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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MRCenter 메시아닉 회복 센터 원문보기 글쓴이: 아브라함
메시아닉 유대인 공동체의 부활
- "당신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돈 핀토)의 제10장 부활한 "나사렛 사람들" 요약
I. 라비노비츠의 대두
3,4세기에 예슈아를 인정했던 유대인 분파였던 나사렛 공동체가 소멸된 이후에, 많은 이스라엘 자녀들이 예슈아를 믿게 된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이교도의 관습에 덧칠해 놓은 기독교 신앙을 강요받았는데, 북유럽 신들을 공경하는 나무와 전야제에 쓰이는 큰 장작들로 겨울을 알리던 축제가 예수 탄생의 축제 'Chist Mass'가 되었고, 유월절은 부활절이 되었고, 이방인들에게 요구하지 않던 할례는 유아세례와 침례로 대체되었다. 바르 미츠바(13세 남자아이의 성인식)는 안수로 대신했고, 유대인 메시야 안에 유대인식 믿음 표현은 실종됐다.
1882년 조셉 라비노비츠(Joseph Rabinowitz)라는 유대인 지도자는 이러한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그는 귀환하는 유대인 이주자들을 위해 팔레스타인으로 갔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는 감람산에서 메시야이신 예슈아를 만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3년 후 1885년 1월 첫 번쨰 새 언약 이스라엘 성회가 열렸다. 많은 관심자들도 왔지만, 방해자들도 많았고, 그는 2월 초에 길거리 데모가 터지면서 폭행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단념하지 않고 1890년 러시아 당국의 승인 아래 러시아의 몰도바 키시네프에서 첫 메시아닉 유대인 회당을 열었다. 당시에 안식일 성회에는 100여명의 유대인들이 모이게 되었다.
그는 감람산 체험 후에 두 가지 주제에 헌신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과 예슈아였다. 그는 자신의 유대인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았고 1899년 임종시 그의 여권에는 유대인이라고 명시되어 있었으며, 그가 바라던대로 그의 묘비에는 "여호와와 그분이 기름부으신 나사렛 예슈아 유대인의 왕을 믿는 - 다윗의 자손 이스라엘인 조셉 라비노비츠"라고 새겨져 있다.
II. 앞으로 올 일들의 징조들
그가 예슈아를 믿는 신자이면서 동시에 유대인이라는 주장은 유대인 공동체와 교회 양쪽 모두에 끝없는 충돌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초대교회에 상황과 같이, 교회는 그와 무엇을 같이해야 할지 몰랐고, 유대인 공동체는 그를 선조들의 믿음의 배반자로 여겼다.
그는 예슈아 메시야 안에서 믿음만을 통해서 율법의 행위 없이 의로워질 수 있다고 믿으면서, 한편 육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인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할례를 받아야 하며, 하나님이 애굽 땅에서 인도하신 선조들의 후손이므로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대로 안식일, 무교절, 맥추절 등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을 교회가 정통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지만, 마지막 때의 예언의 성취로 환영하는 자들도 있었고, 선교단체들 중에서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단체들도 있었다. 프란츠 델리첵이나 알프레드 에델샤임 등과 같은 신학자들도 라비노비츠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그가 시작한 키시네브 회당은 유대인들이나 비유대인들 모두에게 이상하지만 독특한 조화가 있었다. 기독교적인 요소와 유대교적인 요소가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세계 각지에서 회당을 위한 지원이 왔다. 또한 세계 각 지역을 다니면서 강연이나 활동할 수 있었다. 그는 교파간의 협력 외에는 자신의 위치를 두는데 조심스러웠다.
그는 유대인 회당의 재탄생을 초기 유대인 공동체의 부활, 유대인 가지의 재접붙임으로 믿었으며, 자신들의 메시야를 믿는 이스라엘의 이러한 각성은 로마서 11장 15절에 언급된 죽음 가운데서 부활함“이라고 확신했다.
가톨릭 사제이며 작가인 피터 호컨은 메시아닉 유대신앙이 가톨릭과 개신교의 연합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즉 유대인 신자들이 현대 유대인식 표현 안에서 정통 신앙의 길을 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라비노비츠는 예수 안의 믿음이 탈유대인(ex-Jew)이 되게 하는 것도 아니요 침례를 받았다고 해서 유대인 정체성이 물속에 빠져 버린 것도 아니라는 주장이다.
