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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제4강. 테제 10, 11
* 일시: 2024년 4월 10일(수) 오후8시.
* 참석자: 서선미, 서은혜, 정단희, 이샛별, 유혜숙, 조세랑, 박영기, 박연옥, 정명수 (9 명)
*벤야민이 생각하는 언어에 관한 핵심적 내용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숄렘의 시.
“다른 것을 상징하지 않는 나는 나 자신을 뜻합니다. 그대가 아무리 마법의 반지를 돌려도 소용없습니다. 나에게는 숨은 뜻이 전혀 없습니다.”
게르숌 숄렘 – 7월 15일에 천사가 건네는 인사 중에서.
‘인간의 언어’는 ‘언어 일반’에 부분집합처럼 포함되어 있다. 이 세계에는 인간의 언어 외에 다양한 언어가 있다. 벤야민의 생각 속에서는 생물학적 차원의 커뮤니케이션 신호들을 포함해 모든 사물들의 언어가 있다. 그 이유는 창세기 신학에 입각해서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벤야민의 논문에는 창세기를 주석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름 언어, 언어의 타락, 타락 이후의 인간의 언어 발생, 바벨탑 설화에서 나타난 언어의 분화, 언어가 점점 더 본래의 언어로부터 멀어져 파편화되는 과정, 언어가 깨지는 과정… 이처럼 인간의 언어는 어떻게 보면 산산이 깨진 언어다. (이것은 유대교 신비주의 학자인 루리아(카발라) 신학과 관련. 그릇으로 창조된 세계, 창조의 빛이 너무 강해 그릇이 산산이 부서짐)
‘언어’가 있고 ‘인간의 언어’가 있다. 애초에 이 ‘언어’는 전달하는 것이다. 언어는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전달한다. 무슨 뜻일까? 언어가 전달하는 자기 자신이 인간에겐 인식 불가능성 속에 놓여있다. 언어는 하나님이 말씀 창조이기에 모든 만물들의 고유한 언어가 있는 것. 이 만물들은 무언가를 전달하는데 그 핵심(일반)은 언어 그 자신이고 곧 ‘사물의 진리’다.
벤야민은 언어를 예술(이미지)과 관련해 생각하고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 같다. 현대 예술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깨뜨리며 대상의 의미 너머 것을 보려 한다. 그러다 보면 대상에 대한 상(이미지)이 왜곡되기 시작한다. 예술은 결코 원근법적 시선에서 대상을 표현하지 않고 흩어진다. 예술가들은 내 앞에 존재하는 사물의 본질을 표현하려고 하는데 뒤집으면 그 말은 우리가 사물을 보는 일상의 시선이 왜곡되어 있음을 폭로하는 것이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전달하는 이 순수 언어는 인간이 타락했기에(왜곡되어 있기에) 인식 불가능성에 속하는 것이다.
소쉬르는 구조주의 언어학의 장을 열었다. 그의 핵심은 ‘기의의 우위성’이다. 기호(언어로 쓰는 말들)는 ‘기표’와 ‘기의’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연필’이란 기호 글자 자체는 물질적 대상이다. 이것이 기표 ‘시니피앙signifiant’이다. 기표가 표현하려는 내용 혹은 개념이 기의, ‘시니피에 signifié’다.
