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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동서문학>, 2014년 겨울호
세월호와 문학
맹문재
1
2014년 10월 22일 현재,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지 190일째이다. 아직도 바다 속에서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있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월호의 참사로 인해 희생된 이들이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유족들의 간절한 바람을 정부나 여당 의원들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과연 국민을 보호하는 국가가 우리에게 존재하는지, 국민의 안전이 미래에 보장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무기력과 무책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으면서도 뻔뻔하게 감추고 변명하는 정부의 모습을 보면서 절망을 넘어 분노가 치민다.
여야 간 세월호 특별법을 제정하기로 합의해 어떠한 형식으로든 타협안이 나오겠지만, 참사의 진상이 제대로 규명될 것이라고 믿는 국민은 거의 없다. 정부는 세월호 관련 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을 방해하고 감시하고 체포하는 데서 보듯이 참사 자체를 불순한 사건으로 몰아가고 있다. 또한 참사와 관련된 집회를 금지시키기 위해 불심검문을 강화하고 인터넷을 감시하고, 어버이 연합이며 서북청년단이며 엄마 부대 같은 유령 집단의 횡포를 방관하고 있다. 심지어 참사의 진상을 요구하는 시민들을 빨갱이로 몰아가는 왜곡에 할 말을 잃는다.
어느덧 세월호 참사는 국민들에게 피로감의 누적으로 인해 무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유족들을 비롯해 의식 있는 시민들이 여전히 단식 농성을 하며 무책임한 정부에 맞서고 있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생업에 쫓기고 있다. 언론도 마찬가지이다. 보수적인 언론은 처음부터 세월호의 문제에 소극적이었지만 다른 언론들 역시 매일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을 제쳐두고 세월호의 참사를 다룰 수는 없다. 이것이 정부가 의도한 전략이 아닐까?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낼 것, 그러면서 지엽적인 일들을 부각시켜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옮길 것, 그러다보면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유족이며 시민들이 제풀에 지쳐 쓰러질 것, 이러한 전략을 세운 것은 아닐까?
그렇지만 사회적 정의감을 가지고 항의 집회며 단식 투쟁을 하는 시민들이 여전히 있다. 가톨릭 신도를 비롯한 종교인들, 영화인을 비롯해 가수나 화가나 작가 등의 예술인 등도 동참하고 있다. 세월호의 참사를 시로 쓴 시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정부는 저항하는 시민들과 종교인들과 예술인 등을 집요하게 방해하고 교묘하게 감시하고 있지만 굴복하지 않고 맞서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의 문제가 작가들에게 대두된다. 어떠한 형식으로 맞서야 하는가? 어떻게 역사적 사실을 창작의 영역으로 결합시킬 수 있는가? 세월호의 참사는 상상력이나 형식 차원을 넘는 거대한 비극이다. 따라서 역사적 관점으로 인식하고 창작하는 것이 요구된다.
이와 같은 면은 이기호의 소설 「나정만 씨의 살짝 아래로 굽은 붐」에서 가능성을 볼 수 있다. 이 소설은 용산 참사라는 역사적 사건을 창작의 영역과 결합시켜 조명한 작품으로 사회적 정의의 필요성을 새롭게 제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2009년 1월 19일 오전 5시 무렵, 일군의 사람들이 서울 용산구 한강로 2가에 위치한 4층짜리 남일당 상가 건물 옥상을 점령하였다. 그들은 재개발로 인해 그곳에서 쫓겨나게 된 중국집 주인, 호프집 주인, 백반집 주인 같은 세입자들과 그 가족들이었으며, 남의 동네 딱한 형편을 듣고 아무 조건 없이 도우러 간 또 다른 지역의 철거민들이었다. 후에 검찰의 공소 사실에 따르면 그들은 그날 그곳 옥상에 4층짜리 망루를 지었으며,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재개발조합 측에서 고용한 철거 용역들에 맞서 저항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최소한의 이주 보상이었다.
