도 미워할 것이라고 하셨고, 바울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했는데,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단 말이지요. 그것을 기독교의 승리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기독교의 승리가 아니라 나태와 타락으로 가는 길이 되었습니다. 중세 암흑기의 수준 낮고 생명력 없는 기독교가 그래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박해와 고난 속에서 진짜 신앙의 열매가 열리게 됩니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들이 증거하고 있잖아요? 물론 지금도 믿음 때문에 탄압받고 고초를 겪어야 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고, 그분들에게 대단히 죄송스럽기도 하지만, 그분들이야말로 참된 믿음을 가꾸어 지켜나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박해를 당하면서도 이 믿음 지키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각오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과, 교회를 가든지 말든지 누가 간섭하는 사람도 없고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이 오히려 교회에 잘 좀 다니라는 잔소리를 들어가며 신앙생활하는 것 중에서 어떤 경우가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나타날 수 있겠어요? 사람의 심리는 참 이상해요. 하지 말라고 하면 기어이 하려고 하던 것도 하라고 하면 안 해요. 믿음도 그렇습니다. 예수 믿지 말라고 핍박하고 못살게 굴면 믿음이 좋아지는데, 예수 잘 믿으라고 하면 잘 안 믿는단 말이죠. 주기철 목사님은 일사각오의 신앙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믿는다는 거지요. 왜요? 그만큼 박해가 심했으니까요. 그랬기 때문에 그분들의 믿음이 별처럼 빛날 수 있었고 역사하는 힘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핍박은 그런 총이나 칼의 형태로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당장 우리의 삶 속에서도 참으로 경건하게 살려고 해 보세요. 얼마나 많은 도전과 방해가 있는지 몰라요. 우리에게 핍박이 없고 예수 믿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 주위에 얼마나 우리를 유혹하고 넘어뜨리려는 것들이 많습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그런 얘기를 해요. 나이 사십이면 불혹이라고 했는데, 정작 사십이 되고 보니 무슨 유혹이 그리 많은지 늘 이리 휩쓸리고 저리 혹하면서 살게 된다는 거예요.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산다는 것은 여러 가지 형태로 다가오는 유혹과 끊임없이 충돌하면서 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들과 싸운다는 것은 그만큼 불이익을 당해야 하고 손해도 보고 희생을 해야 한다는 것이거든요.
아직도 이 세상에는 악한 질서가 큰 세력을 떨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속이고 또 속기도 하지요. 그런 가운데서 우리가 그러한 악에 휩쓸리지 않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유형무형의 핍박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디모데가 신실하게 진리를 선포하면서 경건하고 살고자 할 때 핍박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어요?
그러나 우리는 그 핍박 속에서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는 줄을 알라고 하셨거든요. 그것은 우리가 주님과 같은 편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같은 편인데 겁날 게 뭐예요?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당한 몇 가지 핍박을 말하면서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서 당하는 핍박 속에 주님이 거기 함께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큰 위로입니까?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다시 한 번 강조해서 확인합니다. 그러니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내가 너를 가르쳤지 않느냐? 내가 너에게 모범을 보이지 않았느냐? 절대로 이단과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현혹되지 말고 진리 안에 굳게 서서 교회를 지켜라.
오늘날 교회를 섬기는 모든 청지기들과 성도들이 귀담아 듣고 실행해야 할 가르침입니다. 제대로 배웠으면 제대로 살아야지요. 디모데가 바울처럼 훌륭한 선생에게 잘 배웠으면서도 이리저리 휩쓸리고 헤맨다면 제대로 가르친 보람이 없지 않겠어요? 형제 자매 여러분,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는 이 사도의 말씀이 오늘 우리의 중심을 사로잡는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파도에 나뭇잎 흔들리듯 이리저리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올바로 배우고 진리에 바로 서서 흔들리지 않는, 참으로 확신한 일에 거하는 성도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