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효행 비석 비문
■ 비석의 상단에 제액(題額)을 전면-좌면-후면-우면 순서로 가로쓰기(횡액(橫額)) 전서체 碑行孝喜泰諱公金州慶事主府內宮郞訓承(우에서 좌로 조각) (承訓郞宮內府主事慶州金公諱泰喜孝行碑) ■ 비석의 전면에 비양(碑陽)을 세로쓰기(종액(縱額)) 해서체 承訓郞 宮內府 主事 慶州 金公 諱 泰喜 褒彰完議文 本所?建先聖廟重刊五倫行實以爲崇儒?善而列郡單子繼續來到中謹按忠南有司及多士薦狀則同道燕岐郡錦南面盤谷里孝子金公泰喜字敬和號錦源官宮內主事系出慶州李朝嘉善大夫吏曹?議黃海監司?後諱致玉玄孫諱漢談曾孫嘉善諱弘柱孫諱魯汶之子也天性純良早就?汀陳處士時策之門講習經傳自知事親之道見稱於鄕黨父以無何之?委臥彌毒侍湯不離晝而衣不解帶夜而睡不交睫禱天求命誠無不周漸至危?裂指點血甦延三日而奄忽棄養哀毁泣血幾至滅性喪葬祭奠克遵先賢之禮庶無幽明之憾晨昏省掃不關雨雪三載居廬身不脫?頭不加梳血淚終祥每當忌日必齊沐致祭哀如袒括初可謂終身慕者也苟非通天絶倫之行烏能若是哉噫其德業善行宜有棹楔表宅而但時制不古尙此湮?士論由是以峻發及於本所其在秉彛聞而興感付?梓建閣碑壽嘉蹟樹風聲永圖不朽之意成完議文事 孔夫子誕降二千四百七十八年丁卯四月 日 孔夫子聖蹟圖續修五倫行實重刊淵源儒林鄕約本所 都約長?立約長代辨先聖廟 都有司 鄭成? 約 長 前 判書 李載現 前 判書 閔京鎬 前 判書 朴容大 前 判書 南奎熙 前 ?判 權益相 前 ?判 李明翔 前 ?判 李舜夏 前 ?判 金在珣 前 ?判 魚瑢善 前 ?判 韓昌敎 前 待敎 閔厚植 前 承旨 申斗熙 前 ?書 李秉? 事務約長 前 ?奉 李悳圭 前 直員 權寧萬 前 直員 李承鉀 前 主事 李鍾八 前 講師 吳載權 前 正字 韓凞元 幼學 姜漢喬 前 主事 閔泰稷 八道都有司 京畿道都有司 前 承旨 李胤鍾 忠淸道都有司 前 直員 成樂冕 全羅道都有司 前 議官 李冕稙 慶尙道都有司 前 ?書 金鎔濟 江原道都有司 前 直員 金鳳柱 黃海道都有司 前 ?奉 李丙直 平安道都有司 幼學 鄭桓淳 咸鏡道都有司 前 主事 李達? ■ 비석의 좌면과 후면에 비음(碑陰)을 세로쓰기(종액(縱額)) 해서체 승훈랑 궁내부 주사 경주 김 공 휘 태희 효행 비명 공公의 휘諱는 태희泰喜이고 자字는 경화敬和이고 호號는 금원錦源이며 경주인慶州人이시다 경주 김씨의 시조始祖는 신라新羅 대보 공大輔公 휘 알지閼智이시다 공公은 신라 경순왕敬順王 휘 부傅의 제4자第四子 대안 군大安君 휘 은열殷說과 중 시조中始祖 고려高麗 검교 태자태사 공檢校太子太師公 휘 인관仁琯의 후예이시다 자헌대부資憲大夫 황해 감사黃海監司 중추원 지사中樞院知事 증贈 이조 판서 공吏曹判書公 휘 장?의 십사세손十四世孫이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참의 공?議公 휘 승경升慶의 십삼세손十三世孫이며 조선朝鮮 선조宣祖 시대에 반곡盤谷에 복거卜居하신 통덕랑通德郞 정랑 공正郞公 휘 논論과 배위配位 공인恭人 진주 강씨晉州姜氏의 구세손九世孫이고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 참판 공戶曹?判公 휘 해인海仁과 배위配位 증贈 정부인貞夫人 창녕 성씨昌寧成氏의 팔세손八世孫이시다 고조부모는 휘 치옥致玉과 밀양 박씨密陽朴氏이고 증조부모는 휘 한담漢談과 청주 한씨淸州韓氏이고 조부모는 휘 용주用柱와 전주 이씨全州李氏(생가의 조부모는 휘 홍주弘柱와 전주 이씨全州李氏)이고 부모는 휘 노문魯汶과 전주 이씨全州李氏이시다 공公은 서기 1866년에 충청남도 연기군 금남면 반곡리忠淸南道燕岐郡錦南面盤谷里에서 출생하셨다 관직官職은 궁내부 주사宮內府主事이었고 승훈랑承訓郞 품계品階를 받으셨다 천성이 순진하고 선량하여 일찍이 사서삼경을 배웠고 부모를 봉양하는 도리를 깨달아 부모님께 효성이 지극하여 마을에서 칭찬을 받으셨다 아버지가 알 수 없는 병환으로 위독하여 탕약을 시중들면서 자리를 지키셨다 점차 병세가 극도로 악화되자 손가락 끝을 찢고 피를 드리어 다시 살아나셨지만 3일 연명 후 돌아가시자 몸이 상할 정도로 슬퍼하며 피눈물을 흘리다가 거의 목숨을 잃으실 뻔도 하셨다 장례 후 3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묘막에서 보내며 아침저녁에 성묘하였고 머리띠와 허리띠를 풀지 않았으며 머리를 빗지 않은 채 삼년상을 마치셨다 매년 제삿날이 되면 재계하고 목욕하여 초상 때와 같이 슬퍼하셨다 이렇게 부모님께 극진하신 효성이 널리 알려져 1927년 4월에 공부자 성적도 속수 오륜 행실 중간 연원 유림 향약 본소孔夫子聖蹟圖續修五倫行實重刊淵源儒林鄕約本所에서 효행을 포상하는 포창 완의문을 받으셨다 부인은 의인宜人 공산 이씨公山李氏와 의인宜人 남원 양씨南原梁氏이시다 장남 휘 상윤商尹은 금남면의회 의원을 지냈고 차남 휘 상기商琦는 영등포기자단장을 지냈으며 계자季子는 휘 상길商吉이시다 손자로 휘 응제應濟는 서울특별시의회의원과 구로고등공민학교장을 역임하였고 휘 문제文濟는 조치원문화원장과 조치원기자단장을 역임하였고 휘 영제英濟는 상사(上士) 군인으로 여순 반란 사건 진압에서 순직하였으며 휘 흥제興濟 휘 한제翰濟 휘 준제俊濟를 두셨다 증손은 동민東珉 동은東垠 동범東範 동효東曉 동원東元 동주東柱 동건東建 동수東洙 동령東令 동관東寬이시다 뜻밖에도 2005년에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세종특별자치시 건설을 위한 행정 중심 복합 도시 특별법을 공포하고 경주 김씨 참판 공 해인파의 대대손손이 400여 년 동안 오순도순 살았던 고향 마을 반곡리를 수용하였다 2007년에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보덕1리에 종중 묘역을 이전하였다 2008년에 충청남도 공주군 장기면 송원리 뒷산에 모셨던 선영을 면봉하였다 공公의 증손들은 금전 제일주의가 팽배하여 기본 윤리가 타락한 세태에서 인륜의 으뜸 덕목인 효도를 실천하시어 만인의 귀감이 되신 증조부의 효행을 예찬하고 본받아 후손들에게 길이 전하고자 금원효도선양회錦源孝道宣揚會를 운영하여 책자를 만들고 이 효행비孝行碑를 숙경재肅敬齋 마당에 세웠다 서기 2014년 10월 18일 ■ 비석의 우면에 세로쓰기(종액(縱額)) 해서체 前 汶山高等學校 校長 東潤 謹撰 前 全義初等學校 校長 兒童文學家 東薰 謹書 錦源孝道宣揚會 曾孫 東珉 東垠 東範 東曉 東元 東柱 東建 東洙 東令 東寬 謹竪 * 謹撰(근찬)= 비문을 짓다. 謹書(근서)= 비문을 쓰다. 謹竪(근수)= 세우다.
* ‘포창 완의문’과 ‘승훈랑 경주 김 공 휘 태희 효행 비명’은 2014년에 편집하고 있는 ‘경주 김씨 감사공파 세보(慶州金氏監司公派世譜)’에 등재(登載)되었다.
