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었다
(최금진)
새롭게 출발하고 싶어, 당신은 벽과 장롱과 아이를 구겨 넣으며 중얼거렸다
작은 바퀴가 달린 캐리어는 참 많은 걸 운반했었다, 달력, 바다, 눈물, 바람
나는 깨진 거울을 밀어내며 손가락은 서너 개 썰었다
죽자는 말 하지 마, 캐리어의 지퍼들이 이빨은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유서 같은 거, 생활 앞에서 얼마나 유치했던가, 들통날 수 있는 게 아직도
남았다면 그건 절망이 아니다, 당신은 화분에서 치자나무를 뽑아
뚝뚝 분질러 캐리어 안에 넣었다, 시계는 두고 갈게, 여기 저장된 시간만큼
원한다면 언제든 분노를 꺼내어 봐도 돼, 캐리어 손잡이에
기르던 애완견의 목줄을 걸면서, 다신 시 같은 거 쓰지 마, 돈도 벌지 말고
내 몸에서 녹슨 볼트와 너트가 우수수 떨어졌다
무엇이든 우릴 데려다 주겠지, 숨이 막혀서
아이가 울었다, 닥쳐, 캐리어의 수납공간마다 들어찬 옷들이 귀를 틀어막았다
존엄성이 지켜지는 연애란 없어, 갈아 끼우지 못한
형광등이 눈도 깜박이지 않고, 이 집은 빛도 한 줌 들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다
화엄사 지붕 아래서 비를 맞고 있을 내 이름이 새겨진 기왓장과
섬진강에 들소 떼처럼 빠져 죽은 바위들이 생각났다
나는 들고 있던 과도를 떨어뜨렸다, 아이를 버리진 말아 줘
문 밖에 세워진 캐리어들이 부릉거리는 소리에 커튼이 치를 떨었다
종일 실어 나른대도 가방 하나에 다 들어갈 수 있는 사연이 있을까
당신의 등에 붙은 익명의 수화물표를 보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가
캐리어가 덜덜덜 떨며 당신 손에 끌려 나갔다, 꼬깃꼬깃해진 아이 몸이
창밖 허공에 펼쳐질 때, 나는 어이없게도 오늘 먹을 저녁을 생각했다
당신이 있었다, 내가 있었다, 발이 없었다, 새가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최금진: 2001년《창작과비평》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