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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시왕릉 =================
진시황릉(秦始皇陵)은 중국 최초의황제 인진 시황제의 묘지이다.
여산 또는 역산(酈山)이라고 불리는,중화인민공화국 산시성 시안 린퉁구원산원(驪山園)에 있는 야산에 위치하여 있다.
기원전 246년에서 208년까지 38년간 공사를 했으며, 지금의 황릉은 야트막한 피라미드형으로, 시간이 지나며 그 높이가 낮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76m라는 높이를 자랑한다.
진시황릉은 당시 진나라의 수도였던 함양의 모양을 본 따서 만들어졌는데, 외성과 내성으로 나뉘어 있다.
외성의 둘레는 6.3km이고, 내성의 둘레는 2.5km이다.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산은 당시 내성이었던 부분의 남서쪽에 위치하며,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관이 안치되어 있는 매장실과 기타 부장품들은 아직까지도 완전히 발굴되지 못하였다.
관이 들어있는 매장실은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았기에, 현재 중국 고고학계가 주로 발굴, 조사하는 곳은 진시황릉을 넓게 둘러싸고 있는 외성과 내성 부분이다.
또한 무덤 동쪽에 있는 병마용 또한 워낙 그 규모가 방대하기에 이 유물들만을 조사하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한다.
병마용은 진시황을 사후세계에서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고, 이 또한 아직까지 완전히 발굴되지 못하였 다.
사마천『사기(史記)』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따르면 기원전 246년,
그가 13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을 때 진시황릉의 공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다만 이처럼 산 하나를 통째로 쌓아 거대한 무덤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난 후였다.
즉위 초부터 여산(酈山)에 무덤을 착공하기 시작하였고, 통일 후에 국력이 강성해지자 이 곳의 공사를 위하여 최대 70여만 명까지 동원하였다고 한다.
진시황릉이 완공되기 전, 진나라 말기 들어 사회가 흔들리며 많은 반란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장한 장군은 진시황릉에서 일하고 있던 70만 인력을 빼내어 모두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 이용했고, 이로 인해 공사는 잠시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항우가 함양으로 들어왔을 때, 무려 30만 명에 달하는 병사들을 동원하여 이 곳을 도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이 때, 항우가 무덤을 도굴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거대한 구멍에 양이 빠지자, 어느 양치기가 횃불을 들고 양을 구하러 갔다가 실수로 그 안에 있던 목조 건축물들에 불을 내 그 안에 있었던 건물들이 전소하였다는 설화 또한 전해져 내려온다.
실제로 병마용을 덮고 있던 목조 구조물 들 중에서 화재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다만 실제로 이러한 대규모 약탈이 있었는지에 대한 여부는 알 수 없고, 몇몇 학자들은 진시황릉이 아예 훼손되지 않은 채 온전한 상태로 지금까지 남아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1987년, 진시황릉은 병마용갱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병마용갱 ==================
병마용갱(兵馬俑坑)은중국 산시성 시안시 린퉁구에 있는진시황릉에서 1km 가량 떨어진 유적지로 흙을 구워 만든 수 많은병사,말등 모형이 있는 갱도이다.
1974년 농민이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해 지금까지 4개 갱도를 발견했다.
‘병용’은 키가 184cm에서 197cm로 큰 편이며, 장군을 병사보다 크게 만들었다. ‘병마용은 전사, 전 차, 말, 장교, 곡예사, 역사, 악사 등 다양한 사람과 사물을 표현하고 있다. ’발굴한 4개 갱도 중 3곳 에 모두 8천여 점의 병사와 130개의 전차, 520점의 말이 있다고 추정하며, 아직도 발굴하지 않은 상당수 가 흙 속에 묻혀 있다.
‘병마용갱’은 진시황 장례에 사용한 테라코타(terracotta)다. ‘병마용갱’은 1974년 한 농부가 발견해서 발굴조사를 시작했다. 진시황릉에 관한 사마천의 사기에는 진시황이 340만 명 인부를 동원하여 기원전 246년에 건축하기 시작 했다고 한다.
사마천의 사기는 진시황릉을 완공한 후 약 1 세기가 지난 때 저술한 사서다.
사기에 따르면, 진시황릉은 지상의 황궁을 그대로 옮긴 것과 같은 규모이며, 수은이 흐르는 5,000여 개 강과 수십 개 망루를 가진 도성 안에 온갖 보물과 병사로 화려하게 조성하였다고 전한다.
진시황릉은 지상 궁전을 재현한다는 개념으로 지었으며, 완공한 후 도굴을 막고자 동원했던 인부들을 모두 사살하였다고 한다.
2003년 1월 9일 진시황릉의 부장릉이 발견되어 진시황릉이 병마용 뿐만 아니라 실제 황궁을 재현한 것임 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최근 조사 결과 병마용갱 부근의 리산의 토양이 많은 수은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이곳이 바로 진시황릉이 조성된 곳으로 추정된다.
다시 말하자면, 진시황릉은 높이 76미터 넓이 350 평방미터에 이르는 흙으로 조성된 거대한 피라미드인 것이다.
2007년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원격 탐지 장치를 이용하여 내부에 벽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병마용의 병사들은 장인들에 의해 머리, 몸통, 팔, 그리고 다리가 각각 제작된 후 결합되었다. 연구 결과 제각기 다른 얼굴을 위해 8 종류의 틀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다른 부위도 각기 여러 종류가 있어 이들을 조합하여 다양한 형태의 병마용을 제작한 것이다. 다 리 부분은 대부분 동일한 형태로 같은 틀을 사용하여 대량 생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조립을 위해서는 각각의 부분을 맞춘 뒤 다음 과정으로 넘겨주는 생산 공정에 따른 조립 라인이 있었을 것이다. 최근 역사학자들의 연구 결과 기와의 생산과 같은 일상 생활 용품의 제작에서도 이러한 생산 라인이 존재하였음이 확인되었다.
병마용은 살아있는 듯한 모습의 등신대로 제작되었으며 얼굴 부위에는 채색의 흔적이 있다. 병마용의 존 재는 진시황제의 강력했던 권력을 상징한다.
병사들의 특징이 잘 살아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 모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은 하되 특징을 살리는 진의 문화가 두드러진다.
■ 화청지 ==================
화청지 (華淸池,중국어:华清池화 칭츠 [*]) 는 중화인민공화국 산시성 시안시의 동쪽 35km 떨어 진 '여산' 아래에 위치한 곳으로, 북으로는 위수를 마주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온천이 있어서, 43도의 온 천수가 샘 솟는다.
온천이 드문 지역이다 보 니 3,000년 전인 주나라 때부터 그 역사가 거슬러 올라간다.
주나라 때는 '여궁',진나라때는 '여산탕',한나라 때는 '이궁'으로 당나라 때는 '화청궁'으로 불렸다.
당 현종이 양귀비에게 지어준 '해당탕'이 있는 곳이며 이때 전성기를 맞게 된다. = 화청지는 병마용 근처에 위치한 목욕탕으로 알려진 국가 5A급 명소 양귀비가 이곳에서 매일 목욕을 해서 미모를 가꾸었다고 알려짐.
당 현종이 양귀비에게 선물한 연꽃 모양의 아름다운 해당탕을 지나, 양기비가 자주 거닐었다는 산책길을 걸으면... 한 나라를 쥐고 흔들었던 경국지색이 부럽지 않다.
이곳을 통해서 당나라 시대의 건축물과 정원의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당 현종 말기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 화청지는 대부분 불타고 후에 청나라와 중국 정부에서 30%만 복원하는데 그쳤다.
■ 서안 종루 / 고루 / 회족거리 =================
종루(중국어:钟楼 중러우)는 명나라 초기에 세 워진 시안시의 상징물로1384년에 세워졌다. 중국에 있는 종루 중 가장 규모가 큰 것 중의 하나이다.
종루에는 당나라 시대 만들어진 대형 청동 주조로 된 ‘종’이 여러 개 있다. ‘종루의 누각은 정사각형이며, 1,377m2의 면적으로 벽돌 과 원목을 사용하여 40m 높이로 지어졌다.
종루:명나라 태종(주원장)이 시각을 알리기 위 해 지었다고 함.
남문에서 위쪽(북)으로 6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교통의 중심이자, 여행의 중심지가 된다.
종루에서 고루는 한눈에 보이며 직선거리로 260m 떨어져 있고, 오른편으로 종고루 광장을 끼고 기역자 형태로 위치한다.
주변에 전통의상 대여점이 많이 있고, 중국 관광객들이 전통의상을 입고 다니는 모습을 흔히 볼수 있다.
서안 종루는 명나라 시절. 70번의 타종을 한 후에 성문이 열렸다고 전한다.
현재 누각의 종은 모형이며, 타종 대신 매일 6회의 편종 및 전통악기 공연이 열린다. 건물은 2층 정방형의 누각 형태로 기단의 높이는 8미터, 누각의 높이는 38미터 이다.