# 포창 완의문 ■ 포창 완의문의 원문 · 한글 · 해석
褒彰完議文(포창 완의문) 원문-本所 ?建先聖廟 重刊五倫行實 以爲 崇儒?善 而列郡單子 繼續來到中 한글-본소 창건선성묘 중간오륜행실 이위 숭유장선 이열군단자 계속래도중 해석-유림향약본소에서 공자의 사당을 세우고 오륜행실을 다시 간행하여 유학을 존중하고 선행을 장려하던 중 여러 고을에서 계속 오는 단자들 중에서 謹按 忠南有司及多士 薦狀則 同道 燕岐郡 錦南面 盤谷里 孝子 金公泰喜 근안 충남유사급다사 천장즉 동도 연기군 금남면 반곡리 효자 김공태희 충남 유사와 많은 선비들이 보낸 추천서를 삼가 살펴보니, 충남 연기군 금남면 반곡리에 사는 효자 김태희의 字敬和 號錦源 官宮內主事 系出慶州 李朝 嘉善大夫 吏曹參議 黃海監司 ? 後 자경화 호금원 관궁내주사 계출경주 이조 가선대부 이조참의 황해감사 장 후 자는 경화요 호는 금원이요 벼슬은 궁내주사요 본관은 경주이고, 이조 가선대부 이조참의 황해감사를 지냈던 장의 후손으로 諱 致玉 玄孫 諱 漢談 曾孫 嘉善 諱 弘柱 孫 諱 魯汶之子也 휘 치옥 현손 휘 한담 증손 가선 휘 홍주 손 휘 노문지자야 휘 치옥의 현손이요 휘 한담의 증손이요 가선대부 휘 홍주의 손자이요 휘 노문의 아들이다. 天性純良 早就 ?汀陳處士時策之門 講習經傳 自知事親之道 見稱於鄕黨 천성순량 조취 장정진처사시책지문 강습경전 자지사친지도 견칭어향당 천성이 순진하고 선량하여 일찍이 위정 진시책 선비의 문하에 가서 사서삼경을 배웠고, 스스로 부모를 봉양하는 도리를 깨달아 향당에서 칭찬을 받았다. 父以無何之? 委臥彌毒 侍湯不離 晝而衣不解帶 夜而睡不交睫 禱天求命 誠無不周 부이무하지제 위와미독 시탕불리 주이의불해대 야이수불교첩 도천구명 성무부주 아버지가 이름 없는 병환으로 병석에 누워 위독해지자, 탕약 시중들면서 자리를 떠나지 않고, 낮에는 옷의 띠를 풀지 않았으며, 밤에는 졸면서도 눈을 감지 않은 채, 하늘에 명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어,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漸至危? 裂指點血 甦延三日而奄忽棄養 哀毁泣血 幾至滅性 점지위갹 열지점혈 소연삼일이엄홀기양 애훼읍혈 기지멸성 점차 병세가 극도로 악화하여 손가락 끝을 째서 피를 드리어 다시 살아나시게 하여 3일을 연명하셨지만 갑자기 돌아가시자, 슬퍼함을 피눈물로 울부짖어 거의 목숨을 잃을 뻔도 하였고, 喪葬祭奠 克遵先賢之禮 庶無幽明之憾 상장제전 극준선현지례 서무유명지감 장례와 제사를 받듦에 선현의 예를 지켜서, 유명 간에 유감없게 하였고, 晨昏省掃 不關雨雪 三載居廬 身不脫? 頭不加梳 血淚終祥 신혼성소 불관우설 삼재거려 신불탈질 두불가소 혈루종상 아침저녁에 성묘하였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3년을 묘막(墓幕)에서 보내면서, 몸에선 수질(首?)과 요질(腰?)을 풀지 않았고, 머리를 빗지 않은 채, 피눈물로 삼년상을 마쳤다. 每當忌日 必齊沐致祭 哀如袒括初 可謂終身慕者也 매당기일 필제목치제 애여단괄초 가위종신모자야 매년 제삿날이 되면 반드시 재계(齋戒)하고 목욕하여, 슬퍼하기를 초상 때와 같았으니, 종신(終身)토록 부모님을 흠모(欽慕)하는 사람이로다. 苟非通天 絶倫之行 烏能若是哉 구비통천 절륜지행 오능약시재 참으로 하늘의 이치에 통하여 이륜(彛倫) 실천에 뛰어난 사람이 아니고서는 어찌 이 같이 할 수 있었겠는가? 噫 其德業善行 宜有棹楔表宅 而但時制不古 尙此湮? 士論 由是以峻發 及於本所 희 기덕업선행 의유도설표댁 이단시제불고 상차인묵 사론 유시이준발 급어본소 아! 그 분의 덕업(德業)과 선행(善行)은 마땅히 정문(旌門)을 세워 집안의 표상(表象)으로 삼아야 되겠지만 제도(制度)가 옛날과 달라서 아직도 묵인하던 차에 선비들의 공론이 이로 말미암아 크게 일어나서 본소에 미치게 되니 其在秉彛 聞而興感 付?梓建閣碑 壽嘉蹟 樹風聲 永圖不朽之意 成完議文事 기재병이 문이흥감 부침재건각비 수가적 수풍성 영도불후지의 성완의문사 그 이륜(彛倫) 잡은 일을 듣고 감심이 치솟아 책을 인쇄하고 비각을 세워 아름다운 유적을 오래 전하고 교화를 베풀고자 불후의 뜻을 꾀하여 완의문을 이룩한다. 孔夫子 誕降 二千四百七十八年丁卯 四月 日 공부자 탄강 이천사백칠십팔년정묘 사월 일(서기 1927년 4월) 孔夫子 聖蹟圖 續修 五倫行實 重刊 淵源 儒林鄕約本所 공부자 성적도 속수 오륜행실 중간 연원 유림향약본소 都約長 ?立約長 代辨先聖廟 都有司 鄭成默 도약장 창립약장 대변선성묘 도유사 정성묵 約 長 前判書 李載現 前判書 閔京鎬 前判書 朴容大 前判書 南奎熙 약 장 전판서 이재현 전판서 민경호 전판서 박용대 전판서 남규희 前?判 權益相 前?判 李明翔 前?判 李舜夏 前?判 金在珣 前?判 魚瑢善 전참판 권익사 전참판 이명상 전참판 이순하 전참판 김재순 전참판 어용선 前?判 韓昌敎 前待敎 閔厚植 前承旨 申斗熙 ?書 李秉? 전참판 한창교 전대교 민후식 전승지 신두희 참서 이병현 事務約長 前?奉 李悳圭 前直員 權寧萬 前直員 李承鉀 前主事 李鍾八 前講師 吳載權 사무 약장 전참봉 이덕규 전직원 권영만 전직원 이승갑 전주사 이종팔 전강사 오재권 前正字 韓凞元 幼學 姜漢喬 前主事 閔泰稷 전정자 한희원 유학 강한교 전주사 민태직 八道都有司 京畿道都有司 前承旨 李胤鍾 忠淸道都有司 前直員 成樂冕 팔도도유사 경기도도유사 전승지 이윤종 충청도도유사 전직원 성낙면 全羅道都有司 前議官 李冕稙 慶尙道都有司 前?書 金鎔濟 전라도도유사 전의관 이면직 경상도도유사 전참서 김용제 江原道都有司 前直員 金鳳柱 黃海道都有司 前?奉 李丙直 강원도도유사 전직원 김봉주 황해도도유사 전참봉 이병직 平安道都有司 幼學 鄭桓淳 咸鏡道都有司 前主事 李達? 평안도도유사 유학 정환순 함경도도유사 전주사 이달훈 ■ 포창 완의문 낱말 풀이 휘(諱)=죽은 어른의 생전의 이름. 죽은 사람 이름 앞에 붙여 씀. 포창(褒彰)=찬양하여 내세움.선성(先聖)=옛날의 성인 창건(創建)=건물이나 조직체 따위를 처음으로 세우거나 만듦. 유의어 :창립, 설립, 창시. 創(비롯할 창/다칠 창)의 이형동의자(이체자)=동자 ?, ?, ?, ?, ?/고자 ?/간자 ?. 묘(廟)=조상ㆍ성인ㆍ신(神)ㆍ영정(影幀) 따위를 모신 사당. 종묘(宗廟)ㆍ문묘(文廟)를 통틀어 이른다. 성묘(聖廟)=문묘(文廟)=공자를 모신 사당. 원래 선사 묘(先師廟)라고 하였다가 중국 명나라 성조 때 문묘 (文廟) 또는 성묘(聖廟)라고 하였으며, 청나라 이후 공자묘(孔子廟)라 하였다. 중국 산둥성(山東省) 취푸(曲阜)에 있는 것이 가장 크고 유명하다. 우리나라에는 성균관과 향교에 있는데 곳에 따라 사성(四聖), 공자의 제자, 역대의 거유(巨儒) 및 신라 이후의 우리나라의 큰 선비들을 함께 모신 곳도 있다. [비슷한 말] 근궁ㆍ성당(聖堂)ㆍ성묘(聖廟). 중간(重刊)=<출판> 이미 펴낸 책을 거듭 간행함. 오륜(五倫)=유학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 (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을 이른다. 존숭(尊崇)=높이 받들어 숭배함. 열군(列郡)=열읍(列邑)=여러 고을. 단자(單子)=사주 또는 후보자의 명단 따위를 적은 종이. 후보자의 명단. 내도(來到)=어떤 지점에 와서 닿음. 유사(有司)=단체의 사무를 맡아 보는 직무. -공(公)=(고유명사를 포함하는 일부 명사 뒤에 붙어)‘높임’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목면공 충무공 태사공. 상고(詳考)=꼼꼼하게 따져서 검토하거나 참고함. [비슷한 말] 구계(句稽). 궁내부(宮內府)=궁내부(宮內府)는 조선 말기인 1894년 제1차 갑오개혁 때 신설되어 왕실 업무를 총괄한 관청이다. 구한말에, 왕실에 관한 모든 일을 맡아보던 관아. 고종 31년(1894)에 설치하여 융희 4년 (1910)까지 두었다. 궁내부에 소속된 관원은 궁내부대신 1인, 협판 1인, 참서관 3인, 통역관 2인, 주사 10인, 특진관 15인 이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승훈랑(承訓?)=조선이 건국된 직후인 1392년(태조 1) 7월 문산계(文散階) 제정될 때 정6품 상계는 승의랑 (承議郞), 하계는 승훈랑으로 정하여졌다. 조선 시대 정6품의 관직으로 종친과 의빈(儀賓)에게 주던 관계(官階). 가선대부(嘉善大夫)=<역사> 조선 시대에 둔, 종이품 문무관의 품계. 가의대부의 아래 급으로, 태조 1년 (1392)에 설치하였으며 고종 2년(1865)부터 문무관, 종친, 의빈(儀賓)의 품계로도 썼다. 이조(吏曹)=조선 시대에, 육조 가운데 문관의 선임과 훈봉, 관원의 성적 고사(考査), 포폄(褒貶)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참의(參議)=<역사> 조선 시대에, 육조(六曹)에 둔 정삼품 벼슬. 감사(監司)=<역사> [같은 말] 관찰사(조선 시대에 둔, 각 도의 으뜸 벼슬). 손자 이후 표현=1대-아들(子)/2대-손자(孫子)/3대-증손(曾孫)/4대-고손(高孫),현손(玄孫)/5대-내손(來孫)/ 6대-곤손(昆孫)/7대-잉손(仍孫)/8대-운손(雲孫) 순량(純良)하다=성질이 순진하고 선량하다. 