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삶은 고단하고 곤궁하다. 지금까지 뭐 하나 맘 먹은대로 풀려본 적이 없고, 현재의 형편 또한 그날이 그날이며, 앞으로도 뾰족한 수가 생길 것 같은 싹수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당신은 욱일승천의 기세로 탄탄대로만을 걸어온 걸출한 인물에게서 한 줄기 희망을 읽겠는가. 아니면 늘 패배하면서도 울음 한 번 삼키고 땀 한 번 훔친 뒤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잡초 같은 사람에게서 따뜻한 위안을 얻겠는가.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수많은 ‘당신’들을 위해 지난주 영화 한 편이 개봉됐다고 한다. 이름하여 ‘슈퍼스타 감사용’. 이 영화는 1982년 프로야구 원년 15승65패라는 ‘경이적인’ 기록으로 꼴찌팀의 대명사가 된 삼미 슈퍼스타즈에서도 1승15패1세이브의 또다른 경이적인 기록을 남긴 감사용 투수의 감투정신을 그린 것이다. 주인공인 감사용(48)을 경남 창원에서 만났다. 그는 야구를 그만둔 뒤 식당 주인과 초등학교 야구감독 등을 거쳐 지금은 창원시 대방동에 있는 할인마트 관리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 TV출연등 정신 없지만 기분 짜릿 -
연일 쇄도하는 언론 인터뷰 및 방송출연 요청 등으로 정신이 없다는 감사용은 “지금 심정이 프로야구 입단 전 창원의 삼미특수강 직장야구팀 투수로 우승한 뒤 마산어시장에서 동료들과 생선회에 소주 한 잔 걸쳤을 때만큼 기쁘고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야구도 그렇고 인생도 그렇지만 세번 오는 기회 가운데 한번만 살리면 성공이듯이 자신은 프로야구와 음식장사에서 살리지 못했던 기회를 50살 문턱에서 얻은 것 같아 참으로 감격스럽다는 것이다. 그는 “유명해지는 건 좋은데 인터뷰 등 ‘외도’로 시간을 지나치게 뺏기는 것 같아 자신을 믿고 자리를 맡긴 사장님에게 죄송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삼미 슈퍼스타즈를 소재로 한 책이 출간되고 이번 영화가 만들어지는 등 ‘꼴찌’를 향한 대중들의 애정과 환호에 대해 그는 제2의 IMF라는 작금의 시대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진단도 내놓았다. 감사용은 “다른 팀과의 뚜렷한 실력차를 극복하기 위해 비아냥과 수모 속에서도 묵묵히 노력했던 삼미 선수들의 눈물과 땀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지 말고 꿈과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오늘을 있게 한 삼미팀에 대한 애정과 좀더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던 것에 대한 회한도 드러냈다. 삼미는 프로야구 6개 구단 가운데 가장 늦게 창단됐으며 선수층도 얇아 페넌트 레이스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는 등 ‘준비가 덜된 팀’이었으며, 어떻게 보면 ‘아마추어적인 정신으로 프로에 도전했던 무모함’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열악한 조건에서도 선수들은 서로 형제애와 같은 끈끈한 연대감을 갖고 있었으며 꼴찌에서 벗어나기 위해 뭔가 해보자는 기류가 늘 존재했다고 한다. 특히 컨디션이 좋을 경우 강팀을 큰 점수차로 이기는 바람에 ‘도깨비팀’이라는 별명도 얻었다는 것이다. 감사용은 “지금 와서 생각하면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하면서 “삼미 응원가가 된 ‘연안부두’를 목청껏 부르면서 승리를 기원했던 인천팬들에게는 죄송스러울 뿐”이라고 말했다.
영화에서는 극적 효과를 위해 자신이 ‘패전처리용 투수’로 묘사됐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그는 거듭 강조했다. 이미 큰 점수차로 질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패전처리’를 위해 등판했다면 어떻게 15패가 기록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지금은 투수들이 선발, 중간계투, 마무리 등으로 역할이 정확하게 나뉘어 있지만 프로야구 출범 초기만 하더라도 그런 구분이 없었다고 한다. 1승15패라는 성적이 초라한 것이긴 하지만 ‘이미 패배한 게임을 뒤치다꺼리하다가 생긴 것이 아니라 때로는 선발로, 때로는 마무리로 등판하면서 힘껏 던졌으나 승리하지 못한 데서 얻은 기록’이라 부끄럽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 삼미선수들 잡초정신이 희망 던졌으면 -
감사용은 프로야구 선수로는 유일하게 직장인 야구선수 출신이었다. 그를 제외한 모든 선수들이 고교, 대학, 실업에서 한가락씩 했다는 위세(威勢)를 업고 있었지만 그는 고교·대학에서 야구를 했지만 졸업한 뒤 한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그곳의 동호인 야구팀 투수를 했던 것이다. 그런 ‘동네야구’ 출신이 미국 프로야구를 거친 당대 최고의 투수 박철순과 맞대결을 펼쳤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감사용은 “박철순 투수를 포함해 윤동균, 신경식 등 거물타자들이 즐비한 OB 베어즈와 만났을 때 ‘그래, 나도 직장야구에서는 최고였다. 한번 해보자’는 오기가 생겼다”고 말했다. 매서운 각오로 임한 그는 5회까지 OB 타자들의 진땀을 빼게 했지만 결국은 지고 말았다.