외관은 3층 구조의 겹처마로 이루어졌고, 내부는 2층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오전부터 밤까지 개장하기 때문에 이곳에 올라 낮과 밤의 서안 풍경을 볼 수 있다. 밤에는 중러우(종루) 전체에 조명이 켜져서 낮과 또 다른 화려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종루가 위치한 구역은 구시가의 중심지이자, 교통 중심지이기 때문에 주변에는 크고 작은 상점과 먹을거 리 장터가 열린다.
종루와 가까운 곳에 있는 ‘이슬람거리’도 볼거리다. 종루와 고루 사이의 광장은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만남의 광장이며, 두곳은 지하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 고루 鼓楼
시계가 없던 시절에 밤을 알리는 ‘시계’ 역할을 함 종루에서 5분 거리이며, 이용시간은 08:30~21:00 종루에서 서쪽으로 200m 떨어진 고루는 4년 앞선 1380년에 축조되었다.
고루에서 북을 치면 서안의 성문이 일제히 닫혔던 것이다. 전체 높이가 33m로 종루보다 약간 작지만, 명나라 초기 목조 건축의 정수로 꼽힌다.
현재 모습은 1740년에 대대적으로 보수한 것이다.
종루와 마찬가지로 직접 고루에 올라갈 수 있으나, 경치는 종루만 못하다.
주목할 것은 고루의 북문 뒤로 이어진 베이위안먼(북원문) 거리이다. 서안을 대표하는 이슬람 구역으로 7세기경 실크로드를 따라 들어와 정착 생활을 해온 후이족들이 집단거주하면서 독특한 문화 거리가 조성
되었다. 이 거리에 가기 위해서 ‘고루’를 지나쳐 간다고 봐야 함.
= 회족거리
서안의 회족거리는 이슬람 문화와 중국 요리가 융합된 독특한 먹거리 천국이다.
전통 회교도 지역에 위치한 이 거리는 신선한 재료와 화려한 요리 기술로 만들어진 다채로운 음식들이 많다.
► 추천할 음식:
1)양고기 꼬치:숯불에서 구운 양고기 꼬치는 매콤한 향신료와 고소한 맛이 일품
2)양로우파오모:양고기 국물에 잘게 부순 빵을 넣어 만든 전통 스튜
3)비앙비앙면:두껍고 넓은 면에 매콤한 양념과 고명을 곁들인 서안의 대표적인 국수 요리
4)스징빙:이슬람식 난 빵에 양고기와 채소를 얹어 만든 간식
서안의 회족거리는 단순한 먹거리 장소가 아니라, 음식과 문화가 공존하는 특별한 공간 이슬람 스타일 중국 음식을 맛보며,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생동감 넘치는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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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째)
■ 소안탑
소안탑(小雁塔)이란 중국 당나라때 장안성내의 젠푸사(천복사) 경내 에 경용(707년 - 710년) 년간에 건립된 벽돌탑이다.
장안성의 성방에서는 좌가의 안인방(구 안민방, 태종의 이름의 「백성」자를 피해 적음)의 서북쪽 구석에 해당되는 젠푸사의 탑머 리 부도원에 지어졌다.
높이는 현상으로 13층 43 m이지만, 당초는 15층 88 m 있었다고 여겨진다. 지진 등에 의해서 붕괴해 현재의 모습이 되어 있다. 젠푸사의 가람은 변칙적으로 배치되어 있어 소안탑은 안인방에 있지 만, 젠푸사는 북린의 개화방에 있었다. 일명 화엄탑이라고도 한다.
송대 이후, 지진 등의 재해가 자주 있어,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날의 모습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명나라가정 34년(1555년)에 기록된 탑 아래층에 남는 제기로 보이는 지진의 피해와 복구에 관련된 일화이다. 이 글에 따르면 지진에 의해서 탑이 두 개로 찢어졌는데, 다시 지진이 일어나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성화 말년(1487년)에 일어난 지진으로 탑에 반대쪽이 보일만큼 균열되었지만, 정덕 말년(1521년) 지진에 의해 하룻밤 만에 탑이 복구되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소안탑은 천복사라는 절이 건축되게 된 내역을 알아야 한다.
천복사는 당나라 고종이 죽은지 백일을 기념하여 기원후 684년 창건되었다. 수복사라고 불렸다가 천복사라고 개칭되었다.
천복사가 준공되자, 707년에 15층의 거대한 전탑을 세웠다.
이 천복사에서 인도에 유학을 갔다온 의정삼장이 불경을 번역하였다. 경내에 들어서면 바로 소안탑이 보인다. 소안탑은 본래 15층, 약 50m 였다고 한다.
그런데 1555년 섬서지방에 몰아닥친 대지진 때문에 두층이 무너져 13층이 되었고, 높이도 43m로 낮아지게 되었다. 1965년 대 수리를 하게 되는데, 누각식이던 탑내부를 계단식으로 바꾸어 올라갈 수 있게 만 들었다.
당나라때 의정법사가 인도에서 25년간 체재한 후 가져온 산크리스트경전을 봉해놓은 탑이다. 창건당시에는 15층의 탑이었지만 1557년 지진으로 상부의 2층이 무너져 현재는 43m에 13층만이 남아있 다. 서안성 남쪽의 천복사(薦福寺)에 위치해 있다.
천복사는 당대 장안성 내에서 유명한 불교사원이었다.
684년에 지어졌으며, 중국 황실이 고종이 죽은 후에 "헌복(獻福)"을 위해 지어 준 절이다. 그래서 원래 이름도 헌복사(獻福寺)였는데, 무측천 때(690년) 천복사로 이름을 바꿨다. 당나라 승려 의정(義淨)대사가 인도에 가서 경전을 얻어 귀국한 후에 이 곳에서 경전을 번역하여 대량의 불경을 남겼다.
현장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의정(義淨)도 천축을 여행한 당나라의 고승이다. 그는 672년 광주에서 배로 인도로 건너갔다.
그의 여행은 무려 20여년이나 걸렸으며 인도네시아까지 발을 들여 놓고 있다. 귀국시 가져온 400여부의 경전을 번역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 이 소안탑이다. 당시는 15층 45m였다고 하는데, 현재는 상부 2층이 무너져 내려 13층 42m이다. 대안탑이 직선적, 남성적임에 대하여, 소안탑은 곡선적, 여성적이다.
707년 당(唐)나라 중종(中宗) 때 건립된 4각형의 밀첨식(密檐式) 탑이다.
벽돌로 쌓은 15층의 전탑이며, 전체 높이는 원래 46m였으나 꼭대기가 훼손되어 지금은 43.3m이다. 네모난 기좌(基座) 위에 탑신(塔身)을 세웠으며, 탑신의 1층 각 변의 길이는 11.38m이다. 1층의 남쪽과 북쪽에 문이 있으며, 문틀은 청석(靑石)으로 만들었다.
문미(門楣) 위에는 선각(線刻)으로 천인(天人)과 덩굴풀을 생동감 넘치게 새겨놓았는데, 이는 당나라 초 기에 나타난 조각기법이다.
대자은사 내에 위치한 대안탑과 대치하고 있고, 크기 면에서 약간 작다는 이유로 소안탑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13층의 소안탑은 사각형의 평면에 1층의 높이가 가장 길며 점차 올라갈 수록 층 의 높이가 낮아지면서 폭도 좁아져 부드러운 곡선을 지니고 있다. 1층 북쪽과 남쪽에 권문(券門)이 있 고, 2층부터는 각 층마다 권창(券窓)이 나있다.
각 층의 처마 간격은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좁아진다.
각 층마다 남쪽과 북쪽에만 작은 창을 내 통풍과 채광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처마는 맞물림 구조로 밖으로 내밀어져 있다.
처마 밑은 마름의 이처럼 튀어나왔고, 그 위로 벽돌을 15겹으로 쌓아 겹겹이 밖으로 내밀게 함으로써 탑 처마가 안쪽으로 구부러진 활 모양을 이룬다.
이는 당나라 밀첨식 탑의 건축기법을 반영하는 것이다.
탑신 둘레는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줄어드는데, 5층 이하는 완만하게 줄어들다가 6층 위로는 급격하게 줄 어들게 하여 탑 윗부분의 윤곽을 한층 두드러져 보이게 하였다.
탑신 내부는 속이 빈 공통식(空筒式) 구조로서 나선형의 나무계단을 설치하여 위로 올라갈 수 있지만, 내부 공간이 매우 좁고 빛도 잘 들지 않아 탑 안에서 밖을 바라보기가 불편하다.
탑신의 작은 창문이 남북 방향으로 마주보고 있는데다 아래위로도 일직선으로 놓여 탑 전체 구조의 견고 성을 약화시켰고, 결국 지진으로 인하여 탑이 갈라지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므로 1965년 이를 보강하는 공 사가 이루어졌다.
밀첨식 불탑의 전형으로서 탑의 내부와 외부가 건립 초기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당나라 탑의 건축기법을 연구하는 데 소중한 유물이다.
■ 서안 박물관
서안 박물관은 서안 성벽 남문에서 약 2km 정도 남쪽에 위치해 있다.
서안(장안)이 중국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천년전 주나라 시기부터이다.
서안 서남쪽에 성터 유적이 남아 있다.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는 서안의 북 쪽의 함양에 도읍을 삼았다.
