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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냄을 받은 이들” - 누가복음 10:1-2
“이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 온양성결교회 (주일예배) 8- 19-2007
예화) 인도에서 동물을 죽이지 않고, 생명을 존중하는 힌두교의 전통으로 인해 떠돌이 개들이 문제가 되었음
- 개들이 사람을 물고, 광견병에, 지저분해지는 환경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뉴델리의 한 시의원이 “개들을 모두 잡아 한국으로 수출하자!”고 건의
- 개들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충성스러운 개들이 문제인가? 개만도 못한 사람들도 있는데!”
- 오늘의 이야기는 바로 개들처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주면 먹고, 안주면 굶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은 모습으로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 누가복음 9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가 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자로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을 뜻하는 것인지?를 말씀하시다가, 10장에 들어서서, 12제만이 아니라, “70여명의 전도자들”을 뽑아서 각 지역으로 보내셨습니다. 다른 성경에는 70명, 또는 72명으로 나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이제껏 자신과 동거동락한 12명의 제자 외에도 여러 명의 일꾼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돕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전하고,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고, 귀신을 쫒아내는 일을 하시되, 더 효과적으로 더 광범위하게 더 많은 지역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70여명의 사람들을 세우셨습니다. 주님의 일은 몇몇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효과가 있습니다. 지역을 나누어서, 연령을 나누어서, 그리고 재능과 관심에 따라 주의 일을 분배하여 같이 할 때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 그런데 왜 하필, 70명일까요? 성경에는 구체적으로 답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사실 누가복음에만 이 70인 전도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70이라는 숫자가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12명의 제자가 새로운 이스라엘을 의미했으며, 이스라엘 12지파를 뜻하는 것이라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12제자를 세우신 것은 이스라엘, 또는 유대인들을 위한 전도와 선교를 담당하라는 의미라면, 이제 70이라는 숫자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이방인들을 위한 전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창세기 10장에 나오는 노아의 자녀들의 계보를 보면, 홍수 이후에 이 땅에 얼마나 많은 나라와 민족이 생겼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 창세기 10장의 민족들을 세 보았더니 바로, 함과 셈과 야벳의 자손들이 모두 70개의 민족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70은 구약에서는 이방의 민족을 의미한다고 보았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70인의 전도대를 따로 세웠다는 것은 이방인을 위한 전도대를 특별히 구성하셨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 70이라는 숫자가 이방인들을 생각하는 숫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기원전 300년경에 이방인의 지역에 살던 유대인들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 즉 “Diaspora” 유대인들이라 부릅니다. 유대인들은 이민의 역사가 가장 오래된 민족 중에 하나입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에게 자녀들에게 전할 신앙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점점 유대인들은 모국어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더 문제는 말만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히브리어에 담겨있던 그들의 신앙마저 잊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말을 잊어버리니, 마음의 신앙마저 잊어버리는 것에서 신앙의 선조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들에게 읽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 가운데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자녀들을 위해 히브리어로 되어 있던 구약성경을 당시의 공용어였던 헬라어로 번역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대표하는 6명씩을 뽑아서 한 사람씩 골방에 들어가게 해서, 번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번역한 것을 모두 비교해보니, 모두가 하나 같이 동일했다는 전설입니다. 거기에 유래한 성경이 “70인역 성경”입니다. 그런데 이 70인역 성경은 이방에 사는 유대인 자녀들뿐만 아니라, 결국 이방사람들도 읽을 수 있었기에 후에 기독교가 전파될 때, 많은 이로움을 준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70인역 성경이 사도 바울과 초대 교회 성도들이 “성경”이라고 할 때, 의미했던 바로 그 성경입니다. 70인역 성경의 배경에서도 알 수 있듯이 70은 바로 이방을 위한 숫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 특별히 70명의 전도대를 세울 때, 이는 분명히 전도자들로 하여금, 이방인, 즉 지금 주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보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 70이라는 숫자는 구약 민수기 11장 24-25절에 보면, 모세를 도왔던 장로들의 숫자가 바로 70이었습니다. 