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로스차일드가의 금융 마피아 오트피낭스의 실체를 밝혀낸, 유대인 칼 폴라니.
홍기빈이 번역한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을 읽고 경제학자로서 전환점을 발견했다.
기존의 경제학에 불만이 많던 나로서는 행운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저자를 까먹은 ‘천문학 콘서트’는 ‘거대한 전환’과 함께 나의 眼目을 넓혀 주었다.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항상 불만이었다. 내가 이런 되지도 않는 것을 공부해야 하는지, 이걸로 먹고 살아야 하는지.
그러다가 칼 폴라니를 만났다. 그의 책, ‘거대한 전환’ 은 나의 운명이 되었다.
나의 불만이 해결 되었다.
일본에서 일본어 판을 읽었고, 한국에 돌아와 홍기빈이 번역한 책을 또 읽었다. 20번 정도는 읽었을 것이다.
좌/우 의 이론적 지표가 되었던, 아담 스미스와 칼 맑스는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자본주의 자유시장은 자기 조정이 스스로 가능하다는 아담 스미스의 유토피아를 여지 없이 깨뜨리고, 맑스의 국가의 통제만으로 해결 할 수 있다는 계획 경제의 허구성을 밝혀냈다.
칼 폴라니는 1886년 빈에서 헝가리계 유대인 아버지와 러시아계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평생 오스트리아인도 유대인도 아닌 헝가리인의 정체성을 지켰으며, 유대인답게 세계 곳곳을 떠돌았지만 헝가리 땅에 묻혔다.
그는 매우 유별난 집안에서 태어난 셈이었다. 아버지 미하이 폴라섹은 과격 학생운동가였다가 철도 엔지니어로, 다시 철도 사업가로 변신해 당대에 ‘헝가리의 철도왕’ 반열에 올랐지만 무리한 투자 끝에 파산한 풍운아였다. 어머니 세실리아 볼은 20대 여학생 시절에 과격 폭력 혁명단에 가입해 학교 실험실에서 폭탄을 만들었다고도 하고, 체포를 피해 오스트리아로 와서 사교계의 명물이 된 뒤 ‘백작부인 출신’이라는 소문을 달고 다녔지만 실제로는 유대교 랍비의 딸이었다.
아무튼 인생을 평범하게 살지 말 것! 기존의 권력에 순응하지 말고 저항과 진보의 삶을 불태울 것! 이것이 부부가 음과 양으로 자녀들에게 던져준 교훈이었다.
자기 조정이 가능하다는, 자본주의 자유 시장경제은 애초부터 현실에서 절대 이뤄질 수 없는 유토피아적인 개념으로 시장경제의 논리로 인하여 인간과 자연 그리고 화폐라는 내용물이 태초 생겨난 목적과 다르게 상품으로 규정될 경우, 사회가 파괴될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또한 자기조정 시장경제 못지 않게 국가나 중앙의 강력한 통제에 의한 사회주의에서의 계획경제에도 크게 반대했다.
화폐를 상품화하고 권력화 하면서 현재도 미국정부를 비롯한, 세계 자본주의 경제를 장악한, 같은 유대인 로스차일드가의 오트피낭스의 실체를 처음으로 밝혀낸 것도, 같은 유대인 칼 폴라니였다.
‘거대한 전환‘에서 폴라니는 맑스를 포함한 대부분의 경제사가들의 통념을 산산이 부수어버린다. 자본주의 시장은 태초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침략과 약탈의 산물이며, 자기 조정이 가능하다는, ‘보이지 않는 손’이 수요와 공급의 메커니즘에 따라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결정한다는 시장자본주의는 수천 년 동안 사회에 자연스레 뿌리내려 ‘내재되어’ 있던 본래의 시장을 파괴하고, 본래의 시장을 통제하고 있던 공동체 자체를 무너뜨린다고 했다.
자유방임주의와 금본위제는 제1차 세계대전 후 각국의 초인플레이션 등 경제 위기를 불러왔고, 이를 각국이 보호무역으로 해결하려다 보니 제2차 세계대전이 불가피해졌다는 것이다. 히틀러니 나치니 반유대주의니 하는 것은 변명에 불과할 뿐이었다.
노동, 화폐, 토지를 상품에서 해방해 공동체의 틀에 맡기는 일이 된다. 이런 폴라니의 처방은 사회주의적이면서도 역사유물론을 주장하는 좌파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그는 지하에서 웃고 있을 것이다.
반값 세일을 하는 닭을 사기 위해, 여자들과 드넓은 이마트 매장을 뛰어서 겨우 닭을 사서 웃고 있는 늙은 남성 퇴직자의 모습을.
그것은, 남성 중심의 전통의 사회로 복귀하자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시장을 파괴한 자본주의 시장을 비웃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