진나라 멸망 후 들어선 한나라는 함양 남쪽 웨이강 건너에 새로운 수도 ‘장안’을 건 설했다.
장나라부터 지금의 서안(시안)과 위치가 같 다.
서안박물관 1층에는 다양한 불교 유물이 전 시되어 있다.
박물관 지하층에는 고대도시 서안을 주제로 다양한 기록 복원 모형들이 전시되어 있다.
■ 비림 박물관 碑林博物馆
본래는 공자를 모시는 사당이었다.
하지만 북송 원우 2년(1087년)에 건설된 것으로 지금까지 9백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한나라로부터 근대까지의 비석, 묘지를 4천개 정도 보존하고 있으며, 서안에서 수집한 비석 1,000여점을 보유한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총 7개 전시실에 진나라부터 당나라까지의 국보급 서예 작품이 총망라되어 있다. 글과 그림을 새긴 비석들이 열대 우림처럼 빽빽해서 ‘비림(碑林)’으로 불린다.
한자를 예술로 승화한 서법은 한자 문화권을 대표하는 독특한 문화로, 서예에 관심 있는 여행자라면 결코 놓쳐서는 안될 명소다.
하지만 비림 박물관은 관람객들의 호불호가 갈린다.
방문하기 전에 중국의 서체 변천사를 대략적으로 알고 가야 재미있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비석이 많다 보니 자칫하면 흥미를 잃기 쉽다.
‘서성(书圣)’이라 칭송받는 왕희지(王羲之, 303~361년), 서예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모범으로 삼는 구양순(欧阳询, 557~641년), 당대 해서의 모범이 된 안진경(颜真卿, 709~785년), 우리나라 서예에 큰 영향을 끼친 조맹부(赵孟頫, 1254~1322년) 등 저명한 중국 서예가들의 필체가 한자리에 모여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비림(碑林)이라는 비각이 세워져 있고, 그 안에 기단부과 몸체, 갓머리로 구성된 석대 효경(石臺孝經)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당현종이 자식들에게 효를 행하라고 서를 쓰고 주해를 달아 적어 놓은 비라고 한다.
현종이 황제가 되는 과정에서 얼마나 부모에게 불효를 저질렀으면 이렇게 천년이 가도 지워지지 않을 정 도로 후손들에게 유시를 내렸을까 하는 생각이 미친다. 각 전시실마다 파괴되고 망실된 비를 수집하여 질서정연하게 보관중이었다.
왕희지(王羲之, 303~361), 구양순(歐阳詢, 557~641), 안진경(顔眞卿, 709~785), 조맹부(趙孟頫, 1254~1322) 등 저명한 서예가들의 필체가 한자리에 모여있어 많은 서예가들이 탁본을 해간다고 한다.
하이라이트는 제1~3 전시실이다.
제1 전시실은 국보급 문화재인 ‘개성석경(开成石经)’이 유명하다.
도합 114개의 비석 양면에 65만여 자를 새긴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서적’이라 불린다.
내용은 <논어>, <맹자>, <시경>, <효경>, <의례> 등 유가에서 중시하는 13종의 경서로 채웠다.
제2 전시실에는 구양순, 안진경을 비롯한 당나라 대가들의 작품을 한데 모아 두었다.
하나 더 눈여겨 볼 것은 ‘대진경교유행중국비 (大秦景教流行中国碑)’이다. ‘경교(景教)’는 고대 기독교 종파 가운데 하나인 네스토리우스교를 뜻한다.
781년에 세워진 이 비석에는 기독교가 중국에 전파된 과정이 상세히 기록돼 있을 뿐 아니라,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관련 비석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빼곡한 글자보다 비석의 상부에 새겨진, 구름으로 둘러싸인 십자가가 먼저 눈에 띈다. 하부는 특이하게도 불교의 연꽃 문양으로 되어 있다.
이는 동양의 불교와 서양의 기독교가 융화된 흔적으로, 당시 시안이 실크로드의 중심지였음을 실감케 한 다.
제3 전시실에서는 역대 서체의 변천사를 확인할 수 있다.
재미난 것은 1716년 청나라 때 화가가 그린 ‘관제시죽(关帝诗竹)’이란 비석이다.
곧게 뻗은 대나무와 꺾어진 대나무가 조각되어 있는데, 내용은 소설 <삼국연의>에서 관우가 조조에게 잡혔을 때의 심경과 관련이 있다.
‘지금은 조조에게 꺾어진 대나무처럼 굽히고 있으나, 마음은 곧게 선 대나무처럼 유비에게 지조를 지키 고 있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 서안 성벽
시안성벽(중국어:西安城墙)은 산시성 시안시 성구에 위치해 있다. 명나라 초기에 당나라 장안 황성의 기초 위에 만든 것이다.
이후 수차례 보수 공사를 거쳐, 방어체계를 구축하였고, 중국에서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고성벽이 완성 되었다.
1961년 시안성벽은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에 의해 전국 중점문물 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오늘날의 서안성벽은 명나라 초기에 건설된 것이다.
당나라 말기 뤄양(낙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원래의 도성인 당장안성은 대부분 파괴되었다.
명나라 초기 주원장에 의해 둘째 아들 주협이 진왕으로 봉해졌고, 서안부를 두었다.
홍무 7년인1374년에 서안장벽의 재건공사가 시작되었다.
장벽을 중건할 때 서, 남 양쪽은 원래의 당나라 장안성 황성의 터 위에 성을 연장하여 만들었고, 동쪽 벽과 북쪽벽은 새롭게 만들어졌다.
이 공사는1378년 홍무 11년까지 8년을 진행하여 기초를 완공하였다.
그 후 1568년 융경 2년 장벽 위쪽 공사와 외벽 쪽의 공사가 마무리 되었다.
1636년 명나라 말 숭정 9년 섬서순무 손정정이 이자성의 반란을 막기 위해 네 문의 옹성을 추가로 만들 었다.
1643년 숭정 16년 서안을 공격했고, 다음 해 1644년 이자성은 칭제를 하며 국호를 대순이라 칭하였다. 청대에 이르러 명나라 때 기본골격을 따랐고, 열 두차례에 걸친 중수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 중 규모가 가장 큰 것은 건륭제 46년인 1781년의 작업이며, 포와 해자를 추가하여 대대적인 방어능력을 향상시켰다.
성벽은 방어용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동서로 길쭉한 장방형이다.
동벽은 2,590m, 서벽은 2,631m, 남쪽 장벽은 3,441m, 북쪽 장벽은 3,241m로 전체 둘레 13.75km이다. 성내의 면적은 총 12평방킬로미터로, 당나라 장안성의 1/7 정도의 크기이다.
성벽의 높이는 12m, 아래에서 15~18m에 이른다. 서안성은 동서남북으로 4개의 성문이 있고, 각각 장악문 (长乐门), 안정문(安定门), 영녕문(永寧門)과 안원문(安遠門)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고, 문 밖에는 옹성 이 고르게 쌓여있다.
각 문은 3층으로 3중으로 나뉘어 있고, 바깥이 안쪽을 향하게 되어있다.
■ 대자은사 대안탑
648년 당 태종의 아들 이치(李治, 당나라 3대 황제인 고종)가 돌아가신 어머니 ‘문덕 황후’를 추모하 기 위해 지은 황가 사원이었다. 당시에는 장안에서 가장 큰 불교 사원 이었는데, 당나라 말기 전란 때 불에 타 황폐해졌다. 1887년에 보수하면서 본래 규모보다 작게, 7분의 1로 축소해 지었다.
지금은 인도에서 돌아온 현장(玄奘)이 머물면서 불경 번역에 몰두했던 곳으로 더 유명하다.
사원 뒤뜰에 있는 대안탑은, 652년 현장이 인도에서 가져온 법문 경전을 보관할 목적으로 세운 것이다.
처음에는 5층으로 지었는데 파괴되었고, 재건하는 과 정에서 10층으로 높여 지었으나, 지금은 7층 전탑으로 높이가 64m에 달한다.
위로 갈수록 탑의 폭이 좁아지고, 층마다 아치형 창을 낸 것이 특징이다.
별다른 장식을 하지 않았지만 고풍스럽게 아름답다. 별도의 비용을 지불하면 탑에 올라가서 경치를 조망할 수 있는데 너무 비싸서 추천하지 않는다.
대자은사 앞 광장은 또 하나의 사진 촬영 포인트다. 경장(经藏), 율장(经藏), 논장(论藏)의 불교 경전에 정통해서 ‘삼장(三藏)’이라 불렸던 현장의 동상이 우뚝 서 있는데, 담장 너머의 대안탑과 동상을 함께 넣어 사진 찍기 좋다.
동상과 대안탑을 바라보노라면 마치 실크로드 한복판 에 서 있는 듯하다.
대자은사 뒤편의 북 광장(北广场)도 특별하다.
아시아 최대의 음악 분수가 설치되어 있다. 저녁 조명 을 화려하게 밝히고 물을 뿜어 대는 분수를 보노라면, 마치 당나라의 영광이 재현된 듯하다.
관람하려고 모여드는 사람이 많아서 소매치기가 기승을 부리니 소지품 관리에 유의하자.
