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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익산 답사를 마치고서......> 2006년 11월 13일 월요일. 오전 9시. 시청 주차장 앞. 발밑에 뒹구는 낙엽이 한 번씩 불어오는 바람에 회오리 일듯 날릴 때면 나는 스산한 가을에 취하고 만다. 자꾸만 빈 나무 아래 서 있기를 고집하게 되고 뜨거운 커피가 뽑아져 나오는 자판기 앞에 서게 된다. 그런 나를 달래기라도 하려는 듯 광문관에서 답사를 가기로 했다. 오전 9시. 시청주차장에 대기하던 버스에는 광문관 회원들이 벌써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떡이며 감이며, 귤이랑 과자가 들어있는 간식 보따리도 한아름이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회원들에게 전화하여 도착여부를 묻는다. 시간이 되자 오지 않을 회원들은 두고 우리는 오늘 하루 전북 익산 답사를 하기로 했다. 버스가 출발하고 나는 우리라는 이름으로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한 회원들을 보며 감사해 했다. 딱히 우리 모임이 우리에게 주는 이익적인 측면은 아주 작지만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마인드가 같아서 한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돌아오는 혜택도 그리 크지 않아 마음속으로 늘 도움이 되어 주지 못해 미안해 할 뿐인데 귀한 시간을 내서 함께 해 주니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회원의 머리수보다 참석하는 회원은 항상 고정되어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이원창회장님의 “같은 곳을 바라보는 우리는 남이 아니다.”라는 그 인사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김성민주임님의 수고로 오늘 답사가 이루어진 점 또한 놓치지 않으시고 칭찬을 하신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작지만 크게 웃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즐거운 하루가 될 것 같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어 저장해 두었던 전화번호 하나를 찾았다. 그리고 오늘 하루 우리를 안내 해 주실 익산의 황호일 선생님께 광주에서 익산으로 출발 하였노라는 전화를 드렸다.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라는 목소리가 핸드폰 저 너머에서 들린다. “아니 벌써부터 기다리시면 많이 기다리실텐데요.” 미안한 마음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아닙니다. 광주에서 출발하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제가 사는 곳에서 기다리는 데 저는 괜찮습니다.” 미안해 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들리지만 그래도 나는 많이 미안했다. 버스가 빨리 가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운전석을 쳐다보지만 과속해 줄 것을 차마 말하지는 못했다. 처음 전북 익산으로 답사지를 결정하고 나서 전북의 이용미사무국장님으로부터 황호일 선생님의 전화번호를 전달받고 통화했을 때가 생각이 난다. 그 때 그 선생님께서는 “네. 기꺼이 기다리겠습니다.” 라고 하시며 몇 번이고 시간과 날짜를 물으시고는 전화를 끊으셨다. 처음에는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서 점잖으시다고만 생각했는데 떠나기 이틀 전에 선생님께서 손수 전화를 걸어오셔서는 11월 13일 월요일 오전 9시에 출발하시는 일정에 차질 없느냐고 물어 오셨다. 약속을 섣불리 여기기도 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지만 나는 그 선생님에 대한 기대로 다가왔다. 창밖으로 스치는 가을이 숨듯이 매우 빠르게 사라져 가고 저만치 서 있는 익산이 눈앞으로 정겹게 다가서 왔다. 삼례 인터체인지에 도착하고 있음을 알리는 전화를 하자 황호일 선생님께서는 타고 오신 차에서 내려서 기다리고 있으니 당신이 보이실 거라고 하신다. 버스가 통행료를 내는 사이 나는 내릴 준비를 하는데 손에 전화기를 꼭 쥐고 저 앞에서 검정색 두루마기를 입으신 선생님께서 우리가 타고 온 버스를 알아보시고서는 먼저 걸어오시는데 버스에 타고 있는 우리는 무어라 할 말을 잊었다. 김나현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오늘 우리는 해설을 듣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저 정도의 차림새로 기다리시는 분이라면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하셨다. 얼른 내려서 광문관의 사무국장이라 인사를 하니 이원창회장님과 김성민주임님께서도 인사를 건네신다. 타고 오신 승용차를 세워두고 버스에 탑승하여 함께 이동하려 했으나 선생님께서는 당신이 앞서서 가는 것이 편할 것이라며 두루마기를 여미시더니 앞장서서 차를 달리셨다.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는데 아마도 황호일 선생님의 모습에 스스로를 돌아 본 것은 아닐까 한다.
그렇게 시작 된 전북 익산 답사는 생각보다 더 많이 유익했으며 시간마다 차오르는 지적충만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하루 해가 너무 짧아 아쉬움으로 남아야 했으니 다음을 기약하며 처음 도착지부터 이 지면에 옮겨볼까 한다.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는 왕궁(王宮)리 석탑에 이르러서 우리는 오늘의 일정을 시작했다. 선생님께서는 조용하고 차분한 어조로 말씀을 하시는 데 익히 알고 있는 금강경이 출토된 왕궁리5층석탑은 통일신라시기에 만들어진 탑이라는 전문적인 지식은 빼고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을 부분을 설명해 주셨다. 당연히 우리는 금강경이 통일신라시기의 것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금강경과 함께 출토된 사리함의 문양이 백제의 사비시대에 나온 문양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금강경의 글씨체는 중국 육조 사경체와 같아 7세기를 넘지 않았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같이 출토된 청동여래입상이나 석탑은 통일신라 작품이다. 그렇다면 왜 금강경만이 백제시기의 작품이며 통일신라시기의 탑에 봉안되었던 것인가를 설명하시는데 1965년 왕궁리 석탑을 해체할 때에 당시의 석탑에서는 볼 수 없었던 기단부에서 백제목탑구조가 발견되어 모두를 의아하게 했다고 하셨다. 90년대 중반 실재로 현재 기단부에 훨씬 큰 규모의 목탑지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금강경은 현재 석탑 이전에 세워진 목탑내에 봉안되었다가 석탑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일본의 고문서 관세음응험기에서 알 수 있는데 문헌에는 백제 무왕의 왕궁리 천도와 왕궁이 일대 사찰 조성에 관한 기록을 담고 있다는 것이었다. 전북 익산 왕궁리 터는 백제무왕이 천도를 했던 곳이었다는 사실 앞에서 선생님께서는 백제 무왕을 떠 올리는 듯 차분하게 우리 일행을 뒤로 물러서게 하셨다.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달리 보인다는 왕궁리5층석탑... 누워서 바라보아도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아도 그리고 멀리 지나가는 차 안에서 바라보아도 그 당당함은 무어라 말 할 수 없다하시니 이 곳에 탑을 세웠던 사람의 보는 눈의 대단함을 높이 사는 황호일선생님의 백제를 사랑하시는 모습이 참으로 감탄스러웠다. 그렇게 멀리서 왕궁리5층석탑을 보시고서는 그 위풍당당함에 전혀 주눅이 들지를 않으셨으니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시각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졌다. 돌아서서 다시 보는 왕궁리5층석탑이 벚꽃에 가리워져 보이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드는 마음이 안타까운 건 왜일까... |
첫댓글 아쉽지만 전북 익사 답사가신분 수고하셨습니다.후기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