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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1 - 세계 제국 로마, 로마누스가 기원전 753년에 로마를 건국하다!
아놀드 토인비는 “문명이란 도전에 대한 응전” 이라고 말했으며 인류가 만든 23개
문명을 들었는데.... 21세기에 이슬람문명과 힌두문명에 중국문명이 아직까지는
갸날픈 숨을 몰아쉬고 있기는 하지만, 이제 세계는 서구문명 하나로 귀일되었습니다.
서구문명으로 통일된 지구촌에서 일약 돋보이는 나라가 있으니 “한류(韓流)” 를 만들어 낸
한국으로, 배용준의 겨울연가에서 시작된 한류는 대장금으로 이어지고 방탄소년단 과
싸이를 거쳐서 기생충과 오겜으로... 세계인들이 한국을 선망의 대상으로 보고 동경하며
"한국어" 를 배우는 시대가 되었으니 바야흐로 "한민족 융성의 시대" 가 시작되었습니다.
세계인을 사로잡은 "한류(韓流)" 는 서구문명의 한 갈래이니 저 "서구문명" 은 19세기 말에
동양에 전해졌는데, 일본의 선각자 후쿠자와 유기치는 네차례나 미국과 유럽을 방문한후
미국등 서구문명을 “문화, 문명, 자유, 개인” 등의 단어로 번역 및 조어(造語)해 소개했습니다.
유길준은 후쿠자와의 지도를 받아 미국을 다녀온 후에 서유견문록에서 남들이 말한 찌꺼기
(후쿠자와의 서양사정) 를 주워모았다고 했는데.... 한국인들이 누리는 서구문명의 원천인
"로마 문명" 에 대해 에드워드 기번과 시오노 나나미에 기대어 요약, 정리해 보기로 합니다.
동서고금의 인류 5천년 역사는 되풀이되는지라 현명한 자는 과거의 역사에서 미래를
배운다고 하는데..... 특히나 나라의 최고 지도자는 늘 외로운 법이니, 어느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에 항상 안절부절 하는 법 입니다.
지도자가 나라 운명이 걸린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때 고전을 읽는 사람들이 있으니
영국의 두 수상인 윈스턴 처칠과 클레멘트 애들리가 그들인데, 두 사람은
그때마다 “에드워드 기번” 의 “로마제국 쇠망사” 를 되풀이 해서 읽었다고 합니다.
2차대전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윈스턴 처칠의 장엄한 명구들은 기번의 저서를 숙독함으로써 영감을
얻었다고 하며, 1949년 클레멘트 애들리는 700여년을 영국의 식민지로 다스려온 아일란드의
분리 독립문제에 대해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라 로마 쇠망사를 2번이나 계속해서 읽었다고 합니다.
로마 제국의 역사는 불멸의 위대한 성공을 쌓아올린 나라가 세계를 정복해 대 제국의 위치에
오른 후에는 어이없게도 자신의 제국과 문명을 파국으로 몰아넣었으니.... 로마 대성공의
비결은 무엇이며 또 망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지 찬찬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2000년에 처음으로 이탈리아등 유럽 7개국을 여행하면서 로마를 처음 방문한 이래 이탈리아는
5번, 그 중에 로마는 3번을 여행했는데.... 포로 로마노 그 2천년전 유적을 거닐다가 돌무더기
너머 부숴진 신전을 바라보면서 어깨 너머에 신들이 앉아 지켜보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적이 있습니다.
와이프는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새벽 5시에 교회로 가서 새벽 기도를 그르지 않는 독실한 크리스찬
기독교도인지라 유일신 사상에 젖었으니.... 로마를 2번이나 나와 함께 갔어도 결코 로마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로마는 유일신이 아닌 수만명 신들을 숭배한 다신교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 제1권에서 “지성에서는 그리스인 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인이나 게르만인 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 보다 못하고, 경제력은
카르타고인 보다도 뒤떨어지는 것이 로마인이라고, 로마인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로마인 그들만이 그토록 번영할 수 있었을까요, 커다란 문명권을 형성
하고 그것을 유지할수있었을까요? 광대한 영토를 정복해 대제국을 건설한
것은 강한 군사력 덕분이고, 쇠망의 길을 걸은 것은 단지 교만 때문 이었을까요....