라캉은 이것을 뒤집는다. 기표의 우위성을 주장한다. 기표는 물질적 대상이다. 기의는 정신적 대상이다. 기의의 우위를 주장했을 때 거기서 바로 인간의 언어가 발생한다. 인간의 언어는 표현 수단이고 다양한 문법 체계(사회적 관습)에 구속되어 있다. 그런데 벤야민은 언어가 전달하는 것은 이 사회적 관습이 맬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기표 우위성의 핵심은 무의미한 물질적 대상이야말로 인간의 언어를 진정 인간의 언어로 만든다는 것이다. 무의미한 물질적 대상이 인간의 언어에서 우위를 차지하기에 인간의 언어는 항상 잉여를 발생시킨다. 딱 떨어지지 않는다. 라캉이 소쉬르가 쳐놓은 원을 해체한 것은 이 ‘딱 떨어지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 이 잉여야말로 인간의 언어 본질을 규정하는 것이다. 잉여는 라캉에선 무의식과 관련 있다. 무의식은 불가능성이다. 인식 불가능성이다. 왜? 실재이므로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벤야민의 언어철학과 라캉 정신분석의 언어철학은 교류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벤야민의 언어철학은 신학으로부터 언어의 개념을 가져오기에 좀 더 신비주의적이다. 벤야민의 언어에서는 언어(순수 언어), 인간의 언어를 구별하는 것이 핵심적이다. 중요한 것은 사물도 무언가를 전달하는데 사물도 사물 언어가 있다는 것. 사물 언어의 본질은 언어 그 자신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물이 가지고 있는 어떤 진리다. 이 진리는 인간에겐 인식 불가능성이다. 하지만 어떤 시적 순간이라든가 변증법적 순간이라든가 어떤 모종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번쩍하면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순수 언어가 전달하려는 언어 그 자신이라는 것은 역사적 유물론자가 놓쳐서는 안되는 변증법적 이미지의 다른 이름이다.
역사의 개념과 관련해서 이것은 다시 벤야민의 성좌(별자리)라는 개념과 연결할 수 있다. 변증법적 이미지는 성좌와 같은 것으로 언어와 똑같이 포개 놓으면 안 된다. 성좌는 위상학적 이해를 필요로 한다. 역사주의자의 시간은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간다. 벤야민은 이 시간을 ‘균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이라고 규정했다. 오늘날도 역사주의 시각에서 과거의 시간은 이렇게 흘러간다. 성좌는 오늘 위기에 처한 주체에게 불현듯 잊혀졌던 과거가 떠오르고(억압과 저항의 순간) 오늘의 위기와 과거의 위기, 그리고 이 위기의 지점들이 연결이 돼서(계기의 순간들. 모멘트) 우리가 가진 지식의 한계를 뛰어넘어 상호 연결되기 시작하며 어떤 새로운 의미의 지형을 구성하고 과거의 균질적이고 공허한 순간을 폭파하는 새로운 순간을 열어준다. 이것이 벤야민이 말하는 성좌 이미지, 변증법적 이미지이다. 역사적 유물론자는 과거 시간이 흘러간 과정, 승리자의 내러티브를 폭파, 정지시키는 그런 순간을 포착해야 한다. 그런 순간이야말로 언어가 자신을 전달하는 그 전달이, 이 불가능성이 인간에게 기적적으로(마법적으로) 인식되는 순간이라 말할 수 있다.
10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한 이 글은 마치 수도원의 수사들이 세상사와 떨어지기 위해 명상하는 것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지금의 세태, 세류대로 우리는 쉽게 우리 삶을 정하고 자신과 세계의 사건과 타자들도 판단한다. 그런 흐름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사는 방식을 갖지 않으면 위기가 상례인 시대의 지배자가 우리의 삶과 죽음, 가치 있음과 없음, 아름다움과 추함을 멋대로 규정할 것이며 노예처럼 내몰리는 삶은 점점 더 강화될 것이다. 거기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역사의 개념에 대해 사고하는 것이며 유물론적 역사가가 사유하는 이유다.
‘세태로부터 떨어지는 것’의 의미는 성스러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유형의 세속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란 뜻이다. 우리는 세속적 삶을 살고 있다고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종교적이고 금욕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 종교적으로 사유하고 금욕적으로 살고 합리적으로 사고하며 너무 즐긴다는 죄의식까지 느끼며 살고 있다. 왜? 그렇게 구조되어 있는 삶 속에 우리 자신을 떼어놓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수도원의 수사들은 성스러운 삶 때문에 명상하지만 지금 유물론적 역사가는 진정한 유물론적 삶을 살기 위해 명상한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말할 때 물질이 전부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하부가 결정적이라고 주장한다. 하부는 생산력과 생산 관계로 나누어진다. 상부는 정치제도들, 국가, 문화, 종교, 이데올로기, 예술이다. 도식적으로 이야기해 보면 사회를 규정하는 것은 기본적 차원에서 생산력이다. 유물론은 경제적 하부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상부와 관련되어 있다. 마르크스에게 자본론을 쓰기 전까지 가장 중요했던 것은 독일 이데올로기였다. 이후 이데올로기 비판을 정치 비판을 통해서 했다(자본론). 자본론은 상품 개념을 규정하면서 시작한다. 상품은 자본을 구성하는 특수한 부분이지만 구체적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품을 분석하면 자본주의의 핵심적 내용이 드러난다. 상품은 독특한 사물이다.
