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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13:14-19
엘리사의 마지막 당부
14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저에게로 내려가서 그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가로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매
15 엘리사가 저에게 이르되 활과 살들을 취하소서 활과 살들을 취하매
16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왕의 손으로 활을 잡으소서 곧 손으로 잡으매 엘리사가 자기 손으로 왕의 손을 안찰하고
17 가로되 동편 창을 여소서 곧 열매 엘리사가 가로되 쏘소서 곧 쏘매 엘리사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의 구원의 살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살이니 왕이 아람 사람을 진멸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
18 또 가로되 살들을 취하소서 곧 취하매 엘리사가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땅을 치소서 이에 세번 치고 그친지라
19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가로되 왕이 오륙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도록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번만 치리이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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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때 홍수가 일어나기 전,
노아가 방주를 만들 그 당시에
잘났던 사람,
권력 있고 자신이 높다고 주장하는 사람,
자기가 스스로 멋있다고 여기는 사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홍수가 터지고 난 뒤에
그 많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노아를 못 살게 굴던 사람도,
노아를 욕했던 사람도,
모두 사라지고 남은 것은
방주를 사랑했던
노아의 말을 믿었던 여덟 식구 뿐입니다.
모든 것이 눈앞에서 사라졌습니다.
이처럼 눈은 모든 세계를 하얗게 변하게 하며
다른 것들을 사라지게 하는 효과를 줍니다.
백설 이외에는 모든 것이 사라지지요.
이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이러한 눈으로서 세상을 보시고,
노아의 홍수로 세상을 다시 한번 평가하고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이해하는
그러한 감을 갖는 것
그러한 정신을 가지고
성경을 보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누구 좀 더 주고
누구 덜 주는, 이런 것들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강도도 낙원에 갔고,
거지 나사로도 죽어서 천국에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리와 창기를 성직자보다도 먼저
천국에 보낼 수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해야 됩니다.
하나님이라는 것은
인간을 똑 같이 바라보는 데서 출발합니다.
모든 인간은 잘난 놈 못난 놈 없이
동일하게 보시면서
모두 죄인으로 보십니다.
모두가 다 죄인이기 때문에
정작 누구에게도 필요한 것은
돈이나 권력이 아니고
구원받는 것이 우선입니다.
구원받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구원받게 되면
인간이란 별 인간이 없구나 라는 사실을
구원받은 자는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에서 나올 때
애굽사람들 중에는
착한 자도 있고
똑똑한 사람, 힘 센 사람, 머리 좋은 사람,
기술 좋은 사람 등이 많았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리 머리가 좋던 어쨌든
그들은 모두, 바다에 빠져야 할 사람일 뿐입니다.
애굽사람들이 히브리인들을 추격할 때에
그들은 한번이라도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을까요.
"여호와여 제가 물에 빠져야 마땅한 자입니다."
라는 생각을 말입니다.
오히려 "저놈 잡아라 놓치지 말아라.
저 자들은 죽이고 우리는 살아야 한다."
이런 생각만 했을 것입니다.
"나는 여호와라는 하나님 앞에
바닷물에 퐁당 빠져 죽어야 될 인간 밖에 못돼!"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까요?
아마 없었을 겁니다.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은
일단 똑 같은 인간으로 만들어 놓고,
눈 온 뒤의 평야처럼
모든 평야가 모두 하얗게
눈으로 덮여 있는 것처럼,
우리는 동일하게 죄라는 시커먼 영혼 속에
너, 나 할 것 없이 덮여 있어요.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예수의 피로
우리를 하얗게 씻어 주고 건져주실 때
그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우리 중에는 이와같은 반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동일하다는 것을
증명해보시오"
저는 성경 말씀을 제시하겠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죄 값으로 죽는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6장에 보면
죄 값은 사망이고,
예수님의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하십니다.
인간이 살면서 주워 모은 모든 결과는
죽음으로 끝난다고 했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죽어야 될 인간을
영생시켜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생각을 해 주어야 됩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너, 나 모두에게 공히 적용되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죽느냐를 알고 있어야
거기에서 건짐을 받는 영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행운이요, 기적인가를
우리가 알게 되는 겁니다.