시오노 나나미의 이 말에 그만 낚여서... 로마인 이야기 15권에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
까지 16권을 사서 읽었으며 그 외에도 로마 멸망 이후 지중해 세계와 황금빛 로마에
베네치아와 십자군 이야기등 모두 30권의 시오노 나나미씨의 책을 구입해서 읽었습니다.
로마의 역사에 관해서는 그간 수많은 저작들이 있지만 가장 오래된 당대의 책으로는 폴리비우스
의 “역사” 와 카이사르의 “갈리아전기” 그리고 타키투스의 “연대기” 와 “역사” 등이 있습니다.
폴리비오스(기원전 203년 ~ 기원전 120년)은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역사가로 기원전 220년에서
기원전 146년 시대를 다룬 책 "히스토리아" 로 유명하니.... 그리스의 대표적 역사가로 흔히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 폴리비오스를 뽑으니 폴리비오스의 권력분립 사상과 정체(政體) 의
정치적 균형에 대한 이론은 후대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과 미국 헌법 초안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폴리비오스는 기원전 203년경에, 아카이아 동맹의 주요 구성 국가였던 아르카디아 의
메갈로폴리스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유력한 지주, 정치가라 군사와 정치를
깊게 살펴볼 수 있었으며 기원전 170년 1년 임기의 장군단의 전단계로 여겨지는
기병 대장(hipparchos) 에 선출되었으니 아카이아 연맹의 독립 유지에 주력하였습니다.
폴리비오스의 아버지 리코르타스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페르세우스와 로마가 전쟁을
벌일때 중립을 주장한 파당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에 로마인의 의심을 받아 기원전
168년 로마에 인질로 잡혀가는 아카이아 귀족 1,000명에 포함되었으며 17년간
억류되었는데 로마에서 높은 교양 수준으로 로마 유력 가문에서 인정을 받게됩니다.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승리한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그에게 자신의 아들 파비우스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장남으로 입양된 사람으로 소 스키피오)
의 교육을 맡겼는데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무찌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의 가정 교사로서 폴리비오스는 스키피오와 오랜 우정을 나누었으며 조언자 역할도 했습니다.
소 스키피오는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를 무참하게 파괴하는데 기원전 150년에 아카이아인
인질이 석방되었을 때, 폴리비오스도 집에 돌아가게 되었지만 바로 다음 해에
친구와 아프리카로 가서 로마군에 의한 카르타고 함락을 지켜보며 이를 기록했으며
카르타고 멸망후 히스파니아(에스파냐)와 아프리카 대서양 해안으로 여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같은 해 코린토스가 파괴된후 그는 그리스로 돌아와 자신의 연줄을 이용해 그곳 상황을 완화하고자
하였는데 폴리비오스는 그리스 도시에 새로운 정치 체제를 마련하는 어려운 일을 맡았으며,
이 직위로 인해 그는 높은 신망을 얻었으며 그후 로마에서 역사서를 편찬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자신이 역사에서 다루는 지중해 여러나라에 긴 여행을 떠나서는 유적지에서 직접
지식을 얻었으며 또 자신이 다루던 역사적 사건을 자세하게 쓰기 위해
참전 병사들을 찾아 대화도 나눈 것으로 보이며, 또 서고 문서들도 열람했습니다.
그는 누만티아 전쟁 당시 스키피오와 에스파냐로 가서 군사 조언자가 되기도 한 것으로 보이며, 나중에
이 전쟁에 대한 글을 썼지만 지금은 전하지 않으며 이후 그리스에 돌아간 것 같으니 그곳에
그의 조상(彫像) 과 비문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며..... 기원전 118년에 낙마로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폴리비오스의 첫 저서는 그리스 정치가 필로포이멘의 전기로, 플루타르코스는 이 책을 참조
했으며 또 그는 로마와 그리스의 군사 전술을 다룬 “전술”이라는 제목의 광범위한 저작
을 남겼지만 이 책의 일부가 그의 주저로 20년간 40장으로 로마에 대해 저술한 “역사”
에 들어있는 것 같은데..... 그의 최대 저서인 “역사”는 앞쪽 5권까지 온전하게 남아있습니다.
