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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미/반일프레임에 갇혀서 불평 불만 병에 해메이다가 주사파들이 던져주는 거짖 정의와 평화의 떡밥을 받아 먹은 후로는 문재인우상화에 핏발이 선 좌파기독교인들이시여!
6.25의 전황을 한번 읽어보시고
비판과 판단은 가볍고도 쉬우나 이 나라는 피와 기도로 보전받은 자유의 땅이라는 점을 한 시라도 잊지 마시구려~~
1.개전 전야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며 조선은 해방되었다. (30분 만에 그어진)38선을 기준으로 소련군은 북쪽에, 미군은 남쪽에 주둔하였다. 그리고 1948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 9월 9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출범하였다.
-남침 준비
(스탈린)
(김일성)
1948년 12월, 모스크바에서는 인민군의 전력을 증강 시키기위한 북.중.소의 회담이 열렸다. 그리고 1949년 3월 5일의 김일성-스탈린 회담이후, 소련의 장비지원은 대폭 증가한다. 이 당시 남한을 무력으로 침공해 정복하자는 김일성의 제안이 있었으나, 스탈린은 “북한이 남한보다 절대적으로 우세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한 무력 침공은 안된다.‘며 거절하였다. 옹진반도 기습이나, 삼척 해방구을 건설하겠다는 대화도 오갔으나, 스탈린은 전부 거부하였다. 하지만 김일성은 계속해서 스탈린을 설득하였고, 소련, 중국과 방위조약을 채결한다,
그러던 1949년 10월 14일, 북한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옹진을 공격하였고, 스탈린은 이 사건에 대해서 전면전 준비중에 일을 그르치지 말라며 북한에 경고를 한다. 그리하여 1950년까지 38도선에서 포격전이나 소규모 전투는 자주 벌어졌지만, 대규모 교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국공내전이 끝나 공산당이 정권을 잡자, 김일성은 중국을 설득하기 시작했고, 북한이 어느정도 준비를 갖추게 되자, 1950년 1월 30일, 스탈린은 김일성의 방문을 허가한다. 실제로 방문한 것은 3월 30일이었다. 3월 30일의 회담에서 스탈린은 국제 정세가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며 48번의 거절 끝에 북한의 남침을 승인하였다. 김일성은 5월 13일에는 베이징을 방문하였고, 5월 15일, 마오쩌둥은 김일성과 남침을 자세히 의논하였다. 마오쩌둥은 김일성의 계획에 찬성하였고, 김일성은 중국의 지원과 동의를 얻게 되었다.
(총참모장 강건)
북한군 총참모부는 총참모장 강건과 소련군사고문단장 바실리에프를 주축으로하여 5월 29일에 침공 계획을 완성하였다. 6월 20일에는 인민군 각 부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달되었다.
1-국군 방어선 돌파, 주력 부대 섬멸, 3일안에 서울 점령
2-전과확대, 국군 예비대 섬멸
3-잔적 소탕. 남해안 진출
인민군은 6월 23일까지 모든 준비를 마쳤고, 6월 12일부터 인민군은 훈련을 가장해 38선 인근으로 이동하였다. 24일에는 해병대병력을 실은 인민군 수송선이 동해안으로 출항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남한정부에 평화통일안을 제의하며 연막작전을 펼쳤다.
6월 23일, 국군은 비상경계령을 해제하였고, 고위 장교들 역시 연회 등에 참석하였다. 국군은 이상태에서 전쟁에 돌입하게된다.
*1950년 1월 12일에 그어진 애치슨 라인이 남침을 유도했다는 음모론이 존재하지만, 애치슨 라인은 라인밖의 나라를 포기하겠다는 의미로 그어진 것은 아니다. 애초 이 음모론은 학계에서는 구석기 시대의 낡은 학설 취급받으니, 진지하게 믿을 필요는 없다.
**미군이 대한민국 정부에 무기를 공급해주지 않은 이유는 정부의 북진통일 야욕도 단단히 한몫했다,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는 국가에 무기를 함부로 줄수는 없었을 것이다.
2.개전
(인민군의 포격)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 포병대가 일제 포격을 개시했다. 국군은 처음에는 일상적인 포격으로 생각하고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으나, 인민군의 남침이 가속화되자 비상동원령을 내린다. 그러나 외박중인 병사들의 귀환은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거기다 최전방의 국군 진지는 인민군의 공격으로 궤멸당하고 있는 상태였다. 또한 북한 공군이 서울상공에 나타나 역과 통신소등에 공격을 가하였다. 인민군 해병대역시 동해안에 상륙하여 공격을 가했다. 11시경에 북한은 “남측이 우리의 평화제안을 거부하고 우리를 공격하여 아군(인민군)이 반격에 나섰다.”라는 거짓방송을 내보낸다.
-옹진 반도 전투
(17연대장 백인엽 대령)
인민군의 남침이 시작되자 옹진반도에 주둔하고있던 17연대는 격령하게 저항하였으나 양원과 강령이 인민군에 점령되어 전선이 양분되자, 6월 26일 해상을 통해 인천으로 철수하였다. 송호림 대령이 이끄는 2대대는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전황이 악화되자 군산으로 철수하였다.
-개성-문산 전투
(1사단장 백선엽 소장)
이곳을 수비하고 있던 것은 백선엽이 지휘하는 국군 1사단이었다(11,12,13연대 배속). 인민군의 습격으로 12연대가 분쇄되자, 임진강 철교 폭파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했다. 6월 26일. 인민군이 임진강을 건너 국군과 교전을 벌였고, 11연대가 반격을 가해 인민군을 잠깐 밀어내지만 ,측방에 주둔하던 7사단이 철수하면서 11연대는 임진강에서 철수하고, 13연대가 방어하던 파평산의 주저항 진지도 무너지자, 사단은 봉일천 인근까지 철수하였다.