대자은사는 불교의 번역과 학술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중국 불교가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 다. 절 내부의 다수 발상들은 당나라 시대 불교 예술의 정수를 보여준다.
대자은사 경내에 있는 대안탑은 가장 상징적인 건축 물로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을 보관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처음에는 5층으로 지어졌으나 후대에 7층으로 개축 되어 현재는 7층으로 남아있다.
내부에는 나선형 계단으로 7층 꼭대기 층까지 올라 갈 수 있게 되어 있다.
대안탑은 당나라의 삼장법사 현장이 인도에서 들여온 불교 경전의 한문 번역에 종사하던 곳.
서유기에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과 같이 등장하는 그 삼장법사..
대안탑은 인도에서 현장법사가 귀국할 때, 가져온 경전과 불상 등을 보존하고자 당 고종(측천무후 남편) 에게 요청해 건립했으며, 현장법사의 ‘사리’도 남아 있다.
현장법사는 당시의 한문 불교경전의 내용과 규율에
대한 의문을 풀고자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 원전을 기반으로 불교를 연구하고자 인도의 푸슈야브후티로 떠났으며, 당나라로 귀국한 뒤에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자신이 가지고 돌아온 불교 경전의 한문 변역에 매진했다.
원문에 충실한 그의 번역은 당시에 커다란 개혁을 가져왔으며, 현장법사 이전의 번역ㅇ르 ‘구역’이라 고 부르고, 현장법사 이후 번역을 ‘신역’이라고 부른다.
대안탑이 있는 ‘대자은사’는 한국 사찰과는 달리 더 화려하다. 대웅전 글씨체도 금색으로 화려하게 금 테를 두르고 있다. 부처님 모습도 마치 그리이스 로마 신화에 부도덕한 신들 표정처럼.. 옷을 걸치지 않은 맨몸도 있고, 짓궂은 모습도 있다.
이는 인도 불교의 영향이며, 타락하기 쉬운 인간 본성을 직설적으로 반영한 것
■ 대안탑 북광장
■ 대당불야성 거리
‘대당불야성’은 대안탑과 대당부용원 사이에 1.5km의 거리에 조성된 보행자 거리.
서안의 최전성기였던 당나라 시대 발전상을 나타내기 위해 당나라 황제, 인물, 예술 등을 테마로 조성. 낮보다는 밤에 그 화려함을 느낄 수 있어서.. 이름을 ‘불야성’이라고 지음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빨간색 ‘불빛’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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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째>
■ 홍경궁( 당 현종과 양귀비가 살던 정원)
흥경궁(興慶宮)은 중국 당나라 시대의 궁전이다. 현종(玄宗)조의 정치 중심지였으며, 북쪽의 태극궁, 대 명궁과 구별하기 위해 남내(南内)라고도 불렸다. 훗날 당 현종으로 즉위하게 되는 이융기(李隆基)가 황자로 있을 때 그의 다섯 형제들과 함께 거주했던 저택으로 원래 이름은 융경방(隆慶坊)이라 했으며, 궁전으로 바뀐 뒤에는 현종의 휘를 피해 개원(開元) 2년 714년 흥경궁으로 바뀌었다. 융경방은 장안 동쪽 끝에 위치해 있었다.
현종은 개원 16년 728년 정월부터 흥경궁에 머물며 정무를 보았다. 개원 20년(732)에는 흥경궁과 장안 동남쪽 모퉁이에 위치한 곡강지(曲江池) 부근에 이궁(離宮) 부용원(芙蓉園)이 지어지고, 북부의 대명궁 과 이어지는 황제 전용 통로 협성(夾城)이 완성되었다. 협성은 이중성벽으로 에워싸인 통로로 주민들은 알지 못하는 길이었으며, 황제들은 이곳을 통해 대명궁에서 흥경궁으로 이동하였다. 또한 이곳에서 양귀 비 (楊貴妃)와 함께 기거하였으며, 안사의 난 이후 양위하고 또한 이곳에서 거주하였다.
당 왕조 말기 흥경궁은 파괴되어, 연못인 용지(龍池)의 경우는명(明) 왕조 말기에서 청(清) 왕조 초기에 이르러 아예 부지가 논밭으로 변해 있을 정도였다. 1957년 5월 31일, 중국 정부에 의해 흥경궁 옛 터가 산시성(陕西省)의 문물보호단위(文物保护单位)로 지정되었다. 1958년부지는 흥경궁공원이라는 공원으로 바뀌었으며, 이후 서안시(西安市) 시내에서 최대 규모의 공원으로 자리잡았다.
흥경궁 공원의 정문은 시안 교통대학과 마주 보고 있으며, 공원 부지 안에는 흥경호(興慶湖)라 이름이 바뀐 호수(옛 용지)와, 그 가운데 인공섬 위에 세워진 누각 침향정을 비롯해 화악상휘루(花萼相辉楼), 남훈각(南薰阁) 등의 당대 건축물의 옛 이름을 붙인 전각들이 당대 건축양식에 따라 재현되어 있다.
중국 서안 패키지 여행지로 인기가 높은 홍경궁 .. 현재 당나라 당시 건축물 방식이 일부만 남아 있고. 양귀비가 좋아했다는 모란 정원 힘향정 등이 부분적으로 복원되어 있다.
홍경궁은 목단꽃으로 유명하며, 공원 안에는 홍경호, 화악상휘루, 남훈각 등의 건축물과 호수, 누각 등 이 있다.
■ 법문사(부처 진신사리를 모신 대안탑이 있는 사찰)
위치:중국 섬서성 부풍현 법문진 북쪽 10km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부처님의 지골사리(손가락뼈)가 모셔져 있다. 부처님의 신체인 진신사리는 우리나라 통도사를 비롯해 아 시아 여러 사찰에 나뉘어 있지만, 지골사리는 법문사가 유일하다. 그래서 법문사에는 늘 순례객들의 발길이 많다.
인도 마우리아 왕조 3대 황제인 아쇼카왕 (기원전304~232)은 형제 99명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과오를 참회하고 불교에 귀의했다. 그리고 불교 전파에 적극 나섰다.
그는 부처님의 사리를 아시아 곳곳에 보냈다. 석리방 등 18명의 스님들은 진신다리 19과(부처님의 사리는 ‘과’로 부른다.)를 가지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국으로 향했다. 위험천만하고 힘든 여정이었지만, 당시 중국은 불교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서안까지 가지 못하고 인근 성총이란 곳에 부처님의 사리를 묻게 된다.
한편 인도 서북부 안식국에는 안세고라는 왕자가 있었다. 그는 왕위를 버리고 불교에 귀의해 역경성으로 이름을 떨쳤자. 그가 성총에 머무를 때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광채가 솟아났다. 그는 바로 그곳을 파봤 더니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7개의 푸른 벽돌과 진신사리가 나왔다.
그중 진신사리를 봉안해 법문사(당시에는 아육왕사로 불렀다.)를 세웠다. 후한(147~189년) 시대였다.
1970년대 서주 왕실 대형 궁전 유적이 발굴된 지역과 불과 수km 거리이며, 주변에는 주공묘, 오장원, 석 고산, 조어대 등 역사 유적지가 밀집해 있다. 이처럼 주진 문화의 발상지이자 3천년간 인문학적 보고로 불리는 관중평원 서부의 주원 대지에, 법문사의 웅장한 진신보탑이 우뚝 서 있다.
‘법문사’는 한나라와 위나라 교체기(약2~3세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가모니 열반 200년후..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왕이 불교를 전파하면서, 석가모니의 사리 8만 4,000개를 각지에 분산시키며 탑을 세웟는데, 중국에 19곳이 지정되었고, 법문사는 그중 다섯 번째 사리 안치처로 기독된다.
이에 법문사는 초기 아육왕사 또는 무왕사로 불리며 역사적 위상을 확립했다.
한나라, 위나라 시기부터 중원과 서역 간 문화 교류가 활발해지며, 법문사는 실크로드의 관문인 장안 인근에 위치해 초기 불교 수용의 핵심 거점이 되었다.
역사학자 량치차오가 “중국과 외부 지식계의 첫 접점은 진당 시대 불학 이었다.”고 지적한 것처럼 주원은 한족과 소수민족의 정치,경제,문화 교류가 집중된 지역으로, 불교가 중국 전통문화와 융합하며 화하 문화의 한 축을 형성하는데 기여했다.
특히 서역 승려들이 법문사에 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한 것은 당시 지리적,인문적 조건이 최적이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 건릉(측천무후와 당고종의 합장릉)
당나라의 수도였던 서안 지역에 가면 측천무후 무덤이 있다.
천무후의 무덤은 ‘건릉’이라고 부르는 데 시안의 대표적인 관광지 중에 하나다.
‘서안’은 병마용부터 비림박물관, 서안 성벽까지 중국의 천 년 고도로써 역사유적이 즐비한 도시이다. 건릉 역시 이러한 대표 유적지 중의 하나로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다. 건릉의 볼거리로는 당 고종과 측천무후의 무덤이다.