폴리비오스는 “역사”서문에 ‘어지간히 어리석은 게으름벵이가 아닌한 불과 53년만에 로마인이 이룩한
이 위업이 어찌 가능했는지 알고싶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라고 적었는데 저 53년이란 기원전
202년에 결국 한니발의 패배로 끝나는 제2차 포에네 전쟁으로 부터 기원전 146년에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제3차 포에니전쟁이 시작된 해 까지를 가리키는데 이후 로마는 지중해의 패자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사실상 첫 황제가 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자신이 치른 갈리아 전쟁에 대해서 “갈리아 전기”
라는 책을 저술했으니 1인칭이 아니라 3인칭으로 자신을 지칭한게 특이한데.... 제 1권, 첫 문장이
“Gallia est omnis divisa in partes tres. 갈리아는 셋으로 나눠져 있다.” 처럼 간격한게 특색입니다.
고대 부터 현대 까지 많은 비평가들로 부터 거의 칭찬 일색인 훌륭한 문장력을 가진 책이니, 이는 내용
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고전 라틴어의 문체라는 측면에서 훌륭하다는 것이니..... 당대에 키케로와
함께 라틴어의 양대산맥이니 오늘날까지의 라틴어 연구는 거의 이 책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졌습니다.
갈리아 전쟁 시작 1년부터 알레시아 전투가 있었던 7년까지의 7권이 존재하며, 카이사르
의 비서였던 히르티우스가 전쟁이 끝난 8년째의 8권도 서술했는데 카이사르는 3인칭
으로 나오니 카이사르가 자신의 전쟁 성과를 홍보하기 위함이지만 읽는 사람에게
최대한 객관적으로 쓰여진 것 처럼 느껴지기 위해서 3인칭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 됩니다.
후세의 역사가의 저서가 아닌 전쟁을 직접 지휘한 이가 쓴 기록인 만큼 전투 전개과정이 잘 표현되고
더불어 입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붙는 뜬소문 및 역사와 문학이 잘 분리가 안되는
고대 사서의 특성상 생기는 문학적 창작이 개입할 여지가 없어 글의 사실성이 높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타키투스(55년~117년)는 로마의 역사가ㆍ웅변가ㆍ정치가니 뛰어난 저술가로 유명한데 남프랑스 나르보넨
시스 출신으로 짐작되는데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제위 69~79년) 때 공직을 시작하여 88년에는 법무관
을 지냈고 97년에는 집정관에 선임되었으며 그후 아시아(터키 서부) 속주의 총독을 역임하고 117년에
사망했으니 위대한 역사가로 평가되는데.... 그는 역사를 사건 자체보다는 인물에 초점을 두며 서술합니다.
타키투스의 가장 주요한 저작은 그의 문필활동 후반기에 쓴 두 권의 역사서 "역사" 와
"연대기" 인데 『역사』는 105년경 저술된 것으로 네로 황제의 사망부터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사망(69년~96년) 을 다루고 있으며 『연대기』 는 110년 부터 집필한 것으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사망 부터 네로 황제가 사망할 때 까지 (14년~69년) 를 다룹니다.
타키투스의 “역사” 는 고대에 로마 내전의 역사를 담고 있으니... 네로에 이어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가 불과 몇개월 간격으로 제위에 올랐다가 내전의 희생양이 되고 내전을
끝낸 베스파시아누스의 치세가 시작되기까지를 담고 있으니 큰아들 티투스 비니우스가
유대인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을 다루며, 유대인들에 대한 흥미로운 평가를 덧붙였습니다.
타키투스의 “연대기” 는 "역사"보다 뒤에 저술되었지만 다루는 시기는 "역사" 보다 앞서니 아우구스
투스에서 네로에 이르는데, 타키투스는 "연대기" 에서 타락의 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데
트라야누스(재위 98~117) 치세를 거치며 자유와 원수정의 조화에 대한 희망을 버렸으며 원로원
을 ‘굴종의 충동’ 에 사로잡힌 집단으로, 황제들은 비타협적이고 포악한 참주의 전형으로 그립니다.
로마의 탄생에 대해서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인 “일리아드” 가 참고가 되는데 소아시아의 트로이
는 테베 아가멤논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그리스군의 침공을 당해 10년간 전쟁을 이어가다가
기원전 1184년에 그리스군이 사라지고 해변에 남겨진 거대한 목마를 선물로 오해하고는
그만 성 안에 들였으니..... 밤에 목마에서 나온 그리스군이 성문을 열면서 트로이는 멸망합니다.
왕족과 서민들이 모두 살해당하고 프리아모스왕의 사위인 아이네이아스만 일족을 이끌고 탈출하는데
아이네이아스는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인간 남자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니 아프로디테
신은 자기 아들이 그리스 병사의 손에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해 탈출을 도왔으니 그들은
배를 타고 크레타를 거쳐 시칠리아를 지나 카르타고를 거쳐 신들이 이끄는대로 이탈리아로 북상합니다.