-동두천-의정부 전투
(7사단장 유재흥 소장)
국군 7사단는 예하의 3연대가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 변경되고, 대신 25연대가 새로 배속되었지만, 25연대의 도착이 늦어져 사단예비대가 없는 상황이었다. 인민군이 공격하자 예하의 1연대는 병력, 장비의 열세에도 인민군에 맞서 인민군의 진격을 저지하지만, 결국에는 열세에 몰려 오후 10시에 덕정으로 철수했다. 포천 방면에는 9연대가 배치되어 방어전을 펼쳤고, 인민군을 잠시 저지하지만 결국은 인민군 전차대의 공격에 밀려 연대 주력이 퇴계원으로 철수한다.
25일, 포천이 인민군에게 점령되고. 동두천시내에 인민군이 진입하면서 의정부가 위험해지자 채병덕 참모장은 ‘의정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사수해야 한다.’며 후방부대를 집결해 의정부에서 인민군을 저지하려했다. 또한 채병덕은 7사단과 2사단에 동두천과 포천을 향해 반격을 가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고 뜻밖에도 7사단이 동두천을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2사단의 포천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의정부가 인민군의 손에 떨어지면서 7사단의 퇴로가 차단되어 분산.철수하였다. 국군은 창동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춘천-홍천 전투
(6사단장 김종오 소장)
(홍천 전투 전황)
(심일 소령)
국군 6사단은 7연대를 춘천, 2연대를 홍천부근에 배치하고. 예비대인 19연대를 원주에 배치하였다. 인민군은 춘천지역에 2군단을 투입하였고, 6월 25일 개전 당일에 6사단전방 경계진지를 돌파하여 국군 7연대가 배치된 옥산포로 자주포를 앞세워 공격을 해왔다. 국군 7연대 대전차포 소대장 심일 소위는 육탄공격으로 인민군 자주포 2대를 파괴하면서 국군의 사기를 드높였다.(전공 조작 논란이 있었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다만, 심일과 같이 활약했다던 특공대 5인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국군의 반격을 받아 인민군의 소양강 도하는 실패하였다.
6사단은 19연대의 증원을 받아 소양강-봉의산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3일간 인민군을 저지하고 춘천외곽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화천-가평의 아군도 3일간 인민군의 진격을 저지한뒤 금곡으로 철수하였다.
홍천에서도 국군 2연대는 어론리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인민군의 진격을 저지하였으며, 말고개 일대에서로 철수해 방어선을 구축한 2연대는 인민군의 4차례에 걸친 공격을 저지하고 홍천방면으로 철수하였다. 인민군이 홍천을 점령한 것은 6월 30일이 되어서였다.
-동부전선
(8사단장 이성가 소장)
동해안의 방어는 8사단이 맡았다. 10연대는 38선 인근을 방어하고, 21연대는 예비로써 삼척에 주둔했다. 인민군이 6월 25일 새벽에 주문진에 상륙하여 남하하기 시작했다. 10연대는 인민군을 화상천에서 저지하고자 했으나 실패해 연곡천으로 철수하였다. 8사단은 27일까지 강릉을 방어해냈고, 대관령으로 철수하였다. 8사단은 강릉으로 공세를 시도하였다가, 철수명령이 하달되자 제천방면으로 철수하였다.
-대한해협 해전
(백두산함)
6월 25일 새벽, 백두산함은 동해안 묵호 근에서 적의함선을 저지.격침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오후8시, 백두산함은 국적불명의 선박을 발견하고 신호등을 비추었으나 응답이 없자 가까이 접근하였다, 다수의 무장병력이 탑승해 있는 것을 발견한 백두산함은 인민군 소속 함선임을 직감. 해군본부에 보고하고 기관총으로 위협사격을 하였다. 적선에서 반격해오자 백두산함은 함포를 발사하며 교전에 돌입했다. 6월 26일 새벽 1시경. 적함은 격침되었다. 전날의 옥계해전 에서도 대한민국 해군은 인민군 수송선단을 공격해 1척을 격침시켰다.
3.서울 함락
(이승만 대통령)
6월 26일. 의정부가 인민군에게 점령당하자 국군 수뇌부는 ‘서울 고수’를 결정하였고, 채병덕은 유재흥을 의정부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창동-우이동에서 인민군을 저지하고 반격을 준비하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1사단이 봉일천으로 철수하고, 인민군이 김포반도 도하를 시도하자 국군 수뇌부는 비상회의를 열어 철수문제, 정부 이동들을 논의 하였다. 27일에 이승만이 경무대에서 빠져나오고 오전 6시에 천도를 발표하자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시민들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면서 서울 시내는 매우 혼잡하였다.
(채병덕 소장)
(신성모 장관)
6월 27일 10시경에 창동의 국군 저지선이 무너지자 채병덕은 신성모 장관으로부터 서울 철수를 허가받고 해군.공군 본부를 수원, 육군본부를 시흥 보병학교로 옮겼다.
국군은 미아리-회기동을 서울의 최후방어선으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있었다. 그러나 27일 오후 7시에 인민군이 전차를 동원해 공세를 가해왔고, 국군은 저항하였으나 결국 28일 새벽에 미아리방어선이 돌파 되면서 서울의 마지막 방어선이 무너졌다.
또한 27일에 인민군이 김포반도를 도하하였고, 국군은 운유산에 방어진지를 구축해 저항했으나 결국 28일에 돌파당하고 김포로 철수한다.
(한강 인도교 폭파)
인민군이 미아리 고개를 돌파했다는 소식을 접한 채병덕은 최창식 공병감에게 한강철교 폭파를 명령하였고, 6월 28일 새벽에 한강인도교를 포함해 4개의 다리를 폭파하였다. 그러나 폭파가 너무 이른시기에 이루어져 아직 철수하지 못한 국군의 퇴로가 차단되었고, 다리를 건너던 차량과 피란민들도 폭발에 휩쓸려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다. 최창식 공병감은 이 일로 군사재판을 받았고. 1950년 9월 21일, 부산에서 처형당했다. 최창식 공병감은 1962년에 무죄판결을 받아 복권되었다.(소위 이승만의 북진사기방송사건으로 비화된 사건 관련 서울철수 상황입니다)
인민군은 6월 28일, 서울의 중심부에 진입하였으며, 인민군 주력은 6월 29일에 본격적으로 한강 도하를 시작하였다, 6월 30일에는 서빙고 방면의 인민군이 한강도하를 시도하다가 국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7월 1일에는 인민군의 마포 도하가 저지되었고, 7월 3일에는 여의도로 진격해오는 인민군을 5번이나 격퇴해 내었다. 하지만 7월 3일에 인민군이 부서진 철교를 수리해서 전차가 건너오자 국군 방어선은 붕괴되었고, 영등포와 노량진이 피탈된다. 게다가 김포의 인민군도 서울 시내로 진입하면서 이에 김홍일은 안양으로 철수할 것을 지시하였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정치범들을 석방하였고, 국유재산과 자본가들의 재산을 압류했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될때까지 인민군은 서울을 압제로써 다스렸다.