측천무후는 당나라 시기 직접 황제의 자리에 오른 여인으로, 중국 역사의 최초이자 마지막 여황제다.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측천무후의 무덤을 찾아올 정도로 그녀는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측천무후가 중국 역사에서 주목받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측천무후가 황제로서 오랫동안 당나라를 통치를 한 부분이 있다. 그녀가 통치하던 시기 당나라는 전성기에서 쇠퇴기로 넘어가던 때였다. 그녀는 여황제임에도 안정적으로 왕권을 유지하며 오랫동안 중국을 통치하였다.
두 번째 이유로는 그녀에 대한 많은 이야깃거리 때문이다.
측천무후는 중국의 3대 악녀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황제의 지위에 오르기 위해 그녀가 보여준 냉혹함과 잔인함은 후세에 여러 이야깃거리로 남는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여전히 측천무후와 관련된 드라마나 영화가 제작되고 있다.
무덤은 산의 형태로 우뚝 솟아 있다.
뿐만 아니라 건릉 입구에는 고종의 장례식에 참여했던 소수민족과 외국 사신을 본 딴 조각상 61구가 입구에 진열되어 있다. 그리고 내성에는 무덤을 지키는 역할의 사자 조각상이 있다.
다만 건릉은 서안 시내에서 부터 위치가 많이 떨어져 있기때문에 대중교통을 타고 가기는 어렵다.
보통 차를 대절해서 프라이빗 투어를 하거나 여행사를 통해 패키지로 간다. (자동차로 1시간 정도 소요) 패키지로 가는 경우, 중국의 고 사찰인 법문사를 함께 여행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역사적 인물의 무덤들은 항상 도굴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중국의 대표적인 왕릉인 청 건륭제, 한 무제, 당 태종의 왕릉도 예외없이 모두 도굴되었다.
건릉의 경우 산 속 깊은 곳에 매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입구의 위치가 처음에는 알려지지 않아서 아직까지 도굴이 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 때 도굴꾼들이 대포까지 동원하여 도굴을 하려고 했으나 도굴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는 도굴방지를 위해 국가 차원에서 철저히 관리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은 건릉에 대한 발굴이 언제 진행될 지에 대해 관심이 많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건릉에는 500톤의 보물이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자극하고 있다.
실제로 1958년 이 지역에서 도로 공사를 하다가 입구가 발견되었고, 중국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발굴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중국의 문화재 하면 빠지지 않는 인물, 저우언라이가 현재 기술로 발굴을 하면 문화재가 훼손될 수 있다며 발굴을 하지 못하도록 지시하였다.
한편 2010년 초에 건릉에 대한 발굴이 진행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으나, 중국 국가 문물국에서는 이를 공식적으로 부인하였다.
그래서 현재까지는 건릉에 대한 발굴 계획은 없는 상황이다.
■ 영태공주 묘실과 박물관
‘영태공주’는 당 고종과 측천무후의 손녀로 측천무후의 명령으로 십대 때 죽은 비운의 인물
이 박물관의 영문명은 <Essence Exhibition of Cultural Relics From the Satellite Tombs of Qianling Mausoleum> ‘건릉의 위성 무덤에서 출토된 문화 유적의 정수를 전시함’ 정도로 변역할 수 있다.
건릉에는 고종, 측천무후 황후뿐만 아니라 여러 황실 일원이 함께 묻혀 있다.
셔틀버스를 타고 건릉에 속하는 여러 묘를 돌아 볼 수 있는데, 그중에 한곳이 영태공부 묘실과 박물관이 다. 영태공주묘 지하로 연결되는 시원한 묘실에서 ‘궁녀도’와 석관, 그 석관 뒤편으로 위쪽에 벽화로 그려진 ‘삼족오’등을 살펴볼 수 있다.
‘박물관’으로 들어가보면.. 다양한 전시물들이 있다.
장비인지? 동탁인지? 눈이 부리부리하고 입체적인 인물 동상도 있고, 실크로드 중앙아시아, 서 아시아 문화권에 있다보니 이슬람 문화 흔적들을 엿볼수 있다.
강인해 보이는 여성들이 말을 타고 있는 모습. 말 뒤에 강아지를 태우고 가는 모습도 있다.
1958년, 섬서 함양 부근의 양산에서 채석노동자들이 산을 깎아 돌을 캐고 있었다. ‘쿠궁’하는 큰 소리와 함께, 열린 깨트린 돌 아래에 배열이 나란한 돌로 쌓은 석별이 발견되었다. 공사팀은 즉각 공사를 중단하고 당국에 연락했다.
확인 결과 이곳이 당고종 이치와 무측천 무덤으로 밝혀졌다.
그후 몇 년간 학자들은 건릉 주변을 탐사했고, 수많은 배장묘 들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능’은 황제 부부만 쓸수 있으며, 공주,왕자는 일반 무덤(묘)를 규모로 써야 한다.
하지만 공주를 왕릉 수준으로 크게 했다는 것은 뭔가 대단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영태공주는 이름이 이선혜, 자는 농휘. 684년 전후에 태어났다.
부친 이현이 낙양으로 불려가기 전에, 영태공주는 가족들과 함께 균주,방주 일대에서 살았다.
상애란이 쓴 ‘중국공주’라는 책에 따르면, 이현이 여릉왕으로 쫓겨나 있는 동안 영태공주는 그녀의 첫사랑 송지민을 만났다. 서로 사랑했지만 송지민 신분이 낮다보니 결혼은 불가능했다.
성력원년(698년) 적인걸의 권고로 이현(중종)을 황제로 올리기 위하여, 낙양으로 부른다. 그러다보니 14세 이선혜 공주는 첫사랑 남자와 헤어져야 했다. 송지민은 친척들(벼슬아치) 도움으로 황실에서 일자리를 구했고, 둘은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된다.
16세가 되면서 공식적으로 ‘영태공주’직함을 받았고, 황실을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정략결혼을 해야 했다. 그것은 측천무후, 이현(아버지) 둘의 요구였고, 그것을 거절할 수 없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못했고, 측천무후 눈밖에 나서 남편과 함께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사실은.. 사랑했지만 결혼할 수 없었던 송지민은 영태공주 무덤앞에서 굶어서 죽음을 선택했고 같이 묘실에 묻히기를 원해서.. 그렇게 함께 묻어줬다고 한다.
궁녀도: 당나라 때 벽화가 그려진 무덤은 신성공주, 방릉공주, 영태공주, 등이 있다. 이중에 영태 공주 의 묘실 벽화에는 공주를 수행하는 ‘궁녀’를 그려 놓았다.
중종은 705년에 정식으로 황위에 오르면서, 17세에 죽은 딸이 너무 불쌍하여 706년에 새로이 무덤을 만 들어주었다. (거의 왕릉 수준으로 크게 만듬)
궁녀도에 궁녀 모습을 통해서 당시 미인을 상상할 수 있다. 얼굴이 크고 통통한 모습, (양귀비같이) 입술이 작은 모습
■ 서안 북역 – 낙양 용문역
1)중국의 천년고도 장안
서안(과거, 장안)은 중국 13개 왕조(진,한,수,당나라 등)가 수도로 삼은 역사 도시
1370년 명나라가 몽골족의 원나라를 쫓아내고 성을 재건할 때, ‘서경’과 ‘장안’의 앞뒤 글자를 따서 ‘서안’이라 부른다.
아테네, 로마, 카이로와 함께 세계 4대 고도이며, 실크로드의 출발지로 번성했다.
진시황 병마용갱, 당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 장소 화청지, 삼장법사가 지은 대안탑, 고대성벽 등 역사-인문학적 경관이 즐비하다.
2)무협지 속 고수 느낌을 담은 ‘화산’
중국의 5대 명산(5악)으로 손꼽히는 화산은 산세가 험하고 하늘 아래 가장 가파른 산 화산의 ‘화’는 꽃을 상징하며, 우뚝 솟은 바위봉들이 마치 꽃의 형상과 같기 때문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통바위산으로 남성적 강인함을 느낄 수 있다. 70도에 이르는 가파른 등산로가 간담을 서늘하게 하지만, 케이블카를 타면 누구나 편하게 정상까지 즐길 수 있다.
3)석각예술의 보고.. 용문석굴(아래에 설명)
4)선종 불교의 본산이자 무림의 대명사 ‘소림사’ 소림사는 오악 중 중악이라 불리는 허난성 쑹산에 있다. 달마대사가 북위 때 양자강을 건너 숭산의 천연석굴에서 면벽 9년의 수도 끝에 중국불교 선종의 일대 종사가 되었다. 달마는 면벽 수도 후 몸이 약해져 건강회복을 위해 다섯 가지 동물의 움직임을 본떠 신체수련을 했는데, 그것이 소림권법으로 발전했다. 소림사와 탑림은 역대 승려들의 묘탑이다. 당대-청대에 걸쳐서 벽돌로 만들어진 250여개의 탑이 숲처럼 들어서 있다.