처사(處士)=예전에, 벼슬을 하지 아니하고 초야에 묻혀 살던 선비. 문하(門下)=가르침을 받는 스승의 아래. 경전(經傳)=경서(經書)와 그 해설서. 성경현전(聖經賢傳)의 준말. 경서(經書)=옛 성현들이 유교의 사상과 교리를 써 놓은 책. ≪역경≫ㆍ≪서경≫ㆍ≪시경≫ㆍ≪예기≫ㆍ≪춘추≫ㆍ≪대학≫ㆍ≪논어≫ㆍ≪맹자≫ㆍ≪중용≫ 따위를 통틀어 이른다. 성경현전(聖經賢傳)=유학의 성현(聖賢)이 남긴 글. 성인(聖人)의 글을 ‘경(經)’이라고 하고, 현인(賢人)의 글을 ‘전(傳)’이라고 한다. [비슷한 말] 경전(經傳). 향당(鄕黨)=자기가 태어났거나 사는 시골 마을. 또는 그 마을 사람들. 예전에는 500집이 ‘당(黨’)이 되고 1만 2500집이 ‘향(鄕)’이 되었다. 탕약(湯藥)=<한의학> 달여서 마시는 한약. 열지(裂指)=어버이나 남편(男便)의 병이 위중(危重)할 때 깨끗한 산피를 드리려고 제 손가락 끝을 째는 일. 병자에게 깨끗한 생혈(生血)을 먹이려고 제 손가락 끝을 쨈. 또는 그 손가락. 엄홀(奄忽)=급작스러움. 멸성(滅性)=친상을 당(當)하여 지나친 슬픔으로 말미암아 자신(自身)의 생명(生命)을 잃음. 유명(幽明)=1. 어둠과 밝음을 아울러 이르는 말. 2. 저승과 이승을 아울러 이르는 말. 신혼(晨昏)=새벽과 해 질 무렵을 아울러 이르는 말. 질(?)=상복을 입을 때 머리에 쓰는 수질(首?)과 허리에 감는 요질(腰?). 수질(首?)=상복(喪服)을 입을 때에 머리에 두르는, 짚에 삼 껍질을 감은 둥근 테. 요질(腰?)=상복(喪服)을 입을 대에 허리에 띠는 띠. 짚에 삼을 섞어서 굵은 동아줄처럼 만듦. 기일(忌日)=사람이 죽은 날. 제삿날 재계(齋戒)=<불교>종교적 의식 따위를 치르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부정(不淨)한 일을 멀리함. 종신(終身)=목숨을 다하기까지의 동안. 흠모(欽慕)=기쁜 마음으로 공경하며 사모함. 이륜(彛倫)=사람으로서 떳떳하게 지켜야 할 도리. 덕업(德業)=어질고 착한 업적이나 사업. 정려(旌閭)=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 정문(旌門)=충신, 효자, 열녀 들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 집 앞에 세우던 붉은 문. 사론(士論)=선비들의 공론. 준발(峻拔)=산 따위가 험하게 우뚝 솟음. 俊拔=준수하여 빼어남. 감심(感心)=마음속 깊이 느낌. 또는 그렇게 감동되어 마음이 움직임. 침재(?材/?梓)=<출판>[같은 말] 기궐(??)(인쇄할 목적으로 나무 판에 글자를 새김). 풍격(風格)=물질적, 정신적 창조물에서 보이는 고상하고 아름다운 면모나 모습. 성망(聲望)=1.명성과 덕망을 아울러 이르는 말. 2.좋은 평판. 불후(不朽)=썩지 아니함이라는 뜻으로, 영원토록 변하거나 없어지지 아니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도모(圖謀)=어떤 일을 이루기 위하여 대책과 방법을 세움. 완의(完議)=충분히 의논하여 참석자 전원이 합의한 내용. 문사(文事)=학문, 예술 따위에 관한 일. 공-부자(孔夫子)=공자(중국 춘추 시대의 사상가ㆍ학자)를 높여 이르는 말. 탄강(誕降)=임금이나 성인(聖人)이 태어남. 성적(聖跡/聖蹟)=성스러운 사적이자 고적. 연원(淵源)=사물의 근원. 약장(約長)= <역사> 조선 시대에, 향약 단체의 우두머리. 도약장(都約長)=조선시대 향약(鄕約)의 최고 직임(職任). 향약(鄕約)= <역사> 조선 시대에, 권선징악과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만든 향촌의 자치 규약. 유사有司=단체의 사무를 맡아보는 직무. 도유사(都有司)=향교, 서원, 종중, 계중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우두머리.
噫(희)=한숨 쉴 희, 트림할 애, 탄식할 억=1. 한숨을 쉬다 2. 탄식하다(歎息ㆍ嘆息--) 3. 느끼다 4. 아아! a. 트림하다(애) b. 하품(애) c. 탄식하다(歎息ㆍ嘆息--)(억) d. 아아! (억) ?(제)=앓을 제 1. 앓다 2. 병들다 3. 짧다 4. 작다 5. 자라지 아니하다 睫(첩)=속눈썹 첩, 깜작일 섭 1. 속눈썹 2. 안목(眼目) a. (눈을)깜작이다(섭) b. (눈을)감다(섭) 睡(수)=졸음 수 1. 졸음 2. 잠 3. 꽃이 오물어지는 모양 4. 자다 5. 졸다 甦(소)=깨어날 소, 긁어모을 소 1. 깨어나다, (잠이)깨다 2. 소생하다(=蘇), 되살아나다 3. 살다 4. 긁어모으다 5. 가득 차다 참고: ?(소)의 속자(俗字). 蘇(소)와 통자(通字) 袒(단)=[부수]?(옷의변)웃통 벗을 단, 터질 탄 1. 웃통 벗다 2. 소매를 걷어 올리다 3. 어깨를 드러내다 4. 옷솔기가 타지다 5. 옷이 해어지다 6. 가세하다(加勢--) 袒免(단문)=시마(?麻) 이하의 복(服)에서, 두루마기 따위의 웃옷의 오른쪽 소매를 벗고 머리에 사각건을 쓰는 상례(喪禮) ?麻(시마)=상복(喪服)의 하나. 가는 베로 만들어 종증조(從曾組)ㆍ삼종 형제(三從兄弟)ㆍ중증손(衆曾孫)ㆍ 중현손(衆玄孫)의 상사(喪事)에 석 달 동안 입는 복(服) 免(문)=면할 면, 해산할 문 1. 면하다(免--), 벗어나다 2. 용서(容恕)하여 놓아주다 3. 허가하다(許可--) 4. 벗다 5. 해직하다(解職--) 6. 내치다 7. 힘쓰다, 노력하다(努力--) 湮(인)=묻힐 인, 막힐 연 1. 묻히다 2. 잠기다 3. 빠지다 4. 스미다 5. 통하지 않다 湮沒(인몰)=인멸(湮滅)=①자취도 없이 죄다 없어짐 ②또는, 없앰. 苟(구)=진실로 구, 구차할 구 1. 진실로(眞實-), 참으로 2. 다만, 단지(但只) 3. 겨우, 간신히 포창 완의문 관련 참고 사항 1. 김태희 세계표(金泰喜 世系表) -현주(顯柱) -맹주(孟柱) -홍주(弘柱)-노문(魯汶)(용주 백부에게 양자) 2. 경주 김 공 휘 해인(海仁)의 선조 세계(世系)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 1세(시조)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傅) 28세(신라의 제 56대 마지막 왕)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 29세(경순왕의 9남 3녀 자녀 중 넷째) 태사공(太師公) 김인관(金仁琯) 34세/태사공 1세(중 시조) 참의공(?議公) 김오(金?) 41세/태사공 8세 전서공(典書公) 김자정(金子汀) 42세/태사공 9세 감사공(監司公) 김장(金?) 43세/태사공 10세 참의공(?議公) 김승경(金升慶) 44세/태사공 11세 정랑공(正郞公) 김론(金論) 48세/태사공 15세(공인(恭人) 진주 강씨와 반곡에 정착) 참판공(?判公) 김해인(金海仁) 49세/태사공 16세 3. 반곡(盤谷)에 처음 정착한 경주 김씨의 선조는 누구인가? 경주 김씨의 시조(始祖)는 신라(新羅) 왕조 대보 공(大輔公) 휘(諱) 알지(閼智)이시다. 우리는 신라 경순왕(敬順王) 휘 부(傅)의 제 4자(第四子) 대안 군(大安君) 휘 은열(殷說)과 중 시조(中始祖)인 고려(高麗) 검교 태자태사 공(檢校太子太師公) 휘 인관(仁琯)의 후손이시다. 자헌대부(資憲大夫) 황해 감사(黃海監司) 중추원 지사(中樞院知事) 증(贈) 이조 판서 공(吏曹判書公) 휘 장(?)의 5세손이시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참의 공(?議公) 휘 승경(升慶)의 고손(高孫)과 고손부(高孫婦)이신, 통덕랑(通德郞) 정랑 공(正郞公) 휘 논(論)과 공인(恭人) 진주 강씨(晉州姜氏)가 조선(朝鮮) 선조(宣祖) 시대에 충청도 공주목 연기현(忠淸道 公州牧 燕岐縣)에 있던 반곡(盤谷)에 처음 복거(卜居)하셨다. 휘 논(論)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동안 병조 정랑(兵曹正郞)에 제수(除授)되시어 전장에서 공을 세우시고 전사하셨다. 휘 논(論)의 아드님이신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 참판 공(戶曹?判公) 휘 해인(海仁)이 서기 1602년(조선 제 14대 왕 선조 35년 임인년)에 반곡에서 태어나시어, 홀어머니에게 지극한 효성으로 조선(朝鮮) 조정(朝廷)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 참판(戶曹?判)을 받으셨다. 휘 논(論)의 자부(子婦)는 증(贈) 정부인(貞夫人) 창녕 성씨(昌寧成氏)이시며, 손자로 휘 선익(善益),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추 공(僉樞公) 휘 정익(鼎益), 휘 광익(光益), 휘 귀익(貴益)을 두셨다. 4. 반곡리(盤谷里)는 어디이었는가? 