망루 농성이 시작된 지 하루가 지난 2009년 1월 20일 새벽 6시, 테러 진압을 목적으로 창설된 경찰특공대가 남일당 건물에 전격 투입되었다. 작전을 위해 100톤짜리 크레인 한 대와 특수 제작된 컨테이너 한 대가 동원되었다. 컨테이너에 특공대원들을 태워 옥상으로 올려 보내는 작전이었다. 본래 계획은 100톤짜리 크레인 두 대와 컨테이너 두 대를 이용, 양쪽 방향으로, 한쪽은 망루 지붕을 걷어내고, 다른 한쪽은 출입문 쪽으로 진입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당일 새벽, 약속한 크레인 기사가 잠적하는 바람에 작전은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훗날, 1심 재판에 검사 측 증인으로 나온 경찰특공대 1제대장은 원래 계획한 작전대로라면 참사를 면하거나 희생자들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거라는 취지로 진술했다. 철거민 측 변호사는 그것이 바로 성급하고 무리한 작전의 증거 아니냐고 물었다. 1제대장은 자신은 상부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크레인은 오전 7시와 7시 20분, 두 차례에 걸쳐 경찰특공대원들을 남일당 옥상으로 올려 보냈다. 특공대원들은 물포를 쏘며 각각 방패조와 플래시조, 소화기조 등으로 역할 분담을 한 채 망루 안으로 진입했다. 하지만 그들은 망루 안에 세녹스 20리터 60통이 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며, 도대체 몇 명이 그 안에 있었는지도 알지 못한 상태였다. 그들은 그저 지시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었다. 지붕 처마 밑에서부터 시작된 불길이 벽 모서리를 따라 망루 전체로 옮겨 붙은 것은 오전 7시 21분, 불이 붙은 망루가 무너진 것은 오전 7시 45분, 소방관들이 옥상에 올라가 망루를 해체한 것은 오전 8시 30분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세 시간이 흐른 후, 경찰은 불에 탄 망루를 수색해 세입자 두 명과 전철역 소속 회원 세 명, 경찰특공대원 한 명의 시신을 수습했다.
이것은 그날 오지 않은 크레인 기사 이야기다.
― 이기호, 「나정만 씨의 살짝 아래로 굽은 붐」1)
용산참사는 2009년 1월 19일 용산 재개발 지역 철거민 세입자 30여명이 한강로변 남일당 건물의 옥상에 올라가 망루를 짓고 농성을 하자 1월 20일 6시 45분 경찰이 컨테이너에 경찰특공대를 태워 옥상에 올려보내 진압하는 과정에서 화재가 일어나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 1명이 사망하고 23명이 부상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은 철거민과 재개발 조합 사이의 보상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였다. 재개발 조합 측은 세입자에게 휴업보상비 3개월분과 주거이전비 4개월분의 지급을 제시했지만, 세입자들을 그 정도의 보상비로는 생계와 주거 생활을 할 수 없다고 맞섰다. 이와 같은 갈등은 부동산 광풍을 일으킨 서울시의 무분별한 재개발 사업으로 발생되었다. 서울시는 도시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용산 4구역의 재개발 사업을 추진했는데, 40층 규모의 주상복합 아파트 6개동(493가구)이 들어설 계획이었다. 그리하여 개발 기대감으로 주변의 땅값이 상승해 상인들의 장사가 힘들어졌고, 도시정비 사업과 관련된 법제가 분명하지 않아 주거이전비를 지급하지 않는 등 불법 행위가 행해지고 있었다. 그 결과 보상비의 문제를 둘러싸고 인명 피해까지 낳은 것이다.
「나정만 씨의 살짝 아래로 굽은 붐」은 용산참사의 그 상황을 의외의 형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마치 소설의 구성을 포기하고 신문기자가 쓴 기사와 같은 문체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용산 참사가 일반적인 소설 형식으로는 담아내기 힘든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새로운 형식을, 즉 규범적인 소설의 구성을 포기하고 새로운 구성으로 작품화한 것이다. 결국 용산 참사라는 비극적 사건을 회피하지 않고 작가 정신을 발휘하여 알리고 있는 것이다.
「나정만 씨의 살짝 아래로 굽은 붐」의 사건 전개가 용산 남일당 상가 건물에 일을 하러 가다가(옥상에 망루를 친 채 농성하는 철거민들을 진압하는 일인지 몰랐다.) 발길을 돌린 크레인 기사 “나정만” 씨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것도 마찬가지이다. 소설을 쓰기 위해 “나정만” 씨의 이야기를 들으러 온 소설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소설가의 발언은 일체 생략된 채 “나정만” 씨만 말하고 있다. 두 인물의 대화가 아니라 “나정만” 씨의 발언만 작품의 형식으로 또 문장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면 역시 용산 참사를 일반적인 소설 형식이 아니라 새로운 형식으로 다루려는 작가의 의도로 볼 수 있다. 결국 작가는 무분별한 재개발 사업에서 보듯이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새로운 소설적 장치로써 대항하고 있는 것이다.
