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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누정 정원 스크랩 봉화,재산일대의정자..재못마을.,갈천정..
이장희 추천 0 조회 49 15.04.06 17: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원경

정면 전경

정면 왼쪽 전경

왼쪽 측면 전경

뒷면 전경

진입로

명칭.갈천정.경상북도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 잿못마을
(원소재지 : 안동부 재산현 갈산리)김희주(金熙周, 1760∼1830.

건축 이야기

지금은 낡아버린 옛 정자

봉화읍에서 갈천정에 이르는 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36번 도로를 타고 현동 태백 쪽으로 가다가 918번 지방도로를 따라 우회전하여 봉성·명호를 거쳐 재산 쪽으로 간다.

가다가 933번 도로와 만나는 삼거리에서 933번 도로 쪽으로 좌회전 하여 1.2km 쯤 가면 왼쪽으로 갈천정이 보인다.

갈천정은 바로 길가 냇가에 기대어 있기 때문에 금방 눈에 띤다.
다른 하나는 36번 도로를 타고 법전·춘양을 지난다.

노루재 터널 직전에서 영양으로 가는 31번 도로를 따라 우회전 하여 7, 8km 남짓 가다가 918번 도로를 만나면 우회전 하여 5, 6km 남짓 가면 오른쪽으로 갈천정이 보인다.
정자의 재목은 아주 좋은 편이다.

기둥을 받친 초석은 잘 다듬은 돌이고, 마루를 고인 돌 조차도 잘 손질된 돌인 것으로 보아 이 정자는 엄청난 물력을 들여 공들여 지은 것이다.

그런데 돌보지 않아 이렇게 퇴락하였다.

누정 이야기.
- 탁월한 문장가로서의 면모.


김희주의 문집으로는 『갈천집』 10권이 있다.

문집의 시 가운데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화답한 「화귀거래사(和歸去來辭)」는 그의 산뜻한 정감과 뛰어난 문장력이 돋보이는 글이라 평가되고 있다.

편지글에는 이황·이상정의 학문에 관하여 토론한 것들이 있다.

1811년에 올린 「논혜경궁복제소(論惠慶宮服制疏)」는 여러 전거와 중국의 사례를 들어 14년 동안 왕권을 대행한 혜경궁에 대한 상례(喪禮)가 소홀하다는 의견을 개진한 것이다.
1824년(순조 24)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

이 소가 당시의 정치적 폐단을 개선하기 위한 방책을 제시한 「사서추잉진육폐소(辭西樞仍陳六弊疏)」이다.

그 내용은 성인의 학문을 궁구함[躬聖學], 기강을 세움[立紀綱], 널리 인재를 모음[廣人才], 백성을 돌봄[恤民隱], 선비의 길을 바로 세움[正士趨], 유학의 도를 높임[崇道術] 등의 6가지 당시의 현실과제를 제시한 것이다.

이외에도 왕에게 맹자의 왕도정치 구현을 주장한 「경연강의」가 있다.
그는 1820년(순조 20) 한 달여 금강산을 유람한 뒤 돌아와

「금강산유록(金剛山遊錄)」이란 기행문을 짓기도 하였다.

원만하고 화해로운 성품의 선비, 김희주.


김희주(金熙周, 1760∼1830)의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字는 공목(公穆), 뒤에 왕명에 의하여 성사(聖思)로 고쳤으며,

號는 갈천(葛川)이다.

그는 개암(開巖) 김우굉(金宇宏)의 현손이다.

옛 안동부의 속현인 내성현 망도리(乃城縣 望道里)에서 후덕한 사람으로 알려진 아버지 증 이조 참판 김시동(金始東)과 어머니 반남박씨 박효술(朴孝述)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처사 전필현(全必鉉)과 송오(松塢) 권사민(權思敏)에게 수학하였으나 뒤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이 되었다.

대산 이상정은 돌아갈 즈음 사람들에게 김희주의 장래가 유망하다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1789년(정조 13) 사마시에 합격하고, 1792년(정조 16) 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강제문관(奎章閣講製文官)이 되었다.

그 뒤 많은 벼슬을 역임하였고, 1819년(순조 19) 대사간(大司諫)에서 병조 참판을 거쳐 영흥 부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사임하였다.

