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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린 시절만해도 논쟁은 결코 흔한 단어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주제를 갖고 각자의 생각을 말하면서 토론을 벌인다는 것 자체가 드문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권위자의 한마디가 최종적인 결론이 되는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논쟁은 흔한 일이 되었습니다. 국회를 보면 세종시를 놓고 여야가, 여여가 서로가 맞다는 자기주장을 벌이면서 논쟁을 벌입니다. 논쟁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더 큰 뜻을 세워가기 위한 도구가 논쟁인데 우리 주변의 논쟁은 상처를 주고, 극단적인 감정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국회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닌 우리 가정과 직장 심지어 교회안에서도 볼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정이야기를 해볼까요? 남편과 아내,부모와 자녀가 서로 관점이 다른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마치고 기쁨으로 축배를 드시나요? 아니면 그날 밤 열을 식히느라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시나요? 대부분의 논쟁은 소모적이고, 상처를 더 깊게 만들고 끝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논쟁하는 세상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뒤엉킨 영성이란 책에서 마이클 야코넬리는 한 모임에서의 논쟁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그 모임의 이름은 잘 알려진 죄인들이라고 하는데 1년에 한번 자신들의 영성을 숨김없이 나누는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들 중 절반은 알콜중독에 가까운 사람들이었고, 심한 욕도 아무렇지도 않게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항상 단순하게 시작되는 대화는 독설과 분노를 담은 논쟁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었고, 결국 모두가 분노에 휩싸여 절제할 수 없게되자 결국 수련회를 책임지고 있는 수라는 여인에게 모임에 조정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오후에 다시 토론이 시작되고 결국 논쟁으로 번지면서 분위기는 험악해졌습니다. 그러나 수라는 여인은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제 그녀가 개입해주었으면 했지만 그녀는 그저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며 안타깝게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물과 안타까운 시선은 방안을 꽉 메우고 있던 분노를 깨뜨렸고, 소리치던 사람들을 잠잠케 했으며, 사람들의 얼어붙었던 마음을 녹여 화해의 길로 나갈 수 있게 했습니다. 야코넬리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들을 고치시기 위해 수의 눈물과 침묵을 사용하셨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이 논쟁의 현장을 떠나셨습니다. 현대어 성경은 재미있게도 그들을 버려두고 떠나가셨다고 했습니다. 너는 떠들어라 나는 간다! 뭐 이쯤되는 거죠. 우리는 주님의 이 모습을 통해서 논쟁을 피하라는 메시지를 듣게 됩니다. 소모적이고 감정을 분노로 가득하게 하는 논쟁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상황속에서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있습니다. 가정입니다.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요? 부부의 대화 끝에 가끔 '그래 니 맘대로해!'하고 자리를 피하는 경우 속이 시원하시던가요? 아니면 더 열이 나시던가요? 자리를 피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더 큰 위기로 한걸음더 나아간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논쟁의 끝에 남겨진 감정의 앙금은 사라지지 않고 상처받은 심령으로 너도 한번 걸리기만 해봐라!는 복수의 마음으로 지옥같은 직장생활을 하게 됩니다.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착실한 아들로서 아버지에게 순종하며 말없이 일하는 착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둘째는 성공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서 집을 떠날 궁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유산을 달라고 졸라서 유산을 받아 먼 곳으로 떠나갔습니다. 그는 낯선 곳에서 방탕함으로서 모든 유산을 잃고 돼지우리에 들어가 먹이를 다투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먼 곳에서 아들임을 알아보고 아들을 안아주고 포옹하며 잔치를 열어줍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의 어떤 부모가 그런 자녀에게 할 말이 없었겠습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거냐? 누구에게 속았느냐? 정말 한푼도 남김없이 다 잃어버렸느냐? 다시 돈을 찾을 수 있는 길은 없냐?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거냐? 그런데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따질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의 모습은 우리가 논쟁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델입니다.
아버지는 권위가 없기 때문에 아들을 그저 받아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그에게 부어졌기 때문에 아들을 끌어안고 너는 내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와 감정의 상처를 주는 대화를 서슴지 않은 상대가 나의 아내요, 나의 남편이요, 내 자식입니다. 원하기는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히 부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선한목자교회는 회의를 할때마다 종을 갖고 들어간다고 합니다. 논쟁이 벌어지면 누구라도 종을 치고 그러면 모두가 침묵하며 1분간 기도한답니다. 물론 다시 논쟁이 시작되기도 하지만 다시 종을 치고 다시 기도한답니다. 기도하는 데 논쟁이 이어질 수 있겠습니까? 사랑의 마음이 부어져서 한 마음이 되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신교회 교우여러분! 앞으로 우리 교회도 회의에는 종을 갖고 들어가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논쟁이 벌어질 상황이 되면 종을 치고 기도하십시오. 직장에서 논쟁이 벌어지면 '차 한잔 마시고 합시다.'라고 Break time을 선포하십시오. 딤후2:14절에 "너는 저희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니라"
논쟁은 유익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하는 도구가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논쟁의 현장에 서게 되었을때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에 부어져 화목을 위해 일할 기회를 붙잡기 바랍니다.
