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이순신대교와 낙안읍성
백운산 산행 후 이순신대교 를 건너 본다.
○ [李舜臣大橋]
- 전남 광양과 여수 간을 잇는 100% 국산 자재ㆍ장비ㆍ기술로 시공된 한국형 현수교로, 2013년 2월 7일 개통함
전남 여수시 묘도동과 광양시 금호동 사이를 잇는 총 연장길이 2,260m의 왕복 4차로 교량이다. 2012년 5월 10일 여수박람회 개막(5월
12일)을 앞두고 임시 개통되었다가, 박람회가 끝난 직후인 8월 13일 다시 폐쇄, 2013년 2월 7일 개통되었다. 통행료는 무료다.
이순신대교 양쪽 주탑의 높이는 서울 남산(262m), 63빌딩(249m)보다 높은 해발 270m로, 현존하는 현수교 콘크리트 주탑 중 가장 높
은 덴마크의 그레이트 벨트교(해발 254m)보다 높은 세계 최고(最高) 높이로 시공되었다. 주경간장(주탑과 주탑 간의 거리)은 무려
1,545m에 달해 국내 최장(最長)이고, 세계에서는 일본의 아카시대교(1,991m)ㆍ중국의 시호우먼교(1,650m)ㆍ덴마크의 그레이트벨
트교(1,624m) 등에 이어 네 번째로 길다. 특히 이순신대교의 주경간장 길이를 1,545m로 설계한 것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신년인
1545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이밖에 바다에서 상판까지의 높이는 최대 85m, 평균 71m에 달해 1만 8000TEU(21만 톤)급 초대형 컨테이너선 두 대가 자유롭게 오갈
수 있고, 국내 최초로 양쪽 주탑 꼭대기에 전망대도 설치된다. 특히 진도 7∼8의 강진에도 견딜 수 있는 내진 1등급 기준으로 설계됐
는데, 이는 1000년에 1번 꼴로 발생하는 대형 지진에도 견딜 수 있는 수준이다.
한편, 현수교는 주탑과 주탑을 케이블로 연결하고 케이블에서 수직으로 늘어뜨린 강선에 상판을 매다는 방식의 교량이다. 현수교의
설계에서부터 시공 및 유지보수까지 모든 분야를 자국 기술로 소화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미국, 중국, 일본, 영국, 덴마크
등 5개국에 불과하다. 그 동안 국내에서 시공된 4개의 현수교(남해대교, 영종대교, 광안대교, 소록대교) 역시 외국의 기술과 장비 및
기술진에 의존해서 만들어졌지만, 이순신대교는 설계에서부터 장비ㆍ자재ㆍ기술진에 이르기까지 현수교와 관련된 모든 분야를 국산
화하는 데 성공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6번째 현수교 기술 자립국이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순신대교 [李舜臣大橋]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조선시대 대표적이 ㄴ계획도시인 읍성으로 현재 읍성 내에 주민이 직접 살고 있는 대한민국 대표적인 민속마을인
낙안읍성으로 가..
청정갯벌에 사는 짱뚱어탕이 순천의 맛난 음식을 한 그릇씩 먹고
시대:
조선
지정
:사적 제302호
규모:
둘레 1,384m, 높이 4m, 너비 3∼4m
현재
성벽과 동 ·서 ·남 옹성 등이 남아 있다. 고려 후기에 왜구가 자주 침입하자, 1397년(태조 6) 절제사 김빈길이 흙으로
읍성을 쌓았다.
《세종실록》에는 1424년 9월부터 토축의 읍성을 석축으로 쌓으면서 본래보다 넓혀서 쌓았다고 기록되
어 있다. 당시 성 안에는 우물 2개
·연못 2개가 있었으며, 해자는 파지 않았고, 문의 보호시설인 옹성은 그 후에 설치하였다.
안내소앞 매표(일인 2,000원)을 하고
동문인 포졸들이 서 있는 樂豊樓('즐거움이 넘쳐나는 누대'란 )로 들어서게 된다. 정문에 해당되는 동문루(東門樓)이었다고
한다.
