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나공 묘표(學生羅公墓表)
[생졸년] 1641년(인조 19)~1699년(숙종 25) / 향년 5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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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형규(羅炯奎) 군이 나에게 배웠는데, 하루는 울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부친께서는 젊은 시절부터 우암(尤菴) 선생을 스승으로 섬겼습니다. 선생께서 북쪽으로 유배 갈 적에 걸어서 따라 가니, 선생이 시를 지어 주셨습니다. 선생께서 사사(賜死)될 때에 우리 부친 역시 기구한 재앙을 만나 영결을 하지 못해 평생토록 한으로 여겼습니다.
우리 부친은 일찍이 북인(北人)의 잔당들이 다시 설치는 것을 아주 싫어하여 힘써 올바른 논의를 견지하였습니다. 또 적신(賊臣)민종도(閔宗道)가나주(羅州)에서 이배(移配)된 것은 실로 문곡 상공(文谷相公김수항(金壽恒))께서 요청을 했기 때문인데,우리 부친이 나주 사람으로 평소 문곡 상공과 관계가 좋았기 때문에 흉도들은 이 일이 우리 부친에게서 나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유감을 품고 교대로 모함을 하여 드디어 6년간 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갑술환국(甲戌換局)이 없었으면, 우리 부친은 거의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 후로는 벼슬길을 단념하고 문을 닫고서 깊숙이 거처하면서 날마다 의리(義理)에 관계된 서적을 가까이하여 아침저녁으로 강론하였으며, 오직 한마디 말과 한 가지 의리도 행여 스승의 가르침에 어긋날까 염려하였습니다.
집안에서의 행실을 잘 갖추었고, 형제간의 화목에 더욱 독실하여 고을 사람들이 관찰사에게 거듭 천거하니, 그때마다 편지를 보내어 만류하기를 ‘실제가 없는데, 감히 헛된 명성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부친은 생전에는 예측하기 어려운 곤액과 치욕을 당하였고 사후에는 행적이 묻혀 일컬어지지 않으니, 만일 애달피 여기는 군자가 한마디 말을 해주신다면지하에서 자신의 불행한 삶을 슬퍼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듣고서 탄식하여 말하기를,
“공자(孔子)께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고 모두 미워하는 것은 선한 사람이 좋아하고 불선한 사람이 미워하는 것만 못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고을 사람들 중에 그대 부친을 미워한 사람들은 이이첨(李爾瞻)과 민종도 같은 무리들이니, 좋아한 사람들은 반드시 선한 사람이었을 것이네.
더구나 생사와 화복의 사이는 여러 사람들이 허둥대며 급박하게 여기는데, 공은 지키는 바가 더욱 확고하였음은 자신의 뜻을 말한 글을 보면 알 수 있으니, 참으로 선생의 제자가 되기에 부끄러움이 없네.”
하였다.
형규가 일어나 울면서 말하기를,
“군자에게 이런 말씀을 들은 것으로 충분하니, 돌아가 돌에 새기겠습니다.”
하였다.
공의 휘는 세기(世器), 자는 자장(子長)으로 대대로 나주에 거주 하였다. 5대조 창(昶)은 중종 때 독서당에 선발되었는데, 관직이 지평에 그쳤다. 조부 휘 해봉(海鳳)은 별제를 역임하였고, 부친 휘 준(俊)은 참봉을 역임하였는데, 모두 고을에서 명망이 있는 선비였다.
공은 숙종 기묘년(1699, 숙종 25) 8월 27일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59세였다. 나주의 서쪽 사기촌(沙器村)에 장사 지냈는데, 원배(元配) 여산 송씨(礪山宋氏)를 같은 언덕에 장사 지냈다.
여사(女士)라는 칭송을 받은 부평 이씨(富平李氏)는 공보다 35년 뒤에 세상을 떠났는데, 따로 영암(靈巖)의 수원(燧院)에 장사 지냈으니, 계배(繼配)이다. 아들 셋을 두었으니, 병규(炳奎)는 송씨 소생이고, 진사 찬규(燦奎)와 형규는 이씨 소생이다. 병규의 아들은 정태(廷泰)와 정식(廷軾)이다. 정태와 정식의 아들은 득륜(得綸)과 득경(得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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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학생 나공 묘표:
이 글은 나세기(羅世器, 1641~1699)의 묘표이다. 나세기의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자장(子長)이다.
[주02] 민종도(閔宗道):
1633~1693. 남인으로 민암(閔黯)의 조카인데, 억세고 사나워 남을 몰래 해치는 것이 흉악한 무리들 중에서도 특히 심하였으며 장
희재와 결탁하여 음모(陰謀)를 꾸미고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조장하였다고 한다.《肅宗實錄 15年 閏3月 7日ㆍ19年 1月
13日》
[주03] 나주(羅州)에서 …… 때문인데:
민종도는 김수항의 건의에 의해 나주에서 종성(鍾城)으로 이배되었다.《肅宗實錄 6年 7月 3日》
[주04] 갑술환국(甲戌換局):
1694년(숙종 20) 갑술년에 김춘택(金春澤), 한중혁(韓重爀) 등 서인들이 폐위되었던 인현왕후의 복위 운동을 일으키자,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민암(閔黯), 이의징(李義徵) 등 남인들이 이를 빌미로 서인들을 완전히 제거하려다가 오히려 자신들이 화를 당한 사건이
다.
이 당시 숙종은 장 희빈(張禧嬪)에 대한 감정이 점차 악화되어 폐비 사건을 후회하고 있었는데, 남인들이 무모한 옥사를 벌이려 하자
분노하여 민암과 이의징 등을 유배보내고, 송시열, 민정중(閔鼎重), 김익훈(金益勳) 등 기사사화 때 축출된 서인들의 관작을 복구시
키고, 서인을 등용하여 정국 전환을 꾀하였다.
[주05] 지하에서 …… 것입니다:
한유(韓愈)와 친분이 있던 장원(張圓)이 도적을 만나 길에서 죽었는데, 그의 부인 유씨(劉氏)가 계집종을 시켜 어린 아들을 한유에
게 데리고 가서 묘표의 글을 청하게 하며 말하기를, “선생께서 명문(銘文)을 써 주신다면 죽은 사람이 욕되지 않게 될 뿐만이 아니라
그 이름이 영원히 전해져서 길이 살아 남게 될 것이요,
세상에 남긴 혈육은 물론이요 그 자손들까지도 비호를 받게 될 것이니, 가령 죽은 자가 만일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지하에서 자기
의 불행을 슬퍼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先生賜之銘, 是其死不爲辱而名永長存, 所以覆蓋其遺胤若子若孫, 且死萬一能有知, 將
不悼其不幸於土中矣.]”라고 하소연한 기록이 한유(韓愈)의〈당고하중부법조장군묘갈명(唐故河中府法曹張君墓碣銘)〉에 나온
다.
[주06] 공자(孔子)께서 …… 않았던가:
자공이 공자에게 묻기를 “마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면 어떻습니까?”라고 하자, 공자가 “아직 안 된다.”라고 하였다. “마을 사람들
이 모두 미워하면 어떻습니까?”라고 하자 “아직 안 된다. 마을 사람 중에 선한 사람이 좋아하고 선하지 못한 사람이 미워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다.《論語 子路》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