5)실크로드쇼, 낙타 방울소리
한 젊은이가 아내를 두고 동료들과 함께 실크로드를 횡단하는 대상이 되어 장안에서 히말라야 준령도 넘고 중앙아시아 평원과 사막도 지나고 로마까지 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그린다. 사막의 모래폭풍, 늑대의 습격, 눈보라치는 만년설 있는 고산준령, 도적의 습격 등의 고난을 겪게 되는데 관중석으로 낙타 무리가 지나가고 늑대개들이 뛰어 다니고 폭포수가 쏟아져 내려고 또 무대가 움직이고 위로 솟거나 땅으로 꺼지기도 한다. 중국문화의 스케일을 느낄 수 있는 공연이다.
■ 용문석굴
(중국 3대 석굴. =룽먼 석굴)
뤄양 시에서 남쪽으로 13km 떨어진 이수이(伊水) 강변 양쪽 벼랑에 벌집처럼 뚫린 석굴이 1km 남짓 이어진다.
룽먼 석굴은 둔황의 막고굴, 다퉁의 윈강 석굴과 함께 ‘중국의 3대 석굴’로 꼽힌다.
493년 북위(北魏)가 도읍을 다퉁에서 뤄양으로 옮기고 석굴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선비족이 세운 북위는 한족의 땅이라 할 수 있는 중원에 입성하자 민족 간 융화를 위해서 불교를 택했다. 이 시기 뤄양에 지은 불교 사원만 1,367개이다.
황실 비호 속에 국가 사업의 일환으로 석굴 사원을 조성했는데, 룽먼 석굴이 대표작이다.
북위에서 송대에 이르기까지 400년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북위와 당나라가 가장 열정적이었다.
총 2,345개 석굴과 감실에 불상 110,000여 존이 만들어졌는데, 그중 북위의 것이 30%, 당나라의 것이 60%를 차지한다.
북위를 대표하는 석굴로는 고양동, 연화동, 약방동, 빈양동 등이 있고, 당나라 것으로는 만불동, 봉선 사, 잠계사 등이 유명하다. 석각 외에도 놓쳐서는 안 될 볼거리가 돌에 새긴 2,800여 점의 비각(碑刻)과 제기(题记)이다. 중국 서예사에서 명필로 꼽히는 필체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
(고양동)
가장 먼저 조성된 석굴로 역사가 1500년이 넘는다. 493년 북위가 뤄양으로 천도하고 처음으로 축조하기 시작했다. 황실과 귀족들이 봉헌해서 만든 불상이 수백여 개에 달한다. 커다란 석굴 벽면에 빈틈이 보이 지 않을 정도로 작은 감실과 불상을 조각했다. 마모된 조각이 많지만 북위 왕조가 숭불 정책을 적극 펼 쳤던 것을 입증하는 석굴로 의미가 깊다.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고양동은 ‘제기의 보물창고’로 유명 하다. 조각한 불상에 만든 장인의 이름과 연도, 제작 이유를 상세히 기록한 것이 바로 제기이다. 용문20 품(龙门二十品)이 북위시대 제기를 대표하는데, 그중 19품이 이곳에 있다. 나머지 한 개는 자향굴(慈香 窟)에 있다.
(빈양동)
북위 시대를 대표하는 불상이 이곳에 있다.
석굴이 빈양남동, 빈양중동, 빈양북동 3개로 나뉘어 있어서 ‘빈양삼동(宾阳三洞)’이라고도 부른다. 그중 500년부터 523년까지 총 24년에 걸쳐 조성한 빈양중동에 주목하자.
룽먼 석굴 중 축조에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린 굴로 꼽힌다. 윈강 석굴보다 한결 섬세하고 온화해진 불상 이 등장한다.
석굴 안 11존의 대불(大佛)을 보면 그 노고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중앙에 8.4m 높이의 석가모니 상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고, 좌우에 제자와 보살이 서 있다. 석굴 앞에 있는 거대 비석은 당나라 때 저명한 서예가 저수량(褚遂良)이 쓴 것이다.
(연화동) - 우측
먼저 천장에 활짝 핀 대형 연꽃 조각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중앙에는 5.1m에 달하는 석가모니 불상이 가부좌가 아니라 허리를 꼿꼿이 펴고 서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연화동의 하이라이트는 남쪽 벽면 상단에 2cm 크기로 정교 하게 조각한 불상들이다.
그러나 육안으로 확인하긴 어렵고 사진을 찍어서 확대해야 보인다.
이는 룽먼 석굴에서 가장 작은 크기로 조각된 불상으로 꼽힌다.
(만불동)
룽먼 석굴에서 조각이 가장 완벽하다고 평가받은 석굴이다.
당나라 고종과 측천무후가 부처에게 소원을 빌기 위해서 조성한 것으로, 전실과 후실로 나뉜다. 전실에 힘이 아주 세게 생긴 역사(力士)와 사자 두 마리가 조각돼 있고, 후실에 석가모니와 제자 및 보 살이 있다.
-석가모니가 앉아 있는 좌우 벽면에 불상 15,000여 개를 매우 규칙적으로 새겨서 만불동이라 부른다. 불상들 표정이 제각기 달라서 관찰하는 재미가 있다고 알려졌지만, 불상 크기가 4cm에 불과해서 육안으로 확인하긴 어렵다.
천장에 예쁜 연꽃이 조각되어 있고, 연꽃을 빙 둘러싸고 제기가 새겨져 있다.
(봉선사)
룽먼 석굴을 통틀어 최고 하이라이트다.
규모가 가장 큰 것은 물론이고, 최고의 예술적 가치를 지녔다.
노천에 드러난 9개 불상 제작에만 4년이 걸렸고, 학자들 고증에 따르면 전체 석굴을 만드는 데는 15년 이상 소요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봉선사로 난 계단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한가운데 위치한 노사나불(卢舍那佛)에 이목이 집중된다. 길이 17.14m의 초대형 불상으로 머리 크기만 4m, 귀 길이가 1.9m에 달한다. 무척 거대한데도 전체적인 조형미가 세련되고 여성스럽다.
얼굴은 보름달처럼 둥글고, 눈썹은 초승달처럼 가늘며, 온몸에서 위엄이 느껴지지만, 전체적으론 온화한 분위기가 감돈다.
전해 오는 바에 따르면 노사나불은 측천무후를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위 사진)
조정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황후 자리에 오른 측천무후는 불교를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수단으 로 삼아, 석굴 제작에도 깊이 관여했다.
<사서(史书)>에는 ‘측천무후가 화장품 살 돈 20,000관을 헌납했다’라는 기록이 전해온다. 당시 1관이 엽전 1,000개를 꿴 것이라고 하니 엄청난 기부금이었다. 측천무후 시대가 룽먼 석굴 조성의 최전성기였다.
현종 때에 이르러 점차 불상을 조각하는 일이 드물어졌다.
■ 향산사/백거이묘
= 낙양 향산사
중국 허산성(하남성) 낙양시 향산사(香山寺).
향산사는 서기 516년에 처음 건립했으며 자신의 왼팔을 잘라 달마대사의 제자가 되었다는 혜가(慧可) 대사가 이 절에서 출가했고, 최초의 여황제 측천무후도 이곳에서 휴양을 하였다.
중국의 문장가 백거이(白居易)도 시와 술과 친구들과 어울리며 이곳에서 노년을 보냈다.
백거이의 자는 낙천(樂天)이며,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 또는 취음선생(醉吟先生)이다. 그는 낙양 부근 신정(新鄭)의 하층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과 숙부들은 모두 관직 생활을 했으나 그가 태어날 즈음에는 가세가 기울어 넉넉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대표작으로 장한가(長恨歌)가 있다.
향산사- 장송별장
쑨원의 별장이면서, 장개석(장제스)의 별장. 장개석의 장. 그의 아내 송미령의 ‘송’ 등 이름을 따서 장송별장.
향산사 안에 있는 2층 누각이 장송별장 향산사는 용문석굴의 맞은편에 위치해 있고, 북위시대인 516년 건립하기 시작했으 며, 원나라 말기에 소실되었다가 청나라 건 륭황제에 의해 다시 중건됨
-향산사의 대웅보전:
대웅보전 현판 위로 ‘불광보전’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부처의 빛’으로 세상을 비추다. 라는 뜻.
- 향산사 주변에 있으면 가끔 종소리가 나는데, 그것은 관광객이 4~5천원을 내고 치는 종소리. 대웅전 앞에서 향을 피울 수도 없고, 스님도 전혀 없다고 함 (중국인은 대체적으로 종교에 무관심한 편)
= 백거이 묘 (우측)
백거이(白居易)는 이백, 두보와 함께 당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를 장편 서사시로 발표한 <장한가(长恨歌)> 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그는 일생 동안 청빈하게 관직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문학은 시대상을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한 면모는 두보를, 애주가였던 모습에서 이백을 떠오르게 한다.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사회의 어두운 면을 예리하게 그려낸 그의 시는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백거이는 평소 이곳의 산수를 좋아하고, 말년에 불교에 심취하여 룽먼 석굴 가까이에 묻혔다. 석굴 관람한 후 마지막에 백거이의 묘소 백원(白园)에 들러 잠시 휴식을 취하기 좋다. 나무 그늘 아래 예쁜 정자와 찻집이 있다.
언덕에 오르면 측백나무에 둘러싸인 비석이 백거이의 묘소임을 알려 준다.
<백거이 참고자료>
백거이는 문학 창작을 삶의 보람으로 여겼다.
