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가 좋아하는 마츠모토씨(박경남 1995년작).
18. 제4화 지하벙커에서 하늘로 01
1994년 봄, 개나리꽃의 선명한 노란색이 밝은 햇빛을 받아 거리를 수놓는다. 한국 서울 길거리. 대학으로 이어지는 길을 젊은이들이 웃고 웅성거리며 걸어간다.
그 한 무리 안에 유독 눈길을 끄는 한 남자의 모습이 있었다. 약간 긴 머리에 180센티미터는 될 것 같은 장신을 작업복으로 감싸고 있다. 배낭 모양의 가방을 메고 운동화를 신고 걷는 발걸음은 가볍다.
연세대학교 내 어학당(한국어를 배우기 위한 시설)에서 공부하고 있는 그는, 63세 학생이다. 그 사람, 이타쿠라 히로미(板倉弘美) 씨와 내가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4년 정도 전의, 의외로 더운 8월의 날의 일이었다.
친구 몇 명과 함께, 태평양전쟁 말기에 만들어진 마쓰시로 대본영(松代大本営) 지하호(地下壕) 터를 찾았다. 도쿄 우에노역에서 신에쓰 본선(信越本線) 특급 '아사마'를 타고 3시간 남짓이면 나가노(長野)역 조금 앞 시노노이(篠ノ井)역에 도착한다. 여기서 택시로 약 10분 정도 거리에 지하벙커는 있다. (*朝間-あさま: 朝のうち. 朝のあいだ.朝)
어지러울 정도로 강한 햇살 아래로 차에서 내리니, 내려 쬐는 태양을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꼿꼿이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상하 작업복 차림의 맨발에 샌들, 긴 머리에 맞춘 듯한 콧수염. 마치 동굴에서 나온 도사(道士)같아 보였다. 이것이 이타쿠라 씨와의 인상적인 첫 대면이었다.
나가노 현의 고등학교에서 사회과 선생님으로 있던 이타쿠라 씨는, 정년을 2년 앞두고 퇴직해 지하벙커의 역사를 제대로 알리고 싶어, 견학 오는 사람들의 안내역을 맡고 있다. 그 안내 횟수는 300회나 된다고 한다.
마쓰시로 대본영 지하호. 내가 이 지하벙커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아동문학가 와다 노보루(和田登1936~ 2025 아동문학가)가 쓴 "김(金)의 십자가(호루푸출판)"라는 아동도서에서였다.
내용은 이 지하벙커 공사를 위해 조선에서 강제 연행된 스무 살과 열일곱 살 김재하, 세환 형제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다. 동생 세환은 열두 살 때부터 열성적인 기독교인이었다. 형 재하와 가족들은 일본군의 기독교 탄압이 걱정돼, 세환을 아버지의 지인 집에 맡긴다.
그 4년 후 형제는 각각 따로 강제 연행되어 마쓰시로에 오는데, 서로 그것을 몰랐다. 패전이 되어 간신히 살아남은 재하는 동생도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환이 남긴 성경구절이 새겨진 판자가, 다른 구역의 공사판 식당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필사적으로 동생을 찾는다.
하지만 이미 동생은 공사 중 폭발 사고로 숨진 후였다. 동료들의 말에 따르면 강제연행도, 폭발사망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였다고 한다. 재하는 동생이 죽은 동굴 암벽에 슬픔과 사랑을 담아 십자가를 새기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중급 이상’을 위한 책이지만 심금을 울리는 내용이었다. 언젠가 나가노시의 마쓰시로쵸에 있는 그 지하벙커를 자신의 눈으로 실제로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군부가 미군의 일본 본토 공습에 대비해 대본영을 이전시킬 목적으로 파낸 거대한 이 지하벙커. 대본영이란 천황을 대원수로 하여 전군의 작전지휘를 하는 최고기관을 말하는데, 군부는 마쓰시로 분지 일대의 안전한 장소에 대본영뿐만 아니라 정부, NHK, 황족의 주거, 가쿠슈인(*学習院), 기타 기관을 옮긴다는 일대천도(一大遷都)를 계획하고 있었다. (*学習院-がくしゅういんは、旧宮内省の外局として設置された国立学校。華族の子弟の教育機関として設立され、華族の子弟は無試験で入学でき、高等科までの進学が保証されていた。1947年-昭和22年に廃止-民営化されたが、新たに私立学校として
"学校法人学習院'となり再出発した.)
1944년 11월 11일 마쓰시로 마을에 발파(광산이나 토목공사 등에서 화약을 사용하여 암석을 폭파하는 것)의 폭음이 울렸다. 그것이 ‘상산(象山)’ ‘개신산(皆神山)’ ‘무학산(舞鶴山)’ 등의 세 산을 도려내는 총 길이 13km에 이르는 대지하공사의 시작 신호였다.
이듬해 8월 15일 패전의 날까지 약 9개월간 아침이고 밤이고 없는 돌관공사가 진행됐다. 단기간에 이만한 대규모 공사를 하려면 많은 노동자를 모아야 한다.
전쟁 말기 노동력은 극단적으로 부족했고, 그래서 일본 내 공사장에서 일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을 임금이 높은 일자리가 있다는 선전 문구로 모았으며, 그것으로도 턱없이 부족하자, 징용이라는 명목으로 주로 15세부터 18세까지의 청소년들을 조선 본토에서 강제로 연행해 왔다.
실제로 지하벙커 공사에 종사한 노동자는 하루 약 1만 명이라고 하는데, 그중 7천 명 이상은 조선인 노동자였던 것이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가혹한 처지에 놓였다. 삼각 막사라고 불리는, 판자로 만든 세모난 지붕을 얹었을 뿐인 칸막이도 없는 판자 움막에서 기거하였다. 눈이 오면 틈 사이로 눈이 바람에 밀려 들어 오는 추위 속에서, 솜이 완전히 삐져 나온 너덜너덜한 천만 남은 '이불'로는 추워서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한다.
하루 2교대로 12시간의 중노동을 지탱하는 식사라고는 반찬도 없이, 수수에 쌀과 콩이 조금 들어 있는 밥에 소금을 뿌린 것으로, 영양실조로 쓰러지거나 죽는 노동자가 속출했다.
공복에 움직일 수 없는 자나, 병으로 누어 있는 사람에게도 가차 없이, 한겨울이라도 양동이로 물을 뿌려 공사장으로 데려갔다. 게다가 도망을 막기 위해 숙소는 잠겨 화장실에 갈 때만 나갈 수 있는 감옥 같은 생활이었다고 한다.
이타쿠라 씨의 뒤를 따라 지하벙커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 썰렁한 냉기로 땀이 식는다. 해발 약 480m의 ‘상산(象山)’을 파내 만들었다는 상산지하호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다. 갱도는 가로 폭 4m, 높이 3m 정도의 넉넉한 넓이로 계속 이어진다.
산 전체가 암반으로 되어 있어 지하수는 없고, 발밑에 무수히 나뒹구는 고르지 못한 암석 부스러기는 말라 있다. 그중 하나를 주워봤다. 붉은빛으로 덮여 있으며, 부서졌을 때의 기세를 나타내듯 어느 면이나 날카롭고 뾰족하다.