4.UN군 참전
-UN의 참전결의
(트루먼 대통령)
(트리그브 리 총장)
(UN 안전보장이사회.)
한국에서의 전쟁 발발은 6월 25일 9시 30분에 미국에 보고되었다. 또한 무초 대사의 보고서가 미국에 전달되면서, 미 국무부는 북한의 침공을 국방부와 논의하고, UN에 북한의 침공에 대한 제재방안을 제기하기로 하였다. UN사무총장 리에게 이것이 통고되었고, 6월 26일에 UN안전보장이사회가 긴급개최되었고, 북한의 침략중단과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찬-9, 반-0, 기-1(유고슬라비아)로 가결되었다.(소련 대표가 불참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소련은 대만이 상임이사국인것에 대한 반발로 회의참석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북한이 이 6.26 결의안을 따르지 않을것이라 판단한 미국은 안전보장이사회에 이 안건을 건의하기로 하였다. 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28일 개최되었고, ‘북한의 침략을 격퇴하기위해 필요한 물자를 한국에 제공한다.‘는 안건이 찬-7, 반-1(유고슬라비아), 기-2(인도, 이집트)로 가결되었고. 미국은 이 결의안에 따라 7월 1일에 미 지상군을 한국전쟁에 참전시킨다. 뒤를 이어 결의에 의거해 파병을 결정함 16개국과, 의료지원 5개국도 참전한다.
-작전지휘권 통합과 작전지휘권 이양
(UN기를 수여받는 맥아더)
(미 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
7월 7일. UN안보리 3차 결의에 의거하여 UN군 통합군사령부가 발족하였다. 이 결의가 있은 후 트루먼 미 대통령은 UN군 최고 사령관으로 당시 극동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임명하였다. 맥아더에게는 7월 14일, UN기가 수여되었다. 같은날, 이승만 대통령이 국군 작전지휘권을 이양하겠다는 의향을 표명했고, 이날부로 국군의 작전지휘권이 맥아더에게 넘어갔다. 17일에는 미8군 사령관 워커에게 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재이양되었다.
-미 지상군 참전, 오산 전투.
(스미스 중령)
(오산 전투 전황)
스미스 중령이 지휘하는 미군의 선발대(24사단 소속, 일명 스미스 특임대.)가 7월 1일 부산에 상륙하였고, 7월 2일경에 대전에 도착하였다. 스미스는 처치장군의 지시를 따라 평택-안성선을 중심으로 전개하였고(정일권과의 작전협의를 바탕으로 함.), 7월 5일에는 오산 죽미령으로 이동헤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하지만 미군의 방어선이 완성되지 못한사이에 인민군이 전차를 앞세워 공격을 해왔다. 인민군 전차 8대를 확인한 스미스는 로켓포 공격을 실시해 전차 2대를 멈추게 하였지만, 뒤를 이어 33대의 전차가 남하해 보병진지를 돌파하고 오산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스미스 부대는 휘의 인민군을 저지하기위해 방어진지를 강화했고, 인민군 보병대가 접근하자 사격을 개시하였다. 이내 인민군과 미군간의 교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한시간 정도가 지나자 스미스 부대는 인민군에 포위될 위험에 처했고, 기상 악화로 항공지원마저 힘들어지자 철수를 결정. 안성을 경유해 7월 6일에 천안에 도착한다.
(마틴 대령)
미 34연대는 평택-안성선에 저지선을 구축하였으나, 인민군 기갑부대의 공격을 받아 저지선을 포기한채 천안으로 철수하였다. 이에 7월 7일, 34연대장 러브래스는 해임되고, 로버트 마틴이 새 연대장으로 부임하지만, 마틴은 연대장으로 취임한지 하루만에 천안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동락리 전투
국군 6사단 7연대 3대대는 인민군에게 포위될 것을 우려하여 음성으로 철수하였고, 연대장이 3대대장을 질책하자 3대대는 동락리로 이동하였다, 그러던중 인민군과 맞닥뜨린 3대대는 인민군과 교전을 벌였고, 여기에 국군 2대대도 가세, 인민군을 공격하였다. 2대대까지 가세하자 인민군은 도주하였고, 국군은 수많은 장비를 노획했다, 얼마후 인민국이 반격을 해오자 국군은 동락리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4.금강-소백산맥 지연전
7월 8일, 미34연대가 천안전투에서 패배하고, 미12연대가 전의-조치원 전투에서 패배하자 미24사단은 딘 소장의 결정에 따라 7월 12일에 금강-소백산맥으로 철수하여 방어선을 구축한다. 연합군은 이 선에서 인민군을 저지하고자 시도한다.
1) 금강선 지연작전
-공주-대평리 전투
(금강 전투 전황)
7월 12일, 미군은 금강을 건넌 후 금강 하류의 나룻터에 있는 나룻배들을 모두 파괴하고. 금강철교를 폭파시켰다. 13일 새벽에 신탄진-공주간의 다리를 폭파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15일에는 신탄진의 철교가 폭파처리된다.
(폭파된 금강교)
14일 아침, 인민군은 금강 건너편의 미군을 향해 포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 포격에 의한 피해는 거의 없었다. 얼마후 인민군은 작은 선박을 타고 금강을 도하하기 시작하였다. 인민군의 포격이 거세지자 웅진인근의 미군 L중대는 포위를 우려해 철수한다. L중대장 스티스는 독단적인 철수로 인해 보직해임되었다.