오랜 방랑 끝에 마침내 로마 근처 해안인 라비노에 도착했는데 그 땅의 왕으로 라틴족 이름이
유래하는 라티누스가 아이네이아스에게 반해 딸일 공주를 아내로 주어 정착하였는데,
그가 죽은후 아들 아스카니오스가 왕위를 물려받았고 30년을 다스린후 그 땅을
떠나서 "알바롱가" 라고 이름을 지은 새 도시를 건설하니 뒷날 로마의 모태가 된 도시입니다.
많은 세월이 흐르고 알바롱가의 왕 누미토르의 외동딸로 공주인 레아 실비아는 아버지의 왕위를
빼앗은 남동생 아물리우스에 의해 베스타(헤스티아) 신전의 여사제가 되었는데..... 어느 날
마르스신이 강변에서 잠깐 잠이든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게 되어 왕녀가 잠에서 깨기
전에 일을 치루었으니 그후 쌍둥이를 임신하게 되었고 로물루스와 레무스 쌍둥이를 낳게 됩니다.
이후 그녀의 자식이 자신의 권력을 뺏어갈까 봐 두려워한 아물리우스 왕에 의해 여사제인 왕녀는
옥에 갇히고 쌍둥이 아들은 모세 처럼 바구니에 담겨 티베리스강에 버려지니 바구니는 강을
따라 흘러가다가 팔라티움 언덕 근처 무화과나무 옆에 도달했고 암컷 늑대가 아이 울음소리를
듣고 젖을 물렸으니, 쌍둥이는 암컷 늑대의 젖과 딱따구리가 물어다주는 것을 먹으며 살아남습니다.
그후 양치기 파우스툴루스가 발견해 키우게 되니 어느날 레무스가 도둑맞은 양떼에 대한 분쟁에 휘말려
외할아버지 누미토르 앞에 서게 되자 이를 알게 된 파우스툴루스는 그들에게 출생의 비밀을 알려
주었고, 그들이 타고 온 아기 바구니를 누미토르에게 보여주어 레아 실비아의 아들임을 증명하게 됩니다.
이후 세력을 키운 두 쌍둥이는 아물리우스 왕에게 반감을 품은 사람들을 동원하고 알바롱가 성안의 사람들
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니 아물리우스는 결국 굴복하였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니 그들은 알바롱가
가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 졸본 오녀산성 처럼 방어하기는 좋으나 협소해 발전 가능성이 적으니 왕위
를 외조부 누미토르에게 돌려주고는 파우스툴루스에게 발견되었던 자리에 새로운 도시를 세우기로 합니다.
하지만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도시를 세울 자리를 두고 언쟁을 벌이게 되니 로물루스는 로마 광장이 있는
팔라티움 언덕을, 레무스는 아벤티움을 주장했고 독수리 점을 통해 결정하기로 했는데 아벤티누스
언덕에 있던 레무스의 머리 위로 6마리의 독수리가 먼저 날아갔지만, 팔라티누스 언덕의
로물루스의 위에는 12마리의 독수리가 날아갔으니 레무스 측은 먼저 본 사람이 우선이라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로물루스 측은 많이 본 사람이 우선이라면서 다투다가 전쟁을 벌이게 되었고 이
전쟁에서 결국 레무스가 죽으니.... 로물루스는 팔라티움 언덕에 도시를 세우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로마라고 이름짓게 되는데 건국 당시 로물루스는 토스카나에서
불러온 사람들과 고서적들을 통해 신성한 풍습을 비롯한 여러 규칙을 정했다고 합니다.
형제가 싸운 일을 생각하니 백제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서로 나뉘어 싸운 비류와 온조가 생각나는데
동양에서 농경민족인 중구은 장자가 우선이지만 몽골등 유목민족은 큰 아들부터 소와 말에 양을
나누어 분가하고 마지막까지 부모를 모시며 산 막내아들이 가계를 계승하니 왕 자리도 그러했습니다.
