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로부터 주도권을 가져온 트로트의 강세 속에서 1960년대 초 우리대중음악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한다. 바로 한명숙의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가 시장을 강타한 것이다. 기나긴 애상조의 노래가 대중음악계를 주름잡아오던 기존의 패턴에서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는 경쾌한 서구 팝의 시작을 알리는 출발선 이였으며 기존의 여가수가 지니고 있었던 전형적인 꾀꼬리 같은 목소리만의 세상에 종식을 알리는 부고장 이였다.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난 한명숙은 평양음대 교수인 외삼촌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서양 고전음악을 접하면서 자랐다. 노래에 소질이 있어 합창단원으로 활약하며 음악 대학의 진학을 꿈꾸기도 했지만 한국전쟁의 발발로 그 꿈을 접어야 했다.
인천에 피난 와 살면서 오르간을 치며 노래 연습을 하던 그녀는 우연히 옆집에 평양 음대를 다녔던 외삼촌의 제자를 알게 되어 그로부터 태양악극단을 소개받는다. 여기서 발성과 무용을 배우고 당시 꿈의 무대였던 미8군에 19살의 나이로 입성한다.
당시 국내에서 인기 있었던 낭랑하고 맑고 애잔한 목소리와는 달리, 허스키하고 끈적끈적한 목소리가 인기 있었던 미 8군 무대에서, 한명숙은 그녀만의 꺼끌꺼끌한 알토 톤으로 블루스를 맛깔나게 불러댔으며 페티 페이지(Patti Paige) 노래를 대부분 완벽하게 소화해내며 대단한 인기를 모았다.
6-7년간 미8군 무대에서 내공을 쌓던 한명숙은 최희준을 통해 작곡가 손석우를 소개 받는다. 그리고 노오란샤쓰의 사나이를 내놓는다. 처음에는 너무 밝은 이질감으로 좋지 않은 반응을 가져왔던 이 노래는 어느 순간 갑자기 당시 대한민국 음악계의 지형도를 완전히 바꿔놓은 곡이 되었다. 느닷없이 세상을 노란색으로 물들인 이 여가수의 목소리는 앞으로 전개될(현미, 김상희, 이금희, 패티김 등의) 다양한 목소리들의 대변인이 되었고 느리고 조용하던 음악만으로 덮여있던 세상은 멜로디와 템포의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었다. 또한 간접적인 표현이 대세였던 당시의 풍조에서 그녀는 “어쩐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 라고 대놓고 맘을 전달하는 직접표현의 넓은 차원이 품고 있는 가능성을 발굴해냈다.
LP시대의 개막과 함께 나온 이 앨범의 영향으로 모든 작곡가들이 자신의 이름을 내건 앨범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팝스타일(당시엔 ‘힐빌리(Hillbilly)’라고 불렀음)은 트로트가 지배하던 세상에 유력한 후계자로 부상한다. 그리고 5․16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정권은 어두워진 사회의 국면전환용으로 이 노래를 지지하고 ‘왜색’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이 노래의 인기는 국내에서만 머물지 않고 국내대중음악으로는 처음으로 해외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다. 프랑스와 일본에서 리메이크되었고 동남아시아에서의 인기는 국내를 능가하는 것 이였다. 이 노래는 대중음악으로는 최초로 모든 해외진출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여기까지가 한명숙의 시작이자 끝이다. 그녀는 이 한곡으로 사실상 역사에서 이뤄야 할 모든 것을 다 쏟아냈다. 완전히 스타덤에 안착한 한명숙은 이후 사랑이 끝났을 때, 사랑은 괴로워등을 차트 상위권에 랭크 시키지만 이미자와 남진, 나훈아로 대표되는 트로트계의 급부상으로 밀려나기 시작했으며 70년대에 들어서는 이혼과 성대 결절 등으로 불운을 겪었다. 그리고 이후 발표한 우리 마을, 사랑의 송가, 그리운 얼굴, 비련 10년등은 노란 샤쓰의 사나이에 비하면 초라한 것 이 되어버렸고 현재는 노오란샤쓰의 사나이를 부른 원 히트 원더로만 인식되고 있다. 어쩌면 지금의 세대는 가수 한명숙 보다는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국무총리 한명숙을, 그리고 장우혁의 노란샤쓰의 사나이만 알지도 모르겠다.
2004년 KBS 가요대상에서 공로상을 수상한 한명숙은 2007년 <남희석․최은경의 여유만만>에서 궁핍한 생활과 이명훈의 내사랑 영아작곡가로 유명한 아들 이일권씨의 공황장애, 그 충격으로 인한 실어증 경험 등의 모습이 전파를 타면서 다시 세인의 관심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동정보다는 본인 노래에 대한 관심을 부탁하면서, 여전히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가 필요한 무대와 모임에서 가수로서의 모습을 담담하게 담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