영생을 받았다는 기쁨을 말입니다.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14절에 보면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저에게로 내려가서
그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가로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라고 고백합니다.
엘리사는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앞에
산 사람이 찾아옵니다.
산 사람이 누구냐 하면
요아스 왕입니다.
그리고 죽어 가는 사람은
다름 아닌 엘리사입니다.
자, 여러분
엘리사를 잃는다는 것은
요아스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손해이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왕의 입장에서 볼 때,
다른 일반 백성이 죽는 것은
아예 관심도 없지만
엘리사가 죽는다는 것은
내가 어떻게 이 나라를 유지하고
이 나라를 보존해야하느냐하는
앞일이 난감한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 동안 요아스 왕이 누구를 의지했는가하면
엘리사를 의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평소에 남편만 의지하던
한 아내가 있다 칩시다.
남편이 세상을 뜨고 나니까
하늘이 막막하고 아득한 겁니다.
이 분은 그 동안 누구를 믿었나 하면
남편을 믿은 거예요.
남편 믿는 것을 통해서
자기는 죽음 문제에서
일단 구원받았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요즘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하기 쉽지 않습니다.
취직이 안 되니 대학원으로 도피하기도 하고,
유학이나 연수로 빠지거나
집안에서 나오려하지 안습니다.
여학생들의 경우에는 도피삼아, 시집이나 가자고 합니다.
어쨌든 죽음 문제로부터
구원되고자 하는 마음,
죽음이 없는 곳으로 도망치려고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가 해결이 된다고
보고 있는 겁니다.
내가 왜 죽느냐하는 것보다도
혹은 내가 왜 죽느냐를 알아서
진짜 죽음 그 자체에서 영생을 얻느냐.
어떻게 하나님의 일이 되느냐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죽음이 없는 곳에 도망하면
더 이상 죽음은 내 문제가 아닐 거라고
오해를 하는 겁니다.
이처럼 자꾸 교회 와서 기도하는 문제도
사실 따지고 보면
모두 다 죽음에 쫓겨서
교회로 오고,
죽음에 쫓겨서 캄캄한 기도장소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왕 주님 앞까지 왔다고 여기신다면
죽음 자체에서
우리가 어떻게 구원되고 영생이 되나
그것을 생각해야 될텐데
하나님 아버지 죽음의 그림자가
얼씬거리지도 않는 환경을 달라고
기도를 하는 겁니다.
지금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와서
내 몸이 아픕니다.
어서 죽음의 그림자를 물리치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지요.
죽음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죽음마저 극복한
새 사람으로 태어날 생각을 해야 되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신자인데,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고,
"아...세 번까지는 어떻게든 견딜 수 있겠는데
네 번째는 곤란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됩니다."
라는 식이 되면 안됩니다.
본문에 보면 이상한 연극이 하나 나옵니다.
엘리사가 죽음 직전에 유언을 남기는데
"왕이여 동편 창을 여시오,
저기 저쪽 아람군대가 있습니다.
활을 쏘세요"
왕이 세 번 쏘고 멈추니까
엘리사가 화를 내면서
"왜 다섯 번이나 여섯 번을 안 쏩니까?
왜 세 번만 했습니까?"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엘리사의 나무람과 꾸지람이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문제를 근원적으로
내가 죽음 속에 들어가도
살아나는 사람이 되어야지,
일시적으로 배고픔만 해결하고
일시적으로 환경이 나아지기만 기도한다면
앞으로 그보다도 더 악한 환경이 왔을 때
어떻게 감당이 되겠습니까?
그때는 하나님을 포기할 것입니까?
다니엘서에 보면 이런 것이 나옵니다.
다니엘에게 세 친구가 있는데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왕이
무리한 요구를 합니다.
'금 신상을 섬겨라'
다니엘 세 친구는
일종의 공무원이 아닙니까.
모든 사람은 그 왕에게 다 복종했습니다.
남은 사람은 다 복종하고
이제 다니엘과 세 친구만이 버티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지금 절을 안 하게 되면
죽음이 찾아옵니다.
절하면 어떻게 됩니까?
죽음이 일시적으로 멀어지고
월급은 계속 받겠지요.
내 생계는 계속 보장받겠지요.
그러면 절 해버리면
자기는 성공한 인생이 되겠지요.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성공한 인생입니까?