그가 지은 작품의 수는 대략 3,840편이라고 하는데, 문학 작가와 작품의 수가 크게 증가한 중당시대라 하더라도 이같이 많은 작품을 창작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더구나 그의 작품은 형식이 다양하여 시가에서부터 산문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학형식을 망라했다.
백거이는 문학으로써 정치이념을 표현하고 독자의 감정에 호소하여 실제 행동에 옮기도록 하는 것을 문학활동의 목적으로 삼았다.
백거이는 800년 29세 때 최연소로 진사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75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했 다.
자는 낙천(樂天),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 시호는 문(文). 허난 성[河南省] 신정 현[新鄭縣] 사람이다.
중당시대에는 과거제도가 효과를 거두어 그 시험에 통과한 진사 출신의 신관료집단이 진출하여 구문벌을 압도했는데, 백거이가 이 시기에 태어난 것은 그로서는 행운이었다. 백거이는 800년 29세 때 최연소로 진사에 급제했다.
이어서 서판발췌과(書判拔萃科)·재식겸무명어체용과(才識兼茂明於體用科)에 연속 합격했다. 그 재능을 인정받아 한림학사(翰林學士)·좌습유(左拾遺) 등의 좋은 직위에 발탁되었다.
〈신악부 新樂府〉·〈진중음 秦中吟〉 같은 풍유시와 〈한림제고 翰林制誥〉처럼 이상에 불타 정열을 쏟은 작품을 창작한 것도 이때이다.
808년 37세 되던 해에 부인 양씨(楊氏)와 결혼했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장편 시 〈장한가 長恨歌〉에는 부인에 대한 작자의 사랑이 잘 반영 되어 있다.
811년 모친상을 지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던 그는 814년 다시 장안(長安)으로 돌아왔으나, 태자좌찬 선대부(太子左贊善大夫)라는 한직밖에 얻지 못했다. 게다가 그 이듬해에 발생한 재상 무원형(武元衡) 암 살사건에 관하여 직언을 하다가 조정의 분노를 사 강주사마로 좌천되었다.
이 사건은 백거이가 관계에 입문한 이래 처음 겪은 좌절이었으며, 또한 그의 시심(詩心)을 '한적'·'감 상'으로 향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820년 헌종(憲宗)이 죽고 목종(穆宗)이 즉위하자 백거이는 낭중(郎 中)이 되어 중앙으로 복귀했고, 이어 중서사인(中書舍人)의 직책에 올라 조칙(詔勅) 제작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이같은 천자의 배려에 감격하여 국가의 이념을 천명하는 데 진력했다. 822년 이후 항저우자사[杭州刺史]·쑤저우자사[蘇州刺史]를 역임했다. 뤄양[洛陽]으로 돌아온 뒤에는 비서감(秘書監)·형부시랑(刑部侍郞)·하남윤(河南尹) 등의 고위직과 태 자빈객분사(太子賓客分司)·태자소부분사(太子少傅分司)와 같은 경로직(敬老職)을 거쳤으며, 842년 형부 상서(刑部尙書)를 끝으로 관직에서 은퇴했다.
한림학사 시절의 동료 5명은 모두 재상이 되었으나 백거이는 스스로 '어옹'(漁翁)이라 칭하며 만족해 했 다. 이같은 성실하고 신중한 태도로 인해 그는 정계의 격심한 당쟁에 휘말린 적이 없었다.
백거이는 문학 창작을 삶의 보람으로 여겼다. 그가 지은 작품의 수는 대략 3,840편이라고 하는데, 문학 작가와 작품의 수가 크게 증가한 중당시대라 하더라도 이같이 많은 작품을 창작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다.
더구나 그의 작품은 형식이 다양하여 고체시(古體詩)·금체시(今體詩:율시)·악부(樂府)·가행·부(賦) 의 시가에서부터, 지명(誌銘)·제문(祭文)·찬(贊)·기(記)·게(偈)·서(序)·제고(制誥)·조칙·주장 (奏狀)·책(策)·판(判)·서간(書簡)의 산문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학형식을 망라했다.
또한 그는 훌륭한 친구를 많이 사귀었는데, 친구들과 서로 주고 받은 시문에는 친애의 정이 물씬 배어 있다. 특히 원진(元稹) 및 유우석(劉禹錫)과의 사이에 오간 글을 모은 〈원백창화집 元白唱和集〉과 〈유백창화집 劉白唱和集〉은 중당시대의 문단을 화려하게 장식한 우정의 결실이라 일컬어진다.
그의 여러 작품 가운데에는 정치이념을 주장한 것도 있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것도 있는데, 모두 평담 한 언어로 알기 쉽게 표현되었으며, 시에 봉급의 액수까지 언급하는 등 매우 당당했다.
때문에 평이하고 속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비상한 노력과 식견에 의해서 달성된 것이었다. 그는 1편의 시가 완성될 때마다 노파에게 읽어주고 어려워하는 곳을 찾아 고치기까지 할 정도로 퇴고(推 敲)를 열심히 했다.
백거이가 자신의 시문에 일상어를 유효적절하게 구사한 것도 그의 표현을 간명하게 한 큰 이유 중의 하 나이다.
그가 일상어를 사용한 것은 구어문학(口語文學)을 추구했기 때문이 아니다. 문언(文言)의 전통을 이어받 으면서도 구어를 자신의 언어 속에서 활용하려 했을 따름이었다. 또한 그는 어휘를 매우 신중하게 선택 했다. 고금문학(古今文學)에 나타난 어휘를 천지(天地)·산천(山川)·인사(人事)·조수(鳥獸)·초목에 이르기까지 1,870개 부문으로 분류하여 〈백씨육첩 白氏六帖〉 30권을 펴냈다. 이 책을 통해 그가 어휘 를 선택하고 그 의미를 확인하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이백(李白)·두보(杜甫)·한유(韓愈) 등 백거이와 이름을 나란히 하는 시인의 작품에는 송대 이래 많은 주석서가 있는 데 반해, 〈백씨문집 白氏文集〉에는 그러한 주석서가 없는 것 또한 특기할 만하다. 종래의 주석서는 난해한 말에 관한 출전을 찾아내어 설명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나, 백거이의 작품에 는 이러한 주석서가 필요없었던 것이다.
백거이는 문학을 2가지의 차원에서 이해했다.
그는 초기에 왕자(王者)의 정치이념은 문학에 의해서 표현되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이 위정자를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생각은 이상에 불타던 젊은시절의 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신악부서 新樂府序〉에서 "글은 임금·신하·백성· 만물을 위해 짓는 것이지 글을 위해 짓는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글을 쓰는 사람은 본래 천하의 정치에 책임을 져야 하고, 그 작품은 백성의 뜻을 군주에게 전달함과 동시에 정치의 옳고 그름을 풍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시경 詩經〉이야말로 이같은 문학의 본질을 잘 나타낸 작품이며, 후세 특히 육조(六朝) 이후의 문학은 기교만을 중시한 나머지 본래의 이념을 상실했다고 비판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809년에 완성된 통렬한 풍유시 〈신악부〉 50편을 비롯하여 〈백씨문집〉에 수록된 100분야에 대한 '판'(判)과 75편의 '책'(策), 200편의 〈한림제고〉, 233편의 〈중서제고 中書制誥〉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백거이가 지은 '조'(詔)·'칙'(勅)·'제'(制)·'고'(誥) 등은 한림학사들에게 〈육전 六典〉보다도 더 존중받았다. 〈육전〉은 칙명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 당대 관계에서 최고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글을 짓는 궁극적인 목적은 천자 대신 천자의 세계관과 이념을 그에 걸맞는 전아(典雅)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이었고, 조·칙·제·고 등은 그 주요한 서술형식이었다.
칙명을 받아 그러한 글을 짓기 위해서는 정확한 식견과 웅장한 필치를 지녀야만 했다. 뛰어난 작가는 ' 대수필'(大手筆)이라 하여 커다란 영예를 부여받았는데, 백거이는 그중 한 사람이었다.
백거이는 문학으로써 정치이념을 표현하고 독자의 감정에 호소하여 실제 행동에 옮기도록 하는 것을 문 학활동의 목적으로 삼았다.
그러나 815년 강주사마로의 좌천과 목종의 죽음은 그에게 큰 좌절을 안겨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정치 문 학으로부터 탈피하여 인생의 문학을 추구하게 되었다.
장경(長慶) 4년(824) 목종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친구 원진에 의해 〈백씨장경집 白氏長慶集〉 50권 이 편찬되었다. 당시 백거이의 나이는 53세였으며 '장경'은 목종의 죽음과 동시에 새로이 바뀐 연호였 다.
따라서 〈백씨장경집〉은 죽은 천자의 후한 대접을 그리워함과 동시에 자신의 인생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835년 백거이는 60권본의 〈백씨문집〉을 강주 둥린 사[東林寺]에 봉납했고, 이듬해 65권본을 뤄양의 성선사(聖善寺)에, 3년 후 67권본을 쑤저우의 남선사(南禪寺)에 봉납했다.