(여기서 일하던 사람들은 부상이 끊이지 않았겠지...) 한 손 안에 겨우 들어가는 크기의 돌을 오른손에 든 채 앞으로 나아간다. 이타쿠라 씨의 설명에 의하면, 이 지하벙커는 길이 약 30미터의 갱도가 20미터 간격으로 동서로 20개, 남북으로 50미터 간격으로 5개로 바둑판 모양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벙커 안의 총연장은 약 6킬로미터에 이르며, 파낸 암석 부스러기는 무려 약 10톤 덤브카로 1만 5천대(!) 분량이라고 한다. 대공사라는 것은 숫자상으로도 알 수 있지만, 현재 공개되어 있는 500여 미터의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그 대단함이 충분히 느껴진다.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견학자용으로 통로가 마련되어 있다. 그 보호되는 길을 걸으면서 좌우로 파여 있는 갱도에 눈을 돌리자, 낙반사고가 있었던 것처럼 암석 부스러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빛이 들지 않아, 끝없는 어둠이 펼쳐져 있어 두려움에 나도 모르게 다리가 움츠러든다.
익숙한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던 이타쿠라 씨가 한참을 가다가, 멈춰 서서 왼쪽 약간 위쪽 바위 표면에 박혀 있는 철제 드릴날을 가리켰다. 이타쿠라 씨의 절제된 목소리가 담담하게 울린다.
“거의 수작업으로 팠어요. 드릴로 구멍을 뚫고 거기에 다이너마이트를 꽂아 도화선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아래 쪽에서부터 터뜨리지 않으면 효과가 없어요. 맨 아래 도화선이 50cm, 맨 위 도화선은 1m. 밑에 짧은 쪽부터 불을 붙여 나가야 하기 때문에 굉장히 위험합니다. 그런 일은 반드시 조선인 노동자에게 시킨 것입니다."
온통 붉게 녹슨 20cm 정도의 드리날은 비스듬히 바위에 꽂혀 50년 가까운 세월을 간직한 채 노동자들의 억울함을 응축시켜 존재하는 듯했다.
● 내가 좋아하는 마츠모토씨(박경남 1995년작).
19. 제4화 지하벙커에서 하늘로 02
전후 이 지하벙커는 그 어두운 과거를 삼킨 채 방치되어 있었지만, 그것을 널리 세상에 알린 것은 시노이 아사히 고등학교(篠ノ井旭高等学校)의 향토 연구반 학생들의 활동이었다.
(*篠ノ井旭高等学校=現,長野俊英高等学校: 長野県長野市篠ノ井御幣川にある私立高等学校。 旧校名は篠ノ井旭高等学校)
1985년 오키나와 수학여행에서 전쟁 중에 만들어진 벙커를 보고 온 학생들은 나가노에도 없을까 하고 찾다가, 이 마쓰시로의 지하벙커를 찾아내, 조사와 공개, 보존을 위해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학생들은 마쓰시로에 사는 한 남성을 찾아가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최소암(崔小岩) 씨였다. 50여 년 전 열여섯 살의 나이로 일본으로 건너온 최 씨는 이 지하벙커 공사에 종사하며 재일 조선인으로서 당시를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귀중한 존재였다. 최 씨에게는 떠올리기도 싫은, 잊어버리고 싶은 체험들이었다.
그것들을 가슴에 간직한 채 전후 줄곧 침묵하고 있던 최 씨는 고교생들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무거운 입을 열어갔다. 지하벙커 공사는 최고 기밀로 여겨졌기 때문에 대부분의 증거자료는 불태워졌고 군부, 건설사의 의견이 일방적으로 실려 있는 자료만 남아 있었다.
예를 들어 이런 형식의 기술(記述)이다. “...통상적이라면, 사망자나 부상자가 꽤 나올 곳이지만 부상자조차 거의 없었다.”(아니야!) 굳게 닫혀 있던 가혹한 기억 속에서 외치는 최 씨의 목소리가 있었다. (사실을 그대로 전해야 한다는)
지하벙커 안에서 가장 위험한 일을 하게 되어, 최 씨의 눈앞에서 희생돼 죽어간 동료들을 위해 "사실"을 말하고 앞으로의 시대를 짊어지고 갈 젊은 사람들에게 다시는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강한 욕구가 최 씨의 마음 속에서 움트기 시작했다.
최 씨의 증언에 따르면 최 씨 자신도 말대꾸 하나 허용되지 않는 환경에 처해 있었지만, 좋은 회사에 넣어주겠다는 말에 속거나, 조선 본토에서 강제 징용돼 온 조선인은 더 엄격한 감시 아래 있었다고 한다.
중학생, 고등학생 정도의 아직 아이 모습의 젊은이가 많았다. "김(金)의 십자가"에 나오는 김재하, 세환 형제 같았을까. 이불 속에서 소리를 죽이고 우는 모습이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일하는 현장에서의 폭력은 다반사였다.
만약 도망치거나 붙잡히면, 조선인 노동자들을 세워놓고 그 앞에서 쇠막대를 도망자의 양 무릎 안에 끼우고 그 양 끝을 눌러 뼈 부러지는 소리를 들려줬다. 그리고 그대로 일주일 동안 열흘 동안 식사를 주지 않고 방치하여 기진한 상태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본보기로 보여주는 것이다. 최 씨도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작업 중 고장 난 용구를 수리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발파의 연기, 돌가루 등으로 사람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아 "무엇을 하느냐"고 물어온 일본인 감독을 동료로 믿고 "보면 알겠지"라고 대답하는 바람에 밖으로 끌려가 칼 등이 안에 들어 있는 참나무 봉으로 맞고 만다.
몇 번 기절했다가 숨을 돌리면 또 맞았다. 그 일로 인해 다리 저림과 부종이 지병이 돼 죽을 때까지 최 씨를 괴롭히게 됐다. 무엇보다 그런 최 씨의 가슴 깊이 박혀 떠나지 않는 광경이 있다. 5, 6미터 정도 전방의 움직이는 인간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칸테라 불빛뿐인 위험한 작업 속에서 사고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느 날 폭발사고로 네 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한순간에 날아가 천장에 머리가 하나 걸렸다. 조각조각 흩어진 동료의 살점, 뼛조각. 그것들을 최 씨가 말없이 주워 모으려 하자 감독의 고성이 날아왔다.
"그럴 틈이 있으면 빨리 일을 해!" 그 감독은 현재 나가노 시 상공회의소 간부를 하고 있으며, 그때를 기억한다고 말한 후, "군은 공사를 서둘렀고 군의 명령은 절대였다" 고 변명하고 있다고 한다.
"숨진 사람들은 어디에 묻혔습니까" 라는 질문에 최 씨는 답했다. "사람이 죽으면, 아, 죽었구나, 개 한 마리가 죽었을 정도로 여겨서, 시체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우리도 여러 가지 수소문해 보았지만, 트럭에 태워 가져가는 것은 모두 보고 있었다고 하는데, 결국 어디로 가지고 갔는지 그것을 모르겠어요."
상황에 따라 사람의 생명은 그렇게 가벼워지는 것일까. 살점 하나에도 가족의 사랑의 흔적이 베어 있을 것이고, 사람마다 단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고향에는 안부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터인데.... 강제노동 실태를 과장도 덧칠도 없이 사실만 들어 거침없이 말하는 최 씨의 증언은 그만큼 설득력과 무게감이 있었다.