이 상태가 노아 방주 안에 들어간 인생입니까,
아니면 밖에 있는 인생입니까?
눈이 왔을 때
일시적으로 죽음을 피해서
살고자 도망쳤던 사람들은
눈 밑에 다 덮였습니다.
비록 죽음의 그늘에서
일시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겼던 사람들은
결국 죽음에서 벗어날수 없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이용한 것이지
하나님을 믿은 것은 아니에요.
끝까지 믿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교회 와서 믿어주면 복 주리라
그런 계산만 한 겁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는 하나님의 종도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도 아니고
도리어 하나님을 자기의 종으로 부려먹으려고 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하인이 된 거예요.
근원적인 문제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러 하시는데
우리들은 일시적인 도피성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덤벼든 겁니다.
뭐가 축복입니까?
계속 마귀는 따라오지요.
아람군대는 계속 따라오는데
세 번만 쳐 가지고 됩니까?
네 번째는 안 쳐들어올 나라입니까?
문제를 근원적으로 접근했던 자들은
다니엘 세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믿었던 하나님은
죽음 밖이나 안이나 변동 없이
죽음을 극복한 신앙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그 세 친구를
진짜 죽음 속 즉 용광로 속으로 집어넣었는데
분명 세 사람이 있어야 할 용광로 속에
한 사람이 더 있었습니다.
그 한사람은 누구였습니까?
평소에 그 세 친구들이 믿고 있었던
믿음의 대상, 신앙의 대상인, 그 분의 아들이
거기 있었던 것입니다.
다니엘 세 친구는 불 속에 들어가도
하나님 믿는 사람이고
불 밖에 나와도 하나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높은 사람이 명령을 해도
그 명령에 따를 이유가 없을 때는
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는 임금님보다도 더 높은 분을 의지하고 있는데 임금님의 명령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께서
나를 죽음에서 건져내실 것이고
설사 그렇지 아니한다 할지라도
내가 믿음이 있는 사람인데
당신 말에 호락호락 넘어가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죽음에서의 건지심을 주관하시는 분을
내가 믿고 있다는 것은
죽음 속에서 이제 모두 끝났다 라는 생각은
신앙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믿어야 할 것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
예수를 믿는 것이지
재미삼아 왔다갔다하는 것은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의식은
"조상이고 예수고
다 죽은 사람아니냐는 것입니다.
옛날 사람이지만
존경하기 때문에 섬기는 것처럼
예수 믿는 것은
지금 살아있어 섬기는 것이 아니고
옛날에 착한 일 많이 했던 사람을 존경하듯
믿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황당한 것은 이런 생각이
교회 목사라는 사람들에게서도 듣게 된다는 것입니다. 진짜 신앙은 죽어도 좋다가 되어야지
하나님 믿는데 나 죽으면 안 돼 라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차라리 그 사람처럼
조상이나 섬겨라 라는 말이
솔직한 태도일 것입니다.
본문 20절-21절을 봅시다.
"엘리사가 죽으매 장사하였더니 해가 바뀌매
모압 적당이 지경을 범한지라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적당을 보고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
세상에 무슨 이런 일이 다 있습니까?
지금 엘리사가 죽어 장사하고 있는데
또 다른 사람들이
자기 친척을 장례 치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모압의 강도들이 출몰합니다.
그래서 장례를 치르던 자들이
돈을 강도들에게 빼앗기기보다도
시체 빼앗길까봐 두려워서
그 시체를 얼른 엘리사의 시체가 묻혀있는
묘에 던져 버립니다.
그때 그 던져졌던 그 시체가
살아서 벌떡 살아나더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평소에 엘리사가 생각하던 하나님과
필요에 따라 엘리사를 원하는
요아스가 생각하는 하나님과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엘리사의 죽음에서 죽음만 볼뿐
부활해서 되살아난 부활의 영이 함께 있다는 것을 알려하지 않는다늗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산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요아스 왕은
엘리사 선지자가 죽는 것을
너무 안타깝게 생각하지 말고
죽어도 살아 계신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직접 통치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엘리사 죽는 것에 낙담해서
안타까워 하지말고
그 엘리사의 신앙이
나의 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죽던 엘리사가 죽던
예레미야가 죽던 상관없이
우리도 엘리사처럼
부활되고 구원될 수 있는 겁니다.