842년 이전의 50권 이외에 '후집'(後集) 20권을 정리하고 이어서 845년 5권의 '속후집'(續後集)을 편찬 함으로써 합계 75권의 '대집'(大集)을 완성했다. 846년 8월, 75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했다.
■ 관림(관우 묘)
촉한의 장수이자 후일 신격화된 관우의 머리가 묻힌 무덤으로, ‘관림사’로도 불린다.
본래 관우 사후 그를 존경하던 조조가 그 수급에 향나무 몸체를 더하여 매장했던 무덤과 작은 사당만이 있었는데, 원나라를 거치며 삼국지가 널리 읽히게 되고 관우에 대한 신격화가 본격화되자 명나라 대인만력제 연간 (1592년) 현재와 같은 거대한 묘로 조성되었다.
관우의 몸은 당양의 관릉에 묻혀있다.
이곳도 문화대혁명의 광풍을 피해갈 수 없었는데, 당시 홍위병들이 무덤을 파묘하면서 관우의 관을 묘역 옆 나무에 묶어놓는 만행을 저질렀다.
다행히 이후에는 복원되었으며, 1980년대 낙양 고미술 박물관으로 활용되었다가.
명대 건축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점을 인정받아 2001년 AAAA급 전국 중점 문물보호단위 에 지정되었다.
매일 표값은 40위안 (학생은 20위안)이다. 그 외에도 관우가 죽은 날로 알려진 매달 3일이면 관림 앞에서 큰 장이 선다.
삼국지는 수호지,초한지와 더불어서 중국의 3대 역사 소설이다.
당나라가 망해갈 무렵, 황건적의 날으로 중국 전역이 시끄러운 시기에 이를 제압하기 위해서 소위 영웅 들이 튀어 나온다. 조정의 지시를 받고 나온 황보승 장군이 위기에 있을 때에 원병을 이끌고 온 ‘기도 위’가 바로 조조이다. 당나라에서 해임된 장군 노식 후임으로 임명된 장군이 바로 ‘동탁’이다.
황건적이 난이 일어났던 중평 원년(184년) 기준으로 볼 때에..
조조 30세, 유비 24세, 손견(손권의 아버지) 29세, 손권 3세, 제갈공명 4세
그중에 삼국지는 한국에서도 소설,만화,영화 등으로 재탄생했고, 그안에는 인생의 교훈이 많다. 삼국지는 실화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며, 흥미를 위주로 다양한 내용이 추가되었다.
관우는 오나라(손권) 군에 수장 여몽에게 패배하여 참수되었다. 손권은 유비의 복수를 두려워 하여 머리 를 조조에게 보냈으나, 관우의 얼굴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본 조조가 후하게 장례를 치러주었다. 관우의 머리만 묻은 곳이 바로 위 사진. ‘관림’이다.
관우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모든 과정으로 인하여 촉나라가 망해가고 장비, 유비 역시 그 속에서 묻히게 된다. 그렇게 해서 오나라-촉나라는 망하고 위나라가 최종승리하게 되는데...
조조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최종 승리자는 인내의 달인 사마중달(사마의) 후손이다.
■ 고묘박물관(낙양 북쪽 10리 북망산 위치)
고묘박물관은 낙양시 북쪽교외 망산총(邙山塚)에 위치하고 있는 중국 유일의 고묘박물관으로 전체면적 3만㎡에 건축면적만 7600㎡를 차지하고 있다. 관내에는 다량의 옛 생활기구와 장식품 등 부장품과 서한, 위진시기의 토용 그리고 당대의 당삼채 등을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은 크게 지하와 지상 두부분으로 나눠져 지상에는 한대 백옥으로 만든 망루와 서막대전(序幕大 殿), 도서자료실, 전시실, 사각루(四角樓), 망경정(望景亭)등이 있으며, 지하에는 박물관의 핵심으로 서 한부터 북송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의 문화를 반영한 전형적 형태의 웅대한 고묘 25개가 자리잡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벽화묘군이 가장 유명하다.
낙양의 한묘(漢墓)벽화 역사는 매우 오래되어 현재 모두 10개의 고벽화묘가 참관할 수 있는데, 서한의 " 타귀도(打鬼圖)" 벽화묘, 서한귀족 복천추(卜千秋) 벽화묘, 동한의 출행도(出行圖) 벽화묘 등이 그것이 다.
고묘박물관은 북위 선무제릉 옆에 세워진 박물관이며.. 과거에는 이곳이 왕, 귀족들의 무덤군이 있었다고 함. 이 일대가 망산(성주풀이 가사에 나오는 북망산)
= 지하 박물관
우측으로 복도같은 출입문이 보인다. 지금 이 구역은 위진남북조 시대의 왕족, 귀족들의 무덤이 약 10기 정도.. 복도의 양쪽으로 묘소들이 있다. 고묘박물관의 고묘는 너무 많다. 약 50-60기 정도의 고묘들이 여러 구역의 복도를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고묘들은 시대와 신분에 따라 묘의 크 기와 구조, 벽면의 화려함, 문양, 입구문의 조각, 천장의 벽화, 관의 크기와 묘실의 부장품 등이 모두 다르다. 3천년 전의 벽화가 살아있는 듯한 어느 귀족부인의 묘도 있다.
산재해 있던 북망산의 주요 릉들은 도굴과 파손을 방지하기 위해 현재 고묘박물관으로 보관되고 있다. 광무제, 횸누제(북위), 위문제, 조비, 백거이, 관우, 여불위, 반초 등 춘추전국시대에 왕족과 귀족들이 이곳 복망산에 묻히기를 원했다.
고묘박물관에 다양한 무덤 양식, 벽화, 천정, 묘실 등등의 형태를 구경할 수 있다. 1986년 뤄양시 관부 호당러촌 북부에서 30기 이상의 한릉이 발견.
무덤의 종류에는 토굴묘, 벽돌묘, 돌무덤(1호, M2, M24, M27, M34)등이 있다.
5개의 석림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재료를 사용하는 동굴무덤으로 방, 흙굴무덤, 석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보물은 띠모양의 ㅌ석판, 사각형의 석실이다. 묘실은 직사각형이고 윗면은 편평하다.
펜문과 패널에는 사람의 발, 용, 범, 거인, 옥벽, 작은 인물 등이 새겨져 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이 무덤들은 서한 말기에 축조된 것.
동한 시기(후한. A.D 25-220) 어느 왕족의 무덤에는 그가 생전의 가족들과 나들이 가는 벽화가 발굴되어 고묘 박물관의 대표 묘실이 되었다.
1984년 뤄양시 엔스시 싱위안촌에서 발굴된 이 무덤은 통로, 무덤 문, 앞 복도, 앞 홀, 뒤 복도, 뒷방 6개로 구성되었다.
무덤은 도굴되었고 소량의 도자기, 동전만 남았다. 이 무덤의 가치는 벽화에 있다.
길이 12m 너비 0.6m. 이 벽화가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외벽이 있었고, 벽화 위에 부엌이 있어서 양쪽 으로 자연히 이 벽화가 감추어져 었었다.
이러한 보존 방법은 극히 드물다. 매장된 동전으로 시대가 동한 말기의 무덤이다.
때로는 부부가 나란히 안장된 곳도 있다. 1994년 신안현 송춘마을에서 발견된 북송시대(960-1127)의 벽돌무덤.
이 무덤이 보물로 지정된 이유는 묘실의 특이한 구조 때문.
나무 모양의 벽돌 조각은 섬세하고, 무덤의 노부부가 함께한 조각은 대단히 반갑습니다.
모서리의 편백나무는 팔각형 구조로 무덤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전통 축조 기법으로는 아주 특이한 모양의 무덤
그 당시 이런 무덤 시설을 할 정도라면.. 그 사람의 신분이 왕족, 귀족, 벼락부자 정도로 예상할 수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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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양릉(한경제 양릉), 지하박물관
한양릉은 서안시의 동북쪽 외곽에 위치해 있고, 중국 서안 여행의 마지막 코스 한양릉은 센양의 서안 신공항을 건설하면서 (도로를 내던중에) 우연히 발견하게 됨
서안 일대에 산재한 황제들의 무덤 중에서 유일하게 발굴된 ‘중국 최대의 지하 박물관’
(우측 사진)
토우의 팔이 없는 이유는 원래부터 팔은 나무로 만들다보니 세월이 흘러서 사라진 것.
원래는 비단옷도 입힌 상태라고 하는데, 비단도 썩어서 현재 남은 것은 우측이 전부
진시황릉 병마용갱과는 달리, 근거리 발밑으로 자세히 볼 수 있어서 관람객들에게 재미가 있음 한양릉은 한나라 제6대 황제 경제와 황후 동영의 합장릉.
진시황릉 규모가 지나치게 커서 국고 탕진에 대한 교훈이 되어서 그런지? 진시황릉 규모의 30% 수준이며, 5만여점이 매장되어 있다.
한양릉에는 총81개의 부장갱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까지 발굴된 것은 10개라고 함.
능원 면적이 20제곱킬로미터나 되어 꼼꼼하게 둘러 보려면 3~4시간이 필요
병마용갱은 사람이 많아서 정신이 없지만, 한양릉 박물관은 사람이 적어서 비교적 조용한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