유물론적 비판: “상부의 내용이 어떤 하부를 목표로 하고 있는가? 그것이 정신성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 시대의 정신성이란 어떤 경제적 내용을 가지고 있는가?” 상부구조의 자율성이란 개념(그람시)을 마르크스도 알고 있었다. 마르크스가 쓴 ‘고타 강령 비판Kritik des Gothaer Programms’은 상부구조 비판이다. 하부만 강조하면 경제주의적 오류에 빠진다. (독일의 사회민주주의당 정당이 생겼을 때 고타 지역에서 회의. 이 강령이 하부만 강조함으로써 어떤 위험을 안고 있고 어떻게 진정한 유물론적 철학으로부터 벗어나 있는지 그래서 유물론으로 보이나 왜 관념론이지를 비판.)
벤야민은 테제10 후반부에서 독일 사민당의 역사주의적인 태도를 비판한다. 벤야민은 독일 사민당이 억압하는 자에게 저항하는 세력으로 구성되었음에도 왜 끊임없이 패배하는지를 분석하면서 <역사철학테제>를 쓴 것. 독일 사민당은 세 분파: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분파, 카우츠키의 중도주의 분파, 로자 룩셈부르크의 스파르타쿠스(급진) 분파로 나뉜다. 벤야민이 비판하는 것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분파다. 그들은 파시즘 앞에서 무릎 꿇었고 정치적 진보에 대한 완고한 믿음을 가졌는데(역사주의 역사관) 이것은 마르크스를 진화론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물론 마르크스도 이것에 경도되었다->역사 과정은 공산주의로 끝날 것. 목적론적, 메시아적(벤야민의 ‘메이아적’과 다름) 유토피아적 관점, 역사가 목적이 있고 궁극적 유토피아를 향해 저항 불가한 방식으로 간다는 신화적 역사관. 이런 내용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가 강조한 것은 계급투쟁이다. 벤야민도 이것을 보는 것. 구체적으로 문제를 의식하고 지배자와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맞서지 않으면 역사는 끊임없이 패배한다.
*독일 사민당의 역사주의적인 태도에 경도된 정치적 실천에 대해 비판. 동일한 사항의 세 양상. 1 진보에 대한 완강한 믿음. 2 대중기반에 대한 믿음. 3 통제불가능한 제도에 노예처럼 종속되어 있는 모습(테제1에서 꼭두각시 인형은 유물론을 대표하는데 뒤에서 조정하는 것은 신학) 여기서는 기계론적인 발전관이 조정하기에 패배하고 있다는 것.
이때는 당과 노동자들의 아방가르드로서의 당. 인텔리겐차와 노동자 계급을 분류. 노동자가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방식으로는 계급투쟁에서 이길 수 없고 더 많은 물질을 가진 계급에 더 빨리 동화되기 쉽다고 봄. 혁명적 인텔리겐차가 노동자 계급을 진정한 마르크스적 계급 투쟁을 하도록 지도해야 한다. 벤야민이 이 글을 쓸 때쯤 유럽 좌파들이 기대를 걸었던 소련이 스탈린주의화 되었다. 특히 소련이 독일 파시즘과 독.러 불가침 조약을 맺음으로써 독일 좌파가 비윤리적인 결정을 한 것에 대해 강력한 비판적 시선이 일었고 벤야민도 그 사실 속에서 이것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이미 관료화되었고 노동자 집단에 군림하는 당을 이야기한 것.