14일, 인민군은 금강도하에 성공했고. 방어선 후방의 미63포병대대는 인민군에게 피습당한다, 후방 포병대가 습격을 당하자 공주를 방어하던 34연대의 방어선은 와해되기 시작했고, 34연대는 15일, 논산으로 철수한다. 교두보를 확보한 인민군은 15일 저녁에 전차등의 중장비 도하가 완료되자 논산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한편 대평리에는 19연대가 배치되어있었는데,19연대는 방어준비를 할 여유가 없어 대평리 일대에만 병력을 집중 배치해두었다, 7월 14일에는 34연대와 달리 큰 교전을 벌이지는 않았으나, 인민군 전차대가 엄폐호를 구축하고 공격을 가해왔다. 그러던중 공주가 인민군에 점령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15일에 인민군이 19연대를 압박해오기 시작하자 연대는 예비대를 측방에 투입하였다. 또한 인민군이 전차를 동원해 도하를 시도하자 항공지원을 받아 격퇴하였고, 인민군 보병들의 도하도 두 번이나 격퇴하였다. 하지만 16일, 인민군은 강을 도하하는데 성공하였고. 미군은 반격을 가해 일부 인민군을 다시 밀어내는데 성공하였지만. 이미 방어진지 후방으로 많은 인민군이 침입한 후였다,
결국 연대의 보급로가 인민군에 의해 차단되었다. 연대는 보급로를 돌파하고 철수하고자 공격대까지 편성하였으나, 결국에는 실패하고 작게 분산되어 산악로로 철수하였다. 미군이 공주-대평리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금강 방어선은 돌파되었고, 인민군과 미군은 대전에서의 전투에 돌입하게 된다.
-대전 전투
(대전 전투 전황)
대평리를 점령한 인민군은 중장비의 도하를 기다렸다가 19일, 유성으로 진출하였고, 인민군의 야크기가 대전의 보급로와 지휘소, 비행장을 공습 하면서 대전전투가 시작되었다. 야크기는 미군기의 출격으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미군기는 인민군의 전차대와 집결지등에도 공격을 가했다. 논산가도에서는 인민군의 공격을 저지하였지만, 유성에서는 인민군의 공격이 점점 거세졌고. 유성의 1대대장은 철수를 건의 하였으나, 19연대장은 거절하였고. 금산가도와 옥천가도에 인민군이 진입하였다는 보고를 접했으나, 인민군의 후방교란에 지나지 않을것이라 판단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19일 밤에도 1대대장은 인민군이 대전을 우회했을거라 판단해 철수를 건의했으나 이번에도 허사였다. 20일이 거의 다 되어서야 인근에 인민군이 출현했다는 소식을 접한 연대장이 정찰대를 파견하였지만, 이미 옥천가도와 금산가도가 인민군에 점령된 뒤였다.
(미 24사단장 딘 소장)
20일 새벽에 인민군은 1대대 진지를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1대대는 남쪽으로 철수한다, 이미 인민군은 대전시내로 진입하고있었다. 이런 상황임에도 통신이 두절되어 34연대장과 24사단장은 악화된 전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대전시내에 인민군의 전차가 출현하였고, 사단장이 직접 로켓포를 들고 전차를 격파하기까지 하였다, 악화된 전황을 파악한 24사단장은 밤이 되기전에 서둘러 철수할 것을 지시하였으나. 이미 후방의 퇴로는 인민군들에 의해 차단된 상황이었다.
이에 미군은 세천 터널을 비롯한 인민군 전선을 돌파하여 철수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했고, 결국 소부대 단위로 흩어져 산길을 따라 영동으로 후퇴해야했다. 이 과정에서 24사단장 딘 소장이 실종되었다.(부상병들의 물을 뜨러갔다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의식을 잃었고.정신을 차린후 36일간 방황하다가 진안에서 포로가 되었다.)
(인민군 대전 입성)
금강방어선이 돌파당하자 워커 장군은 미 25사단을 화령장-상주에 전개하고, 미 1기병사단을 영동-김천선에 전개한다.
-영동-황간 전투
대전을 점령한 인민군은 21일에는 부대정비를 하였고, 22일부터 활동을 시작하였다. 미군은 영동에서 인민군에게 포격을 가하며 출혈을 강요하였으나, 인민군은 계속해서 미군을 압박하였고. 미군은 영동에서 철수하였다. 인민군이 25일, 영동에 진입하였다.
황간에서는 인민군이 전차를 앞세워 공격을 해왔으나. 미군을 이를 격퇴해내었고, 포위를 기도하였던 인민군의 공격도 막아내었다.그러니 27일에 인민군이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오자 결국 김천방면으로 철수하였다.
-김천 전투
(미 1기병사단장 호바트 게이 소장)
황간에서 철수한 1기병사단은 김천에서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29일 아침, 사단장은 지례방향 도로를 정찰하여 인민구의 동향을 관찰하도록 하였고, 도중에 경찰들로부터 인민군 대대가 진입했다는 소식을 접한 수색대는 지례에서 인민군과 교전하였다가 철수한다, 인민군이 지례에 진입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사단장은 두 개 대대를 지례방면으로 보내 인민군을 저지하려하지만, 인민군은 후방으로 침투해 교란작전을 벌이며 미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미군은 강력한 화력으로 인민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고, 7월 31일 하루에만도 항공공격으로 인민군 전차 13대를 격파하였고, 추가적으로 6대의 전차를 격파하였다.
8월 1일, 사단은 철수하였고. 3일에는 왜관의 철교와 인도교를 파괴하였다.
2) 소백산맥선 지연작전
-화령장 전투
국군 17연대는 화령장 방면의 인민군을 저지하라는 지시를 받고 화령장으로 이동하였다, 인민군의 움직임을 확인한 국군은 휴식을 취하는 인민군을 매복 공격하여 큰 타격을 주었으며, 다음날에는 인민군의 문서를 노획하여 인민군이 화령장 북쪽을 통과해 상주로 진입할것이라는 정보를 접했다, 국군은 동관리주변에 매복하였고. 7월 21일, 진격해오는 인민군 대부대를 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국군은 7월 24일, 작전지역을 미군에 인계하고 철수하라는 명령에 따라 화령장 부근에서 철수하였다.
