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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산 조견선생 묘(성남시 향토유적 3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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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견(1351∼1425)은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평양(平壤). 초명은 윤(胤). 호는 송산(松山). 시호는 평간(平簡). 부(父)는 판도판서 덕유(版圖判書 德裕) 이며, 모(母)는 오의(吳懿) 의 딸이다. 조선의 개국에 공을 세운 조준의 동생이다. 유년에 출가하여 여러 사찰의 주지를 역임하고 30세가 넘어서 환속,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안렴사(按廉使) 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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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구에서 바라 본 묘역 원경 |
▲ 우측에는 후손 묘역인듯... |
1392년(태조 1) 상장군으로 이성계의 추대에 참여하고 개국공신2등으로 평양군(平壤君)에 봉해졌다. 1394년 경상도도절제사, 1397년 지중추원사, 1403년 좌군도총제가 되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하여졌다. 공(公)은 자기 이름자를 윤(胤)에서 견(絹)으로 고쳤는데, 일부러 ‘개견 변’을 쓴 것은 ‘나라가 망해도 죽지 않는 것은 개’라는 뜻과 또는 ‘개는 주인을 생각한다’는 뜻이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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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견선생 묘역 하단에 위치한 배정선택주파평윤씨(配貞善宅主坡平尹氏)의 묘 - 조견 선생의 부인 묘인듯... |
후에 양주 청계산에서 살 때 태종이 청계산까지 친히 찾아가 권했으나 굽히지 않고 뒤에 양주의 송산에 숨어 여생을 마쳤다. 견이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이 견의 상여를 메고 가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회오리바람이 불어와 명정이 날아갔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따라가 보니 지금의 여수동 뒷골 견의 묘가 있는 곳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후손들이 이상하게 여겨 그 곳에다 묘를 썼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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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산 조견선생 묘역 전경 |
그는 임종할 때 “내 묘표(墓表)에는 고려의 벼슬 이름만 쓸 것이지 새 조정의 벼슬 이름은 쓰지말라”고 하였다. 그래도 조준이 이조의 개국공신, 호조판서라고 비석을 세웠더니 어느 날 뇌성벽력이 치며 비석을 깨뜨렸다고 한다. 견의 묘 옆에는 그의 아들 의정부좌찬성, 통정대부 趙鐵山의 묘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여기서 살게 된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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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견선생 봉분과 석물 모습. 봉분 앞의 묘비는 벼락으로 깨져서 밑둥만 남아 있습니다. |
묘역은 중원구 여수동의 해발 90m 가량 나지막한 구릉에 정서향하여 방형의 봉분 형태이며, 하단에는 같은 형태의 배정선택주파평윤씨(配貞善宅主坡平尹氏)의 묘가 안치되어 있다. 아울러 묘역에는 다수의 석물과 근래에 마련한 묘표석, 묘갈 및 신도비 등을 갖추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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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인석 |
▲ 벼락으로 깨졌다는 묘비 |
▲ 장명등도 상단이 깨졌네요 |
봉분 중앙에는 비좌와 비신이 파손된 ‘공지묘(公之墓)’ 묘표석이 높이 30㎝ 가량 잔존하는데, 문중에서 제출한 자료(『旌節詞誌(정절사지) 』, 楊州鄕校(양주향교), 2000)에는 “벼락이 깬 송산공 묘비”로 고려 관직만 넣으라는 유훈을 어기고 이조에서 내렸다는 훈관명을 넣어 세웠다가 벼락이 내리쳐서 ‘조공지묘(趙公之墓)’만 남긴 비(碑)로 소개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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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견선생 봉분 측면과 후면 모습 |
특히 묘역 주변에는 선생의 자손 묘가 소재하는데 묘 형태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묘 형태를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곳이다. 선생은 양주 수락산 기슭의 한 마을(현 의정부 송산마을)에서 75세에 생을 마감하였고, 후세에 선생의 호를 따서 송산이라 부르고 살던 터에 유허비를 세우고 지역사람들이 송산사를 중건하고, 양주에도 정절사(사천서원)을 세워 남을진, 조견 두분을 모시고 사림들이 매년 제사를 올리고 있고 , 공주에도 선생의 신주를 모신 송산사우가 있다. - 성남시청 홈페이지 내용 발췌 - |
조견선생 묘역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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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 성남시 중원구 여수동 산30 화살표 ↑ 위치에 조견선생 묘역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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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늘 좋은 자료를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광나루님. 건강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