용산 참사는 물신화된 자본주의 체제의 냉혹함을 여실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자본주의 체제에 종속된 경찰은 철거민들을 마치 테러 집단처럼 여기고 진압했다. 아무리 철거민들이 불법적인 농성을 하고 있더라도 국가는 국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국가는 기본적인 의무를 포기하고 오히려 비인간적이고 반인권적으로 국민의 생명을 빼앗았다. 농성하는 망루에 불이 붙어 뛰쳐나오지 못한 채 시커멓게 타죽은 철거민들의 처참한 모습에 과연 국민을 보호하는 국가가 존재하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2014년 4월 15일 오후 9시】여객선 세월호가 인천여객터미널을 출항했다. 당초에는 6시 30분에 출발 예정이었으나 안개가 짙어 늦게 출발했다. 안산 단원고 학생 325명, 교사 14명, 선원 26명, 일반 승객 등 459명이 탑승했다. 차량 180대, 화물 3,608톤도 실었다.
【2014년 4월 16일 8시 48분】 급격한 변침이 발생했다. 맹골수도를 빠져나온 세월호는 1차 변침한 뒤 140도에서 150도로 급격하게 돌아갔다. 배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8시 50분, 단원고 교감은 갑자기 좌현이 기울어 침수가 발생했다고 학교에 보고했다. 8시 52분, 최덕하 학생이 전남 소방본부에 최초로 “살려주세요! 여기 배가 침몰하는 것 같아요!”라며 신고했다. 8시 55분, 세월호가 제주 해상교통관제센터(VTS)에 구조 요청을 했다. 제주 관제센터는 12분이 지나서야 진도 관제센터와 해경 122 신고센터로 연락했다. 가까운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를 두고 먼 곳으로 구조 요청을 하는 바람에 귀한 시간이 낭비되었다. 8시 56분, 선내에서 움직이지 말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9시 01분, 세월호의 승객 안내 담당자가 인천의 청해진해운 관계자와 통화했다. 이후 6차례에 걸쳐 승무원과 인천․제주의 청해진해운 관계자와 통화했다. 이준석 선장도 통화했다. 9시 07분, 세월호는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와 31분간 11번 교신했다.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는 “최대한 나가서 승객들에게 구명동의 및 두꺼운 옷을 입도록 조치하라”고 전했지만 “승객이 탈출하면 구조가 바로 되겠느냐”고 반문만 했다. 관제센터의 탈출 권고를 무시하고 승객을 탈출시키지 않은 것이다. 9시 10분, 세월호 안내실에서 배가 기울고 물건들이 쓰러지자 조타실의 지시로 5~10분 간격으로 방송했는데, 승객들에게 제자리에 있으라는 것이었다.
【9시 19분】와이티엔(YTN)이 “진도 부근 해상 500명 탄 여객선 조난 신고”라는 속보를 자막으로 보도했다. 9시 20분, 전남소방본부는 단원고에 공식적으로 사고 소식을 통보했다. 9시 23분,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가 세월호에 탈출을 지시했지만 세월호는 방송이 불가능하다고 거짓말을 했다. 육성으로라도 전파하라고 지시했지만 9시 38분까지 구명동의를 확인하라는 지시만 내렸다. 9시 27분, 목포해경의 헬기 B-511이 사고 현장에 도착했다. 이후 제주해경의 B-513, 목포해경의 B-512호 역시 도착했다. 선체 안팎에서 승객 35명을 구조하고, 구명 뗏목 1개를 투하했다. 그렇지만 해경 항공구조사 3명은 선체로 진입하지는 않았다. 9시 30분, 사고 지역으로부터 20~30㎞ 떨어져 조업 중이었던 어선 20여 척이 수협 통신국의 구조 요청을 받자마자 조업을 중단하고 사고 장소로 가 물에 빠진 학생들과 승객들을 건져냈다. 9시 31분, 안전행정부가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 관리 센터장에게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로 상황을 알렸다. 문자 메시지로 전달할 상황이 아니었다. 9시 32분, 해경 경비함 123정이 도착했다. 9시 37분, 세월호가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에 “좌현 60도로 기울어 좌현으로 간 사람만 탈출을 시도했으나 이동이 쉽지 않다”고 전하면서 교신이 끊겼다.