분별력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분별력의 중요성은 더 강조할 필요가 없을만큼 당연한 것입니다. 수박 하나를 골라도 제대로 된 것을 고르고 싶어하는게 사람입니다. 소리가 좋은 것, 빛깔이 좋은 것, 꼭지가 싱싱한 것 저마다의 기준으로 분별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을 책망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 일상적인 삶에서는 분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고 살아가는가?에 대한 안타까움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너가실 때 누룩을 조심하라는 말씀을 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떡을 갖고오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결론을 냅니다. 예수님의 뜻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교훈을 조심하라는 말씀인데 제자들은 먹을 것을 걱정한 것입니다.
왜 제자들은 그렇게 행동했을까요? 눈앞에 너무 몰두했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너무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들을 볼때 걔들이 어떻습니까? 하나도 알고 둘도 아는 것 같아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 같습니까? 하나만 아는 것 같죠? 걔들은요 눈앞에 있는 것만 보고 들어서 그래요. 둘을 알면 철든거지. 제자들도 똑같아요. 먹을 것 생각만했지 주님의 깊으신 뜻을 몰라요.
그러므로 분별력은 어떤 힘입니까? 둘을 생각하게 하는 힘이에요. 학생들 가운데 학교 때려치고 아르바이트하는 친구들 보면 제 눈에 보이는게 있어요. ‘쟤들 언젠가 땅을 치고 그때 공부할걸!’ 그렇게 말할 때가 보여요. 당장 돈 몇푼 쓰는 것 때문에 그 재미에 인생을 팔고 있는 거죠. 분별하는 사람은 현실을 너머 미래를 보는 눈이 있어요.
목회를 시작하고 4년쯤 지난 뒤에 저희 지방의 한 교회와 목회자리를 바꾸자는 제안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땅도 있고 건물도 있고 교인도 많고 예산도 많고 저희 교회와 비교해보면 모든 면에서 목회적 환경이 좋았던 교회였습니다. 저를 아끼는 한 선배 목사님이 중간에 서서 소개를 하신 거에요. 마침 그때 교회안에 있었는데 잠시 기도한 후에 거절의 전화를 드렸습니다.
제안을 하신 목사님이 안타까워 하셨지만 저는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내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목회가 어려울때마다 교회나 옮겨볼까? 생각하는 삯군 목회자가 되겠구나! 하나님앞에 가서 어려우면 교회 옮겨다닌 목사라고 고백할 때 얼마나 부끄러울까?
요셉이 자신의 손을 붙잡았던 보디발의 아내의 손을 뿌리치잖아요. 당장 눈앞에 달콤한 만족을 뿌리침으로서 그는 민족을 구원하고, 애굽을 구원하고, 세상에 하나님을 알린 위대한 지도자로, 영원히 꿈꾸는 사람으로 남겨진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렵다고 양심팔지 마세요, 요령이라는 이름으로 원칙을 버리지 마세요. 뇌물받지 마세요. 말씀을 합리화하지 마세요. 언젠가 저와 여러분이 누구앞에 서게 되겠습니까? 주님앞에 설때 눈앞의 것 쫓다가 왔다고 부끄러운 고백으로 서지 말고 주님앞에 설 날을 바라보며 살았노라고, 기쁨으로 말할 수 있는 분별력의 소유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분별력은 중요한 것을 아는 힘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포장이요. 어렸을때 선물교환할 때 형들이 가끔 엄청난 포장지안에 명태 한 마리 들어있던 선물 기억납니다. 포장이 중요한게 아니죠. 나무를 볼때 사람들은 열매를 중요하게 생각하죠.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뿌리에요. 어린애들이 성장한다는게 뭔지 아세요? 분별하기 시작한다는 거에요. 제가 가온이하고 태건이에게 뭔가 물어보면 이 친구들 대답이 뭔지 아세요? ‘응’이에요. 그래도 안줘박아요. 어리잖아요. 영진이가 응 그러면 한 대 맞죠. 요즘 이 꼬맹이들이 ‘네’ 그래요. 성장한거에요. 어른에게는 네라고 대답해야한다는 걸 안거죠.