반곡리(盤谷里, Bangok-ri) 지명은 마을 밖을 감싸며 휘돌아 흐르는 삼성천(三城川)과 금강(錦江), 그리고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괴화산(槐花山) 산줄기가 어우러진 모습이 마치 둥근 소반(小盤)의 모양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반곡리는 금강의 중류 지역에 1번 일반 국도와 경부선 철도의 중간 지점에 강의 남쪽에 위치하고 마을 뒤에는 어머니 같다는 괴화산이 품고 있었다. 경주 김씨, 여양 진씨, 의성 김씨가 살았던 씨족 부락이었다. 주택은 약 200호이었고, 농촌치고 인구가 많아 금남면(錦南面)에서 용포리(龍浦里) 다음 두 번째로 많았다. 마을의 주거 구역을 7개 ‘뜸’으로 나누어, 재께뜸, 아랫말뜸, 뒷메뜸, 가운뎃말뜸, 안산뜸, 웃말뜸, 골메뜸으로 불렀다. 주민은 논밭 농사의 농업에 종사했다. 대청댐이 건설되기 전에는 해마다 장마철에 금강이 범람하여 마을 앞에 있는 전답까지 며칠 동안 강물에 잠겨 농산물 피해가 매우 컸다. 흉년이 들어 식량 문제로 ‘보릿고개가 태산보다 높다’는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970년대 초반까지 교통수단이 없어 용포리로 버스를 타러 가거나 부강역(芙江驛)으로 기차를 타러 갈 때 약 6km 걸어야 했고, 가옥은 초가지붕이었으며, 전기가 없어 석유등잔으로 원시적인 빈한도골(貧寒到骨) 생활을 했다. 2005년 3월 18일에 행정 중심 복합 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이 공포되어 자손들이 400여 년 동안 참판공(?判公) 휘(諱) 해인(海仁)의 효행을 본받고 반곡리의 남쪽에 솟은 괴화산과 북쪽에 흐르는 금강의 정기를 받아 번영을 누리며 대대로 오순도순 살아오던 세거지지(世居之地)와 세장지지(世葬之地)가 수용되었다. 해마다 음력 시월 보름날에 시제를 지냈던 어덕동(於德洞) 재실(齋室)과 마세 재실도 수용되었다. 반곡리에서 살고 있던 종친들은 2008년에 정든 고향을 떠나 타관으로 분산하여 이주하였다. 경주 김씨 참판공 해인파 종회에서는 2006년에 한국토지공사로부터 수용에 대한 보상을 받고, 2007년 1월에 충청남도 연기군 전동면 보덕리에 새 종중산을 마련하고, 묘지 설치 허가를 받아, 8월에 묘역의 조성 사업에 착수하여, 2010년에 완공하였다. 충청남도 연기군 금남면 반곡리는 2013년 7월 1일에 세종특별자치시 반곡동(직할)으로 변경되었다. 이제 옛 반곡리는 없어져 농촌이 도시로 상전벽해(桑田碧海)되는 개발이 한창이지만, 우리는 고향을 잃은 실향민으로 향수를 달래고 있다. 아! 그리워라! 이웃의 촌수를 따지지 않고 가까운 아저씨 아주머니, 형님 형수님으로 알고 정답게 오순도순 지내 인정 많았던 씨족 농촌이었던 반곡리! 5. 포창 완의문(?彰完議文)은 무엇인가? 완의(完議)라는 말은 찬양하여 내세우기 위한 일로써 충분(充分)히 의논(議論)하고 전원(全員)이 일치(一致)한 결정(決定)으로 쓴 글을 뜻한다. 포창 완의문은 정부 위임 기관인 공부자 성적도 속수 오륜 행실 중간 연원 유림 향약 본소(孔夫子 聖蹟圖 續修 五倫行實 重刊 淵源 儒林 鄕約 本所)에서 내리는 것으로 지방 유림들로부터 효행을 실천하는 사람을 추천받아 전국 8도의 선비들이 심사하여 그 뜻을 기리기 위해 내리는 것이다.
6. 공부자 성적도 속수 오륜행실 중간 연원 유림 향약 본소(孔夫子 聖蹟圖 續修 五倫行實 重刊 淵源 儒林 鄕約 本所)는 무엇인가? 유림 향약 본소(儒林鄕約本所)는 조선 시대에 가장 중요시되던 충효의 덕목을 교육하고 장려하는 일종의 정부의 위임 기관이었다. 암울했던 일제 식민지 시대에 많은 유림 단체들이 친일(親日)로 돌아섰던 것과 달리 조선(朝鮮) 성리학적(性理學的) 전통을 계승하고 가장 중요시되던 덕목(德目)인 충효(忠孝)를 교육하고 장려하던 곳이었다. 본 소(所)에서 창건(創建)한 공부자(孔夫子)의 성적도(聖蹟圖)와 오륜행실(五倫行實)을 거듭 간행하여 성현(聖賢)의 착한 행실을 높이 여기니 열군(列郡)에서 단자(單子)가 계속 올라와 살펴보았다. 백성 중에 효행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으면 지방 유림들로부터 추천을 받아서 현재 장관에 해당하는 그 당시 판서와 현재 차관에 해당하는 그 당시 참판 그리고 전국 각 도의 대표 유사(有司)가 참여하여 심사하고 실천 내용이 인정되면 그 뜻을 기리고 널리 알리기 위해 각(閣)과 비를 세우게 하는 포창 완의문(褒彰完議文)을 내렸다. 한일 합방(韓日合邦)(韓日倂合?約·韓日合倂·日韓合倂·1910년)이 된 후에는 이 일을 담당한 조정(朝廷)이 없어져서 전직 고관들이 중심이 되어 서울에 유림 향약 본소를 세웠는데 그 체계는 도약장(都約長). 약장(約長). 사무약장(事務約長). 별우사. 8도의 도유사(都有司)를 두었다. 나라를 빼앗긴 처지에서 재정적인 여유가 없었던 유림 향약 본소는 덕행자에게 포창만 내려줘 각(閣)과 비(碑)를 세우는 것은 포창을 수여받은 가문에서 할 일이었다.
7. 진시책(陳時策)은 누구인가?
진시책(陳時策 1831-1906)은 자(字)는 선약(善若), 호(號)는 위정(?汀)이다. 25세에 "경의(經義)에 밝고 역학에 뛰어나 광무 신축년(1901)에 보국대신 서상우(徐相雨)의 추천을 받아 고종으로부터 찬정(贊政 1896년에 설치된 의정부의 한 관직) 벼슬을 수여받았으나 사양하고 이를 받지 않자, 고종은 그의 고상한 덕행의 처사라 칭찬하고 후에 가선대부(종2품의 품계) 칭호를 내렸다"고 전한다. 이에 관한 기록은 ?금고실기(今古實記)?에 전하고 있다. ?위정집(?汀集)?은 진시책의 개인 문집으로 전체 권수가 몇 권인지 불분명하지만, 현재 ‘의’와 ‘예’만 전하고 있다. ?위정집 약초?는 ?위정집?에 있는 시문을 발췌하여 수록한 책은 크게 시(詩)와 문(文) 두 부분으로 나뉜다. 진시책의 유허비(진 징사 공 유허비(陳徵士公遺許碑))가 1921년 5월에 반곡리 362-8(재께뜸)에 세워졌다. 반곡리 주민은 거의 그 비석에 대한 내용을 알지 못한 듯하다. 필자도 고향에서 태어나 자라는 동안 그 비석 앞을 수 없이 지나다니며 유허비를 보았다. 그 내용을 몰라 몹시 궁금했었는데, 고향이 수용된 후에야 국립민속박물관이 조사하여 발행한 ‘충남 연기군 금남면 반곡리 민속지’를 읽고 조선 고종으로부터 가선대부 품계를 받았다는 진시책의 자상한 비문 내용을 알았다. # 효도(孝道)는 무엇인가? 1. 김동민 금원 효도 선양회장(金東珉 錦源孝道宣揚會長)의 개막식 인사 효자 증조부님 휘(諱) 태희(泰喜) 효행비를 제막하면서 청명한 가을의 주말에 바쁘실 텐데 시간을 내시어 효행비 제막식에 참석하신 종회의 동훈 고문님, 선환 회장님, 동윤 부회장님, 인환 부회장님, 성환 총무 이사님을 비롯한 종친님께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그리고 금원 효도 선양회 가족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표합니다. 증조부님께서 1927년에 받으신 포창 완의문을 기리는 효행비를 세우게 되어 자손으로서 매우 자랑스럽습니다. 그 동안 제가 포창 완의문을 보관하면서 증조부님의 높으신 효행을 후손에게 어떻게 전할지 궁리하고 있었습니다. 종중 역사에 관심이 많은 동윤(東潤) 형님이 어려운 한자로 쓴 포창 완의문을 한글로 쉽게 번역하여 비문을 쓰시고, 동훈 형님이 비석 건립을 주관하시는데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포창 완의문에는 증조부님의 효도를 선양하기 위하여 후손들은 비석을 세우고 비각(碑閣)을 지으라고 했습니다. 증조부님의 효도를 예찬하고 본받기 위해 증손들은 증조부님의 호(號)인 금원(錦源)을 따서 금원 효도 선양회(錦源孝道宣揚會)를 조직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회원들은 효행비를 건립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우리 의견을 종회에 제시하여 효행비를 종중 재실인 숙경재(肅敬齋) 경내에 세우기로 합의했습니다. 이제 효행비를 세웠으니 증조부님의 효도를 본받아서 우리 가문에 효자 효녀가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자식을 둔 저도 부모님께 효도하려고 노력합니다. 효도를 실행하기 바랍니다. 부모님께 순종하고 공경해야 합니다. 효경(孝經)에는 하늘과 땅이 낳은 것 중에서 사람이 가장 귀하고 사람의 행실에 있어서는 효(孝)보다 큰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주자(朱子)는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돌아가신 뒤 뉘우친다(不孝父母死後悔=불효부모사후회)고 말했습니다. 명심보감(明心寶鑑)에는 효순(孝順)한 사람은 효순(孝順)한 자식을 얻을 것이요, 오역(?逆)한 사람은 오역한 자식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까마귀는 어미가 늙으면 새끼가 먹이를 물어다 주므로 반포조(反哺鳥) 또는 효조(孝鳥)라 하며, 기러기는 앉을 때 어미가 앉은 아래에 앉는다고 합니다. 인간 생활에 근본은 효(孝)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이기적이고 물질 제일주의로 효(孝) 사상이 없어지고 있어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2. 김동훈 아동 문학가 효심 동시(金東薰 兒童 文學家 孝心 童詩) 엄마 내음 아빠 내음 나 어릴 때 엄마 아빠 품에 안기면 꽃향기보다 더 짙은 향기가 있었지 내가 나이 들어 엄마 아빠 안아 보니 허리가 개미허리 향수보다 더 짙은 향기는 간 데 없고 나 어릴 때 엄마 내음 아빠 내음 어디 가고 약 내음만 풍기네 주: 김동훈 동시집 ‘반딧불 동네’ 102쪽에 게재, 오늘의문학사, 2002년 발행 3. 참판공 휘 해인 효행기 해설(?判公 諱 海仁 孝行記 解說)