【9시 38분】승객들은 해경이 도착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선내에 대기하라는 안내방송을 믿고 기다렸다. 9시 39분, 세월호 기관장과 기관부원 7명은 해경 구조선을 타고 탈출했다. 조타실에 있던 승무원들도 도착한 해경정을 타고 탈출했다. 9시 39분, 경찰청 위기관리실에서 “육경에서 도와줄 게 없냐”고 묻자 해경은 “전원 구조 가능하며, 우리 해경과 해군이 다하고 있으니 괜찮다”고 지원을 거부했다. 사고 현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9시 41분, B-511 헬기는 선실 밖으로 나온 승객 6명을 태운 뒤 사고 현장에서 6.3㎞ 떨어진 서거차도 방파제에 내려놨다. 다시 사고 해역으로 돌아가 6명을 살려냈다. 또다시 돌아갔을 때 세월호는 바다 속으로 잠기고 있었다. 9시 46분, 조타실에 있던 승무원들은 해경이 던진 밧줄을 타고 내려와 구조되었다. 이준석 선장도 속옷차림으로 구조되었다. 9시 50분, 해경 경비함 123정은 승객 80명을 구조했다. 이후 구조한 승객 79명을 완도군청 행정선에 인계했다.
【9시 54분】세월호가 64도 이상 기울며 좌현이 완전 침수됐다. 해경 123정은 선수를 여객선에 접안하고 밖으로 나온 승객들을 한 명씩 구조했다. 지휘부는 123정에 선내 진입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경사가 심해서 올라갈 수 없다고 거부했다. 10시 00분,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이 인력과 장비를 최대한 활용해 인명 피해가 없도록 구조에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10시 00분, 안전행정부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꾸리고 1차 공식 브리핑을 진행했다. 오전 10시 기준 약 110명이 구조되었고, 정확한 사고 발생 시각과 사고 원인이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10시 01분, 10시 이후까지 배 안에 갇혀 있다가 탈출한 승객도 있었다. 그 시각까지 해경은 밖으로 나오라는 방송을 하지 않았다. 10시 11분, 그때까지도 아이들은 구조를 기다렸다. 10시 17분, 세월호 침몰 직전인데도 해양경찰청은 서해해경청과 목포해경에 차분하게 구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0시 17분, “기다리라는 안내 방송 이후 다른 안내 방송을 안 해준다”고 선체 내부에서 마지막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10시 21분, 뒤집어지고 있는 우현 난간에서 학생들 40여 명이 탈출해 구조되었다. “대기하라”는 지시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판단으로 바깥에 나온 승객들이었다. 10시 30분, 안전행정부 장관은 세월호가 침몰했다는 사실을 듣고도 경찰 간부 후보 졸업식에 참석해 자리를 지켰다.
【10시 31분】세월호가 완전히 뒤집혔다. 인천 여객터미널을 출항한 지 13시간 31분만의 일이었다.2)
3.
「Daum 세월호 72시간의 기록」으로 남아 있는 화면들을 바라본다. 짙푸른 바다 위에 떠 있는 세월호, 시간이 지나면서 기울고 있는 세월호, 긴박했던 상황들…….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세월호가 우리의 눈앞에 있었다는 것이다. 구조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치도 없이 침몰하고 마는 세월호의 모습을 생방송으로 보면서 국민은 망연자실했다. 수백 명의 국민이 탄 배가 속수무책으로 가라앉는 모습에 비참함과 슬픔과 분노로 주저앉고 만 것이다. 유치원생의 수련원이 무너지고 백화점이 무너지고 다리가 무너지고 지하철에서 화재가 발생하고 급기야…….
정부의 관료주의와 무사안일주의는 구조 활동에 혼란과 방해를 가져왔다. 재난에 대응하는 현장의 지휘 체계가 제대로 없어 상황을 신속하게 파악하지도 구조에 필요한 장비와 인력을 충분하게 동원하지도 못했다. 대형 사고에 대처할 수 있는 대책도 매뉴얼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유족을 대하는 정부의 무책임하고도 몰상식한 태도에 말문이 막힌다. 그리하여 세월호의 참사는 과거의 사건으로 사라지지 않고 현재의 상황을 인식시켜준다. 어두컴컴하고 무섭도록 넘실대는 바다 속에서 두려움과 불안과 공포에 떨면서 죽어갔을 아이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세월호를 삼킨 채 넘실거리고 있는 거대한 자본주의가 자각된다. 우리는 사라진 세월호 앞에서 침묵하지만 롤랑 바르트가 『사진론』에서 푼크툼(punctum)을 발견했듯이 눈으로 보는 것 이상의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다. 시인들이 눈물을 흘리고 분노하면서 시를 쓰는 것이 그 모습이다.