함창 전투
7월 26일, 국군 1사단 13연대는 함창에 도착하자 국군 5연대로부터 작전 지역을 인수받았다, 주민들과 정찰대의 보고로 인민군의 움직임을 판단한 13연대는 인민군이 진입중인 992도로와 국사봉에 병력을 배치하였다, 28일. 국군은 인민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29일에는 인민군과 포격을 주고받았다. 8월 1일, 국군은 낙동강방어선 형성을 위해 낙동강선으로 철수하였다.
-이화령-문경 전투
국군 6사단은 문경인근의 조령과 이화령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기로 결정하고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7월 14일. 인민군이 본격적으로 이화령으로 공격을 가해오자, 국군과 인민구간에 백병전이 벌어진다. 국군 1대대가 투입되면서 인민군은 격퇴되었다. 그러나 7월 15일, 조령이 인민군에 점령되고, 7월 16일에 인민군이 총공세를 가하면서 국군 방어진지가 돌파되고, 문경은 피탈된다.
-안동 전투
죽령-양주 전투이후 양주를 피탈당한 국군은 안동으로 철수하여 방어선을 구축한다. 7월 30일, 인민군이 공격을 개시하자, 국군의 방어선은 돌파되었고. 국군은 안동 최후의 방어선인 오산동 일대까지 철수하였다, 한편. 예천에서는 수도사단 18연대가 인민군과 격전을 벌였고, 함창방면으로 철수하면서 이날 예창이 함락되었다. 31일에는 인민군 전차대의 공격을 받아 방어선이 돌파당했으나, UN군의 항공지원에 힘입어 다시 방어선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낙동강 방어선 구축을 위해 철수명령이 내려지자 국군은 안동에서 철수하였다.
8월 1일, 국군은 본격적으로 후퇴를 시작하지만. 교량이 폭파되고 인민군의 포위망을 돌파하느라 다수의 사상자를 내었다.
3) 동해안
인민군은 동해안지구에 인민군 5사단과 상륙부대를 투입해 부산으로 진출해나가고 있었다. 인민군은 울진과 평해까지 진격하였지만 UN해군의 공격에 남진에 큰 차질을 빚게된다.
-영덕 전투
(영덕전투 전황)
울진과 평해를 점령한 인민군은 7월 18일, 영덕북부에 진출하였다. 인민군은 19일에 본격적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영덕을 점령하였고, 국군은 UN군의 지원을 받아 20일에 반격을 개시. 21일에 영덕을 탈환하고 방어선을 구축하지만, 인민군이 방어진지를 우회해서 후방을 공격하자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23일, 영덕은 다시 인민군의 손에 넘어갔고. 국군은 병력을 충원하여 다시 영덕 공격에 나선다. 29일에 국군은 영덕을 다시 탈환하는데 성공했고. 8월 2일까지 영덕을 사수하는데 성공하였다.
-영덕-포항 전투
(민부대장 민기식)
국군이 영덕에서 인민군을 저지하고 있었지만, 안동으로 진입한 인민군이 8월 10일. 흥해를 점령하면서 영덕의 국군의 퇴로가 차단되고, 포항이 함락될 위기에 놓였다. 8월 11일. 인민군이 포항시내로 진입하자 학도의용군은 포항여중에 진입한 인민군과 4시간의 격전을 벌였다. 이 사이 영덕의 국군 3사단은 영덕에서 철수하였다. 포항이 인민군에게 피탈되자 8월 15일, 예비대인 민부대가 포항탈환에 나섰고, 포위된 국군3사단을 해상으로 철수킨다. 민부대는 8월 18일. 포항을 탈환하였고, 다음날 3사단과 임무를 교대하였다. 3사단은 8월 31일까지 포항에서 인민군과 교전한다.
4) 호남 전역
-장항-군산-이리 전투
(고길훈)
7월 16일, 금강방어선이 돌파되고, 인민군은 강경-장항선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날 제주도에 주둔하던 해병대(지휘관 고길훈)가 군산에 상륙하였다. 7월 17일. 강경이 점령되고 인민군은 계속남진한다. 해병대는 인민군이 장항인근에서 남하하고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산항의 안전을 도모하기위해 인민군의 남진을 저지키로 한다.
장항에 상륙한 해병대는 남진하는 인민군을 선제공격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인민군의 역습과 탄약 소진으로 공격은 6시간만에 좌절된다. 해병대는 해양대학으로 철수하여 그곳에서 부대를 재편성했다. 하지만 인민군 포로로부터 인민군의 다음목표가 군산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18일, 인민군이 신성리에서 금강을 도하할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해병대는 1개중대를 이리, 2개 중대를 군산에 배치하여 인민군과 대치하며 교전하다가 19일에 선박을타고 철수했다. 이날 군산은 점령되었다.
-하동-진주 전투
인민군은 거창-안의 방면으로 진출하여 대구를 위협하고, 하동-진주 방면에서 마산을 점령하려고 했다. 이에 미 8군 사령관 워커는 미 24사단을 진주로 진출시키고. 국군역시 통합사령부를 편성해 방어작전을 수행하도록 결정하였다. 그럼에도 이부분을 방어하는 연합군의 방어태세는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지휘를 맡은 채병덕은 7월 26일, 하동으로 향했다. 하동으로 향하던 채병덕은 쇠고개마루에서 하동탈환작전을 논의하고, 병사들의 개인호 구축을 독려하던중 1개대대규모의 병사들을 발견하였다, 이들은 국군군복을 입고있지않았기에 피아식별이 되지않아 연합군병사들은 이들의 접근을 보고만 있었다. 이들이 가까이 접근하자 채병덕은 ‘귀관들은 아군인가? 적군인가?’라고 소리쳤고. 1개 대대규모의 병사들을 사격을 가했다, 채병덕은 그 자리에서 전사했고. 연합군 참모들도 부상당하거나 흩어졌다.
연합군은 인민군과 교전을 벌였지만, 결국 열세에 몰려 분산 철수 하였고. 쇠고개는 인민군에 점령된다.
미 19연대장은 하동을 방어하기 힘들것이라 판단하고, 7월 28일에 주력부대를 진주에 집결시켰다. 29일 새벽에는 처음으로 퍼싱전차 3대가 배치되었다.