그렇다면, 70은 주인의 일을 돕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되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일을 도울 사람으로 70인 전도대를 구별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 그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없기에 누구누구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 없는 70인 전도대는 그야 말로 주님을 은밀하게 돕고, 더 나아가 효과적으로 주님의 일을 도왔으며, 많은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70인 전도대 처럼, 주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나아가라고, 그렇게 주님의 일을 도우라고 보내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러 와서는, 다시 흩어져 나갈 때 바로 70인 전도대의 각오로 나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믿지 않는 이들에 대하여 저와 여러분이 나가야 할 삶의 자리가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자리입니다. 특별히 어디를 가는 것이 아닙니다. “각동 각처”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신창, 온천동, 실옥동, 너더리, 읍내동, 그리고 모종동, 멀리는 천안까지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여러분들이 하는 일들을 통해 주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하시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정과 생업과 사회적인 의무를 내팽겨 치고 어디를 가겠습니까? 여러분이 사는 곳, 여러분이 일하는 곳, 여러분이 사람을 만나는 곳에서 주님을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예화) 피터 와그너 박사. “일터 교회” - “흩어진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주일과 예배시간의 “전통적인 교회,” 즉 “모이는 교회”도 중요하지만, 여러분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야 말로 여러분이 제사장과 사도, 즉 70인 전도대의 사명을 가지고 나가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모이는 교회도 중요하지만, 흩어진 교회도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변화와 능력과 열매는 바로 눈에 보이는 교회, 건물로 된 교회 “밖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특히 직장이 일터교회입니다. 조경을 하면서, 옷을 팔면서, 음식을 팔면서, 다른 사람의 옷을 깨끗이 하면서, 청소를 하면서, 가구를 팔면서, 법률 상담을 하면서, 공무원의 일을 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자동차를 수리하면서, 기쁨과 즐거움과 신뢰를 주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직업의식이 없으면, 여러분의 신앙의 대상이 욕을 먹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뢰를 주면, 여러분이 믿는 주님을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 사실, 가장 능력 없는 신자는 교회에서만 큰소리치는 사람입니다. 누가 가장 큰 소리칩니까? 바로 목회자들입니다. 목회자들은 전도하기 아주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이들과 만나는 시간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하루 종일 같이 지내는 여러분이야 말로 주님의 아름다운 일을 이루는 진정한 제사장이요, 사도요, 일꾼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 그렇다면 주님께서 믿지 않는 이들을 위해 세우시고, 주님의 일을 돕기 위해 세우신 70인 전도대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주님께서 전도대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첫째, 아주 긴급하게 요청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2절에서 보면,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라는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화) 추수의 시기를 놓치면, 한 해의 농사를 망친다. 옥수수의 예
- 따는 때를 놓쳤더니, 단단해졌습니다. 아무리 삶아도 깡깡해져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딸 때 바로 따야 합니다. 일 년 내내 고생한 것은 바로 추수 때를 위해서였습니다. 추수 때야 말로, 농부가 기다려온 때입니다. 그 긴급한 마음으로, 그 부지런한 마음이 추수 때 농부의 마음입니다.
- 추수 때 수확하지 않는 것은 농사를 포기했다는 뜻입니다.
- 이와 같습니다. 지금이 추수 때인데, 이때를 놓치면 완전히 망친다는 각오로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안된다는 각오와 절박성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곧 임한다는 그 절박성이야 말로 우리 일군들에게 요청되는 것입니다.
- 아니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성도들의 마음에 이미 시작되었으니, 우리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에 어서 빨리 들어오라고 긴급하게 요청하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복음을 외치고, 상처받은 이들에게 가서 기도를 통한 능력을 나타내며, 우리가 할 일은 결국 하나님의 평화를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이미 시작되었으니, 이를 위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이미 임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전하시기 바랍니다.
- 두 번째로, 70인 전도대가 알아야 하는 것은, 방해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3절의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갈찌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라는 말씀입니다. 즉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특별히 세움을 입은 70인 전도대의 일을 할 때, 이를 방해하는 이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니, “날 잡아 잡수시유!”라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영악할 데로 영악해진 세상 사람들의 셈법으로 보기엔 아주 하찮고, 귀찮고, 아니 소아기적인 순진함으로 보이는 그런 말과 행동이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 이리와 같이 우리를 잡아먹으려는 이들도 있음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 예수님을 믿는 신자이기 때문에,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쩌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그것을 이용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너무나 뻔해서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엔 “달걀로 바위를 치는 일”로 보일 것입니다. 너무나 황당해서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 그런데 왜 이러한 위험한 일을 우리가 해야 합니까? 왜 이리 무모한 일을 해야 합니까? 세상의 눈으로 보면 이토록 순진한 일을 해야 합니까?