여자가 운다. 숨을 빼앗긴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운다. 우리가 운다. 아이가 살아올 수 없었던 모든 이유를 찾아내며 운다. 여자가 운다. 우리가 운다. 세상이 모두 없어졌다며 땅속으로 스밀 듯 운다.
생을 달리할 줄 모르고 재재재 동영상을 찍으며 웃던 아이들을 우리는 눈앞에서 생으로 잃었다. 사람들의 가슴속이 시퍼런 바닷물로 출렁이게 된 4월. 아이들의 영혼이 물길을 헤치고 빠져나와 학교로 등교한다. 국화꽃 가득한 교실에서 생의 마지막 수학여행을 한다.
엄마의 마른 입술에 아이가 입술을 포개며 ‘엄마 팔을 휘둘러 발을 굴러 물을 스스로 올려야 펌프지 마중물만 마시면 안 돼’ 여자는 녹슨 펌프가 되어 컥컥거리며 숨을 쉰다. 이제 마중물은 없다. 누가 있어 물을 길어 올릴 것인가. 아이들의 혼이 돌아갈 길을 포기하고 우는 엄마 무릎을 베고 잠든다.
사람들은 여자의 울음을 받아내며 함께 울다가 그늘을 밟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가끔 웃을 일이 있으면 웃기도 하겠지만 이후 봄꽃 냄새 배인 목소리는 모두 낼 수 없겠다. 2014년 4월 16일, 성급하게 져버린 봄꽃들. 컴컴한 바다를 향해 손을 흔든다. 무릎에 잠든 아이도 흔들어 깨운다. 아가야 이제 그만 가라 창끝 같은 세상을 그만 버려라.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 하지 마시라. 뼈에도 새기고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모두 새기마. 너희들의 빈자리를 무엇으로도 채우지 못하게 할 테다. 아이들의 신발을 가지런히 모아 세상을 향해 놓고 두고두고 아파하겠다. 아가야 너희는 이제 그만 이 모진 시대를 버려라.
― 유희주, 「세상의 전부」 전문3)
세월호의 참사로 인해 “숨을 빼앗긴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우는 “여자”의 비극은 당사자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눈앞에서 세월호를 지켜본 “우리” 역시 울 수밖에 없다. “아이들을” “눈앞에서 생으로 잃었”기에 “세상이 모두 없어졌다며 땅속으로 스밀 듯” 절망하는 것이다. 따라서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 아이들을 “뼈에도 새기고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모두 새”겨야 한다. 아이들의 “빈자리를 무엇으로도 채우지 못하게” 하고, “아이들의 신발을 가지런히 모아 세상을 향해 놓고 두고두고 아파”해야 한다.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황이지만,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갚기 위해 아픔을 최대한 간직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이들을 바닷물에 빠트린 자본주의와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대항하는 길이다.
세월호 참사의 근본적인 원인은 국민의 안전조차 무시하고 이익만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가 우리 사회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국가는 신자유주의가 유혹하는 자본의 이익을 거부하지 못한 채 어느덧 동업자가 되어 있다. 국가의 시녀인 보수 언론과 종교 단체와 학자 등도 결탁되어 있다. 그리하여 신자유주의 체제는 더욱 공고해지고 비대해져 세월호의 참사까지 일으킨 것이다. 세월호의 참사에서 보여준 국가의 무능함과 몰인정은 신자유주의 체제에 종속되어 그의 명령에 따랐기 때문이다. 2009년 정부가 20년으로 제한되었던 여객선 선령을 30년으로 완화하는 것으로 해운법 시행규칙을 개정한 것이 그 단적인 증거이다. 국가는 국민의 안전보다 세월호의 이익을 위해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리하여 노후된 선박과 무리한 과적과 비정규직 선원의 채용으로 인해 수많은 국민들이 희생된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이 점점 강화되고 있기에 우려가 크다. 청와대 비서관 회의에서 불필요한 규제는 제거해야 할 암 덩어리라고 말한 대통령의 말은 놀라움을 준다. 규제를 푸는 것이 노동자에게 유리한 것인지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사용자에게 유리한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규제의 완화는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기보다 사용자에게 이익을 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이익관계 차원에서 규제를 풀어서는 안 되고 국민들의 안전과 건강에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닌지, 환경을 파괴하는 것은 아닌지,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것은 아닌지 등을 우선 점검해야 한다. 그것이 국가의 존재 이유이다. 그렇지 않고 정부가 특정 이익집단을 위해 규제를 완화한다면 국가 스스로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지우는 일이다. 따라서 “아이가 살아올 수 없었던 모든 이유를 찾아내”려고 “우리”의 가슴에 상처를 내는 시인의 자세에 동참할 필요가 있다. 타락한 국가를 바로세우기 위한 우리의 연대적 저항이 필요한 것이다.