효자 휘(諱) 김해인(金海仁)은 단군기원(檀君紀元) 3935년(서기 1602년, 조선 왕조(朝鮮王朝) 선조(宣祖) 35년, 임년(壬寅年)-족보에 기록)에 충청도 연기현(忠淸道 燕岐縣)에 출생하였다. 경주 김씨의 중 시조(中始祖)이며 고려 왕조(高麗王朝)에 등사(登仕)한 검교 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 휘(諱) 김인관(金仁琯)의 15대손이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예조 참의(禮曹?議) 휘 오(?)의 8대손이고,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 전서(工曹典書) 휘 자정(子汀)의 7대손이며, 자헌대부(資憲大夫) 황해 감사(黃海監司) 중추원지사(中樞院知事) 증(贈) 이조 판서(吏曹判書) 휘 장(?)의 6대손이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 참의(吏曹參議) 휘 승경(升慶)의 5대손이며, 조선 왕조(朝鮮王朝) 통덕랑(通德郞) 병조 정랑(兵曹正郞) 휘 논(金論)의 유복자(遺腹子)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중 선조(宣祖) 병신년(丙申年)에 명(明) 나라는 일본이 왜장(倭將) 풍신수길(?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을 왜왕(倭王)으로 책봉(冊封)하려는 의도를 거절하였고, 우리나라에 잔류했던 왜병(倭兵)들의 발호(跋扈)가 심하였는데, 아버지 휘 논(論)은 병조 정랑으로 재직 중 이를 토벌(討伐)하다가, 청주 동교(淸州東郊)에서 명예스럽게 전몰(戰歿)하였다. 어머니 공인(恭人) 진주 강씨(晉州姜氏)는 마침 임신 중이었고 피란처를 찾아 이리저리 유리(流離)하다가, 현 연기군 금남면 반곡리에 잠시 우거(寓居)하고 만삭분만(滿朔分娩)하기를 기다리던 중, 다음 해 임인년(壬寅年, 서기 1602년)에 분만 생남하니, 용모가 단아(端雅)하고 차차 자라면서 인후(仁厚)한 성품에 덕기(德氣)가 있으므로, 착한 마음이 바다와 같이 넓으라고 해인(海仁)이라 이름을 지었다. 임진왜란이 평정(平定)되자 조정(朝廷)에서는 그 아버지의 전공(戰功)을 상(賞)하여 복호(復戶)를 명하였다. 휘 김해인(金海仁)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한 한(恨)이 사무쳐, 어머니께 극진히 효도하여 털끝만큼도 그 뜻을 어기지 아니 하였고 마음을 즐겁게 하였으며, 빈한(貧寒)한 살림에 어머니의 고생하심을 애달프게 여겨 낮에는 부지런히 일하고 밤에는 글을 읽어 학문(學問)이 가경(佳境)에 이르렀다. 휘 김해인(金海仁)은 성장하여, 창녕(昌寧) 성(成)씨(氏) 두복(斗福)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부부 화락(夫婦和樂)하고 홀어머니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아니했으며, 아내 성(成) 씨에게 “나는 유복자이므로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사람인지라, 가슴에 사무치고 한(恨)이 천추(千秋)에 풀리지 아니하여 살아계신 어머니의 마음을 괴롭히지 아니하려고 힘쓰고 있으니, 그대로 내 마음을 동정하여 어머니의 마음이 상치 않도록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인조(仁祖)께서는 임진왜란에 유공한 자손을 명(命)하였다. 휘 김해인(金海仁)도 응소(應召)하여 음사(蔭仕)로 삼품 품계(三品品階)에 올랐으나 어머니를 받들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죄스러워 양친(養親)을 위하여 사직서를 여러 번 올려 인조(仁祖)는 가상(嘉尙)히 여겨 양친지자(養親之資)를 후히 사급(賜給)하고 귀향(歸鄕)을 명(命)하였다. 휘 김해인(金海仁)은 사의(思議)하고 어머니에게 돌아와 지성껏 받들었으며, 어머니 병환(病患)에 시탕 지절(侍湯之節)을 소홀하게 하지 않고 동동 촉촉(洞洞屬屬)하였으나 별세(別世)하니, 상장(喪葬)을 치르고 삼년시묘(三年侍墓)하였다. 종상 후(終喪後) 자손(子孫)들을 의방(義方)으로 교도(敎導)하는데, 항상 말하기를 “사람은 마땅히 삼강오륜(三綱五倫)을 가름하여 이해하고 실천궁행(實踐躬行)하여야 가정적으로는 상서로운 일이 생기고, 사회적(社會的)으로는 융화(融和)되어 질서(秩序)가 문란(紊亂)치 않고, 국가에는 일이 없이 태평세월(太平歲月)이 되는 것이니, 근본이 효(孝)에 있다”고 말하였고, 또 “내가 유복자로 태어나서 홀어머니를 받들기 정성을 다 했으나 유감 된 일이 많았다. 그래서 내가 늙어가는 오늘까지 어육(魚肉)을 먹지 아니했으니 내가 죽은 뒤에 기제(忌祭)나 시사(時祀)에 어육을 쓰지 마라”고 일렀다. 효자 휘 김해인(金海仁)은 건강한 몸으로 자질(子姪) 교육을 열심히 하다가, 불행(不幸)하게도 병신년(丙申年, 1656년, 효종 7년) 10월 24일에 55세(만 54세)를 인생일기(人生一期)로 별세하니, 인근(隣近) 인사(人士)들은 효행을 흠모(欽慕)하고 군(郡)과 도(道)에 효행자로 천보(薦報)하여 조정(朝廷)에서도 알게 되어, 효종(孝宗) 연대에 효(孝)로써 특증 가선대부(特贈嘉善大夫)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받았다. 맏아들 휘 선익(善益), 셋째아들 휘 광익(光益), 넷째아들 휘 귀익(貴益)은 집에 있어 치가(治家)하였고, 둘째아들 휘 정익(鼎益)은 음사(蔭仕)로 통정계(通政階)에 올라 정무(政務)에 힘써 혁혁(赫赫)한 공이 있었는데, 아들 4형제는 유명(遺命)대로 각종제수(各種祭需)에 어육을 쓰지 않는다.
■ 낱말의 뜻 -세(世)= 의존명사 (한자어 수 뒤에 쓰여)가계나 지위의 차례, 또는 왕조의 임금 순위를 나타내는 단위. 십오 세 후손, 나폴레옹 삼세, 헨리 팔세. 왕의 이름을 나타내는 ‘일세’, ‘이세’ 따위는 ‘나폴레옹 삼세’, ‘헨리 팔세’에서처럼 붙여 쓴다. 세(世)와 대(代)는 같은 뜻이고, 세손(世孫)과 대손(代孫)은 후손을 세는 단위이고, 세조(世祖)와 대조(代祖)는 조상을 헤아리는 단위인데, 세(世)와 대(代)에서 하나(1)를 뺀 숫자이다. 다시 말하면, 세(世) 또는 대(代)는 기준을 포함한 숫자이지만, 세손(世孫) 대손(代孫) 세조 (世祖) 대조(代祖)는 세(世)나 대(代)에서 1을 뺀 숫자를 말한다. 선조(宣祖)= 조선의 제14대 왕(1552~1608). 이름은 연(?). 초명(初名)은 균(鈞). 인조(仁祖)= 조선의 제16대 왕(1595~1649). 이름은 종(倧). 자는 화백(和伯). 호는 송창(松窓). 효종(孝宗)= 조선의 제17대 왕(1619~1659). 이름은 호(淏). 자는 정연(靜淵). 호는 죽오(竹梧). 검교(檢校)= 고려ㆍ조선 시대에, 해당하는 벼슬의 정원 외에 임시로 증원할 때나 실제 사무를 보지 않고 이름만 가지고 있게 할 때, 그 벼슬 이름 앞에 붙여 이르던 말. 특별히 조선 영조ㆍ정조 때에, 임시로 규장각 제학(提學)이나 직각(直閣)의 사무를 맡아보던 사람의 벼슬 이름 앞에 붙여 이르기도 하였다. [비슷한 말] 검직(檢職). 태자태사(太子太師/大師)= [같은 말] 태사(太師) 1. 고려 시대에, 임금의 고문을 맡은 정일품 벼슬. 원로대신에게 주는 명예직이었다. 태부(太傅)ㆍ태보(太保)와 함께 삼사(三師)라 불렸는데, 이 중 가장 높은 벼슬이었다. 2. 고려 시대에, 동궁에 속하여 왕세자의 교육을 맡아보던 종일품 벼슬. 충렬왕 3년(1277)에 제자사로 고쳤다. 한림학사(翰林學士)= 고려 시대에, 학사원ㆍ한림원에 속한 정사품 벼슬. 임금의 조서를 짓는 일을 맡아보았다. 정랑(正郞)= 조선 시대에, 육조에 둔 정오품 벼슬. 품계(品階)= 여러 벼슬자리에 대하여 매기던 등급. 제일 높은 정일품에서 제일 낮은 종구품까지 상하 18 단계로 나뉘어 있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조선 시대에 둔, 정삼품 문관의 품계. 통덕랑(通德郞)=조선 시대에 둔, 정오품 상(上) 문관의 품계. 