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고강산(萬古江山) 유람할 제 삼신산이 어디메뇨,’중모리장단에 맞추는 단가(短歌) 대목을 바꾸어 뇌어본다. 만고천하(萬古天下) 여행할 때 만리초원 어디인가. 망망초해(茫茫草海) 몽골 들판을 며칠씩 달리다 보면 이렇게 소리치고 싶은 충동이 속에서 인다.
무엇보다 몽골 지형은 초원이 인상적이다. 사막지대, 산야, 들판이 모두 초원이라고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남쪽으로 고비사막이 전국의 삼분지 일을 차지하고 있으나 일반적인 개념대로 그저 모래둔덕만 있는 곳은 아니다. 모래 둔덕은 고비사막 중의 3%이다. 단지 황야일 뿐 그래도 동물이 사는 곳이 있다. 몽골 땅의 20%를 차지한다는 건지성 초원(乾地性/ arid steppe)은 강우량이 적기 때문이다.
시베리아 남쪽에 이어진 침엽수림(針葉樹林)인 타이가(taiga)를 포함하여 산도 숲이 섞여있는 초원이고 나무가 아주 없는 뭉긋한 초원(mountain steppe)도 많았다. 산이라면 수목으로 인식된 우리의 고정관념 때문에 나무 없이 넓게 터진 풀밭이 몹시도 특이하게 보인다. 내 눈엔 모두가 초원, 초원이다, 단지 메마른 초원과 푸른 초원이 아니면 산야의 초원이니까.
넓고 푸른 초장에다 소 띄워놓는 목축이 희망이라던 어릴 때 한 친구의 말이 기억 속에서 먼지를 털고 튀어 나왔다. 손으로 꼴 베어다 썰고, 마른 짚으로 여물죽을 큰 가마솥에 조석으로 끓이던 때였지. 별채에서가 아니라면 시골집 부엌이나 봉당(封堂)마루에 붙었던 좁은 마구에다가 소 한 마리씩 식구처럼 치던 시절이었으니 그렇게 꿈꿀 수밖에.
이토록 초평(草坪)이 큰 곳에 살았다면 누구든지 원하는 대로 우양(牛羊)의 무리건 말 떼이건 저 만리 초원에다 마음껏 풀어놓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걸 아는 이라면 초원천지의 몽골여행에서는 일망무제(一望無際)의 목야지(牧野地) 하나만은 부러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삼림이 섞인 산지의 초원(mountain forest steppe)은 전국토의 25%를 차지하는데 이것이 바로 헝가리(Hungary)에서 만주(滿洲)까지 이어지는 대초원(the Great Grassland)의 한 부분이 된다. 이는 아마도 칭기즈칸의 대제국을 염두에 두고 정의한 말이겠다, 거기까지 그가 말 타고 정복한 영토였으니까.
그 대초원은 그의 전투마를 먹이기에 충분하여 위대한 영웅을 만들 여건은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 살찐 꼴의 그런 초원이 없었다면 몽골말을 타고 그 멀리 정벌하여 나갈 수가 있었을 런지. 낮에는 타고, 싣고, 달리고 밤이면 그 푸른 초원에다 풀어놓으면 되었다, 밤새 말들은 꼴로 배를 채우고 다음날 초원을 달릴 준비를 할 수가 있었을 테니까.
말 맞추려는 사람은 그 대초원을 비엔나(Vienna)에서 베이징(北京)까지라고 미문(美文)의 멋을 부리기도 하지만 지금은 문명과 산업화라는 이름으로 아름답던 지구상의 그 원시적 초원이 잠식되어가고 있다. 갈아엎어 농경지로 만들었고, 집을 짓고 공장을 세웠으며 도시를 건설했다.
다행히 여기 몽골 강산에 마지막으로 그 천년의 처녀초원이 아직도 남아있다. 헝가리에서 만주까지의 대초원도 실상은 몽골초원을 이어야만 그게 가능하다. 몽골 남서쪽 서역(西域)의 사막과 진흙 산들의 중국에서는 대초원이 연결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알타이(Altai) 산을 넘어 시베리아 남쪽의 몽골초원을 거쳐야만 한다. 만리에 퍼진 푸른 초본(草本)이 몽골 산야(山野)에 있기에 그 원초적 순수성을 감상하려고 우리가 온다.
광활한 초원이 둥그스레한 산록(山麓)과 들판에 활짝 펼치고 쪽빛 하늘 밑으로 흰 구름 꽃피워 놓은 경관은 붓으로는 다 묘사 못할 장엄한 장관이다. 궁창(穹蒼)의 남색이 대지의 녹색과 완벽한 짝이 되니 온전한 천지조화의 현상은 이를 통하여 터득할만하다. 그래서 옛 사람들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고 보았나보다.
뭍이 모가 나도 하늘은 기꺼이 보듬어 안아주고 하늘이 품으면 땅은 환락으로 받들며 지극히 자연스럽게 화답을 하지 않나. 이것 때문에 사람들은 몽골을 잊지 못한다. 파란 하늘과 푸른 들이 어디 세상에 더 없으랴마는 사람이 파헤쳐 갈지도 아니하고 거기 뭘 보태지도 아니한 원시적 초원만은 정말이지 독특하다.