어쩌자고,
이 쥑일 놈의 땅덩어리에 태양을 다시 떠오르는 것이냐
꽃은 또 무엇하러 핀단 말이야
내가, 저것들의 살점을 저미고 뼈를 바수어
천지간에 뿌린들
아가,
네 고통의 근처에나 이르겠느냐
네가 거기서 학생증을 깨문 채 덜덜 떨고 있는데
타들어가는 목줄기에 냉수를 들이붓는
이 슬픈 짐승을 부디, 용서하지 말아라
아가,
어미는 자식과 조국을 함께 잃었구나
내가 지금껏 조국이라고 믿었던
어쩌면 사랑하기까지 했던
이 몹쓸 놈의 땅에서 이제는 검불 하나도 믿지 않겠다
어디로 떠난들 여기만 못하겠느냐
이토록 춥고 어둡고 황량하고 기가 턱턱 막히겠느냐
그러니 아가,
용서하지 말고 기억하지 말고 울지도 말아라
이따위 세상, 눈물도 아깝다
아가,
떠돌다 떠돌다 우리 다시 만나지거든
기본과 상식이 통하는 꿈같은 세상에서
풀이나 되자 돌이나 되자
그때, 그러고도 거기가 사람의 세상이었느냐고
침이나 뱉고 말자
그때까지 아가,
밥때놓치지마라어른들믿지마라깊은물에가지마라
무엇보다 아가,
너는 절대 어미로 태어나지 말아라
―박미라, 「어미는 이제 없다」 전문4)
“자식과 조국을 함께 잃었”다고 슬퍼하고 있는 시인의 모습은 세월호의 참사를 역사의식으로 인식하는 자세이다. 시인은 “지금껏 조국이라고 믿었던/어쩌면 사랑하기까지 했던/이 몹쓸 놈의 땅에서 이제는 검불 하나도 믿지 않겠다”며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있다. 국민이 국가에 바라는 바는 “기본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마련해 달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세상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고통당하고 있는 세월호 참사의 유족들을 회피하고 있는 정부와 여당 정치인들에서 보듯이 멀기만 하다. 따라서 “아가,/용서하지 말고 기억하지 말고 울지도 말아라”라고 강력하게 저항하는 행동이 필요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자본주의 사회는 시장이나 공장이나 회사 같은 경제적인 공간뿐만 아니라 대학이나 관공서나 병원 같은 공공의 영역이며 종교 같은 비세속적인 영역에도 신자유주의가 지배하고 있다. 심지어 한 개인의 이념까지도 지배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서는 이상의 세계를 상상하지 못하고 마치 공기를 마시듯 따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에 종속된 자신을 자각하는 일이 필요하다. 신자유주의가 유혹하는 이익에 몸을 싣고 있는 자신을 반성하고 극복하는 행동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올바른 정치적 선택을 해야 한다. “국민들이여! 더 이상 애도만 하지 말라! 의기소침하여 경건한 몸가짐에만 머물지 말라! 국민들이여! 분노하라! 거리로 뛰쳐나와라! 정의로운 발언을 서슴지 말라!”5)라는 한 원로 학자의 외침을 절실하게 들어야 하는 것이다. 세월호의 참사를 극복하기 위해 문학이 나서야 한다. 행동하는 문학이 필요한 것이다.
맹문재(孟文在)
시론집으로 『한국 민중시 문학사』『패스카드 시대의 휴머니즘 시』『지식인 시의 대상애』『시학의 변주』『만인보의 시학』『여성시의 대문자』, 시집으로 『먼 길을 움직인다』『물고기에게 배우다』『책이 무거운 이유』『사과를 내밀다』『기룬 어린 양들』 등이 있다. 현재 안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이다.
1) 한국현대소설학회 엮음,『2014 올해의 문제 소설』, 푸른사상, 2014, 218~219쪽.
2) 「Daum 세월호 72시간의 기록」을 요약 및 정리했다. http://past.media.daum.net/sewolferry/timeline/
3) 빈터문학동인회, The Poemcafe Quarterly, 2014년 봄호(제10호), 8쪽. WWW.poemcafe.com
4) 위의 자료집, 12쪽.
5) 김용옥, 「국민들이여, 거리로 뛰쳐나와라」, 『한겨레』, 2014년 5월 3일, 8쪽.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3554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