29일, 인민군은 하동-진주간의 도로를 따라 진주로 진격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합군의 매복과 항공공격으로 이날 인민군의 공격은 좌절되었고, 다음날 주력부대를 동원해 공격에 나섰다. 연합군은 저항하였으나 밀려나 진주 외곽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31일, 인민군은 공격을 재개하였고, 주저항선이 무너지자 연합군은 무촌리 방면으로 철수한다. 퍼싱전차 역시 유기된 채로 인민군에 노획되었다. 진주가 함락되자 연합군은 마산측선으로 가는 도로를 차단하였다.
5.낙동강 방어선
(낙동강 방어선)
UN군은 7월 한달간 지연작전을 펼치고, 7월 17일경, 미 8군은사령관 워커는 낙동강의 지리적 특징을 이용해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써 구상하였다 깎아지른 절벽이 많아 방어에는 용이하지만 공격하기에는 불리했던 지형이었던 것이다. 워커는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구상하고, 이곳에서 인민군을 저지한뒤 반격을 펴기로 계획하였다. 최초 방어선은 총 길이 240km에 이르는 방어선이었으나, 8월 4일부로 방어 정면이 넓어 방어선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 다부동-포항을 연결해 총 길이 200km로 축소 조정되었다. 좌측의 방어선은 X선, 위쪽의 방어선은 Y선이라 명명되었다.
방어선이 설정되자 낙동강 방어선으로의 철수가 이루어졌고. 8월 4일까지 낙동강의 교량 대부분이 폭파처리되었다. 한편 인민군은 8월 15일까지 전쟁을 끝내겠다는 생각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향한 총공세를 개시한다. 이것이 8월 공세이다.
1) 인민군의 8월 공세
-마산 전투
(인민군 6사단장 방호산)
미군은 인민군 6사단이 마산을 거쳐 부산으로 진격할 계획이라고 판단하여 미 2사단을 마산방면에 배치하였다. 8월 3일, 마산서북방에서 인민군과 미군이 충돌하였다. 인민군은 진동리에 전투부대가 없다고 판단하여 진동리를 공격하였으나, 인민군의 생각과는 달리 미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인민군은 진동리에서 큰 피해를 입는다. 국군 해병대역시 진동리에 투입되었고, 8월 6일, 해병대는 인민군에 점령된 야반산을 탈취하는데 성공하였다. 도한 마산-진동리간 도로도 해병대에 의해 점령되면서, 인민군의 마산 진출은 좌절되었다.
그리고 8월 7일, 연합군은 반격을 시작하였다. 진주를 탈환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인민군의 거센 저항을 만나 포위될 위기에 처하고, 포항의 전황도 악화되자 작전은 중단되고. 연합군은 마산방면으로 철수하였다.
-창녕-영산 전투
창녕-영산의 낙동강은 굽은 형태로, 반원모양의 돌출부처럼 보였다. 미군은 이 돌출부를‘낙동강 벌지’라고 불렀다. 이 ‘낙동강 벌지’는 미 24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24사단은 아직 재편성되지 않아 상당히 빈약한 상태였다. 인민군은 이 돌출부를 도하해 밀양으로의 진입을 기도했다. 인민군은 8월 3일, 낙동강 도하준비를 완료하였고, 8월 5일부터 도하공격을 시작하였다. 이 도하작전으로 미34연대는 클로버고지를 빼앗겼지만, 낙동강 진지를 확보하는데에는 성공하였다. 그리고 열흘간 클로버 고지-어봉리 능선에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8월 10일, 미군은 힐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총공격을 지시한다. 그러나 인민군의 선제 기습을 받아 공격계획은 취소되었고, 인민군은 주저항선을 돌파하여 밀양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미 27연대와 미 23연대가 투입되어 인민군의 진격은 저지되고, 힐 특임대는 8월 14일 공격을 재개한다. 하지만 힐 특임대는 큰 피해를 입었고, 철수한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미군은 해병대를 투입하였고. 미군은 화력지원을 받으며 반격을 가해 8월 17일 클로버 고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하였고, 8월 18일에는 어봉리 능선을 탈환한다. 이날 저녁 인민군은 낙동강을 건너 철수하였다.
-다부동 전투
당초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겠다는 계획이 어려워졌다고 판단한 인민군은 8월 15일을 ‘대구 점영의 날’로 정하고. 다부동지역에서 대규모 공세를 개시하였다. 김일성 역시 직접 방문하여 인민군 병사들을 독려하였다. 곳곳에서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고, 8월 15일은 대구 최대의 위기였다. 왜관 정면의 인민군에 대한 별다른 대비책이 없었던 미군은 왜관의 인민군 집결지에 대규모 폭격을 감행하였고, 이날 동원된 B-29기만 98대였다. 하지만 공중폭격의 성과가 육안으로 확인되지 않아 2차 폭격은 취소되었지만. 인민군 포로의 진술에 따르면 1차폭격으로 인민군은 큰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확인 되었다.
(왜관 폭격)
그러나 이런 대규모 폭격에도 인민군의 대구 공격은 잠잠해지지 않았다. 인민군은 다부동 서쪽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군위와 의성 방면으로 공격하여 다부동을 포위하려고 하였다. 이에 미군은 국군1사단 단독으로 다부동을 방어하기 힘들것이라 판단. 미 27연대를 다부동에 투입하였다.
그러던 18일. 인민군의 박격포탄이 대구역에 떨어지면서 대구 시내는 대혼란에 빠졌다. 혼란은 진정되었지만, 인민군을 대구지역에서 축출해야 한다는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졌다.
국군은 8월 19일, 역습을 감행하지만 인민군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고, 20일에는 전선이 잠깐 소강상태에 놓이게 된다, 다부동 돌파가 어렵다고 판단한 인민군이 유학산 일대의 15사단을 영천방면으로 전환시켰던 것이다. 전선이 안정되자 연합군은 전차를 투입하여 반격을 실시하고자하였다. 하지만 21일, 인민군이 먼저 공격을 해왔다. 인민군은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우고 진격을 해왔고, 미군은 화력을 집중해 보병과 전차를 분리해내고, 전차를 동원해 인민군과 전차전에 돌입하였다. 다부동의 좁은 골목에서는 미군과 인민군의 전차가 5시간동안 포격전을 벌였고, 인민군 전차 9대와 자주포 4문, 다수의 차량이 격파되었다. 이 전차전을 지켜보던 미군들은 전차의 포탄이 인민군의 전차를 향해 곧장 날아가는 모습이 볼링공이 핀을 향해 미끄러져 나가는 모습과 비슷하고, 포탄이 바위에 부딪히며 나는 소리가 마치 볼링공이 핀을 맞출 때 나는 소리와 비슷하다고 하여 ‘볼링 앨리(볼링장) 전투‘라고 불렀다.