● 내가 좋아하는 마츠모토씨(박경남 1995년작).
20, 제4화 지하벙커에서 하늘로 03
최소암(崔小岩) 씨는 1923년 2월 1일(외국인등록증에는 그렇게 적혀 있지만, 고향 면사무소의 호적은 1919년 9월 8일로 돼 있었다. 그래서 정확히는 호적 기재가 옳다고 생각된다), 한반도 남부에 위치한 경상남도의, 산으로 둘러싸인 시골 마을에서 일곱 형제의 제일 막내인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가난한 산촌에서 소작농을 하던 아버지는 최 씨가 네 살 때 돌아가셔서 고생이 많은 어머니를 도와 일 잘하는 효성이 지극한 아이였다고 한다. 생가(生家)도 남의 손에 넘어갈 처지의 가난 속에서, 나도 무엇이든 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열여섯 살이 된 최 씨는, 부모 형제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집을 몰래 나와서, 이미 일본에서 일하고 있던 맏형을 찾아, 부산항에서 나가사키 항구로 건너왔다. 그리고 나가사키를 출발점으로 오사카, 나고야, 도쿄, 호쿠리쿠, 도호쿠, 홋카이도로 일본 전국의 공사 현장을 전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돈을 벌어 고향에 금의환향할 것이라는 희망은 금세 깨졌고, 임금도 받지 못해, 쓰레기 상자 속의 귤껍질로 허기를 달래기도 했다. 홋카이도의 탄광에서는, 노동자를 가두고 노예처럼 부려먹는 합숙소에서, 이대로라면 죽게 될 것이라는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동료 3명과 그곳을 탈주했다.
사흘 밤낮 산속을 도망쳤다고 한다. 굶주림과 추위로 체력도 한계에 다다르자 이왕 죽을 거면 잡힐 것을 각오하고, 단 한 채 외진곳에 있는 민가의 문을 두드렸다.
지옥에서 부처님이랄까, 그곳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최 씨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얼굴도 몸도 시커멓게 더러워지고 옷도 너덜너덜해서 도저히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 씨는 할아버지의 의심의 눈초리 속에, 도망쳐 온 사연과 동료 중 한 명이 산속에서 쓰러져 움직일 수 없게 됐음을 전했다. 그 말을 듣자 할아버지는 곧바로 산속으로 가서 겨우 숨만 쉬고 있는 동료를 새끼줄로 메어 업고 집까지 옮겼다. 그리고 그 후 세 사람을 헛간에 넣고 몸 위에 짚을 덮어 주었다.
아침이 되자, 미지근한 물을 가져와 세 사람에게 먹였다. 시간을 두고 조금씩, 뜨거운 것으로 바꿔 여러 번 먹였다고 한다. 그리고 반나절이 지났을 무렵 "이제 괜찮다"며 그제야 세 사람을 방에 들여오게 한 후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너희들을 바로 방에 들여놓고 따뜻하게 했다면 죽었을 것이다. 너희들이 귀찮아서 처음부터 헛간에 넣은 게 아니니까 원망하지 마."
(이야기는 조금 옆길로 빗나가지만 에이로쿠스케 씨가 가르쳐 준 이야기가 있다. 오키나와에서는 해난 사고로 기진한 사람을 도울 경우, 구조된 사람이 살았다고 안도하는 동시에 숨을 멈춰 버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일부러 험악하게 다룬다고 한다. 준 물을 다 마시면 바다에 다시 던져 넣겠다고 위협하는 것이다. 그러면 도움을 받은 사람은 손에 든 물을 되도록 천천히 마시려고 한다. 그렇게 체력을 서서히 회복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일주일에 걸친 극진한 간호 덕분에 세 사람은 완전히 건강해졌다. 할아버지는 찾아온 딸에게 혼슈로 돌아갈 표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다. 게다가 무사히 도망칠 수 있도록 무인역에서 기차를 타도록 배려까지 해준 것이었다.
세 사람은 할머니가 해준 주먹밥과 여비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 후 3년 정도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그러다 답장이 끊기고 말았다. 타계하셨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최 씨는 나중에 틈날 때마다, 그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잊지 못할 은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의 '비정함' 속에서도 마음을 뜨겁게 하는 '만남'이라는 것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절망에서 벗어나 인간에 대한 신뢰와 희망을 키울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홋카이도를 벗어나 도호쿠 지방에서 2년 정도 일한 뒤 최 씨는 임금을 많이 준다는 말을 믿고 마쓰시로에 왔다. 1944년 가을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앞에서 말했듯이 홋카이도의 탄광 합숙소 못지않은 곳이었던 것이다.
결국 지하벙커가 완성도 되기 전에 전쟁은 끝을 맞았지만. 라디오에서 옥음방송(*일왕의 패전 항복 방송)이 있은 직후, 공사를 맡고 있던 니시마쓰구미(西松組)의 소장을 비롯한 감독들은 일제히 자취를 감추고 도망가 버렸다. 자신들이 한 일을 생각하면 노동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던 것 같다.
최 씨가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했던 것은 일왕 어좌소(天皇御座所) 공사에 끌려간 친구가 그대로 실종돼 버린 것이다. 전쟁이 끝나기 얼마 전날에 "모레 이곳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던 친구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내부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살해당했다는 얘기도 있다.
최 씨가 창고 안을 들여다보니, 마쓰시로 마을 사람들이 한 해쯤 먹고도 남을 만큼의 쌀, 설탕, 된장 등 식량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개중에는 곰팡이가 피고 썩은 것도 있었다. 작업화도 수만 켤레나 비축돼 있었다.
그것들을 지급해주었면, 노동자들이 영양실조로 쓰러지는 일도, 너덜너덜한 작섭화로 피를 흘리며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고 최 씨는 가슴아파했다.
창고 안의 물자뿐만 아니라, 공사를 위해 운반되어 있던 대량의 건축자재도 전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져 버렸다. 당연히 그것들을 처분하여 축재(蓄財)를 한 인간이 있을 것이다.
지하벙커에서 파낸 암석 부스러기는 전후 도쿄 시내 주요 도로 포장에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인 노동자들의 피와 땀뿐만 아니라, 육체까지 섞여 있을지도 모르는 도로 위를 달리고 있다는 것을,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알리지 않았다면, 나도 전혀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전후 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모국으로 돌아갔지만, 최 씨는 마쓰시로에 남았다. 여전히 이어지는 민족 차별 아래 조선인이라는 것만으로 일자리가 없는 상태는 힘들었다. 하지만 다나베 테루미(田辺てる美)라는 일본 여성과 결혼한 최 씨는 3남 1녀의 자녀를, 일용직 노동을 하며 키워내 행복한 가정을 꾸린 것이다.
그 동안에, 최 씨는 열여섯 살 때 나온 고향집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부인 테루미 씨가 "가고 싶으면 언제든 가도 된다" 고 말해도 최 씨는 돌아가지 않았다. "혼자 돌아가는 것이 불안하였는지도 몰라요. 그리고, 생활에 쫓겨 여유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라고, 테루미씨는 추측한다.