포졸들은 낙안읍성에 살고 계시는 주민들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초가지붕 이엉이 기용 볏집으로 된 집
[오태석 명창 생가]
1895년 판소리명창 오수관(吳壽寬)의 아들로 태어나 14세 때 조실부모한 그는 박덕기(朴德基)에게 가야금산조(伽倻琴散調)를 배웠
다. 20세 무렵 송만갑(宋萬甲)의 문하에서 판소리를 익혔으며, 30세 때 상경하여 가야금병창으로 이름을 날렸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태석 [吳太石] (한겨레음악대사전, 2012.11.2, 도서출판 보고사)
금전산이 보이는 '객사'
성곽과 어울어진 고목
성곽을 따라 걷다
이 고목이 내 눈을 띄지 못해 자꾸만 ..
[금전산 △667.0m] 의 金錢山 은 조계사에서 뻗어나온 한 지맥으로 낙안읍성뒤에 낙안의 큰바위얼굴로 우뚝서 있다.
정상부에 서면 너른 낙안들판과 낙안온천이 눈에 들어오며 금강암, 의상대. 원효대사가 있다. 서쪽자락에는 홍매화
가 가장 일찍피는 사찰로 유명한 금전사가 자리하고 있어 최고의 등상코스로 각광받고 있는 낙안면 상송리에 자리잡
은 금전산.
[동헌]
[낙민루]
[낙안팔경]
금강모조 - 금전산 금강암에서 들려오는 저녁종소리
백이청풍 - 백이산에서 불어오는 맑고 시원한 바람
오봉명월 - 오봉산 위에 떠오르는 밝고 둥근달
보람조화 - 제석산 허리에 피어 오르는 아침안개
원포귀범 - 선수앞 바다의 돛단배
용추수석 - 용소의 맑은물과 깨끗한 돌맹이
안동화류 - 안도(내동) 내의 꽃과 버들
[낙민관 자료전시관에 ]
금전사지의 석불비상과 3층석탑에 대한 내용
낙안읍성의 옛지도와
낙안의 지형도. 성곽등의 자료와 옛날 낙안주민들의 삶을 담아 놓은 전시관이었다.
[두주열가옥]이 있는 가 하면 김대지 가옥이 있고 서문 밖으로 김소아 가옥도 낙안인이 살던 집도 있다.
상설체험장에는 말 두마리가 가옥 안에 기르고 있었으며 인절미를 까만 가마솥에 찌어절구통에 넣고 떡매로 치고난 떡 고물위에
곱겨 펴서 잘라 먹는 옛날 그대로의 방식으로 보여주기도 하며 인절미를 팔아 수익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곳이었다.
전통 혼례식을 하는 장면도 있고.
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돌담길과 성곽.
남문에 해당하는 쌍청루에 올라보고.
쌍청루에서 성곽따라 이어지는 낙안읍성.
큰샘에는 금전산에서 내려온 물은 낙안읍성으로 들어 읍 주민들이 우물을 사용하였고 우물아래에는 아낙들이 빨래를 하는
모습을 재현해 보이고 있다.
양규철가옥, 이한호가옥, 곽형두가옥등 122구가 있으며 실제로 살고 있는 집도 있고 시에서 사들여 빈집으로 있는 곳
도 있는데 실제로 민박을 하기도 하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농촌생활과 차이가 없는 성안의 마을같은 곳이었다.
직접 어르신께 물어보니 집들을 사려고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선다고 하였으니 소유권을 이전하는 것은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옥사지]
[[연지]
인구 288명이 살고 있다고 하는 읍성안은 국가지정(성곽 1,410m, 중요민속가옥 9동)과 도 지정(객사1동, 노거수 13주,
임경업장군 비각 1동)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었다.
고려 태조 23년에 낙안군(양악)으로 개칭
조선 태조6년(1397) 낙안태생 양혜공 김빈길 장군이 토성 축조
조선 세종6년(1424)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
조선 인조 4-6년(1625-1628) 충민공 임경업 장군이 석성 완공
1983년 6월 14일 사적 제302호로 지정
2011년 3월 11일 우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 등재된 낙안읍성의 연혁을 옮겨 보았다.
동문으로 들어가면 임경업장군 비각을 우연히 지나쳐 버린 아위움이 컷지만 시간이 부족해 읍성을 나와야 했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아름다운 동행이란 낙안읍성을 안내하고 있는 순천의 여행지로 꼭 한 번쯤 와 볼만한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