11
테제 11은 파시즘 시대에 대중적 열망을 딛고 욱일승천하던 사회민주주의가 터무니없는 패배에 빠져 노동자 뿐 아니라 모든 인민들을 어떻게 위기에 빠뜨리고 있는지 성찰하고 있다. 물질이 풍부해지면 인간은 저절로 해방된다. 이것은 일반적인 관념이다. 모든 문제는 돈이 없어 발생하는 것처럼 느낀다. 로또 하나에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란 이런 태도야말로 지금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더 많이 소유할 수 있는 방향으로 사회를 이끌어가는 세력에게 중요한 지반과 강력한 에너지와 정당한 근거를 주는 것이다. 벤야민은 그런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물질적 궁핍에 매달려서는 안 되며 왜 매달리는지, 어떤 관념이 우릴 내모는지, 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지 사유해야 한다고 말하며 이 글을 통해 그 일을 하려고 한다. 이런 세태를 중지, 폭파시키고 그 힘을 과거로부터 얻어내기 위해서 억압받은 자들의 전통을 물려받아야 한다. 오늘 우리의 투쟁은 과거의 억압받은 사람들의 투쟁 속에서 기다려온 ‘우리’이고 우리의 구원뿐 아니라 과거 그들의 구원까지 가능하게 하는 투쟁이다.
*성좌(별자리)
’매트릭스라(토대)’, ‘전제’로 이해해도 좋다. 우리 삶의 논리가 펼쳐지고 구성되는 전제. 인간은 어떤 계기로 자기의 존재를 스스로 결정한다. 전제는 모든 인간에게 주어지나 자기 삶의 전제란 내가(주체)가 결정하는 것. 전제를 결정하는 이런 것들이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에서 ‘모멘트’, ‘변증법적 이미지’, ‘성좌’, ‘섬광’ 같은 개념으로 표현된다. 역사적 유물론자들은 성좌를 해체하고 새로운 별자리를 구성하는 계기들을 구성해야 한다. 역사주의자들이 무심코 흘려버렸던 계기들, 억압받는 자들의 투쟁, 그 투쟁이 패배했기에 승자의 시선에 감정이입했던 것들, 역사주의적 행간이 어떤 순간 흩어지면서 왜곡되고 엇나가기 시작하면서 숨겨두었던 어떤 것들을 포착해 내는 것. 이것이 유물론적 역사주의자가 기억하는 방식이고 변증법적 이미지를 포착하는 방법이다.
테제 11에서 푸리에와 공산적 사회주의자들의 이런 상상을 벤야민은 왜 중요하게 여겼을까? 벤야민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말하는 물질적 풍요가 모든 걸 해결해 줄 것이란 사고가 어떻게 자연이 가진 풍부한 언어, 무한한 언어(언어는 의미가 무한히 나타날 수 있기에 무한성을 가짐)를 완전히 억압하고 자본주의적, 물질적 축적과 재생산을 위한 재료로 밖에 보지 못하는 빈곤한 의식이 인간 사회를 파멸로 이끄는지를 본 것이다.
‘네 개의 달이 지상의 밤을 밝히고’->자연이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달은 우리에게 말하지 못한다->자본주의적 물질적 의식에 경도된 방식으로는 이 도움은 말하지 못한다. 하지만 역사적 유물론자는 그것을 들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자연의 품속에 잠들어 있는 산물들이다. (->사도 바울이 쓴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자연의 신음, 하나님의 아들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자연과도 관련 있다) 푸리에가 상상하는 소박한 미래 풍경은 이사야의 예언 관념과도 닿는다. 비과학적, 비자연적, 비생물학적 공상에 핵심이 있는 게 아니라 물질적 시선에 경도되어 보지 못하는 자연의 무한한 잠재력과 관련해 제대로 된 관계를 맺는 순간 인간과 자연이 공존할 뿐 아니라 지금과는 다른 매트릭스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있다. 이것을 경제주의적 태도가 말살한다.
오늘날 공짜로 주어진 자연, 지구의 재료들은 원료가 되어 상품이 되었다. 공짜로 주어진 자연이나 상품이 된 자연이나 그것을 이용해 더 많은 물질을 생산하고 삶이 더 풍요로워질 거라고 꿈꾸는 것은 자본가나 노동자나 똑같다. 오늘날 벤야민의 사유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이 사회를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볼 것인가를 사유해야 한다.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드는(우주까지도) 이 세계의 논리에서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보는 시선을 갖지 않으면 파국은 정해져 있다. 파국은 미래의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의 삶 자체가 파국이다. 이것이 벤야민의 주장이다.
첫댓글 녹음 다시 들으며 내용 정리하고 있어요. 전시 마치고 알차게 쉬는 중. 수전할 부분 있으면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