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리를 세우자
'교육 기부' 통해 꿈 키워주고… 훗날 '교육 기부'로 갚게 하자
[동갑내기 우등생의 ‘다른 길’] 청주의 지영씨
장학금 위해 실업高로… 학원 못 가고 독하게 공부/지역 국립대 합격한 뒤엔 주말 12시간 아르바이트
[동갑내기 우등생의 ‘다른 길’] 서울의 준호씨
어릴적 외국 생활… 중3때 外高 준비 학원 다녀
大入 위해 전과목 사교육… 명문대 국제학부 진학스무살 동갑내기 박준호(가명)씨와 박지영(가명)씨.
각각 서울과 청주에서 우등생 소리 들으며 초등학교를 마쳤다. 이후 길이 갈렸다.
준호씨는 미국으로 유학 간 아버지를 따라 뉴욕에서 유치원과 초등학교 1~2학년을 다녔다. 서울 강남에서 중학교까지 졸업하고 외고를 거쳐 올 3월 연세대 국제대학에 입학했다. 아르바이트는 안 한다. 그는 "입시 때문에 고생했으니 당분간 여유를 즐기고 싶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는 과외 별로 안 했어요. 남들 다 하는 바이올린·피아노·태권도·미술학원 정도…. 중3 때 외고 시험 전문학원에 다니면서 '학원 시대'가 열렸어요. 외고 다닐 때 평일은 학교에서 야간자습하고 주말은 새벽 1시까지 학원을 돌았어요. 어느 학원을 다녔는지 다 기억 못하겠어요. 전 과목 다 다녔거든요."
같은 시기 지영씨는 다른 고민을 했다. 조그만 공장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외환위기 직후 도산했다. 아버지는 택시기사로 일하다가 4년 전 교통사고를 내서 실직했고, 사고 후유증인 허리 디스크에 류머티즘과 통풍까지 겹쳐 몸져누웠다. 어머니는 8년 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한 살 아래 여동생까지 세 식구가 나라에서 주는 기초생활수급비(월 59만원)로 연명했다. 당장 고등학교 갈 돈이 없었다.
- ▲ 청주의 지영씨가 일식집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돌아와 단칸방에서 공부하고 있다. 그는 배경 필요 없이 실력만 있으면 합격할 수 있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다. /신현종 기자 shin69@chosun.com
◆청주여상의 '독종' 자매
지영씨는 인문계 진학을 포기하고 전액 장학금을 주는 청주여상에 진학했다. 암울했지만 '어떻게든 교사의 꿈을 이루겠다'고 결심했다.
준호씨가 새벽 1시까지 학원가를 도는 동안, 지영씨는 학기마다 어린이재단에서 지원하는 참고서로 독학했다. 오전 6시에 학교에 도착, 매일 자정까지 학교에 남아 있었다. 학원은커녕 독서실 갈 형편도 못 됐다. 사정을 들은 진학부장 교사가 아예 교실 열쇠를 내줬다.
지영씨는 가장 힘들었던 순간으로 "나보다 공부 잘하는 동생에게 '너도 상고 가라'고 권했을 때"를 꼽았다. 여동생은 "나보다 성적 나쁜 애들도 다 인문계 간다"며 서럽게 울었다.
동생도 결국 청주여상에 입학했다. 자매는 학교에서 '독종' 자매로 유명했다. 집에 오면 밥상 겸용 앉은뱅이 책상을 차지하려고 자매가 신경전을 벌였다. 이불 한 채 펴면 발 디딜 곳이 별로 없는 단칸방(26㎡·8평). 자리를 보전한 아버지가 밥상에서 '열공'하는 두 딸을 측은하게 지켜봤다.
- ▲ 연세대 글로벌 라운지에서 수업 준비를 하고 있는 준호씨. 아직 구체적인 미래 계획을 세우지 않은 그는 “(미래에 대해) 큰 걱정은 없다”고 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교사의 꿈을 접다
지영씨는 작년 10월 청주교대 면접을 봤다. "어차피 재수는 꿈도 꿀 수 없으니 단번에 붙어야 한다"고 별렀다. 그러나 정작 면접장에선 너무 긴장해 입이 안 떨어졌다. '독종' 소리를 듣던 지영씨가 면접을 망치고 돌아오는 길에서 엉엉 울었다.
지영씨는 장학금을 받고 충북대 경영학과에 들어갔다. 지난달 26일 청주 집에서 만난 지영씨는 일식집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추석 연휴 중인데도 아르바이트에서 막 돌아왔다고 했다. 지영씨는 주말마다 하루 12시간씩 일해 월 40만~50만원씩 번다.
"고 1때 '왜 우린 이렇게 사나' 싶어 우울증까지 걸렸었어요. 하지만 현실이 달라지진 않잖아요. 그래서 아예 (남과) 비교를 안 하고 살려고 해요."
지영씨는 "어려서부터 교사를 동경했지만, 이젠 다른 목표를 잡아야 한다"고 했다. 독학으로 여기까지 왔다는 자부심과 '그토록 노력했는데 1지망은 실패했다'는 좌절감이 교차하는 것 같았다. 지영씨는 7~8급 공무원 시험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
◆"딴 세상 이야기 같아요"
서울의 준호씨는 아직 구체적인 미래 계획이 없다. 전공에 대해서는 "경제학이 무난할 것 같아 그쪽으로 잡을까 싶다"고 했다. 토플 116점, 텝스 951점에 독일어 2급(우수) 자격증이 있고, '동양권 제2외국어를 이수해야 한다'는 학규에 따라 중국어를 배우는 중이다.
서울의 준호씨와 청주의 지영씨는 앞날을 생각하는 자세가 달랐다. 지영씨는 현실부터 고려했다.
"같은 공무원이라도 7~8급 대신 행정고시를 노려볼 수 있지 않느냐"고 묻자, 지영씨는 "빨리 취업해서 돈 벌어야 하니까, 시간이 오래 걸려선 안 된다"고 했다. 대기업 입사에 대해서는 "어학연수도 못 다녀왔는데…"라며 입을 다물었다.
준호씨는 여유가 있었다. 그의 동급생들은 대부분 유복하게 자라 해외에서 살다 왔다.
"제가 혜택을 많이 받았다는 걸 알아요. 태어난 가정에 따라 미래가 결정되는 건 분명히 불공평하죠. 그런데 솔직히 실감이 안 나요."
준호씨에게 청주의 지영씨 얘기를 해주자 그는 "딴 세상 이야기 같다"고 했다. 물론 공부를 열심히 했을 뿐인 모범생 준호씨에겐 잘못이 없다.
첫댓글 아직은 경주의 결승점에 오지 않았습니다.
결승점에서 우승자는 누구일까요?
많은것을 생각하게 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딸들에게 읽어줘야겠어요. 뭔가 느끼겠지요.
어제 좋은 말씀 많이 듣고 와서인지..오늘 이 글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