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열사가 분신 항거한 이후 추모사업은 매년 11월 13일 추모제를 통해 뜻을 기리고,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모든 노동자들의 가슴에 되살아 났습니다.
1980년대 전두환군사독재정권 아래에서 강제적 노조 해산, 구속, 수배의 탄압 속에서 노동자들의 공간을 만들고자 81년 전태일기념관 건립 위원회가 발족하였습니다. 이것이 초기 기념사업회의 모태가 됩니다.
이후 전태일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이름으로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 출간되었고, 84년 전태일기념사업회로 명칭 변경을 하였습니다. 국내, 외 모금을 통해 85년 전태일기념관이 개관하게 되었습니다.
전태일기념사업회는 노동자 교육사업과 노동현장에 민주노조 건설등의 조직지원 사업들을 진행하였고 각 지역에 노동상담소를 개설하는 등을 활동을 펼쳤습니다. 또한 전태일기념관은 당시 엄혹했던 군사정권아래 노동자들의 소중한 모임 및 교육장소로 활용되었습니다.
88년 11월 전태일열사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전태일 정신 계승 전국 노동자 대회'가 개최되면서 매년 11월 전국 노동자대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88년부터 한해 동안 가장 모범적으로 노동운동을 한 단체나 개인을 대상으로 시상하는 전태일노동상이 제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일하는 사람들의 소중한 삶의 글을 시, 소설, 생활글, 기록문등으로 담아 내는 전태일 문학상이 제정되어 매년 시상되고 수상작품을 한데모은 수상집이 출판되고 있습니다.
선정기준
전태일 정신을 올바르게 계성, 구현하는 것이 전태일노동상의 제정취지이므로, 전태일 정신을 구체적으로 실천속에서 올바로 세웠는가를 기준으로 삼았다.
- 조직성 전태일동지는 혼자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항상 조직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21살 때 '바보회', 22살 때 '삼동친목회'를 조직하여 실천했던 것이 그 본보기이다. 열사의 이러한 조직성은 오늘날 모든 노동자 조직으로 살아 이어지고 있다.
- 투쟁성1970년 22세 되던 그는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노동청 진정, 시위 등을 했으나 권력과 자본의 탄압으로 좌절되자 자신의 하나뿐인 목숨을 바쳐서 끝까지 투쟁하였다. 열사의 투쟁성은 올 노동법 개악에 맞선 노동자 총파업으로 나타난다.
- 헌신성"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나를 모르는 모든 나"와 같은 일기속의 구절을 보면 그는 자기와 전체에 대해 높은 깨달음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열사는 점심을 굶고 있는 어린 시다를 위해 자기의 버스비를 털어 풀빵을 사주고는 자기집까지 3시간을 걸어다녔다. 그러다가 마침내 노동자를 억누르는 권력과 자본에 맞서 자신의 하나뿐인 몸뚱아리마저 바쳤던 것이다.
- 노동운동과 전체 민중에게 끼친 기여도 전태일 정신은 모든 고통받고 억압받는 민중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투쟁이었다.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굴리려 하네... 도울수만 있다면, 이를 수만 있다면" 열사는 우리에게 자신이 못다 굴린 덩이를 계속이어서 굴려가야 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의 투쟁은 이러한 열사의 뜻을 이어 전체 노동자, 민중들이 함께 하는 투쟁이어야 하고, 전체 민중을 위한 투쟁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