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창제를 둘러싼 논란은 지금도 가끔 불거진다. 불교계 일각에서는 신미대사(信眉)의 역할을 주장하고, 영화 「나랏말싸미」(2019)는 그 주장에 살을 붙여 스크린에 올렸다.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사료 앞에서는 이 흥미로운 이야기가 조용히 무너진다.
세종실록 1450년 음력 4월 6일자 기사가 핵심이다.
"세종대왕께서 병인년(1446)부터 비로소 신미의 이름을 들었고, 금년(1450)에는 효령대군의 사제로 옮겨 거처해 정근할 때 불러 보시고 우대한 것은 경들이 아는 바이다."
신미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이 1446년, 실제로 대면한 것은 1450년이다. 훈민정음 28자 창제는 그보다 7년 앞선 1443년 음력 12월의 일이다.
공조판서 김수온이 세조의 명으로 1464년에 쓴 복천사기(拭疣集 권2 복천사기)도 같은 사실을 적는다. 세종이 신미를 산으로부터 불러들여 처음 대화를 나눈 해가 경오(庚午, 1450)년이며, 세종은 그 첫 만남으로부터 49일 후 승하했다. 병중의 노왕이 생의 마지막에 만난 승려가 신미였을 뿐이다. 훈민정음 창제와는 시간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겹치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과 복천사기, 서로 다른 출처가 같은 연도를 가리킨다는 사실은 결정적이다.
신미 합작설의 또 다른 근거로 거론되던 「원각선종석보」 역시 위작으로 판정됐다. 진본은 없고 복사본만 존재하며, 2016년 종이의 연대 자체가 현대로 판정됐다. 어법과 제본 방식도 현대식으로 확인됐고, 세조 5년(1459)에 간행된 월인석보의 내용을 짜깁기한 것임도 드러났다. 훈민정음 반포(1446) 이후에 만들어진 문헌을 반포 이전의 근거로 쓴 셈이다.
세종 재위 32년간 수십 종의 책이 나왔다. 농사직설·향약집성방·칠정산·삼강행실도…… 모두 신하들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것들이다. 그런데 훈민정음 하나만 다르다. '어제(御製)', 임금이 직접 지었다는 표현이 붙은 것은 세종 시대 수십 종의 편찬물 중 훈민정음이 유일하다. 언해본은 이 단어를 "임금 지으신 글"이라고 직접 풀었다. 실록 기사도 "임금이 친히 지었다(上親制)"고 적었다. 다른 편찬물에는 이 표현이 없다. 이 하나의 사실이, 모든 논쟁에 대한 가장 간명한 답이다.
세종실록은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다(是月上親制諺文二十八字)"고 기록한다. 해례본 서문 역시 "어제(御製)"로 시작한다. 어제는 왕이 직접 짓거나 만든 경우에만 쓰는 표현이다. 집현전 학사들이 해례본 집필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28자 자체의 설계는 세종 단독의 작업이라는 것이 현재 국어학계의 통설이다.
또한 최만리 등 7인이 상소를 올렸을 때 세종의 반박은 짧고 직접적이었다. "네가 운서를 아느냐. 사성칠음에 자모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바로잡을 것이냐." 음운론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말이다. 훈민정음이 세종의 단독 창제라는 가장 강력한 방증은 바로 이 발언에 있다. 집현전 학자들이 모르는 것을 세종은 알고 있었다.
한글이라는 문자를 들여다보면 오히려 이 통설이 자연스럽다.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 자음을 설계하고, 천지인(天地人)의 원리로 모음 체계를 구성하고, 초성·중성·종성으로 음절을 분석한 이 체계는 단일한 철학적 의도 없이는 나오지 않는다. 여러 사람이 타협하며 만든 결과물에서는 이런 수준의 내부 정합성이 나오기 어렵다.
세종이 한글을 만든 것과 세상에 퍼뜨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창제 자체는 비밀 속에 이루어졌고, 1444년 음력 2월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가 반대 상소를 올렸을 때 조정의 분위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최만리는 중국 한자를 버리는 일은 문명 세계에서 스스로 이탈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세종은 이들을 하루 투옥했다가 석방했다. 강하게 맞섰지만 짓누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전략을 바꿨다.
반대의 심리적 뿌리를 이해하는 것이 출발점이었다. 사대부들이 한자를 고집하는 이유는 중화 세계와의 접속 능력이었다. 그렇다면 한글이 그 접속을 더 정밀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된다. 1447년 완성해 이듬해 반포한 동국정운(東國正韻)이 그 도구였다.
동국정운은 당시 혼란스러운 우리나라 한자음을 통일·표준화하기 위해 한글로 한자음을 표기한 운서다. 청각으로만 전달되던 발음을 눈으로 확인 가능한 기호로 고정시킨 것이다. 한글이 단순히 백성들의 언문이 아니라, 고급 학문을 위한 정밀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사대부들에게 보여주는 시도였다. 다만 동국정운식 한자음은 실제 통용 발음과 지나치게 달랐고, 결국 16세기 이후 쓰이지 않게 됐다는 점은 함께 기억해야 한다.
백성 쪽은 결이 달랐다. 그리고 여기서 고려의 유산이라는 문제가 등장한다.
조선은 1392년에 세워졌지만, 그 전에 불교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약 1천 년에 걸쳐 한반도 사람들의 정신과 일상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국가가 유교로 교체됐다고 해서 천 년의 신앙이 50년 만에 바뀌는 것은 아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든 1443년에도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절이 있었고 부처가 있었다.
태종이 대대적인 억불 정책을 폈음에도 세종이 불교에 우호적이었다는 것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궁궐 안에 내불당(內佛堂)을 세우려다 신료들의 강한 반발을 샀을 때, 세종은 물러서지 않고 강행했다. 지배 이념과 백성의 현실 사이에 세종은 무엇이 놓여 있는지 알고 있었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은 그 앎에서 나왔다. 1446년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수양대군에게 명해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한글로 정리한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편찬하게 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447년, 세종은 그 내용을 바탕으로 석가모니의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를 500여 수 직접 지었다. 이것이 월인천강지곡이다. 아내의 명복을 빌기 위한 개인적 신앙과, 한글을 백성 속에 심으려는 정책적 의도가 한 지점에서 맞물렸다.
한자를 모르고 불경 원문을 읽을 수 없는 백성들이 이제 한글로 된 찬불가를 배워 부를 수 있게 됐다. 불교는 새 왕조의 정책과 충돌했지만, 세종은 그 충돌을 억누르는 대신 백성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한글을 얹었다.
사대부에게는 한자음 표기의 유용성을 보여주고, 백성에게는 부처님 노래를 한글로 부를 수 있게 했다. 서로 다른 욕망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문자 하나로 공략한 것이다.
신미대사의 역할로 돌아가면, 그는 훈민정음 반포 이후 불경 언해 작업에 기여한 것이 사실일 것이다. 한문 불경을 한글로 옮기는 일에 산스크리트어와 불교 교리에 정통한 승려의 역할이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28자를 설계한 것은 세종이다. 사료는 그 사실을 여러 경로에서 일관되게 가리킨다.
세종은 1443년에 문자를 혼자 만들었고, 당대의 욕망 구조를 정확하게 읽어 그것을 퍼뜨렸다. 반대를 억압으로 누르지 않고, 반대하는 쪽의 동기를 파악해 새로운 것과 접점을 만들었다. 그리고 천 년 불교의 뿌리를 정치적 장애물이 아니라 보급의 통로로 삼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