마태복음 17장을 예를 들겠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갔습니다.
세 사람과 예수님이 산에 올라갔을 때에는
그들앞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아와 예수님을
단순히 육신과 육신의 만남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계신 장소에
갑자기 하늘의 광채와 함께
현장이 바뀌어 버립니다.
거기에는 그들 외에
옛날에 죽었던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엘리야가
산 엘리야입니까. 죽은 엘리야입니까?
물론 옛날 사람이니까
시간상으로는 죽은 자입니다.
그러나 시간상으로는 사라졌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영원히 살아있는 존재가
바로 엘리야입니다.
모세도 시간적으로는 우리가 볼수없는 존재이지만
예수님 안에서는
어디든 사라지지 않고
맨 그 자리에 함께 놓여 존재,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신비롭습니까?
여러분, 이 신비를 모르면
이 세상에서 예수 믿는 사람은
제일 불쌍한 사람입니다.
예수 믿고 잘살아 보자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얽매인다면
이 세상에서 그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죽은 조상을 믿는 것이면
윤리와 도덕적 차원에서
칭찬이라도 듣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신앙의 신비를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 신비의 세계가
나의 세계가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생각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죽은 친척의 시체가
엘리사의 시체와 만날 때
그 시체가 살아났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십자가의 덕분에
여기 저기의 무덤이 터지면서
옛날에 죽었던 시체들이
살아나서 돌아 다녔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을
아라는 뜻입니다.
다니엘 세 친구가 불 속에 들어갔을 때
세 친구는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하나님의 아들이 함께 있을 때
그들은 춤을 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세계이며 신앙의 세계입니다.
돈과 명예가
자신의 미래를 보장할 것이라는 생각은,
여전히 죽음을 극복하지 못한,
그리고 홍수를 극복하지 못한
종교놀이에 불과합니다.
본문 14절 봅시다.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저에게로 내려가서
그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가로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매"
이 말씀에 보이다시피
요아스가 엘리사에게 하는 말이
당신은 필요한 존재요,
당신은 무기요,
나라를 지켜왔던 하늘나라의 군대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죽어버리면
자기는 어떻게 되냐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마병이여.
무슨 뜻입니까?
죽어 가는 엘리사가 마병이고 기병이라고
매달려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영적인 세계의 하나님의 군대와 병사는
누구도 될 수 있는 겁니다.
어떤 경우에,
우리가 어디서부터 구원을 받았는지 간에
이 인간 자체의 세계로부터 구원받았다면
우리는 이제 죽음에 대해서도
겁나지 않을 것이고
세상죽음에 대해서도 겁이 없는
늘 살아있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지금 죽어도 낙원에 간다.
오늘밤에 낙원에 간다고
늘 산 생명을 소유하고 있으면
죽음이 닥쳐도 큰 문제가 되지 않고
또 적들이 나를 쳐들어 와도
문제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 이 세상이 죽음 때문에
벌벌 떨고 있습니다 .
하나님 저를 보내셔서
죽음의 공포로부터
저들을 구원해 주십시요 라는 기도만이
성도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지금 온 세계가 온 백성들이 경제위기로
벌벌 떨고 있습니다.
저들도 나처럼 죽는 것을 생각지 말고
지금 나는 누구와 함께 살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살게되는 이 현실을
그들도 알게 해달라 라고 기도해야 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19절에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가로되
왕이 오륙 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도록 쳤으리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요아스 왕은 사명이 있습니다.
무엇이냐하면 저들은 지금도
부단히 악한 영의 사주를 받아
교회에 가도 죽음을 극복 못하고,
예수를 믿어도 부활이 못되고, 구원이 안 돼!"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위에, 학교, 직장, 가정에 수두룩합니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돈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양심도 팔아먹고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
대다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만 구원받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바로 적을 알아야 됩니다.
무엇이 적입니까?
그저 일시적으로 도피만 하면
성공한 인생인줄로 오해하지 마시고
극한 죽음에 있더라도
'나는 이미 산 사람이구나' 라고 하면서,
나는 노아의 방주에 있는 것처럼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