고종 2년(1865)부터 종친의 품계로도 썼다. 삼품(三品)= 조선 시대에 둔, 문무관 품계의 셋째. 정삼품과 종삼품이 있었다. 유복자(遺腹子)=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를 여읜 자식. 책봉(冊封)= 왕세자, 왕세손, 왕후, 비(妃), 빈(嬪), 부마 등을 봉작(封爵)하던 일. 발호(跋扈)= 권세나 세력을 제멋대로 부리며 함부로 날뜀. 토벌(討伐)= 무력으로 쳐 없앰. 동교(東郊)= 동쪽의 교외. 전몰(戰歿)= 전쟁터에서 적과 싸우다 죽음. [비슷한 말]전망(戰亡)ㆍ전사(戰死)ㆍ진망1(陣亡)ㆍ진몰(陣歿). 공인(恭人)= 조선 시대에, 정오품 및 종오품 문무관의 아내에게 주던 외명부의 품계. 유리(流離)= 일정한 집과 직업이 없이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님. [비슷한 말]유리-표박(流離漂泊)ㆍ유리방황. 우거(寓居)= 남의 집이나 타향에서 임시로 몸을 붙여 삶. 또는 그런 집. 단아(端雅)하다= 단정하고 아담하다. 인후(仁厚)하다= 어질고 후덕하다. 덕기(德氣)= 어질고 넉넉한 마음씨나 낯빛. 복호(復戶)하다= 조선 시대에, 충신ㆍ효자ㆍ군인 등 특정한 대상자에게 부역이나 조세를 면제하여 주다. 한(恨)= 몹시 원망스럽고 억울하거나 안타깝고 슬퍼 응어리진 마음. [비슷한 말] 한탄, 원한, 응어리. 빈한(貧寒)하다= 살림이 가난하여 집안이 쓸쓸하다. 가경(佳境)= 한창 재미있는 판이나 고비. 화락(和樂)= 화평하고 즐거움. 사무치다= 「…에」깊이 스며들거나 멀리까지 미치다. 천추(千秋)= 오래고 긴 세월. 또는 먼 미래. 응소(應召)= 소집에 응함. 음사(蔭仕)= [같은 말] 음관(蔭官)(과거를 거치지 아니하고 조상의 공덕에 의하여 맡은 벼슬). 양친(養親)하다= 부모를 봉양하다. 가상(嘉尙)하다= (흔히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칭찬할 때 쓰여) 착하고 기특하다. 양친지자(養親之資)= 부모를 봉양할 재물. 사급(賜給)= [같은 말] 사여(賜與)(나라나 관청에서 금품을 내려 줌). 귀향(歸鄕)=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돌아옴. 명(命)하다= 1.[같은 말] 명령하다(윗사람이나 상위 조직이 아랫사람이나 하위 조직에 무엇을 하게 하다). 2.[같은 말] 임명하다(일정한 지위나 임무를 남에게 맡기다). 사의(思議)하다= 생각하여 헤아리다. 시탕(侍湯)= 어버이의 병환에 약시중을 드는 일. 절(節)= (한자) 마디 절. 1. (식물의)마디 2. (동물의)관절(關節) 3. 예절(禮節) 4. 절개(節槪ㆍ節介), 절조(節操:= 절개와 지조를 아울러 이르는 말). 동동촉촉(洞洞屬屬)= 매우 공경(恭敬)하고 삼가하여 조심스러운 모양(模樣) 상장(喪葬)= 장사 지내는 일과 삼년상을 치르는 일. 시묘(侍墓)= 부모의 거상(居喪=상중(喪中)에 있음) 중에 3년간 그 무덤 옆에서 움막을 짓고 삶. 종상(終喪)= [같은 말] 해상(解喪)(어버이의 삼년상을 마침). 의방(義方)= [같은 말] 의방지훈(집안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가르침). 교도(敎導)= 가르쳐서 이끎. 삼강오륜(三綱五倫)= 유교의 도덕에서 기본이 되는 세 가지의 강령과 지켜야 할 다섯 가지의 도리. 삼강(三綱)= 유교의 도덕에서 기본이 되는 세 가지 강령.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을 이른다. [비슷한 말] 삼정(三正). 오륜(五倫)= 유학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을 이른다. 유의어 : 오상, 인륜. 가름하다= 1.쪼개거나 나누어 따로따로 되게 하다. 2.승부나 등수 따위를 정하다. 실천궁행(實踐躬行)= 실제로 몸소 이행함. 상서(祥瑞)= 복되고 길한 일이 일어날 조짐. 융화(融和)= 서로 어울려 갈등이 없이 화목하게 됨. 일= 해결하거나 처리해야 할 문제. 또는 처리하여야 할 행사. 태평세월(太平歲月)= 근심이나 걱정이 없는 시절. 어육(魚肉)= 1.생선의 고기. 2.생선과 짐승의 고기를 아울러 이르는 말. 시사(時祀)= 1.[같은 말] 시향(時享)(음력 2월, 5월, 8월, 11월에 가묘에 지내는 제사). 2.[같은 말] 시향(음력 10월에 5대 이상의 조상 무덤에 지내는 제사). 기제(忌祭)= [같은 말] 기제사(해마다 사람이 죽은 날에 지내는 제사). 자질(子姪)= 1.[같은 말] 자여질(아들과 조카를 통틀어 이르는 말). 2.[같은 말] 자손(子孫)(자식과 손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 흠모(欽慕)= 기쁜 마음으로 공경하며 사모함. 천보(薦報)= 추천하여 보고함. 효종(孝宗)= 조선(朝鮮) 시대(時代) 제 17대 왕. 특증(特贈)= 특별하게 관위(官位)를 추사(追賜)하다(=죽은 사람에게 벼슬, 칭호, 물건 따위를 주던 일).
가선대부(嘉善大夫)= 조선 시대에 둔, 종이품 문무관의 품계. 가의대부의 아래 급으로, 태조 1년(1392)에 설치하였으며, 고종 2년(1865)부터 문무관, 종친, 의빈(儀賓)의 품계로도 썼다. 일기(一期)= 1.어떤 시기를 몇으로 나눈 것의 하나. 2.한평생 살아 있는 동안. 치가(治家)= 집안일을 보살펴 처리함. 혁혁(赫赫)하다= 공로나 업적 따위가 뚜렷하다. 제수(祭需)= 1.제사에 드는 여러 가지 재료. 2.[같은 말] 제물3(祭物)(제사에 쓰는 음식물). 유명(遺命)= 임금이나 부모가 죽을 때에 남긴 명령.
4. 김동윤 교장 효심기(金東潤 校長 孝心記)
아버님 어머님께(父母前上書) 아버님 어머님, 안녕하세요? 다사다난했던 2009년도 며칠 안 남았네요. 한 해가 저물어 가니 아버님과 어머님이 몹시 그리우며 뵙고 싶어 이 편지를 썼습니다. 이곳 고양시 능곡(陵谷)은 한강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겨울바람과 함께 눈이 내리는 영하의 날씨입니다. 아버님 어머님이 계신 그곳은 세모를 맞아 춥지 않으신지요? 아버님께서는 제가 일곱 살 때 6ㆍ25 동란 중 북한 괴뢰군에게 학살되시어 서른여섯에 가신 지 어언 59년, 어머님께서는 제가 마흔여덟 살 때 저녁 진지를 잡수시고 돌연 가슴 통증으로 일흔아홉에 가신 지 벌써 18년이 지났습니다. 부모님이 가신 지 긴 세월이 흘렀고 불효자는 예순일곱이 되었지만, 기쁘나 괴로우나 어버이의 구로(?勞)를 잊은 적이 없고 무엇보다 아버님의 살육을 저지른 원수에 대한 원한을 잊지 못합니다. 작년 10월에 유택(幽宅)을 옮길 때 부모님을 다시 뵈오니 반가웠어요. 정든 고향에 계셨던 부모님 유택을 뜻밖에 옮기게 된 사연은 이렇습니다. 2005년 3월 18일에 행정 중심 복합 도시 건설 특별법이 공포되었습니다. 정랑공(正郞公) 휘 논(論) 할아버님과 공인(恭人) 진주 강씨 할머님께서 조선 왕조 선조 시대에 정착하신 반곡리가 세종시를 건설할 국책 사업에 수용되었어요. 남쪽에 솟은 괴화산(槐花山)과 북쪽에 흐르는 금강(錦江)의 정기를 받으며 대대손손 살아온 후손들은 400여 년간 정든 터전을 떠나야 하다니 못내 아쉬워했어요. 저도 어린 시절에 꿈을 키우면서 연을 날리던 뒷동산과 소나기가 지나가면 무지개를 보면서 물고기를 잡던 시내가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애틋한 심정을 가눌 길 없었어요. 누군들 태어나고 자란 땅에 붙인 정을 쉽게 잊을 수 있겠어요. 그러나 후손들은 더 좋은 환경을 개발하겠다는 정부의 시책을 이해하고 협조하여 이주할 수밖에 없었어요. 반곡에 살았던 자손들은 향수를 달래면서 작년에 뿔뿔이 타관으로 이사하고, 동하(東廈)는 용포리로 이사했어요. 동네 집이 다 헐려 옛 마을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어요. 경주 김씨 참판공 해인파(海仁派) 종회에서는 2006년에 종중이 소유한 논, 밭, 임야, 주택, 대지의 자산에 대하여 정부가 지급하는 보상금을 받고, 2007년에 전동면 보덕리(寶德里)의 임야를 매입하여 종중산을 마련하고, 2008년에 묘역을 조성한 후 선영들을 이전하는 역사적인 종중 사업을 했어요. 햇살 바른 곳에 가지런하게 묘지 터를 닦고 큰 봉안당을 지어 선조님들을 모두 면봉(緬奉)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부모님도 새 유택(幽宅)으로 면례(緬禮)하게 되었습니다. 조부모님과 아버님은 이번에 두 번째 면례하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은 대전지방법원(大田地方法院)에 민사주임(民事主任·현재 민사과장)으로 근무하시는 중, 1950년에 6·25 동란(動亂)(사변(事變)=한 나라가 상대국에 선전 포고도 없이 침입하는 일·오늘날 전쟁이라고 함)이 발발(勃發)하였을 때, 처가(妻家)인 탄동면 수남리(水南里) 148번지에서 피란하셨지요. 