최 씨의 몸 상태는 늘 나빴다. 지하벙커에서의 일이 원인으로 보이는 진폐, 폭행으로 다친 허리와 다리 등 항시 고장이 난 듯 입원과 퇴원, 통원을 반복하는 사이, 마침내 1991년 3월 17일, 최소암(崔小岩) 씨는 마쓰시로의 땅에서 영면했다. 향년 70세였다.
● 저가 좋아하는 마츠모토씨(박경남 1995년작).
21 제4화 지하벙커에서 하늘로 04.
내가 처음 마쓰시로(松代)를 방문했을 때 최 씨의 다리 저림 지병이 심해져 있었기 때문에 다음 기회로 미루고, 뵙지 못한 채 귀경해 버린 것이 아직도 후회스럽다. 이타쿠라(板倉弘美) 씨가 갑자기 보낸 최 씨의 부고에 나는 할 말을 잃을 뿐이었다.
3월 19일 마쓰시로쵸(松代町)의 기요미즈데라(清水寺)에서 열린 장례식에서, 이타쿠라(板倉) 씨는 마음속으로 "정말 섭섭합니다, 사이모토(최 씨의 일본명) 씨. 당신과는 이제 더 만날 수가 없게 되었군요" 라고 중얼거렸다.
이타쿠라 씨에게 최 씨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이타쿠라 씨가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있을 때 지하벙커 이야기를 듣고 싶다며 최 씨를 찾아간 이후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지하벙커에 깊이 관여하게 된 것은 최 씨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타쿠라 히로미(板倉弘美) 씨는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며 한 편의 시를 썼다.
ㅡ이제부터는 함께 할 수 없는 고(故) 최소암
(崔小岩) 씨에게ㅡ
"당신과는 이제부터 함께 할 수 없군요"/돌 하나를 던지고 돌아왔다. 다음날 / "히로미짱 놀자" / 라고 부르러 올 것이니까. 기다릴 수 없을 때는 / "요시오짱(*최소암의 애칭) 놀자" / 하고 부르러 가면 된다.
한국 경상남도의 고향을 함께 찾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사이모토 코이와(催本小岩) 씨. 약속을 어긴 당신과는 / 이제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구나. 정말 가버렸나요? 부드러운 미소의 사진은 틀림없이 당신이지만. 상주---다나베 가즈오(*田辺一男: 어머니의 성을 받은 崔小岩의 아들) / 이것은 다나베 가문의 장례식이지 / 최씨가(家)의 장례식이 아니다. 최소암(崔小岩)의 장례식이 아니다.
경상남도의 고향에 부고는 보낸 것인가. "일본어로는 인변(*사람人변)을 두 개 쓰는 최(催)입니다." (주·‘催’라는 한자는 사람임변이 두 개 있는 글씨라고 누군가에게 배운 것 같고, 催小岩 씨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이 글자 중에 '사람人'이 두 개 있는지 찾아보세요)
글자를 읽는 것도 쓰는 것도 모르는 당신이 설명해줘서, 문패에는 최본소암(催本小岩)이라고 되어 있고 / 지금도 그 문패를 떼지 않고 있는 그 부인 이름은 다나베테루미(田辺てる美) / 催本테루미가 아니다 / 최광미(崔光美)가 아니다.
경상남도를 방문하게 되면 / 최씨라고 부르려고 했다. 그곳 고향에서는 소암(小岩)을 어떻게 읽을까? 당신을 / 태어날 때 지은 이름 그대로의 / 최소암(崔小岩)이라고 부를 기회는 이제 없다. 연금을 받게되면 퇴직하고, '원혼'을 푸는 일을 함께 하자고 약속했는데, 돌연.
작별인사도 없이 가버리다니 / 너무했다 / 사이모토 씨. 당신과 / 이제 더는 함께 할 수 없게 되었다. "사이모토 아저씨, 안녕히 가세요!" 라고 시노노이 아사히 고등학교 향토반(篠ノ井旭高校郷土班) 학생의 조사가 낭독되고 있다.
"가해의 책임추궁"의 말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라, 긴장해서 찾아온 학생들에게 “저는 일본을 좋아해요. 아내도 일본인, 나쁜 것은 군대·전쟁"이라고 상냥하게 이야기해 준 사이모토 씨 말에 학생들은 안심하고 긴장을 풀었던 것이다.
홋카이도의 탄광합숙소에 있을 때 / 파리채에 맞아 죽는 파리 목숨처럼 취급된 것은 / 조선인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기도 한 사이모토 씨.
탈주에 실패한 노동자는 살해된다 / 그래도 / 맹렬한 아키타 개에게 뜨거운 무를 수건에 싸서 물려주면서 탈주하고 / 굶주림과 추위로 이왕 죽기로 각오하고 농가의 문을 두드렸을 때 / 헛간에 숨겨주며 따뜻한 물을 마시게 하면서 생명을 살려준 일본 농민을 잊지 않은 사이모토 씨.
드릴이 고장이 나서 / "뭐 하고 있어?" 라고 물어서 / "보면 알겠지"라고 대답한 상대가 감독이었기 때문에 / 매질을 당하고 / 몇 번이나 정신을 잃고 / 허리 아래가 감각을 잃어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사이모토 씨. 그래도 당신은 / ‘일본인 모두가 나쁜 것은 아니다’라고 / 마쓰시로 중학교 학생들에게 말해 주었다고 한다.
왜 귀화하지 않으셨나요? "한번 절차를 밟아 봤는데 귀찮아서 그만뒀어요." 왜 한 번도 고향을 찾으려고 하지 않으셨나요? "함께 고향을 떠나온 친구가 사고로 둘 다 돌아가셔서 어머니들 얼굴을 보기가 힘들어서요." 하지만 어머니들은 이미 돌아가시고 없을것이다.
경상남도의 고향 언덕에 섰을 때는 / 다른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가버리다니. 이제 당신과는 / 더 이상 놀지 않을 거야. 내가 찾아간 것은 조사를 위해서만이 아니다.
"싸운 적은 한 번도 없다" / 미소를 나누고 / 눈을 마주보는 두 사람 / 마쓰시로가마(松代焼き)에서 구워 만든 찻잔으로 마시는 차. 맛있는 장아찌. 사이모토 씨 댁에서의 그 한때는 정말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었다.
"가혹한 시대 - 더 이상 사랑은 성립되지 않는다" / 등 중얼거리며 살고 있는 나의 긴장을 늦추게 하고 / 느긋하게 / 편안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는데, 아내 혼자 남겨두고 가버리다니 / 이제 셋이서 차를 마실 수도 없다 / 나는 쉴 곳이 없다. "사이모토 씨, 나랑 놀지 않을래?" 말을 걸어도 /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ㅡㅡ
마쓰시로 동네는 최 씨의 고향을 많이 닮았다. 그러고 보니 나가노의 기후, 풍토, 모습은 한국 시골을 쏙 빼닮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인삼(朝鮮人参)이 나가노의 명산이라는 것도 그 증명일 것이다. 최 씨에게 망향의 마음은 분명 강했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랑 많은 것이 겹쳐진다...
아버지는 아홉 살에 일본에 오셨다. 먼저 일본으로 건너온 할아버지를 따라 할머니와 함께 고향을 떠난 것이다. 그로부터 60년 이상 지났지만 아직 모국의 땅을 밟지 못한 채다. 아버지의 동생, 나의 당숙이 조국 북쪽 땅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당숙의 입장을 생각해서 남쪽 고향을 찾을 수 없다.