(볼링앨리 전차전)
하지만 다부동 전선은 아직 불안했다. 7월 23일, 인민군이 국군이 점령중이던 741고지를 점령하고, 가산까지 진출하여 지휘소를 공격하기까지 했다. 이에 연합군은 볼링 앨리 계곡에서 반격을 개시,신주막까지 진출하였고. 기갑연대와 연합하여 가산 일대의 인민군을 격퇴하고 741고지를 재탈환 하였다. 이로써 다부동 동측방의 위협은 사라졌다.
다부동이 안정화되고 미 2사단이 미국 본토로부터 증원되자 미군 방어정면을 넓히고 국군 방어정면을 좁혀 다부동을 미군이 담당하도록 전선을 조정하였다.
27일. 국군 수색정찰대는 인민군 사령부를 급습하여 인민군 군관 2명을 비롯. 5명을 생포하였다, 다부동 전선이 안정되자 인민군 8월 공세는 기세가 꺾였다.
-외전:해병대의 통영 상륙
(김성은)
8월 17일. 인민군이 통영시내로 침입해 들어오자 김성은의 해병대는 거제도에 상륙하여 통영으로부터 진입하는 인민군을 저지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해병대는 거제도에 상륙하였다가, 통영에 상륙하는 것이 더 이득이 될것이라 판단. 화력지원을 받으며 통영에 상륙하였다. 해병대는 8월 18일. 원문고개인근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매일봉을 점령하였다. 인민군은 저항하였으나 해병대에 격퇴되었고. 인민군은 원문고개 방어선을 돌파하기위해 8월 31일까지 공세를 감행하지만 매번 격퇴당했다. 이 전투에서 국군 해병대가 ‘귀신잡는 해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 인민군의 9월 공세
인민군의 8월 공세가 대구에 진출하지도, 낙동강을 돌파하지도 못하고 좌절되자, 인민군은 최후 총공격인 9월 공세를 준비하였다. 하지만 인민군은 점차 한계에 다다르기 시작했다, 연합군의 공습으로 인민군의 군수시설과 보급로가 파괴된데 이어 장비의 보충등도 이루어지지 못했다(대표적으로 7월 18일의 원산 정유소 공습.). 또한 인민군 전선의 보급을 위해 30만명의 주민을 강제 동원하여 1인당 20kg에 달하는 보급품을 약 20-30km씩 릴레이식으로 날랐다. 이렇다보니 인민군의 보급률은 최악으로 치달았고, 8월 15일의 보급률은 7월 15일의 보급률에 비해 4분의 1밖에 미치지 못했다.
(원산정유공장 폭격)
병력역시 점령지에서 ‘의용군’이라는 명목으로 강제 징병.징용하였고, 어린이들까지 징집해 전투에 투입하였다. 때문에 인민군의 전투력은 격감하였고, 사기또한 낮았다.
-왜관-다부동 전투
인민군은 9월 2일부터 다시 다부동에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다부동에서는 다시한번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인민군은 전차를 앞세워 미8기병연대가 주둔한 다부동을 공격하였고, 가산이 인민군에 피탈되었다. 또한 7기병연대역시 포위되었다, 이 공세는 다시한번 대구를 위협하였고, 연합군은 낙동강 방어선 후방인 데이비드슨 선으로 철수하는것까지 고려하였다.
(※데이비드슨 선은 마산-밀양-울산을 연결하는 선으로, 방어선이 아니라 UN군이 안전하게 일본으로 철수하기위해 필요한 선이었다, 이곳으로 철수하겠다는 것은 곧 한반도를 포기하겠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만일 데이비드슨 선으로 철수한다면 인천 상룩 자체가 불가능해지기에 사령부와 본부만 부산으로 이동하는 선에서 그쳤다.
인민군의 공세는 9월 12일부로 중단되었으며. 이날 7기병연대가 314고지를 점령하고, 14일에는 대구 북방에서 연합군이 인민군을 저지하였고. 15일에는 인민군이 다부동-가산산성 일대로 철수하여 인민군의 9월 공세는 좌절되었다.
-영천 전투
(영천 전투)
8월 공세 이후. 보현산 일대의 국군 방어가 비교적 약하다는 것을 파악한 인민군은 기습적으로 영천을 점령하였다. 이 때문에 낙동강 방어선이 크게 위태로워졌다. 국군은 이틀간 재정비를 거치고 미군 전차의 지원을 받아 인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였고, 영천을 포위하였다. 연합군은 9월 10일에 영천으로 돌입, 13일까지 교전을 벌인다. 영천은 탈환되었고. 인민군은 진격을 멈추었다.
인민군은 “영천을 점령했을 때 승리할수 있었고, 영천을 상실하자 패배하였다”고 자평하였다. 영천 전투는 UN군이 반격을 가할수 있는 기점이 되었다.
-안강-포항 전투
9월 6일, 인민군은 경주를 점령하기위해 수도사단이 주둔중인 무릉산-곤제봉 일대에서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하였고, 곤제봉은 인민군에 점령된다. 수도사단은 과감한 역슴을 감행하였고, 연합군과 인민군 양측은 곤제봉을 놓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다. 국군은 15번의 역습을 가했고, 9월 12일. 곤제봉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9월 8일, 인민군은 국군 3사단 후방의 운제산을 점령하였고, 미군은 9월 11일 운제산을 공격하지만 실패한다, 9월 12일. 미군은 화력지원을 받아 다시 운제산을 공격하였고, 운제산 탈환에 성공하였다. 국군역시 9월 14일에 연일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고. 안강-포항의 인민군 공세는 꺾인다.