감사용의 유일한 1승은 부산 구덕구장에서 있었던 롯데와의 경기에서 거둔 것이다. 선발 등판한 그는 7회까지 호투하고 후배인 이동철에게 마운드를 넘겼는데 경기가 끝난 뒤 이동철이 다가와 ‘사용이형 1승 축하합니다’라고 말해 줘서 자신이 프로 데뷔 이후 처음으로 승리를 거뒀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감사용은 “이런 게 승리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찡했다”고 말했다.
승리를 거두진 못했지만 그가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경기는 당시 호화타선을 자랑하던 삼성 라이온즈와의 일전이다. 2-4로 지고 있던 상황에서 구원등판한 그는 8, 9회를 무실점으로 막았다. 특히 9회에서는 장효조-이만수-허규옥으로 연결되는 삼성의 막강 클린업 트리오를 모두 삼진으로 처리하는 발군의 피칭을 선보였다. 9회가 끝난 뒤 마운드에서 내려오니까 삼성의 천보성 1루코치가 ‘감사용, 나이스 피칭!’이라며 환한 표정으로 격려했고 그는 꾸벅 인사를 보냈다. 그에게 삼진을 당했던 장효조나 맞대결을 펼쳤던 박철순 등 당시의 스타들은 ‘슈퍼스타 감사용’ 시사회에도 참가했고 이들의 따뜻한 격려 속에서 스크린을 응시하던 감사용은 끝내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선수들의 감투정신에도 삼미는 극도의 부진 끝에 팀이 해체됐고 그는 잠시 OB에 머물다가 평범한 생활인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야구만을 생각했고, 야구에 모든 것을 걸었던 감사용에게 현실의 벽은 프로야구 강팀들의 벽 이상으로 높았다. 두번이나 식당을 차렸고, 장사로 모은 돈을 주식에 투자했다가 큰 손해를 보기도 했다. 마산시내 초·중학교 야구팀에서 어린 선수들을 지도하는 한편으로 직장야구협회 일을 보기도 하다가 3년전 지금의 할인마트 관리부장을 맡았다. 감사용은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나 머릿속은 야구로 가득찼다”면서 “기회가 되면 모교인 마산고에서 후배들을 가르치고 싶다”고 말했다.
- 영화속 ‘매표소 여직원’ 아내 아니다 -
감사용은 “그동안 우여곡절 속에서 마음 고생을 많이 한 아내가 병을 얻어 지금도 병석에 있다”고 말했다. 인천야구장 매표소 여직원 ‘은아씨’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는 영화 장면이 떠올라 ‘그 은아씨가 지금의 부인이냐’고 묻자 그는 “인천 출신은 맞는데 매표소 여직원이 아니라 친지의 소개로 만나 결혼했다”면서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은아아파트’일 뿐”이라고 말했다.
56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난 감사용은 초등학교 시절 고무공 멀리 던지기에서 항상 전교 1등을 차지했다고 한다. 진해중 2학년 때 처음 야구를 시작한 그는 마산고에 특기생으로 진학해 야구를 계속했으나 팀이 전국 4강에 들지 못하는 바람에 대학 진학을 못하고 인천체육전문대에 들어갔다. 인천과의 첫 인연이었다.
졸업후 육군에 입대한 감사용은 틈만 나면 개인 체력훈련을 하는 등 야구에 대한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제대한 뒤 삼미특수강에 입사해 관리직으로 일했던 그는 어느날 삼미 선수들이 진해로 전지훈련을 온다는 얘기를 듣고 선수들의 가이드를 자청해 훈련장에서 ‘내 피칭을 봐 달라’며 간청을 했다. 당시 왼손투수가 없었던 삼미팀의 박현식 감독은 비록 171㎝의 단신이었지만 기본기가 탄탄한 그를 두말없이 합류시켰다.
감사용은 이미 창원의 명사였다. 물건을 구입하러 온 동네사람들은 모두 ‘영화 주인공’인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했고, 마트의 직원들은 그를 ‘부장’이라는 직함 대신 ‘감독님’으로 부르고 있었다. 초·중·고 팀의 감독을 맡은 적이 있는데다 ‘고향을 빛낸 야구인 감사용’에 대한 각별한 예우로 읽혀졌다. 할인마트 입구 곳곳에 붙어있는 ‘슈퍼스타 감사용’ 영화 포스터 앞에서 포즈를 취한 감사용은 “이제 진짜 슈퍼스타가 된 것 같다”며 사람좋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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