아버지는, 아홉 살이라는 어린 나이 때의 고향 산, 강에서 보낸 추억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으며, 그리워하는 마음의 깊이는 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보름달이 밝은 밤, 달빛을 의지해 산을 넘어 심부름을 간 이야기를, 호랑이와 조우(!)한 에피소드도 섞어 생생하게 말해 주기도 하였다.
흙마루에 양반다리를 하고 술에 취해 아버지는 자주 울었다. 망국의 백성이 된 원한, 모국이 해방되고도, 다시 나라가 두 동강이 나버린 분단의 슬픔이 입에서 왈칵 쏟아졌다.
역사와 정치는 가차 없이 인간을 가르는 것이라고,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어렸던 나는 확신해 갔던 것 같다. 칠순이 넘어서 아버지는 그제야 조만간 고향을 찾기로 결심한 듯하다. 최 씨도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거쳐, 겨우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이 생기려던 참이었다.
"반년만 더 살았더라면..." 하는 아내 테루미 씨의 탄식이 무겁게 울린다. 이타쿠라 씨와 최 씨가 나눈 약속은 끝내 이루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함께 최 씨의 고향에도 가고, 그리고 나가사키---나고야---도쿄---홋카이도---마쓰시로에의 여정을, 16세에서 20대 초반의 젊은 최 씨가 걸었던 각지를, 함께 여행하겠다는 약속이었다.
● 내가 좋아하는 마츠모토씨(박경남 1995년작).
22 제4화 지하벙커에서 하늘로 05
그런데 거기서 이야기가 다 끝나지는 않았다. 마쓰시로(松代) 지역과 최 씨의 고향은 뜻하지 않게 굵은 선을 그리며 이어져 간다.
이타쿠라 씨는, 최 씨에 대한 생각을 앞에서 언급한 시(詩)에 썼는데, 이를 읽은 인근의 우에다(長野県上田市)에 사는 재일교포 2세 사업가 김달남(金達男 47세) 씨로부터 "최 씨의 고향을 함께 찾아가자"는 권유를 받았다.
아버지가 생전에 지하벙커 공사에 종사했다는 김 씨는, 시(詩) 속의 한구절 "경상남도의 고향에 부고는 전해졌나요"라는 글에 마음이 움직였다. 이렇게 김 씨의 도움을 받으며 이타쿠라 씨의 "죽은 친구"의 고향 찾기가 시작됐다. 최 씨의 고향을 찾아, 친구를 대신해 반세기 만의 "귀향"을 실현하려고 나선 것이다.
유소년기를 모국에서 보내고, 친족이 모두 고향에 있다는 최씨와,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고, 모국에는 이름조차 모르는 먼 친척밖에 없는 나와는 '망향의 마음'의 무게는 비교가 되지 않겠지만, 나에게 '고향'은 오랫동안, 멀리 있어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곳이었다.
최 씨와 이타쿠라 씨의 우정을 느낄 때마다, 나도 잊기 힘든, 친구와 함께한 "귀향"이 생각난다. 내가 처음으로 나의 모국을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8년 전 가을이었다. 그때까지 좀처럼 여권을 얻지 못해 고생 끝에 겨우 이룬 여행이었다.
왜 고생을 했냐면, 나에게는 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의 부모님이 각각 조부모님들 손에 이끌려 일본에 온 것은 부모님 두 사람이 아직 어렸을 때였고, 그대로 계속 일본 땅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고국의 고향 면사무소에 결혼 신고를 할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당연히 나의 출생신고도 없었고, 여권 취득에 필요한 호적원부에 나의 존재는 없는 것이다. 부모는 조선 국적이라 한국 경상북도 고향에 가지 못해 호적을 만들지 못했는데, 재일교포들에게는 비슷한 경우가 많다.
(1945년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서 해방되어, 일본에 있는 조선인들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모두 ‘조선 국적’이 되었다. 하지만 이는 정확한 국적이 아니다. 1965년 맺어진 한일조약 이후 여권 취득, 신분보증 등 여러 이유로 한국 국적으로 바꾸는 사람이 많아졌다. 나도 현재는 한국 국적이라 부모님과는 다른 셈이다).
그래서 일본에는 그런 사람들을 대신해 본적지 면사무소에 가서 호적을 작성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있다. 나도 거금을 털어 호적 만들기를 부탁했고, 그 외 여러 번잡한 절차를 거친 뒤 마침내 한글로 대한민국이라고 적힌 여권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반쯤 포기할 뻔했던 모국으로의 여행을 촉구해 준 것은, 교육잡지 편집장을 하던 절친한 친구인, 일본 여성이었다. 몇 년 전 유방암 수술을 한 그녀의 말은, 크게 가슴을 울렸다.
"한번 한국을 여행해 보고 싶지만, 박경남 씨가 자기 고향에 가보지 못하고 있는데, 내가 당신보다 먼저 갈 수는 없잖아. 나는 암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내가 건강할 때 둘이서 박경남 씨의 고향에 가봐요..." 만약 친구의 이 권유가 없었다면 나의 귀향은 꿈으로만 남고,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에서 급행열차를 타고 신라의 도읍 경주로 향했다. 경주는 나의 조상의 땅이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전원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선명하게 보이는 논밭에 시선을 빼앗기면서 문득 머리를 스친 것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 풍경 속에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고향을 떠나 얼마되지 않아, 이국의 흙이 된 조부모님, 그리고 일본에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를 대신해서 내가 귀향했다는 생각이, 창밖의 ‘고향’을 향해 중얼거림이 되어 입에서 나왔다.
“이제야 왔습니다....” 창문에 이마를 댄 채 나는 모국에 와서 처음으로 울었다. 눈물을 계속 흘리고 있는 내 옆에서 친구가 말없이 지켜봐 주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 기뻤다. 분명 이타쿠라 씨와 김달남 씨의 최 씨의 고향으로의 여정도, 우정을 한층 키우는 좋은 여행이 되었을 것 같이...
최 씨의 고향은 어디일까. 김 씨의 손을 빌려, 한국 면사무소에 닥치는 대로 전화를 걸어 애를 썼지만, 최 씨의 고향 지명은 좀처럼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등화불명" 이라는 말과 같이, 최씨의 고향 확인은, 결국 최씨의 부인인 다나베 테루미씨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40여년 전의 낡은 엽서 한 장에서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최 씨 바로 위의 형인 최암이(崔岩伊) 씨로부터 가족의 소식을 알리고, 재회를 바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김 씨가 연락처를 알아보고 전화하자, 79세가 되는 최암이(崔岩伊) 씨는 놀라워하며 말문을 열었다.
"언젠가 분명, 일본에서 연락이 올 줄 알았다. 제수씨와 아이들을 만나고 싶다.” 이후 한국 지인에게 부탁해 보내준 최씨의 호적을 손에 쥐었을 때 이타쿠라씨와 김씨는 최소암씨의 고향에서의 확실한 증거에 손이 떨렸다고 한다.