라비노비츠는 유대인 상황을 마치 의사가 환자의 아픈 부위를 건드렸을 때에만 고통을 느끼는 것과 같다고 했다. 예를 들면, 그가 ‘타나크’(히브리어를 영어로 번역한 구약성서)를 비판적으로 말하거나 모세의 글이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는 주장들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그가 예슈아가 메시야라고 말하면서 그 거룩한 땅에서 들어왔을 때, 온 사방에서 고통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세계 도처의 유대인 선교단체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라비노비츠가 재건한 회당은 유지되지 못하였다. 그가 아무런 후계자도 남기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되었다.
III. 조셉 라비노 비츠의 유산
히브리 크리스천 미국 연맹은 유대인 신자들의 교제를 위해서 1951년에 결성되었다. 유대 백성들은 예슈아를 구세주로 깨닫고 미국, 영국의 주요 도시들 안의 주류 교회들과 합류하기 시작했다.
1928년 7월 국제 히브리 크리스천 연맹이 독일 함부르크에서 모였다. 그 컨퍼런스 연설에서 연맹의장인 레비손 경은 라비노비츠를 언급했다. 1931년 윌킨슨은 키쉬네브를 방문해 라비노비츠의 소유였던 히브리 성경을 읽었다.
라비노비츠를 후원했던 유대인들이 히브리 크리스천 회중교회를 설립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라비노비츠가 시작했던 것 같은 그러한 회당들이 아니었다. 메시야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기존의 회중교회의 일원이 되기를 바라는 일종의 선교였다.
IV. 메시아닉 유대신앙이 탄생하다
1967년 늦은 봄 아랍 5개국과의 전쟁(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승리하고 많은 영토를 포함해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통치 안에 들어왔다. 이 무렵에 예수를 믿는 유대인 신자들이 많이 증가했고, 이것은 많은 경우 미국의 1967년 예수 운동을 통하여 일어났다. 이 많은 열렬한 젊은 신자들을 제자화하기 위한 필요는 체르노프에게 큰 시작의 전환을 가져왔다.
히브리 크리스천 미국연맹 컨퍼런스가 6일 전쟁(1967년)이 끝난 바로 며칠 후 개최됐고, 놀라운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는데, 하늘로부터 온 놀라운 변화에 모두 격앙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메시야의 귀환 시까지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통제 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쳐왔다. 신학의 재정비가 요구되었다.
마틴과 요한나 체르노프는 그들의 젊은 양무리들을 위해 하나님의 마음을 들으려 하였다. 유대인의 전통적인 방식을 버릴 의사가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으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970년 마틴은 환상을 받았다. 두 단어가 깃발 모양으로 하늘을 가로질러 장식되어 있었다. ‘Messianic Judaism'(메시아닉 유대 신앙).
체르노프는 메시아닉 회중모임의 리더로 섬기게 되었다. 그리고 메시아닉 유대인 미국연맹이 출발하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혁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유대인 정체성의 더 열렬한 표현을 향한 종교적, 철학적 관점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마티 왈드맨과 같은 사람도 그와 같은 시도를 하였다. 그는 텍사스 달라스에 메시아닉 회당을 세웠다. 대니얼 저스터는 70년대에 메시아닉 유대인 회중 연합회장이 되었고 80여개의 회중모임을 이끌었다. 그 후 저스터는 이스라엘과 구 소련의 언약의 동반자들과 함께 미국의 회중모임들을 감독하는 티쿤(회복) 네트워크를 돕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은 1967년 이후에 존재하기 시작했다.
V. 공산주의 몰락 - 복음주의의 진보
1980년대의 메시아닉 유대신앙은 예슈아 믿음에 대한 모나지 않는 유대인식 표현을 개발하는데 필연적으로 관계했다. 또한 1세기 메시아닉 공동체의 필수적인 요소인 사도적 사역이 등장했다. 90년대 초 공산주의 몰락 후 놀라울만한 영적 갈급이 동 유럽 안에 표면화되었고, 그것은 추수를 위해 무르익은 들판이 되었다. 엔터 조나단 버니스는 많은 동유럽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심어 주어려는 비전을 갖게 되었다. 그는 유대인들의 문화 축제를 돕고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돕기 시작하여 많은 이들이 메시야를 받아들이게 됐다.