또한 영해 부사·안주 목사·우승지·형조 참판·한성 좌윤·사간원 대사간·함길도 관찰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798년(정조 22) 홍문관 교리 때에는 당시 현실의 폐단을 상소하였는데, 정조가 칭찬을 하며 받아들였다고 한다.

1800년(순조 1)에는 교리에 실록 편수관(實錄編修官)을 겸하여 『영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806년(순조 6)에는 안악 군수(安岳郡守)가 되었다.

그는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아 정치와 교화 또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개탄하여, 사재(私財) 수백 냥을 투자하여 배움터[講所]를 마련하였다.

안악군 내의 뛰어난 젊은이들을 뽑아 효제의 도리 등을 교육하고 생업에 힘쓰도록 하였다.

그 성과가 매우 뛰어나서 주변 고을도 모두 본받았다고 한다.
김희주는 만년에 귀향하여 소수서원의 원장이 되었다.

화공을 불러 낡은 선성(先聖 : 공자)의 영정을 모사하고, 회헌 안향과 신재 주세붕의 영정도 새롭게 손보았다.

영정들을 봉안하는 날, 그 자리에 모인 천여 명의 사람들이 이를 매우 영광스럽게 여겼다.
김희주는 당대 사림의 지도자로 여강서원의 배향문제(이른바 병호시비)의 규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의견들이 달라서 오래도록 통일되지 않았다.

그러한 가운데 조정을 해가며 수십 년 동안 사림의 영수노릇을 하였다.

그의 성품이 퍽 너그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벼슬살이도 잘하였고,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한 뒤에는

풍기의 소수서원,

안동의 여강서원의 원장이 되어

사문을 흥기시키는데 힘을 썼고 사림들을 이끌었다.


<tbody></tbody>

건축 배경

갈천정(葛川亭)은 갈천 김희주가 지은 정자이다.

살림이 넉넉하였던 그는 봉성 북쪽, 땅이 그윽하고 넓은 쌍송정이란 곳

[지금의 물야면 북지리이다.]을 보고 주인에게 많은 돈을 주고 구입하였다.

그리고 비용을 들여 수리하고 전 가족을 옮겼다.

못을 파 연꽃을 심고 날마다 글을 읽고 시를 읊으며 노년을 보낼 계획으로 1808년(순조 8) 당시 안동부 재산현 갈산리 선영 아래에 이 정자를 지었다.

산이 깊고 물이 돌아나가며, 아래에는 폭포가 있고 돌이 파여 그윽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그 위에 집을 짓고 재(齋)를 족한(足閒)이라 하고,

헌(軒)을 수월(水月)이라 이름 붙였다.

정자를 갈천정이라 이름 지어 현판을 걸었는데, 이는 만년에 한가롭게 몸과 마음을 정양하고자 하는 뜻이었다.

몇 년 후 옛 주인이 갑자기 반환을 청하자 바로 포기하고 인색하게 굴지 않았다.

그는 매년 봄 가을 좋은 때를 만나면 혹 벗과 함께, 혹 홀로 갈천정에 가서 머무르며 노닐다가 돌아왔다.

그런데 잠깐은 몰라도 늘 있기는 어려웠다.

왜냐하면 갈천정에 가 있는 동안 여러 일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살던 덕봉 남쪽에 수 칸의 집을 지어 동쪽 방은 양정(養正)이라 이름 붙이고, 서쪽 방은 입교(立敎)라 이름 붙였다.

집은 덕봉정사(德峯精舍)라고 이름을 걸어 집안 아이들을 강학하도록 하였다

현판
갈천정(葛川亭)

물에 비친 밝은 달의 집, 수월헌 현판.
갈천정은 김희주가 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 것이다.

아마도 자신의 선영이 있는 갈산리의 칡 갈(葛)자를 따고,

갈산리에 냇물이 맑게 흐르므로

내 천(川)자를 따서 자신의 호를 삼았고,

또 그것을 바탕으로 정자의 이름을 붙인 것 같다.

수월헌(水月軒)
수월헌은 정자 앞 물에 달이 밝게 비치는 형상을 딴 듯하다.
족한재(足閒齋)

족한재는 만년에 한가롭게 노닐기에 족하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인근에서는.갈래.라고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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