1991년 6월 25일. 나고야에서 비행기를 타고 부산에서 고속도로를 달려 3시간여 동안 마쓰시로를 많이 닮았다는 최 씨의 고향 경남 합천군 이천리(慶尚南道陜川郡伊川里)에, 김 씨와 이타쿠라 씨는 발을 들여놓았다. 최 씨의 생가는 최 씨의 어린 친구 정인옥(鄭仁玉) 씨가 물려받았고, 형 최암이 씨는 인근에 살며, 농사를 짓고 있었다.
최암이 씨는 처음에, 동생은 소식불통인 채 죽고 말았는데, 인연도 연고도 없는 인간이 돈과 시간을 들여 왜 여기까지 찾아온다는 것일까, 하고 당황했다고 하는데, 두 사람을 만나자마자 그런 미심쩍은 마음은 날아간 것 같았다.
이타쿠라 씨의 말에 따르면, 최암이 씨는 혼자 조금 떨어져서, 동생의 영정과 유품인 수저를 조용히 쓰다듬고 있었다고 한다. 마당에 멍석을 깔고 최암이 씨의 자녀들도 모여, 소중한 닭까지 잡아, 많은 음식을 준비하였고 술도 오가는 환영연이 열렸다고 한다.
전해준 소식이 최 씨의 부고였던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김 씨와 이타쿠라 씨의 노력으로 고향 땅에 비로소 최소암 씨의 소식을 알릴 수 있었던 셈이다.
.● 내가 좋아하는 마츠모토씨(박경남 1995년작).
23, 제4화 지하벙커에서 하늘로 06.
귀국 후 이타쿠라 씨는 "머나먼 이천리(伊川里)"라는 시를 썼다.
김달남(金達男) 씨과 둘이서 겨우 찾아내어 / 도착한 당신의 고향. 경남 합천군 가야면 이천리 456번지(慶尚南道陜川郡伽倻面伊川里四五六番地) 솟아오른 푸른 산들 / 깨끗한 이천천 물줄기. 무궁화 꽃이 피어있는 36호의 조용한 부락.이쪽으로 오세요! 당신의 어린 친구 정인옥(鄭仁玉) 씨가 / 말복날을 축하하는 모임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 불고기와 탁주를 먹었습니다.
"최소암(崔小岩)이라고요? / 최대소(崔大小)라면 잘 알아요 / 너무 머리가 좋고 / 힘이 세서 쌀가마니를 메고 언덕길을 뛰어오르곤 했다 / 약자를 괴롭히는 놈에게는 당찬 소년이었다 / 다 같이 출세해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합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고 / 친근하게 대소(崔大小) 소년의 이름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대소'라고 불렸군요) 바로 위의 형 최암이 씨는 이웃 마을에서 활기차게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는 받아든 영정사진을 어루만지시고. 조카인 삼범 씨는,
"소암 삼촌은, 왜 연락을 주지 않았을까? / 왜 대본영 이야기를 알려주지 않았는가? / 꼭, 한번 마츠시로에 가보고 싶다." 라고, 아직 만난 적이 없는 마쓰시로의 사촌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맡겨 주었고, 손자 중 한 명인, 영희 씨는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어 / 저의 시집의 번역을 해 주기로 하였습니다.
시노노이 아사히 고등학교 향토반(篠ノ井旭高校郷土班) 학생들도 이천리(伊川里) 마을을 방문하여 / 가족과 마을 사람들과의 교류를 했습니다. 최소암 씨. 이천리와 마쓰시로 사람들과의 교류가 크게 확산되려고 합니다.
김 씨와 이타쿠라 씨가 처음 이천리 마을을 찾은 지, 두 달 뒤인 8월 초순 시(詩)에도 적혀 있듯이 시노노이 아사히 고등학교의 미야자키(宮崎) 군과 이치카와(市川) 군, 고문 쓰치야(土屋) 선생, 그리고 이타쿠라 씨 등 네 사람은 최 씨의 고향 마을을 다시 방문했다.
고교생들은 마쓰시로의 최 씨의 무덤에서 가져온 조약돌 몇 개를 최암이 씨에게 건넸다. 그리고 최(崔小岩) 씨가 항상 그들에게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말라고 상냥하게 말해 준 것 등을 최암이(崔岩伊) 씨에게 전했다. 그로부터 한숨 섞인 말이 나온다.
"대소(崔大小)는, 어머니 생각을 제일 많이하는 아들이었어. 어머니는 해방 후 3년 정도 지나서 돌아가셨는데, 대소가 마쓰시로에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죽기 20분 전까지 '보고 싶다, 보고 싶다'고 말했었어. 그렇게 엄마 생각을 많이 했던 대소가 왜 어머니에게 소식을 전하지 않았는지 지금 생각해도 알 수 없다. 일본에 간 것은, 가난한 집안을 돕기 위해서였어. 가져다 준 조약돌은 한동안 소중히 상자 안에 넣어 두었다가, 때가 되면 그를 위해 무덤을 만들어 함께 묻고 싶다..."
이타쿠라 씨는 최 씨를 대신해, 최 씨의 다른 형제들과 함께 최 씨 아버지의 성묘를 하러 갔다. 어머니의 묘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 그기까지는 무리라고 했다. 산길을 갈 수 있는 곳까지 차로 달리고, 나머지는 15분 정도 길 없는 숲속을 헤집고 도착한 무덤은 약간 봉분이 솟아 있을 뿐인 한국 특유의 무덤이었다.
이타쿠라 씨는 들꽃을 꺾어 봉분에 꽂고 손을 모았다. 풀이 무성한 채, 외롭게 있던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이타쿠라 씨는 마쓰시로에 있는 최 씨의 무덤을 생각하고 있었다.
"사이모토쇼간(催本小岩)" 이라고 적힌 묘비에서는 최소암(崔小岩)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 최 씨가 자신을 소개할 때 "사람인변(人변)이 달린 사이모토(催本)입니다라고 말한 것은 왜일까 하고 이타쿠라 씨는 계속 생각해 왔다.
고향에 대한 망향의 마음을 뿌리치고, 마쓰시로 땅에서 일생을 마칠 각오를 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일본 국적을 갖고 일본인으로 일상생활을 하고 있는 최 씨의 아들과 딸에 대한 배려 때문이었을지도. 아니면... 하지만 그 이유를 이제는 망인이 된 최 씨에게 물어 볼 수도 없다.
최 씨의 고향을 찾은 고교생들은 면사무소에 가서 보관돼 있던 최 씨의 호적 원본을 볼 수 있었다. 일본이 1910년에 조선을 식민지로 했을 때 만들어진 것이다.
1939년에는 "창씨개명령(創氏改名令)"이 내려져 조선명을 일본명으로 바꾸는 것이 강제됐다. "최소암(崔小岩)"이라는 최 씨의 이름에 X표가 붙었고, 그 옆에 최본소암(崔本小岩)이라고 고쳐 썼다. 해방 후 1950년부로 호적에는 원래의 "최소암(崔小岩)"이 새로 적혀 있다.
두 고등학생들에게는 "창씨개명"의 기록물을 실제로 보고,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 체험을 가진 마을 노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러한 냉엄한 역사의 현실과 마주하면서, 한편으로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었던 여행은 잊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한국 고교생들과의 교류도 이어졌다. "가깝고도 먼 나라"가 아니라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 가 되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최 씨가 고등학생들에게 자신이 실제로 겪은 사실을 이야기해온 것이 이런 식으로 결실을 맺은 것이다.
