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반정과 폐위, 쓸쓸한 말년
광해군의 재위 15년 동안 정권을 장악했던 대북파는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옥사를 일으켰다. 때문에 살아남은 정적들은 은인자중하면서 복수의 기회를 노렸다. 급기야 1623년 서인인 김류와 이귀, 김자점 등이 과거에 죽은 능창군의 형 능양군과 손잡고 인조반정을 일으켜 대북파를 제거하고 광해군을 폐위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들의 반정 명분은 광해군이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거부했으며, 형제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폐모하는 등 패륜을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하루아침에 임금에서 왕자로 강등된 광해군은 강화도에 유폐되었다. 당시 인목대비는 아들 영창대군을 죽이고 친정을 멸문지화시킨 광해군에게 원한을 품고 그를 죽이고자 했지만, 보위에 있었던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없다는 인조의 만류로 분루를 삼켰다.
그 후 병자호란의 패배로 삼전도의 치욕을 겪은 인조는 혹시 모를 청의 광해군 복위를 염려하여 그를 멀리 제주도에 이배했다. 그때 광해군의 아내 유씨는 광해군과 함께 귀양보내줄 것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한 뒤 1년 7개월 뒤인 1624년 10월,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유씨는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 창덕궁에 몰려든 반란군을 향해 “오늘의 거사가 대의를 위한 것이오, 아니면 일신의 영달을 위한 것이오?”라고 힐난했던 여걸이었다.
그 후 광해군은 피붙이 하나 없는 제주 땅에서 홀로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 1641년(인조 19년) 7월 1일,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 땅의 피폐한 민생에 한 줄기 희망을 뿌렸던 조선의 빛은 그렇게 바닷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