- 저와 여러분을 통해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이 확신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한 마음입니다. 평화의 마음, 감사의 마음, 더 나아가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가 없으면 나갈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세상의 말로 비교할 수 없는 이 기쁨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힘과 지혜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인도와 도우심과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주님의 도우심이 눈에 보이는 생활의 윤택함이나, 세상의 인정이나, 세상의 지위의 보상으로 곧 연결되는 것이 아님을 계속되는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긴급하게 요구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가지지 말고, 즉 아무 것도 준비하지 말고, 방문한 집에서 주면 먹고, 방문한 집에서 문전박대를 당하면 즉시 나와서 다음 마을로 가라고 지시하셨습니다. 항상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기대하지는 말라는 말씀입니다. 항상 좋은 대접 받고 좋은 열매를 맺으리라 생각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받아들이지 않는 가정과 마을이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만큼 나가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사랑과 평안을 전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화)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의 활동 시기를 전후한 한 철학학파와 비슷했습니다. 이들은 거지처럼, 한두 명씩 돌아다니며, 이 마을 저 마을에서 진리를 전하고 다녔습니다. 세상의 권세나 지혜 있다는 이들을 경멸하고, 참 진리는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전통이나 유행에 있지 않고, 스스로의 깨달음에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다녔습니다. 떠돌이 개라는 별명으로 견유학파라고 불렀습니다. 키닉스, 시닉스라고 불렀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대해서 냉소적인 이들이었습니다. “냉소적인 cynical”하다는 말이 여기서 유래되었습니다.
- 그 대표적인 이가 디오게네스였습니다. “무엇이 필요한가?”라고 묻는 알렉산더 대왕 앞에서, 햇볕을 가리고 있으니, 조금만 비켜달라고 했던 이가 바로 견유학파의 디오게네스였습니다. 세상의 권세에 굴복하지 않았기에 비천하게 채소를 씻어서 먹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고개 숙이는 법을 조금만 알아도, 푸성귀만 먹는 신세를 면할 텐데!” 그러자 “가난하게 사는 법을 조금만 알아도 고개 숙이지 않아도 되는 것을”이라고 훈수를 두었답니다.
- 어쩌면 개만도 못한 대접을 받는 일이 주님의 일을 할 때 나타나는 현상일 수 있습니다.
- 그런데 세 번째, 마지막으로 주님의 사역은 궁극적인 승리가 있습니다. 감사한 것은 이 70인의 전도대가 주님께 돌아와서 사역을 보고하는 경우에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17절에 보니, 전도대원들 스스로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70인들의 사역 현장에 같이 있지 않았던 예수님께서도 이 순간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전도대가 주님의 일을 이 땅에서 할 때, 그 결과는 잠깐 동안 공중권세를 잡은 사단의 세력에 분명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 주님의 일을 하는 저와 여러분의 전도대의 삶의 통하여, 여러분이 속한 한 가정, 한 직장,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그 한 사람의 일을 통하여 하늘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가 실제로 더 확실히, 더 가까이 우리 모두에게 나타나리라는 희망과 소망의 기대입니다. 하늘나라에서 분명한 변화가 있으니, 20절에서 말씀하시듯이, 우리 모두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주님께서 분명히 인정하시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 그래서 예수님께서 간곡히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귀신을 굴복시키는 일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고, 우리의 이름이 우리의 사역이 하나님 아버지의 기억이 되고, 인정이 된다는 그 사실에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저와 여러분의 사역은 분명한 열매가 있습니다. 긴급하게 요청되는 주님의 사역을 망설이지 말고 부여안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감동으로, 또는 권면으로, 또는 의무감으로 다가오는 그 주님의 일을 빨리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전도하는 일, 위로하는 일, 세우는 일, 그리고 도모하는 일 결국 주님을 위하는 그 여러 일들을 빨리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일은 그 때가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 주님의 일을 할 때, 모욕을 당하기도 합니다. 어려움도 있습니다. 시험과 연단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일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도록 분명히 도우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일은 하늘의 분명한 결과와 상급과 인정이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일이 다가 아닙니다. 우리가 실패로 보이는 그 일을 통해서도, 주님께서는 아름다운 하늘나라를 건설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 결국 주님의 일을 하는 저와 여러분에게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분 각자에게 주님께서 긴급하게 요청하시는 일들을 넉넉히 감당하셔서, 주님의 도우심과 깊은 은혜를 받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