반면에 유럽에서는 로마 이후 게르만족들은 프랑크족 살라키법에 따라 모든 아들이 똑 같이 상속을
받으니 메로빙거왕조와 카롤링거 왕조에서 아들의 수에 따라 나라가 3개 내지 4개로 갈라
지는데... 이렇게 되면 외적의 침입을 받으면 각개 격파될 위험이 있고 또 형제 중에 한명이
죽은 후에 조카가 국왕이 되면 나머지 삼촌들이 작당해 침공하니 언제나 내라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12세기 들어 게르만 살리카법이 로마 교회법으로 대체되면서 장남이 모든걸 다 상속하고
차남은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으로 정리되는데....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차남은
작은 공국 하나에 만족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늘 형인 국왕의 견제를 받아야 했습니다.
얼마 전에 해리왕자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400페이지 분량의 자서전을 발간했으니 제목이
스페어 (Spare)인데.... 제목인 스페어(Spare)는 모든 부와 명예는 첫째 왕자인 형 윌리엄
에게 가고 둘째인 해리 왕자는 예비용일 뿐이라는 의미이니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뜻인가
한데 자신의 사생활 외에 찰스 3세 국왕과 윌리엄 왕세자 부부를 겨냥한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건국일에 대해서는 마르쿠스 바로의 견해에 따라 기원전 753년 4월 21일로 여기니 이날 로물루스는 흰
암소와 수소에 쟁기를 매서 깊은 도랑을 팠고 이를 도시 성벽의 경계로 삼았으니 성역으로 지정되었고
후에 '포메리움' 으로 명명되는데 그리스에서는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 경기가 6회나 열린 시대였습니다.
기원전 753년에 건국된 로마 왕정은 마지막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세운 기원전 509년까지 계속되는
데.... 로마의 왕이 된 로물루스는 로마에 성인 남성은 많지만 여성의 수가 부족한 것을 보고
이웃 나라들에 사절을 보내 혼인 관계를 맺을 것을 청했지만 거절당하자 여성들을 납치하기로 합니다.
로마의 종교 축제에 이웃 사비니인들을 초대했고, 축제 도중에 여성들을 납치하고 남자들은
추방하자 사비니인의 도시 쿠레스의 왕 타티우스가 이끄는 연합군이 로마를 공격하였고
몇년간 지속된 로마-사비니 전쟁은 강제로 로마에 붙들여 정착하게 되었지만 로마인과
결혼해 아이를 가지게 된 사비니 여성들의 중재에 의해 끝나게 되니 양국은 합병을 합니다.
로물루스는 죽기 전 팔라티움 언덕에 창을 박아 넣으며 이곳이 로마라고 선언했고, 그 창에서 자란 나무는
로마의 흥망성쇠를 같이 겪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다른 전승으로는 어느 날 천둥 번개가 몰아치며 번개
(혹은 구름) 가 그를 감싸며 데리고 갔다고 하는데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고 봅니다.
오래된 로마 신화에 따르면 그는 갑자기 사라지고 나서는 율리우스 프로쿨루스
(Julius Proculus) 앞에 나타나 신이 되었다는 말을 남겼으며, 이 신은
퀴리누스라는 이름으로 로마인들에게 중요한 신앙의 대상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로물루스의 조상은 트로이왕의 사위 아이네이아스가 맞는가? 고려 태조 왕건은 아버지
가 용건이고 할아버지는 고려왕실 공식 가계도인 왕대종족기나 고려성원록 등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왕건이 죽고 200년이나 지난 훗날인 의종때 지은 편년통록 에는
작제건(作帝建)이라 나오는데 당나라 왕자 숙종(혹은 선종?) 이 죄를 짓고 신라땅으로 유랑합니다.
신라땅 송악 마가갑(摩訶岬) 양자동(養子洞)에 이르러 보육(寶育)의 집에 머무를 때 차녀 진의(辰義)
가 천침(薦枕)해 아들 작제건을 낳았고 작제건은 유리처럼 아버지를 찾아 중국으로 가다 바다에
빠져 용왕을 만나 부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요호(妖狐)를 활로 쏘아 죽이는 공을 세워 용왕의
딸 용건을 낳았으니 《삼국유사》에 나오는 명궁 <거타지 설화> 와 90% 같은 내용인데 그
손자 왕건은 당나라 황실의 자손이요 용왕의 후손이라 미화한 것과 같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로마인들은 기원전 753년에 로마를 건국한 것은 로물루스이고 로물루스는 트로이에서 도망쳐
나온 아이네이아스의 자손이라고 믿었는데 그리스와 교류를 갖게 된 이후 트로이 함락이
기원전 1200년경(기원전 1184년) 이란 것을 알게되자 연대에 차가 너무 많이 나니
430년 이란 공백을 메워야 할 처지가 되었는데..... 적당히 중간에 알바롱가의 왕들을
채워넣었으니 두 나라 모두 조상이 고귀한 출신임을 미화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로 보입니다?