최 씨 자신도 "빼앗긴 것을 되찾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았다. 최 씨가 많은 사람들을 만나 "마쓰시로 대본영 지하호"에서의 체험을 이야기하는 과정은 최 씨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것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타쿠라 씨는 최 씨의 그런 변화를 옆에서 느낄 때가 많았다. 최 씨는 세상을 떠나기 전 "남은 생애를 '한(恨)'을 푸는 일을 하고 싶다. 도와달라고 이타쿠라 씨에게 말했다고 한다.
사람인변이 붙은 사이모토(催本)입니다" 라는 표현이 아니라, 최소암(崔小岩) 혹은 최대소(崔大小)로 불리며, 최 씨가 직접 그렇게 자신의 이름을 말할 수 있는 곳은, 고향 땅에 섰을 때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
● 제가 좋아하는 마츠모토씨(박경남 1995년작).
24, 제4화 지하벙커에서 하늘로 07.
최 씨의 부고가 고향에 전해진 것이 계기가 되어, 마쓰시로(松代)와 이천리(伊川里) 사이에 큰 교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최소암(崔小岩)의 1주기에 이천리 마을에서 형 최암이(崔岩伊) 씨, 그의 부인 김주순(金住順) 씨, 셋째 아들 삼봉 씨, 손녀 영희 씨가 마쓰시로를 찾았다.
김주순 씨는 동서인 다나베 테루미 씨의 손을 꼭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형 암이 씨는 동생 최 씨의 묘를 말없이 쓰다듬고 있었다. 조카인 상봉 씨는 "40년 살면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눈물을 봤다" 고 이타쿠라 씨에게 말했다고 한다.
한복을 입은 암이 씨 등은 시장(市長)을 예방하고 기자회견에도 참석했다. 그 의연하고 당당한 태도에 이타쿠라 씨는 한민족의 긍지를 느끼며 감동했다고 한다.
최소암 씨의 아들들에게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때까지 한국을 싫어하고 피하던 태도가 바뀌면서 내 안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인정한 것이다. 한글도 배우기 시작했다. 최 씨가 살아 있었다면 얼마나 아들들의 변화에 놀랐을까.
얼마 전, 이천리에서 열린 최 씨의 아버지 제사에 테루미 씨, 최 씨의 장남과 2남, 이타쿠라 씨, 시노노이 아사히 고등학교 학생 2명, 선생님 등 총 7명이 참석했다. 테루미 씨와 두 아들은 물론 첫 한국 방문이다.
이타쿠라 씨의 최 씨에 대한 우정이 훌륭하게 결실을 맺었다고 할 수 있다. 최 씨의 고향 방문은, 이타쿠라 씨가 일본인인 자신을 되돌아보는 여행이 됐다. 그리고, 이타쿠라 씨의 후반 인생도 바꿔놓은 것이다.
이타쿠라 히로미(板倉弘美) 씨는 1931년 나가노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면사무소에서 근무하셨는데 빚에 쫓겨 생활이 "굉장히 가난했다"고 한다.
누나 세 명은 초등학교를 나올까 말까 하는 나이에, 아이치현의 방적 공장으로 보내졌다. 어려서부터 무리한 자세로 계속 일했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도 몸이 비틀어져 있었다고 한다.
형 둘도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했다. 이타쿠라 씨는 13세에 집을 나왔다. 구제(旧制) 중학교 졸업과 동등한 자격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 이끌려 히로시마현 후쿠야마 항공기 승무원 양성소에 들어갔고, 전후에는 철도교습소에서 일하며 배웠다.
그리고 와세다 대학의 교육학부를, 역시 일하면서 졸업하고, 나가노의 산속 분교를 시작으로, 정년을 2년 남기고 퇴직할 때까지 고등학교 사회과 선생님을 해왔던 것이다. 나가노현 고교교직원조합 서기장으로도 유명했던 이타쿠라 씨가 지하벙커의 역사를 알고 싶다며 최 씨를 찾았고, 이후 친분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최 씨의 부고를 고향 마을에 전달하고 나서, 마쓰시로와 이천리의 교류가 이루어지게 된 것은 앞서 말한 대로이지만, 최 씨의 형 암이 씨의 손자, 영희 씨가 나가노 현의 전문대학으로 유학을 왔다.
부산의 대학 일본어학과에 다니는 그녀는, 소암 할아버지에 대해, 일본에 대해 더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영희 씨를 강사로 하는 한글 강좌가 마쓰시로에서 열리게 되었다. 가장 열성적인 학생은 이타쿠라 씨다. 1994년 3월 한국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다.
궁중 만찬 석상에서, 일왕과 김 대통령이 각각 “과거 역사에 대한 깊은 반성 위에 서서...”라고 하자, “더 이상 과거가 미래를 속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라는 연설을 했다. 그것과 때를 같이해 이타쿠라 씨는, 3월 17일 최씨 기일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연세대 어학당 단기 유학을 위해 한국으로 날아갔다
"최영희 양과 시노노이 아사히 고등학교 학생이 담소를 나누며 걷고 있다. 최영희 양과 마쓰시로 중학교 학생이 손을 맞잡고 상산 지하벙커(象山地下壕)를 향해 걸어간다. '전쟁을 일으킨 자들'이 만들어낸 과거 역사의 무게를 그 어깨에 짊어지고. 주저 없이. 주춤하지도 않고. 똑바로 걷기 시작한 일본과 한국의 젊은이들. 나도 걸어간다. 최소암 씨와 함께 나도 걸어간다."
이타쿠라 씨는, 혹독한 겨울이 끝나고 봄이 일제히 한국의 야산을 꽃들로 수놓아 풍성하게 만들려는 3월 말, 서울에 도착했다. 그리고 63세의 학창생활이 시작되었다. 모두(冒頭)에서 표현한 장면이다.
특별한 연줄이 있어서 입학했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사실 50세까지라는 입학 조건이 있었는데 그걸 모른 채 원서를 제출한 셈이다. 아마 심사하는 사람이 나이를 간과했을 것이라고 한다. 다행이다.
연세대 어학당은 1급부터 6급까지 있다. 초보자는 1급이고, 이타쿠라 씨는 2~3급 반이었다. 한 반은 10명 정도이다. 물론 최연장자다. 미국인도 있었지만 재일교포가 많았다.
처음에는 학업에만 전념하여, 한글 성적이 90점 이상이었던 이타쿠라 씨는, 그러는 사이에, "한국문학을 읽는 모임"과 "대본영(大本営)을 아는 모임"을 만들어, 마쓰시로의 지하벙커 사진을 전시하며, 최 씨의 증언을 담은 비디오를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주임교수는 송 씨라는 50대 여성으로, 나가노에서는 한글교실을 한다고 했더니, 정년 후에는 꼭 도와주러 가겠다고 약속해줬다고 한다. 반년간의 학창생활을 마치고 가을에 귀국했다. 오랜만에 만난 이타쿠라 씨는 최 씨에 관한 일을 절절히 이야기한다.