억울하게 아무 죄 없는 아버님은 인민군에게 잡혀, 1950년 9월 27일(음력 팔월 열엿샛날) 오전 10시에 학살되시어, 향년(享年) 36세를 일기(一期)로 젊은 나이에 원통(寃痛)하게 서거(逝去)하셨지요. 온 동네 사람들이 얼마나 슬퍼했는지 몰라요. 아버님의 유택은 전시 중에 어수선하여 엉떠지께 종산의 송림 속에 제대로 모시지 못했어요. 오랫동안 불편한 자리에 계시다가 어머님이 1991년 3월 25일(음력 신미년(辛未年) 이월 열흘날)에 돌아가시어, 아버님의 산소에서 서쪽으로 약 50m 떨어져 금강이 훤하게 보이고 양지바른 곳에 모실 때, 아버님의 유택을 면례하여 합부(合?)했습니다. 그 해 5월에 조부모님 유택을 부모님 산소의 바로 위에 면례하니 벌초하고 성묘하기에 가까워져 편했습니다. 조부님 휘 상옥(商玉)과 조모님 밀양 박 씨 휘 옥용(玉蓉)의 산소는 반곡리 집에서 약 6km 떨어진 금남면(錦南面) 부용리(芙蓉里)의 앞에 금강(錦江)이 흐르고 뒤에 높이 솟은 부용산(芙蓉山) 중턱에 모셨었습니다. 부모님을 면례하기 위하여 2008년 10월 13일(월) 오후 3시에, 산타모(santa mo) 자가용차를 운전하고 고양시(高陽市)에 있는 집을 출발하여 용포리(龍浦里)로 이사한 동하(東廈) 집으로 가서 잤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서울에서 온 형과 동하와 함께 반곡리(盤谷里) 어덕동(於德洞)(엉떠지께)으로 갔습니다. 부모님이 새 유택으로 가신 날, 2008년 10월 14일(화)(음력 무자년(戊子年) 구월 열엿샛날 정해(丁亥))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가을이었습니다. 여수배들(호암평狐岩坪), 번제(藩堤)들, 큰개들의 황금물결이 괴화산과 금강에서 불어오는 산들 바람에 넘실거렸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저희 삼형제는 사촌을 비롯하여 재종과 함께 엉떠지께(於德洞)에 계신 부모님 휘(諱) 인제(仁濟)와 진주 강씨(晉州姜氏) 휘 신규(信閨), 조부모님 휘 상옥(商玉)과 밀양 박씨(密陽朴氏) 휘 옥용(玉蓉)과 텃체(대처산(垈處山))에 계신 큰 할머님 진주 강씨(晉州姜氏), 우리 집의 뒷산에 계신 증조부모님 휘 학희(學喜 초명은 경희(慶喜))와 밀양 박씨, 텃체에 계신 고조부모님 휘 노령(魯令)과 밀양 박씨와 금댕이(봉기리(鳳起里)) 공동묘지에 계신 작은 고조할머님 단양 우씨(丹陽禹氏), 열 분 유택을 면례했어요. 생전에 뵙지 못한 고조부모님과 증조부모님, 그리고 저를 귀여워하시고 6ㆍ25 동란에 아들을 잃어서 매우 슬퍼하시며 고생을 많이 하셨던 조부모님도 면례하면서 다시 뵈오니 반가웠어요. 부모님께 면례를 고(告)하는 예(禮)를 올리면서 형이 축문(祝文)을 읽었죠. 維 歲次 戊子 九月 壬申 朔 九月 十六日 丁亥(유세차 무자 9 월 임신 삭 9월 16일 정해) 孝子 東運 敢昭告于 (효자 동운 감소고우) 顯 考 學生 府君(현 고 학생 부군) 顯 ? 孺人 晋州姜氏(현 비 유인 진주 강씨) 葬于玆地 政府收用 迫於不得 改定幽宅 將行緬奉 今以吉辰 將破舊墓 伏惟尊靈 勿震不驚 (장우자지 정부수용 박어부득 개정유택 장행면봉 금이길신 장파구묘 복유존령 물진불경) 謹用 牲醴庶品 敢告虔告(근용 생예서품 감고건고) 아버님께서는 엄격하시고 어머님께서는 인자하신 모습이 생생했어요. 생전에 부모님께 효도를 다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어요. 제 새끼가 아비 말을 듣지 않을 땐 부모님의 무한한 사랑을 생각했어요. 제가 부모님 말씀을 듣지 않았을 때 부모님께서는 얼마나 속상하셨을까 하고 뉘우쳤어요. 정철(1536-1593) 조선 왕조 시인의 시조가 떠올랐습니다. 어버이 살아 실 제 섬길 일란 다 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달프다 어이 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또, 낭원군(朗原君)(1640-1699)(조선 왕조 선조의 손자인 인흥군(仁興君) 영(瑛)의 아들)이 지은 시조를 되새겼습니다. 어버이 날 낳으셔 어질과저 길러내니/ 이 두 분 아니시면 내 몸 나서 어질소냐/ 아마도 지극한 은덕을 못내 갚아 하노라. 오후 3시 반에 새 ‘옷’으로 갈아입으신 휘 노영(魯永) 고조부님, 밀양 박씨(密陽朴氏)와 단양 우씨(丹陽禹氏) 고조모님, 휘 학희(學喜) 증조부님, 밀양 박씨(密陽朴氏) 휘 동촌(東村) 증조모님, 휘 상옥(商玉) 조부님, 진주 강씨(晉州姜氏)와 밀양 박씨(密陽朴氏) 휘 옥용(玉蓉) 조모님, 휘 인제(仁濟) 아버님, 진주 강씨(晉州姜氏) 휘 신규(信閨) 어머님, 모두 열 위(位) 조상님은 다시 올 수 없는 정든 고향 땅을 떠나셨어요. 날이 가물면 여수배 논에 물을 대기 위해 소를 이용해서 냇바닥을 깊이 팠던 삼성천(三城川) 옆을 지나고, 돈적골에 있던 옛 물레방앗간의 터와 금강 북쪽의 전월산(轉月山) 밑에 있는 양화리로 배 타고 건너다니던 옛 앵챙이 나루터를 가까이서 바라보고, 큰개들과 아랫들에 큰 농로의 옆에 붙어있던 옛날 우리 밭 옆을 지나고, 금강 남쪽의 비학산(飛鶴山) 끝자락에 있는 제가 졸업한 금남국민학교(錦南國民學校)(초등학교로 변경)와 금호중학교(錦湖中學校)를 멀리서 바라보며, 금강의 뚝방 위 도로를 지나, 유유히 흐르고 있는 금강 위에 금남교(錦南橋)를 건너, 보덕리(寶德里) 종산을 향해 가셨죠. 불효자는 한 대의 영구차에 열 위(位) 조상님을 함께 모시고 가면서 만감이 교차했었습니다. 편히 모시지 못하여 자손으로서 죄송스럽고 불경스러운 마음을 금치 못했어요. ‘유정 천리’(반야월 작사 김부해 작곡 박재홍 노래) 옛 노래 가사를 되새겼습니다. 1. 가련다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 감자 심고 수수 심는 두메산골 내 고향에 못 살아도 나는 좋아 외로워도 나는 좋아 눈물 어린 봇 다리에 황혼 빛이 젖어 드네. 2. 세상을 원망하랴 내 아내를 원망하랴 누이동생 혜숙이야 행복하게 살아다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인생길은 몇 구비냐 유정 천리 꽃이 피네 무정 천리 눈이 오네. 아버님, 우리는 대전에서 여유 있게 잘 살다가 6ㆍ25 동란에 아버님께서 일찍 가신 후, 어머님은 시부모님을 모시면서 아들 셋을 키우시느라 고생을 얼마나 많이 하셨는지 아버님은 모르실거에요. 그 고생한 이야기를 다 하자면 끝이 없어요. 아버님을 수 없이 불러 보고 찾으면서 살아왔어요.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났어요. 이제 의식주 생활이 많이 달라졌어요. 참 좋아졌어요. 조상님들뿐만 아니라 제가 반곡리부터 대평리까지 먼 뚝방 길을 왕래한 삶의 애환이 많잖아요. 십리가 넘는 길을 엄동설한에도 강바람을 쐬면서 장갑도 외투도 없이 걸어 다녔잖아요. 이젠 제 자가용차를 운전하여 반곡에서 서울까지 3시간이면 다닐 수 있으니 편리해졌죠. 강둑엔 풀이 거의 없건만 많은 소들이 있어 소똥이 널렸었잖아요. 이젠 소를 한 마리도 볼 수 없고 풀이 우거졌으며, 걷는 사람은 없고 자동차들만 다니죠. 우리가 겪은 ‘보릿고개가 태산보다 높다’는 빈한도골(貧寒到骨) 시절의 시대상을 요즘 아이들은 이해하지 못해요. 석유 등잔 생활을 하다가 1970년에야 전기(電氣)가 들어왔을 때 새 세상을 만난 것 같았죠. 아카시아 꽃과 송화 가루로 끼니를 때우던 식생활이었는데 지금은 남는 음식 쓰레기 문제로 고민한답니다. 못 먹어서 괴로워했는데 요즘에는 살찌는 것을 걱정해요. 무명 옷을 입으려고 목화를 심어 솜을 만들고 베를 짜느라 고생이 많았잖아요. 이젠 좋은 옷이 많아 모양을 내고, 싫증나서 버리는 옷들을 후진국에 보내 준답니다. 짚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씌우고 흙으로 벽을 발라서 지은 초가집에 살 때 불편했지만 아파트 주택에서 생활하니 매우 편리합니다. 이젠 더 잘 살기 위한 개발을 추진하면서 자연 환경을 소중하게 보존하려고 노력한답니다. 평균 수명도 옛날보다 많이 길어졌습니다.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하며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가난을 벗어나려고 애쓰던 새마을운동의 보람으로 잘 살고 있지요. 해외로 여행해보니 ‘이젠 우리나라가 잘 사는구나’하고 느끼는데 우리가 땀 흘려 고생하면서 열심히 일한 대가이죠. 여기저기서 개발이 한창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바로 앞에 경의선 능곡역(陵谷驛)이 있는데요, 작년에 복선 철도를 설치하고 능곡 역사(驛舍)를 크게 개축하여 지난 7월에 최신식 전동 열차의 운행을 시작했어요. 앞으로 더 살기 좋아질 거여요. 그런데, 아버님 어머님, 못 먹고 못 입어 찌들게 가난했을 적엔 이웃 간에 서로 정이 두터워 사람 사는 인정이 있었잖아요. 