문명이 아직도 손대지 않은 채 원초적인 채로 남아서 천연의 처녀 초원으로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으니 말이다. 땅 갈아 기경(起耕)을 아니하는 유목민들이라 그냥 그대로의 풀밭에서 우양을 치면 되었으니 오늘까지도 원시적 모습일 수가 있다.
내 눈이 무한 자유하고 가슴이 그냥 탁 트이는 이 광대한 대자연을 누가 마다하랴. 컴퓨터 스크린의 작은 상자에서 경쟁과 문명에 지친 현대인의 눈들을 저 시원한 녹색 벌판에다 씻으면 자연이 주는 신비한 시력을 새로히 회복할 것 같다.
북미와 유라시아 및 아르헨티나에 상당한 면적으로 덮고 있었던 대륙의 자연 초원들이 지금은 남미의 파타고니아(Patagoia)와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Kazakhstan)에만 보존되어있을 뿐이란다. 대부분의 좋은 땅의 풀밭은 경작지로 개간되어버리고 지극히 작은 부분들만 보존되어있는 형편이다.
몽골의 동부와 중부지방에서만 전봇대조차도 보이지 않고 끝없이 펼쳐진 이 마지막 초록빛 바다가 지금껏 남아있다니 말이다. 특별히 늦봄이 될 때면 에메랄드 빛깔로 산야을 뒤덮을 때는 더더욱 장관이 된단다.
호사한 풀들은 몽골의 평원과 산록을 끝없는 은빛바다로 만들어 보드랍게 이불 덮는다. 다른 중앙아시아 지방과는 달리 여긴 여름에도 그렇게 메마르지 않아 9월이 되도록 잔디는 누렇게 변하지를 않는다.
말 타고 몽골의 만리 초원을 달리게 된다면 신-칭기즈칸이 되리라. 몽골의 동북쪽 그의 고향 다달(Dadal)에서부터 그의 수도였던 하라호린(Kharakhorin)으로, 남쪽 고비(Gobi)사막도 가로질러보고, 수목도 없이 넓게 열려진 대초원을 휘달려 봄이 어떻겠느냐.
19세기 미국의 서부개척 시대처럼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the wild, wild west)와 같이, 서쪽으로, 또 서쪽으로 달린다면 옛 중국의 서역이었던 신장성을 넘고, 카작스탄과 같은 중앙아시아를 횡단하여 유럽까지 달릴 수 있겠지. 하기는 그 놈의 국경이 말썽이라 말을 쉬 통과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몽골의 좋은 초원은 단지 사람이 살지 않았기 때문에가 아니었으니 수천 년 동안, 아니 만고상청(萬古常靑) 그렇게 푸르러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이 북부지역엔 바바(babas)라는 고대의 석비(石碑)들과 무덤의 봉분들이며 묻힌 고대 도시들이 여태까지 그것을 증언하고 있다.
페르시야와 튀르크, 알타이 사람들, 티베트 인들과 중국인들, 또 많은 유목민 종족들의 문명이 나들었다. 그들의 각기 다른 언어를 저 초원에서 이야기 했었으니 독특하던 말들이 저 맑은 공중에와 흙속에 레코드판처럼 녹음되었겠지. 누가 새론 기기를 발명하여 그 소리들을 재생시켜 준다면 말이다.
소위 부싯돌 계곡(Flint Valley)이라 불리는 고고학적 자원의 채석장에는 석기시대로부터 사용했던 수십만 개의 돌화살촉과 같은 돌연모들이 이 초원에 널리 발굴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들소(bison)와 털 복슬 무소들과 같은 동물들이 이 초장에 살았었다. 많이는 멸종되기도 했다지만 여전히 여기서 오래 생존해 온 동물들도 있잖나.
물론 그렇게 된 것은 몽골 사람들이 원시 적부터 지속돼 온 같은 유목민의 생활양태가 한 몫을 했다. 농지로 개간을 했다든지 인구가 집중적으로 도시화 했다면 야생동물들이나 초원이 남아있을 터전을 빼앗기게 되었을 것이다.
그 당시 세계에서 단 하나의 문명국이었던 대몽골제국이 떨치던 시기에는 마르코 폴로(Marco Polo)와 그 때의 사람들이 몇 개월씩 걸려 다니던 중국과 유럽을 잇는 단 한 개의 비단길만이 있었다. 그러나 몽골제국이 무너지고 나서는 동서의 교역이 오랫동안 중단 되었던 것이다.
불교를 받아들인 후부터는 몽골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랍지 아니한가. 이리하여 몽골제국의 대부분을 러시아와 중국에게 빼앗기게 된 것이다. 저 대초원을 마상으로 돌다가 목이 말라 대몽골제국의 후손인 유목민의 게르로 가서 아이락(airag) 한 대접을 받아 마시면 옛 이야기가 되살아 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