어린이들이 자라면서 해도 되는 일, 하지 말아야할 일, 먹어도 되는 것, 먹지 말아야 할 것, 갖고 놀아도 되는 것 안되는 것을 분별하기 시작하죠. 지들 입으로 ‘이거 갖고 놀면 안되지. 위험하지’뭐가 그들을 제어할까요? ‘엄마의 가르침’입니다. 그 가르침이 분별을 돕는 거에요. 그런데 학생들 죽어라 말안듣잖아요. 분별하지 않잖아요. 요즘 중딩들이 그렇게 무섭대요. 중딩 자녀를 두신 여러분! 얼마나 고생하십니까? 집안에 핵폭탄 하나씩 두고 사는 것 같다고 하시더라구요. 뭐 저도 얼마 안남았습니다. 걔들이 왜 그럴까요? 명확하던 것이 혼란해진거에요. 뭘 보고? 어른들을 보니까 공부 안해도 되고, 상황에 따라 말 바꿔도 되고, 먹지 말라는 것 다먹고, 하지 말라는 것 다하고 그러니 얼마나 혼동스럽겠어요? 가르침이 안먹히는거죠. 설득력이 없는 거에요. 걔들이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지는 다 하면서 왜 나는 안되는데?’ 여러분! 뭘 가르쳐야 하는지 아시겠어요? 열매를 맺으라고 말하지 말고 뿌리의 중요성을 가르쳐야 해요, 물고기를 많이 잡아다가 줘서 먹으라고 하지 말고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줘야 해요. 공부 잘해서 너 혼자 잘먹고 잘살아라 하지 말고 많은 사람들을 유익하게 해주는 삶을 살라고 가르쳐야 해요. 뭐가 중요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야 해요.
요즘 세계적인 성공기업의 신화를 쓰던 도요타가 무너지는 것을 전세계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원가절감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서 부품의 질적저하가 가져온 대량리콜사태는 지난 55년간의 무파업, 50년이상의 흑자경영의 명성을 하루 아침에 물거품으로 만들었습니다. 도요타가 잊은 것이 뭐 대단한 것을 놓친게 아니에요. 좋은 부품이 고객의 신뢰를 얻는다는 아주 단순한 것을 잊어버린거에요.
경쟁사의 추격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도요타다움인 것을 잊은거죠.성도의 삶은 본질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것을 바라보는 영적인 존재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육체보다 영혼의 중요함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오병이어를 보고도 먹을 것 타령하는 제자들처럼 살면 안되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모든 것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안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분별력을 얻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롬12:2절입니다.
롬12:2절은 이렇게 가르쳐줍니다. 먼저 이 세상의 살아가는 방식에 동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붙들고 살아가지 말라는 거에요. 현실에의 성공, 많은 돈을 버는 것, 최고의 것을 누리고 살아가는 삶이 아닌 주님의 가치관을 붙들어야 합니다. 거창에 거창고등학교가 있어요. 이 학교가 제시하는 직업선택의 10계명을 들어보시겠습니까? 1.월급이 적은 곳 2. 나를 원하는 곳이 아니라 요구하는 곳 3. 승진의 기회가 적은 곳 4.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보다는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 5. 아무도 가지 않는 곳 6. 장래성이 전혀 없는 곳 7. 가운데가 아닌 가장자리 8. 사회적 존경을 바랄 수 없는 곳 9. 부모와 가족이 반대하는 곳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는 곳이다. 이게 어떻게 가능해요? 무슨 대단한 자선사업가를 길러내는 곳 같죠? 주님의 가치관을 붙들면 가능해요. 뭐가 더 중요한지 아니까 말입니다.
두 번째는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은 예배에의 참여, 기도생활, 지속적인 독서입니다. 묵은 마음 그대로 익숙한 마음 그대로 내버려두지 마세요. 잔잔한 마음에 자꾸 돌을 던져 파장을 만들어내세요. 그래야 주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아가에 됩니다.
롬12:2절을 제가 직역했어요.
"더 이상 이 세상의 삶의 방식을 따르지 마십시오. 다만 당신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서 변화되십시오. 그렇게하면 당신은 그분의 선하고(우리에게 선을 행하시는) 기쁘고(우리를 기쁘게 하시는) 완벽하신(우리의 모든 삶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의지가 무엇인지를 완벽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고, 분명한 증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신교회 교우 여러분! 올 한해 주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