오늘날 메시아닉 회중교회들은 캐나다, 서유럽, 남미, 뉴질랜드, 호주 등에서 번창하고 있다. 이 회중교회들은 그들의 공통된 믿음 안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모인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는 교회들 안에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회복을 위해 각성하고 있다. 아랍인들 사이에서도 구원은 유대인으로부터라는 인식이 커져 가고 있다. 조셉 술람은 히브리어로 예배하는 9개의 회중교회가 예루살렘에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가정교회들도 있다. 이스라엘에 100여개의 교회가 존재하고 있다.
1967년에는 메시아닉 유대인 회중교회가 세상에 없었다. 크리스천 투데이는 현재(2001년) 350개의 메시아닉 교회가 있다고 한다. 1967년에는 유대 신자들이 2,000명이었지만, 1990년에는 100만명이 넘게 되었다. 메시아닉 회중교회는 유대인 신자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확신하여 자신들의 유대인 뿌리와 결속하고 있는 언약의 이방인 동반자들도 있다.
VI. 적대 세력 가운데서의 성장
초기에는 격렬한 저항이 있었다. 때로는 폭탄과 위협과 죽음의 협박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지역에 메시아닉 교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이 신흥종교를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구 소련권 안에서도 적대세력 또한 잔인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믿는 유대인들은 시민권도 거부당했고, 구타를 당하고 건물이 포위당했다.
초대교회 시기에 모습과 비슷한 양상이 펼쳐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나사렛 사람들’은 그 땅에 머무르기 위해 지금 돌아오고 있다.
VII. 새로운 일
이러한 회당들이 세워지면서 많은 질문이 있어 왔다. 유대인 유산의 어느 부분이 유지되어야 하고 어떤 부분이 버려져야 하는가? 회당 안에는 어떤 것들이 있어야 하고, 어떤 종류의 예배 음악이 있어야 하는지? 회당 지도자들은 랍비라고 불려야 하는지? 유대인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으면서 (이방인)교회로부터 얼마만큼 받아들여야 하는가? 어떻게 이방인과 연합하면서 유대인으로 남을 수 있는가?
대니얼 저스터는 반드시 랍비식 유대 신앙이 성서적인 믿음과 같은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랍비교리는 인간 이성과 섞인 계시로 대체되어 심하게 이탈되었다고 말한다. 메시아닉 유대인들은 랍비식 유대인들이 아닌, 성서적 새 언약의 유대인들이라고 했다. 유대인의 삶과 관습의 배경 안에서 믿음의 충만함을 반영할 더 창조적인 요소들의 생산을 격려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질문들에 항상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각 연맹들은 서로 의견 차가 크게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성숙과 은혜가 증가하면서 이 운동들은 회복을 가져오고, 오늘날 새롭게 회복된 교제를 나누고 있다. 교회도 이 부활한 공동체를 계속 평가해 왔다. 릭 조이너는 처음에는 교회로부터 거리를 두는 메시아닉 운동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나중에는 그러한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했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관계성의 단계는 처음에는 공존이요, 다음에는 독립이며, 마지막에는 상호의존이다. 공존 단계에서는 약한 성격이 강한 성격 안에 삼켜져 버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독립의 단계를 거친 후에야 상호의존이라는 최상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메시아닉 운동은 그들의 정체성을 확립할 때까지 교회로부터 독립하는 상태가 필요했었다.
우리 시대에 많은 유대인들이 메시야에게 돌아오고 있고 하나님의 언약을 다시 확증하고 있다. 우리는 유대인들의 눈이 열리는 이사야의 비전의 성취를 보고 있다.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것을 보고 있다. 예수님은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눅 21:28)고 하셨다. 주님은 그분이 사랑하시는 이스라엘 없이 역사의 커튼을 닫으려 하지 않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