로마인들은 자기 조상이 트로이 아이네이아스의 후손들이 피난와서 로마가 위치한 라티움 지방의 라틴족
과 결합한 것으로 이해했으니 로마를 '재건된 트로이' 로 여겼는데 도증을 할 수는 없지만 자신들의
역사가 그만큼 유구하며 문명의 역사도 오래되었다는 자부심이 저런 신화를 만들어 낸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고고학적으로는 난민들이 모여 살다가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도시화되었다고 보는데 땅을
발굴해보니 소규모 촌락의 흔적이 기원전 800년 이전에도 있었고 이것이 로마인들의 뿌리로 로마인
들은 초가집과 같이 흙과 밀짚을 엮은 집에서 살았는데, 이미 거대한 성을 짓고 국가 단위의 대규모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중국 도시들에 비하면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당시 로마는 신화와는 달리 부랑자, 난민들이 모인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사비니 여인 노략 사실이
그 증거이니.... 로마인들에게 여자들이 모자라자 로물루스가 꾀를 내어 사비니족 가족들을 초청하여
파티를 벌인 틈을 타 무방비가 된 사비니족 여자들을 보쌈해 배필로 삼아 버렸다는 사실에서 그러합니다.
로마는 7개 언덕이 있었는데 로마로 이주한 사람들은 방어적인 측면에서 유리한 언덕 꼭대기에서
살게 되었고 로마 외곽을 흐르는 테베레 강은 로마를 빙 둘러 지나가면서 물난리를 자주 일으
켰기에 배수시설이 잘 갖춰지지 않은 시절이라 저지대에 거주하기란 어려웠는데 처음부터 7개
언덕에 모두 거주한 것은 아니고 다른 부족을 통합하면서 새 부족에게 언덕을 하나씩 내주게 됩니다.
로물루스는 팔라티움 언덕을 기반으로 레무스를 죽이고 세력을 확장해, 야산 로마인으로 불리던
퀴리날레 로마인을 거두었고 이후 사비니족을 통합하였으며 카피톨리노 언덕과 밸리안
언덕의 사이에 있던 늪지대의 물을 뺀 다음 땅을 다지고 그곳에 포로 로마노를 건설하게 됩니다.
다만 로마가 라틴인이나 그리스인이 아닌 트로이인의 후계를 자처했다는 사실이 후대에도 되풀이 되니
훗날 게르만인들이 로마의 후계를 자처하고, 슬라브인들도 로마의 후계를 주장하며, 심지어 이슬람
튀르크인들 까지 로마의 후계를 자처하는 사태는 로마의 유구한 전통(?) 이라고는 할 수도 있겠습니다.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한지 800년후에 제정로마 초기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로마에
대해 말하기를 “ 로마는 이탈리아반도의 중간쯤에 자리잡고 있으니 북구의 이점과
남국의 이점을 동시에 갖고 있으니 신기와도 같은 인간의 지혜가 유리한 지세와
온난한 기후 혜택을 받아 로마인들이 이 땅에 도시를 건설했을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서로마 최후의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건국왕 로물루스에게서 이름을 따왔으니
그런 그가 최후의 황제가 됐다는게 아이러니한데.... 동로마 비잔틴제국도 비슷한게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로마 시에서 비잔티움(콘스탄티노폴리스)
으로 천도하며 동로마의 시작으로 꼽히는 콘스탄티누스 1세 대제와 이름이 같습니다.
2020년에는 로마의 원로원 건물 계단 밑에서 로물루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위치상 그럴지도 모른다는 것이지 확정된 것은 아니며 실제로는 로물루스의 실존 조차도
입증되지 않은 상황인데 세리에 A 의 구단인 AS 로마의 엠블럼은 저 사진을 인용해서 만들었습니다.
로마는 전통적으로 일곱 언덕의 도시로 불렸고 세르비우스 성벽이 이들을 모두 포함하며
이후 도시가 확장되어 테베레 강 서안까지 이르게 되었으며 한 때 유럽인들에게
로마는 세계의 중심이자 유럽의 수도였으니....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All roads
lead to Rome, 라틴어: Omnes viae Romam ducunt)' 는 말이 로마의 위상을 말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