"왜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는지, 지금도 생각한다. 처음에는 증언하기를 싫어했다. 마쓰시로 대본영을 남기고 보존해 나가자는 운동을 하면서 차츰 마음이 바뀌어 갔다. 마지막으로 도달한 것은 일본인 모두가 나쁜 것이 아니다, 전쟁이 나쁘다,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 그런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고향을 찾아보려는 마음도 들지 않았을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최 씨의 형은, 동생이 거짓말을 하고 집을 나갔다며 지금도 분노를 감추지 않는다고 한다. 일본에 함께 가자는 동생의 권유를 형 암이 씨는 가난해도 가족이 함께 하는 게 낫다고 가로막았다. 그런데도 동생인 소암 씨는 몰래 가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탄식하는 것을 가까이서 보았다. 일본에 가기만 하지 않았다면 어머니를 슬프게 하지도, 마쓰시로의 지하벙커에서 봉변을 당하지도 않았을 텐데 하고 화를 내는 것이다. 그런 형의 분노를 알기에 최 씨는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지 않았을까 하고 이타쿠라 씨는 생각한다.
“그가 죽기 반년 전쯤 ‘한(恨)’을 풀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하는 거예요. 한이라는 것은 조선인이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한 원망이라면서. 그때는, 형을 만나도, 자신들이 이런 운명이 된 것은 형이나 나 같은 개인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라, 전쟁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돌아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죽어버려서 안타까워요." 이타쿠라 씨는, 최 씨가 운명하기 한 달 전 지하벙커 관련 마지막 증언을 동료들과 함께 들었다.
나중에 최 씨의 아들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몸이 안 좋은 상태라서 나가지 말라고 말려도, 최 씨는 지하벙커 얘기가 나오자 무리해서라도 나갔다고 한다. 최 씨는 이타쿠라 씨에게, 고문의 후유증으로, 허리 아래가 저려 잘 걸을 수 없다고, 호소했다. 이타쿠라 씨는 최 씨가 50년 가까이 육체노동을 하며 견뎌 왔으니까, 별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타쿠라 씨는, 최 씨의 장례식 때, 최 씨의 맏며느리로부터, 시어머니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시아버지의 허리 아래의 뼈가 녹아 없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혈액이 잘 흐르지 않는 경우에 그런 일이 있다고 한다. "그런 곤욕을 치른 그가 '일본인 모두가 나쁜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
최 씨가 평소 했던 말은 어설픈 체험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타쿠라 씨는 새삼 그 무게감을 느꼈다. 그런데도 이런 말을 하기 시작한 최 씨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 충격으로 잠시 멍해진다.
"하지만 그가 TV를 통해 조국 사람들에게 자신의 체험과 생각이 전해진 것이, 내게는 가장 큰 기쁜 일로 생각된다. 정말 내가 한국까지 간 보람이 있었어요." 최 씨가 TV에 나왔다는 것은 1994년 8월 10일 밤 MBC TV 제작 8.15 다큐멘터리 중에서였다.
이타쿠라 씨가 중심이 돼 서울에서 진행한 "마쓰시로 대본영의 모임"이 화면에 비춰졌다. 그 중에 "마쓰시로 대본영의 보존을 추진하는 모임"이 제작한 비디오가 있었다. 비디오에는 최 씨가 지하벙커를 안내하거나 듣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들어 있다. 아래와 같은 최 씨의 메시지도 나온다.
"일본인 모두가 나쁜 것이 아니다.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이 나쁘다. 전쟁이 일어나면 또 일본인과 한국인이 서로 죽이고 미워하게 된다. 그러니 두 국민이 힘을 합쳐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들어 가자."
최 씨는 TV를 통해 모국인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할 수 있었다. 이타쿠라 씨의 가슴 속에서도 그가 말한 "일본인 모두가 나쁜 것이 이니다" 라는 말이 되풀이 되어 들리고 있다.
● 내가 좋아하는 마츠모토씨(박경남 1995년작).
25, 제4화 지하벙커에서 하늘로 08.
최 씨의 마음이 꽃피고 있다. 얼마 전 시노노이 아사히 고등학교를 방문했을 때 향토연구반 학생들이 마쓰시로 대본영 평화기념관(松代大本営平和記念館) 설립을 열심히 이야기해 주었다. 서명을 받거나 청원서를 내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고 한다.
"평화기념관"은 지난해 말 건설실행위원회가 생겨 상산지하호(象山地下壕) 서쪽, 마침 최 씨의 집 입구쯤 오천평방미터 땅에 지어질 예정이다.
기념관 안에 한글을 배우는 교실을 만들고 싶다, 그곳에 가면 역사나 이웃 나라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다, 국제 교류의 거점으로 만들고 싶다... 실행위원이기도 한 이타쿠라 씨의 포부는 부풀어 오른다.
영희 씨는 지금 부산에서 일본어 교사를 하고 있다. 한국 땅에서 소암 할아버지의 뜻을 잇겠다고 한다. 이타쿠라 씨에게 최소암 씨와의 만남은 그에게 무엇을 가져다줬는지 넌지시 물어봤다.
"최소암 씨 부부는, 흔치 않은 너무 좋은 부부였어요. 눈빛만으로도 서로를 이해하는 그런 부부였어요. 어려움을 견뎌내는, 그런 점에 이끌렸지요. 그리고, 사람은 앞으로 무엇을 할지를 생각할 때가 있지요. 그 무엇이 최소암에 베팅한 것인지도 몰라요. 내 삶의 사람들 중에서 가장 함께 뭔가를 하고 싶었던 사람이었어요.
그는 보고 싶어지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그의 고향에 가거나 그쪽 가족을 초대하거나 하는 일은 대단한 일이라고들 합니다만, 무리하고 있다든가, 희생하고 있다든가 라고 생각한 적은 전혀 없어요, 그것이 없으면 내 생활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의 무언가를 최소암과의 교제가 가져다 주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갑자기 죽었으니까, 가슴에 구멍이 뚤린 심정이었지요."
지하벙커 안내인을 비롯한 여러 활동을, 평화를 위한 운동이라고 이름 붙이지만 내용물은 자신을 위한, 소일거리라고 이타쿠라 씨는 단언한다. "소일거리"가 한국이라 하면, 힘들고 피곤하겠지만, 하는 이상 더 잘해보라고, 격려해주는 부인과 아이들의 성원을 등에 업고 이타쿠라 씨는 다시 한국으로 면학의 길을 떠나려 한다.
나를 고향으로 이끌어준 친구는 암으로 타계했다. 그녀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처음으로 부모님의 고향을 방문할 수 있었다. 올해 7월이 그녀의 5주기가 된다. 그녀는 함께 나란히 한반도와 일본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자고 내게 말했다.
최 씨의 "생각"은 이타쿠라 씨에게 맡겨졌다. 반면, 나는 그녀의 "의지"에 나를 겹쳐 놓는다.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로 흘러가는 시간을 세로축으로 하여 사람은 각자 자신에게 필요한 삶의 방식을 골라내고 자기 자신을 발견해 나가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신은 고립된 것이 아니라 한 사람, 또 한 사람과 서로 옆에 있는 사람과 결부되어 간다. 국가도 사회도 한 사람씩의 인간이 옆으로 연결돼 이루어진다.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나 마음을 무엇보다 소중히 하고 싶다. 그래요, 최소암 씨, 이타쿠라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