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로 이어지는 오월 마지막 주말이었다. 밤새 아파트단지 세워둔 차들이 빠지지 않고 그대였다. 토요휴무제가 일상으로 정착 되어가지만 학교는 정상일과를 진행하는 토요일이었다. 출근길 도로는 시원하게 뚫려 차들이 많이 다니지 않았다. 최근 치솟는 국제 원유가로 나라 안 에너지소비에도 비상등이 켜졌다. 거기다가 토요일 아침이니 도로에 다니는 차량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한 분 출장으로 맡게 된 교체 수업까지 네 시간 모두 교실에 들어갔다. 청소지도하고 아이들 종례를 마쳐주고 퇴근시간에 맞추어 바로 귀가했다. 점심을 후딱 비우고 배낭 메고 나선 걸음은 산행이 아니라 고향 가는 길이다. 배낭 안에는 집사람이 장만해준 갈치와 생선이 들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마산 합성동으로 가서 고향 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주말이라 승객이 평소보다는 많았다.
함안 지날 때 차창 밖 들판엔 모내기가 많이 이루어졌다. 내가 탄 버스는 수박 주산지 월촌을 지나 의령에 닿았다. 일철이라 마음이 바빠 읍에서는 택시를 타고 고향 마을 앞에 내렸다. 앞 들녘에서 큰형님 내외가 작은조카와 함께 모내기를 하고 있었다. 수목원에 근무하는 큰조카는 산림박람회 행사로 보이지 않았다. 대신 울산 해운항만청에 근무하는 작은조카가 와서 일을 도왔다.
나는 집에 가서 밀짚모자를 쓰고 나왔다. 모판을 옮겨주고 이앙기가 지나면서 빠뜨린 가장자리에 손으로 모를 심었다. 앞 들녘은 일모작이라 다른 곳보다 모내기를 먼저 했다. 낮이 길어져 반나절도 일할 시간이 제법 되었다. 마침 같은 교직에 몸담고 있는 부산 작은형님도 시간을 내어 와 주었다. 나보다 열세 살 많은 시골 큰형님 건강이 염려되어 외지 형제들이 자주 고향을 찾는 편이다.
저녁밥 들고 나서 큰형님은 산책 나가고 나는 작은형님과 세상사는 얘기를 나누었다. 외양간을 둘러본 큰형수가 송아지를 낳았다면서 큰형님을 찾았다. 나는 동구 밖으로 나가 큰형님에게 알려 함께 집으로 왔다. 나는 가축 분만에 도울 일이 없어 일찍 잠에 들어 새벽에 일어났다. 평소 같으면 뒷산 조부모님과 부모님 산소에 다녀온다만 바쁜 일철이라 성묘는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우리 형제는 아침 식전에 감자밭으로 갔다. 호미로 이랑을 헤집으니 포기마다 아기주먹만한 감자가 두세 개씩 나왔다. 캔 감자를 손수레에 싣고 집으로 왔다. 밭둑에 자라는 감나무 꽃은 지고 밤나무 꽃이 피고 있었다. 이슬이 깬 식후엔 본격적으로 마늘 거두는 작업을 했다. 고향 농촌에서 별다른 산물이 없어 마늘을 많이 심는다. 큰형님과 형수는 엊그제부터 미리 마늘을 뽑아 놓았다.
먼저 종자용 마늘은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간수해야 한다. 큰형수와 아침에 진주에서 나온 여동생은 마늘을 다발로 묶었다. 나는 수레로 옮겨 놓고 작은형님이 고리를 걸어 건네주면 큰형님은 외양간 서까래에 걸었다. 간밤 새끼를 본 어미 소는 송아지한테 젖을 먹이고 있었다. 외양간엔 두 마리의 암소가 더 있었지만 태어난 지 하루도 안 된 송아지가 제 발로 어미를 찾는 모습이 신기했다.
종자용 마늘 말고는 잎담배를 말리던 건조실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나는 묶어 놓은 마늘 다발 끝을 낫으로 자르는 일을 했다. 그리고 마늘 다발을 경운기 짐칸에 옮겨 건조실로 옮겼다. 하루 내내 경운기로 옮겨온 횟수가 열서너 번 되지 싶다. 건조실을 빼곡히 채우고도 아직 남은 마늘이 더 있었다. 못다 실고 온 마늘은 큰형님과 형수 두 분이서 농기계창고 천장에다 걸어둘 요량이라고 했다.
날이 저물자 큰형수는 시동생이 가져갈 상자를 작은형님 차에 실었다. 나는 작은형님과 같이 오면서 땀 흘려 한 일에 보람을 느꼈다. 여느 때 휴일 같으면 교통체증이 심한 남해고속도로가 그렇게 밀리지 않았다. 작은형님은 창원에 들러 나를 내려주고 부산으로 갔다. 시골에서 온 상자엔 마늘과 양파와 감자가 담겨 있었다. 고향 흙이 빗어낸 토실한 알뿌리였다. 언젠가 그 흙으로 돌아갈 우리다.
첫댓글 피붙이 오라버님이 근무하던 해운항만청...참 살가운 명칭이었습니다.저도 고향에서 감자를 캐고 왔습니다. 흙에 묻힌 토실한 감자가 꼭 닭의 내장에 슬어놓은 알처럼 달려나왔습니다. 달덩이를 캐내는 기분이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