-UN군 반격의 서막
안강-포항 전투 이후 안강-포항 축선의 인민군의 전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인민군의 공세는 중단되었고. 인민군은 수세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9월 15일. UN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낙동강 전선의 연합군도 공세로 전환하였다. 바야흐로 반격의 시작이었다.
외전-영흥도, 덕적도 상륙
인민군은 남진하면서 몇 개 도서지역도 점령하였다. UN 해군은 전 해안을 봉쇄하였지만. 인민군의 포격이 닫는 도서지역은 포기할수밖에 없었다. 그 포기해야했던 섬들 중 영흥도와 덕적도가 있는데, 덕적는 같은 경우 인천상륙을 위해서 반드시 점령해야할 지역이었다. 8월 15일, 한국해군은 지형정찰, 정보수집을 위해 서해안 도서지역을 탈환하겠다고 극동해군사령부에 건의하였고. 이 작전이 승인되자 바로 덕적도 탈환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한국해군의 기함은 PC 702함이었고, 작전은 PC 702함의 함장(이희정 중령) 성을 따 ‘이 작전’이라 명명되었다. 어청도에 집결한 상륙부대는 지원자를 뽑아 육전대 1개 중대를 편성한뒤, 8월 18일, 영국 함정의 포격지원을 받으며 덕적도에 상륙하였고, 북적도에서 가장 큰 마을인 진리가 국군에 점령된다, 인민군은 소형선박을 타고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국군은 이를 나포하고, 덕적도를 점령하였다.
(PC 702 금강산)
8월 20일, 국군은 인근의 대이작도를 공격하여 점령한뒤, UN군 함정의 지원을 받으며 영흥도에 상륙하였다, 인민군은 산에서 격렬하게 저항하였으나 8월 21일. 국군은 인민군을 제압하고 영흥도를 점령하였다. 국군은 두 섬에 소수병력만 남겨놓고 돌아갔다.
-계속-
참고 문헌 및 사이트
국방부 군사편찬 연구소
-한권으로 읽는 6.25전쟁
-6.25전쟁사 4권 금강-소백산맥선 지연작전
-6.25전쟁사 5권 낙동강방어작전
기갑전으로 본 한국전쟁 (권주혁 저, 지식산업사)
6.25전쟁 60대 전투 (온창일외 7인. 황금알)
바토의 한국전쟁사 블로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출처] 6.25특집 포스팅) 한국전쟁사-1 남침과 낙동강전선|작성자 LT 38
첫댓글 문재인 대통령은
세종대왕 이상의 국민을 위해 일 한 통치자로 길이 남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 함께 기뻐합시다.
아주머니도 기뻐해 주세요
탁현민의 대중선동쇼가 서서히,,약빨을 다해가고 있네요
미국무역보복- 북핵대화쇼-국내교회의 결집- 경제지표공멸등등 다가올 파도가 만만치 않아요 ~~
@예수사랑1 아주머니 걱정일랑 부들어 매셔요.
이명그녜라면 전쟁 했을 틴디
문재인 대통령의 평화 정책으로 잘 되구 있쟈뉴
전쟁 안 한 것 만으로도 행복한거유.
입은 삐뚤어 졌어도 말은 바른 말 햐야지유
안그류?
전쟁 했어 봐유 아주머니 아들 딸 그리고 손주들 박살 나지 않았겠어요?
지금이 아주 잘도고 있는거유
안그류?
@조영노 전쟁나고 안 나고는 하나님 소관이니 재껴두고!!
미국이 제공하는 안보우산밑에서 품잡으며 평화의 사도로 주가 올리는 문재인이
어느날 갑자기 트럼프의 딜에 팽당해 정은이와 같이 도매값에 경매시장에 나올지는 않을까
하는 위태로움이 현재 외교판세가 아니던가요~
가짜평화의 일시적인 유혹에 빠진 대한민국 ~~
그게 얼마나 갈까요
가짜는 다 수명이 길지 않거든요
김정이라는 걸레가 어떤 애인데 ~~말이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춧불선동과 기레기들의 푸닥거리에 눈알이 순간 뒤집허서 실성한 것지요
좌파들의 본색이 드러나고 북핵쇼가 그 약빨이 사그라짐에 따라 순진한 백성들도; 서서히 원상회복중이라오
청년들 박쌀나고 자엉엽자 곡소리나고 미국자동차 관세들어가면 ,,,, 문재인은 말그대로 문재앙으로 신문지면을 장식할거고 트럼프가 주한미군철수 운운하며 김정은과 한묶음으로 흔들어버리면 치명상이 말이 아닐건데,,그게
@예수사랑1 이명박근혜가 나라 말아먹은걸 가지고 문통한테 덮어씌우려하시네.
근데 이제는 아무도 안믿는다는거 ㅎㅎ
그나저나 한국당은 큰일이네요.
지방선거 공천자들마다 전부 고사를 해대니 어디 이름도 잘모르는 피래미들 데리고 선거 치르게 생겼네요.
지방선거 시작도하기 전에 폭망하겠어요. ㅎㅎ
@야다 이명박 박근혜 발끝에도 못 따라가는 문재인의 저질 정치를 하는 걸 보면서도 찬양할 맛이 난다니, 이건 신앙 문제를 떠나서 인간의 기본 양심과 관계된 것 같은데, 야다가 이 게시판에 상주하며 정치 글을 토해내는 이유는 자기 기분 만족을 위해서라는 것인가, 아니면 민중을 계몽하겠다는 소위 좌파식 브나로드 운동의 일환인가, 후자라면 그 어줍잖은 자존심을 구겨주는 충고를 해야겠네. 공부가 너무 얕아 보이니 좀 제대로 정치와 역사를 공부한 다음에 나불거리면 보기에 덜 역하겠네.
@ourdailybread 발끝 ............와 정말 대단하시네요
문재인 대통령은 세종대왕 이상의 통치자로 길이 존중 받을 일을 하고 계심 그러니 살 맛나지 아니한가!
조영노=세종내시=문재인 내시...성립하는지?
문씨=세종 등식은 틀렸으니 그만 치우시고,
문씨=세조,
문씨=철종,
문씨=연산 정도로 전개하는 쪽이 바람직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