요즘엔 웬걸요. 더 잘 먹고 잘 입고 편리하게 살면서도 돈 때문에 집안 끼리 싸움이 일어나기도 해요. 물질은 풍요롭지만 인심은 각박해지고 있어요. 물질 만능 사상으로 세상이 거칠어졌어요. 옛날엔 이혼, 사기, 강간, 강도, 방화, 자살, 살인, 등등 험악한 사건들이 어디 있었나요. 인내하고 이해하려고 하질 않아요. 세상이 어떻게 되려는지 걱정이 되는군요. 그래도 좋은 사람들이 많으니 비관할 것 없겠죠. 영구차는 오후 늦게 보덕리(寶德里) 종중산에 도착하였습니다. 고조부모님부터 차례로 건좌(乾坐) 좌향(坐向)으로 만든 지실(地室)에 안치하고 평토(平土)만 했습니다. 종회에서 면례를 계약한 마정천도 회사에게 성분(成墳)을 맡겼습니다. 정성껏 예를 올리고 나니 가을해가 저물었습니다. 또 뵙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작별을 고한 후, 조치원 읍내(邑內)로 가서 어느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니, 음력 9월 가을의 둥근 달이 휘영청 밝았어요. 밝은 달을 바라보며 새 유택으로 가신 아버님과 어머님의 평안을 두 손 모아 빌었습니다. 다음 날 또 면례하기 위해서 형과 함께 동하네 집으로 가서 이틀째의 밤을 잤습니다. 다음 날 이른 아침에 형과 동하와 함께 마소해산(馬召海山)(마세) 종산으로 갔습니다. 휘 한붕(漢鵬) 6대 조부님, 경주 이씨(慶州李氏) 6대 조모님, 휘 상호(商浩) 종조부님, 한산 이씨(韓山李氏) 종조모님, 휘 원제(原濟) 당숙님, 휘 의제(義濟) 숙부님, 동하(東廈) 처 천안 맹씨(天安孟氏) 휘 영수(榮樹)를 면례하였습니다. 작년 10월 29일(음력 시월 초하루날 임인(壬寅))에 진주 강씨 할머님을 비롯한 조상님들께서 반곡리에서는 여기저기 흩어져 계셨는데 보덕리 새 종중 묘역의 한 곳에 모셨습니다. 조상님들께서는 모두 이웃에 가까이 계시니 정을 나누시겠지요. 오호통재(嗚呼痛哉)라. 3남 3녀를 기르시느라 고생을 많이 하신 순흥 안씨(順興安氏) 휘 병은(炳殷) 작은어머님이 금년 3월 17일(음력 이월 열하루날)에 돌아가셨어요. 우연히 어머님이 별세하신 날의 바로 다음 날이었고, 종중 묘역을 이전한 후 집안 중에서 처음으로 작은아버님 곁에 합부(合?)하였어요. 지난 6월에 숙경재 재실을 기공하고 8월에 상량식을 하여 지금 공사하고 있습니다. 한국토지공사가 후원하고 국립민속박물관이 행정 중심 복합 도시 건설 예정 지역 33개 부락 중 반곡리를 선정하여 인류 민속 분야 문화유산 지표 조사 보고서로 ‘충남 연기군 금남면 반곡리’ 4 권을 2006년에 발행했는데, 그 보고서에 의하면 반곡리가 풍수로 보아 길지(吉地)이랍니다. 그 길지가 어떻게 개발될는지 기대가 큽니다. 요즘 이명박 (李明博) 대통령 정부에서는 세종시 개발 계획을 변경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부모님께서 고향을 떠나시게 된 사연을 말씀드렸는데, 다음에 고향이 변한 모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엄동설한에 안녕히 계세요. 2010년 새해에도 복 많이 받으세요. 2009년 12월 26일 고양시 토당동에서 불효자 동윤 올림
# 비석은 무엇인가? 1. 비(碑)·갈(碣)·비석(碑石) 비(碑)는 석재를 방각형(方角形)으로 깎아서 만든 것이고, 비신의 윗부분이 네모지며, 어떤 사적(事蹟)을 후세에 오래도록 전하기 위해 나무·돌·쇠붙이 따위에 글을 새겨 세워놓는 것이다. 갈(碣)은 둥그런 자연석의 한쪽 면만 깎은 것이므로, 석물의 위쪽이 둥그스름하다. 가첨석(加?石)을 얹지 않고 머리를 둥그스름하게 만든 작은 비석이다. 비석(碑石)은 고인(故人)의 사적(事蹟)을 칭송하고 이를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문장을 새겨 넣은 돌이다. 하마비(下馬碑)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말을 탄 사람이 그 앞을 지나갈 때는 말에서 내리라는 글을 새긴 비석이다. 비(碑)·빗돌·석비(石碑) 등 여러 말이 있으며, 거기에 새겨 넣은 글은 금석문(金石文)이라고 한다. 2. 비석의 종류 비석의 종류는 묘비(墓碑)를 비롯하여 능비(陵碑)·신도비(神道碑)·기적비(紀蹟碑)·기념비(記念碑)·순수비(巡狩碑)·정려비(旌閭碑)·송덕비(頌德碑)·애민비(愛民碑)·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등이 있으며, 그 밖에도 유허(遺墟)·성곽(城廓)·대단(臺壇)·서원(書院)·묘정(廟庭)·빙고(氷庫)·교량(橋梁)·제지(堤池)등에 세우는 기적비(紀蹟碑)가 있다. 내용에 따라 탑비(塔碑)·묘비(墓碑)·신도비(神道碑)·사적비(事蹟碑)·송덕비(頌德碑) 등이 있다. 3. 비석의 구조 비석의 구조는 대개 비석을 받치는 대좌(臺座), 비문을 새기는 비신(碑身), 비신을 덮는 개석(蓋石) 또는 관석(冠石)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대좌는 귀부(龜趺)로 되어 있고 관석은 이수(?首)로 되어 있으나, 요즈음 서민층의 묘소에는 귀부와 이수 없이 비신만을 세우는 경우가 많다. * 이수(?首)의 뜻 (국어사전) 건축물이나 공예품 따위에 뿔 없는 용의 모양을 아로새긴 형상. 비석의 머리, 궁전의 섬돌, 돌기둥에 많이 새긴다. [비슷한 말] 이두(?頭). (한자사전) 건축물(建築物)이나 공예품(工藝品)에서 뿔 없는 용의 서린 모양을 아로 새긴 형상(形狀). 흔히 종정(鐘鼎)이나 궁전(宮殿)의 섬돌ㆍ이기(?器)ㆍ인장(印章)ㆍ대구(帶鉤)ㆍ비(碑)머리 등(等)에 쓰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무기를 새긴 개석(蓋石) 또는 관석(冠石)이다. * 이무기(대망大?(?)/?(?)=이무기 망, 메뚜기 맹)의 뜻 전설상의 동물로 뿔이 없는 용. 어떤 저주에 의하여 용이 되지 못하고 물속에 산다는, 여러 해 묵은 큰 구렁이를 이른다. * 귀부(龜趺)의 뜻 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碑石)의 받침돌. 신라 초기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탑골 공원의 대원각사 터의 비(碑)와 경주 서악의 무열왕릉의 비가 있다. 대좌(臺座)는 비신받침으로 거북모양을 조각한 귀부(龜趺)와 네모로 깎은 방부(方趺)의 두 가지가 있다. 어느 것이나 대좌 위에 직사각형의 홈을 파서 비신을 끼우게 되어 있다. 대좌로 귀부를 많이 쓰는 것은 거북이 수명장존(壽命長存)을 상징하는 신령스런 동물로 인식되어왔으므로, 비문을 후세에 영구히 전하기 위하여 가장 적절한 상징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방부는 네모의 대석에 아무 수식도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나 어떤 비에서는 돌려가며 꽃잎을 새기거나 2∼3단의 농대(壟臺) 위에 올려놓기도 하였다. 비신(碑身)은 대개 긴 직육면체(直六面體)로 깎아 세우는데, 앞면을 비양(碑陽), 뒷면을 비음(碑陰)이라 하며, 비문은 주로 비의 음양 면에 새긴다. 비신의 상단부 또는 이수에 비의 명칭을 새기는데, 이것을 제액(題額)이라 한다. 전서로 쓴 것을 전액(篆額), 예서로 쓴 것을 예액(隷額)이라 하기도 한다. 제액 가운데 비신의 상단에 가로로 돌려가며 새긴 것을 횡액(橫額), 비양에 세로로 쓴 것을 종액(縱額)이라 한다. 횡액을 쓰는 경우, 비문은 대개 비음에서 시작하여 끝나지만 짧은 명문(銘文)은 종액의 좌우에 나누어 새기기도 한다. 관석(冠石)은 이수(?首)가 변형되어 단순히 이수의 윤곽만을 나타내거나 꽃잎의 문양만을 새긴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개석(蓋石)은 대개 개화(開花)의 형상을 취하여 그 꼭대기에 화심형(花心形)의 꼭지를 두는 것이 보통으로 이것이 화관석(花冠石)이다. 이수나 화관석 외에 지붕모양의 개석을 가첨석(加?石)이라고 한다. 4. 비문의 문체 비문의 문체는 산문으로 된 서(序)와 운문으로 된 명(銘)으로 대별된다. 서와 명으로 된 비문을 대개 비명병서(碑銘幷序) 또는 비명이라 부른다. 서가 없이 명으로만 된 비문이나, 명이 없이 서로만 된 비문도 있기는 하나, 이런 것은 비송(碑頌) 또는 비기(碑記)라 하여 따로 구별하기도 한다. 비서(碑序)는 비문을 쓰는 경위를 설명하는 부분으로 본문에 의의를 부여하는 곳이다. 비명(碑銘)은 4언·5언·7언 등의 운문으로 이루어진다. 명에서는 짧고 화려한 수식을 동원하여 공덕을 찬양하고자 ≪시경 詩經≫의 송(頌)이나 아(雅)와 같은 전아(典雅)한 시가에 그 근원을 둔다.
5. 비문의 서체 비문의 서체에는 전서, 예서, 해서, 행서 등이 있다. |
출처: 반곡리 김 동 윤 블로그 원문보기 글쓴이: 김동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