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음하기도 힘드는 제목의 영화 [이퀼리브리엄]의 메인 카피는 [메트릭스는 잊어라]이다. 즉 어떤 식으로든지 이 영화는 [메트릭스]와 관련이 있다는 뜻이다. 이미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작품을 물고 늘어지는 것은 케케묵은 홍보전략 중의 하나이다.
더구나 국내 개봉도 하기 전에 [저주받은 걸작]으로 네티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는 소문도 돈다. 대체 [이퀼리브리엄]은 어떤 영화인가? 혹시 미국 평단의 외면을 받고 흥행에 실패한 이 영화를, 홍보사에서 띄우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한 고차원 전략은 아닐까, 의구심을 갖고 영화를 보았다.
확실히 미국 평단이나 흥행은 이 영화의 본질적 가치에 비하면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고 저주받은 걸작이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다.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컴퓨터 그래픽을 과도하게 사용하지 않았고, 비교적 적은 예산으로 스타일리쉬한 영화를 만들어냈다.
[이퀼리브리엄]은 3차대전 이후의 21세기 지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SF 영화다. 그러나 [블레이드 러너]처럼 작가주의적 영화는 아니다. 내러티브는 굉장히 대중적이고 상업적이다. 형식적 기교 면에서 커트 위머 감독은 스타일리스트로서의 매력을 보여준다.
특히 크리스찬 베일이 보여주는 총격신은, 그 자체가 예술이다. [건 댄스]라고 이름붙일만한 매혹적인 액션의 아름다움에서 우리는 시선을 떼어낼 수 없다. 동양의 쿵후와 검도 등 다양한 무술이 혼합되어 있는 [건 댄스]는 와이어 액션이나 컴퓨터 그래픽의 도움 없이도 매우 모던한 감각의 총격씬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퀼리브리엄]이 현란한 액션에만 힘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도시 국가 리브리아의 대중들은 정기적으로 인간의 감정을 절제하는 약을 먹고 감정의 변화없이 평화스러운 일상을 보낸다. 이곳의 총사령관은 대중 앞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채 도시 곳곳에 설치된 대형 전광판을 통해 대중들을 다스린다.
프로지움이라는 감정절제 약물의 투약을 거부하고, 인간적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투쟁하는 도시의 게릴라들, 그리고 그런 반체제 반란군들을 소탕하는 임무를 갖고 있는 전사들의 대치가 도시 곳곳에서 팽팽하게 이어진다.
공화국 최정에 전사인 존 슬레이터(크리스찬 베일 분)는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면서 그리고 버려진 개를 만나면서, 인간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는 몰래 투약을 거부하고 마지막에는 반란군 편에 서서 총사령관 살해의 임무를 부여받는다.
[이퀼리브리엄]의 화면은 철저하게 흑과 백의 모노톤으로 만들어져 있다. 화려한 시각적 효과보다 오히려 모노톤의 화면은 우울한 디스토피아의 미래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또 베를린에서 촬영된 건물은 마치 보이지 않는 빅 브라더가 도시를 지배하는 조지 오웰의 [1984]처럼, 파시스트의 위압감을 느끼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우리가 [이퀼리브리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오히려 권력이 치열하게 부딪치는 외형적 액션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을 서서히 느끼기 시작하면서 내적으로 변모하는 주인공의 작은 흔들림이다. 절친한 동료의 자살, 아내의 숙청 등으로 조금씩 동요하던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스쳐갔을 계단의 난간을 잡을 때, 혹은 버려진 개들이 총살되기 직전 자신의 손을 핥을 때, 변화하기 시작한다. 떨리는 존 슬레이터의 내면은 그대로 관객들의 가슴 속으로 전이된다.
비록 대중적 주제를 상업적으로 끌고 갔지만 [이퀼리브리엄]은 어떤 영화에서도 접근하지 못한 창의적 스타일이 살아 있고, 주제의 섬세함이 내면에서 꿈틀거린다. 특히 스필버그 감독의 [태양의 제국]의 아역배우에서 출발하여 [아메리칸 사이코]를 거치면서 성격파 배우로 거듭난 크리스천 베일의 연기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