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룟유다만 예수를 팔아 먹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조차 아직 진리의 성령이
오시지 않았을 때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들이려고 발을 씻어준다고
했음에도 극구 사양하기도 하고, 발을 씻어주시는 영문도 모르고 내 손도, 머리도
씻어주옵소서 덤벙댔습니다. 그때까지 베드로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들일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날에 성령님이 이 땅에 오신 이후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도다”(행2:36)고 말합니다. 그때 비로소 베드로는
예수님을 구주로 사들이는 겁니다. 그로인해 그는 사람들 앞에서 “내가 너희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보다 옳으냐, 너희들 스스로 판단하라”(행4:19)고 외칩니다.
다시 말하면 목숨을 걸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와 그리스도로 사들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의 발을 씻어 줄 때 그때는 아직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내가 죽는데 이르러도 목숨을 걸고 주님을 따르겠습니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아니다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하신 겁니다(요13:37-38)
그래서 요한복음 13장하면 사고팔고인데 주님은 우리를 사시고
우리는 주님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접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보낸 자는 예수님을 사들이는 자로서 사실은 예수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진짜 팔려고 하는 겁니다. 공짜로 값없이 팔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영접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들이는 것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발 씻음 곧 소위 세족식이라는 의식의 참된 의미입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바로 서로 발을 씻어주라, 서로 용납하라,
서로 영접하라는 이 말인 겁니다. 바로 이웃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아직 자기 사랑이었습니다. 그의 자기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베드로 한번 보세요.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13:37)” ‘내가’ 어떻게 따르지 못합니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습니다. 이건 바로 자기의 것으로 주를 사랑하는 겁니다.
반면에 현대교회의 모습은 가룟유다 같은 요소가 상당히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자기의 것으로, 자기화 시키려고 노력하지
아니하고,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유익으로 팔아넘기려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가룟유다를 소환해서 왜 그렇게 했느냐고 청문회를 한다면,
인간적으로 충분히 그럴 수밖에 없이 납득이 갈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만 가룟유다가 죄인일 뿐 실제적으로는 가룟유다의 말을 들어보면 일리가 있어요.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를 보면 가룟유다의 항변이 인간적으로는 일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다니면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렇게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왜 아깝게 죽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너무 억울해서 팔아먹어버렸다는 거죠. 이것이 인간적으로는 맞지만,
성경적이며 영적으로는 그것이 사단의 앞잡이가 되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의 상황을 인간적인 관점으로 보면 가룟유다를 이해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들의 삶에 유익이 되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좀 팔아먹는 게 무슨 잘못이냐고 할 것입니다. 자본주의 체제가 바로 사고팔고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전체가 사고팔고 아닌가요?
품을 팔아서 돈을 사고, 돈을 팔아서 쌀을 사먹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람이
사고팔고 하는 것은 아무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왜 진리를 사고서
팔아먹느냐고 책망하십니다. 진리는 반드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팔아먹으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사역에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사역은 그 사역을 통해서 그 자체가 우리에게 유익이 되어야 합니다.
목회나 선교활동을 통해서 그 사역을 팔아먹고 내게 유익을 챙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역을 통해서 내 존재에 유익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영적으로 살이 붙어가야 합니다.
실제로 주의 종들이 오랫동안 공들여서 세워놓은 탑을 하나님이 왜 허물어 버릴까요?
하나님은 그 공이 든 높은 탑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공든 탑을 세울 수 있는
실력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의 종들이 열심히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왕창 헐어버리는 겁니다. 헐어버리고 다시 세우도록 하는 거죠.
우리 인간은 늘 사고 판 그것에 대한 업적이 기억 되어 있습니다. 근데 이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업적은 우리 안에 영원히 남아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업적의 공력입니다. 오늘 날 이 구원의 날의 복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현대교회가 가룟유다를 실컷 욕하면서 자기도 가룟유다를 뒤 따라
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풍조를 따르다 보면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어제 한 목사님이 제 아침 글을 읽고 보내 주신 글이 공감이 되어 함께 공유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로마에 가서 제도가 되었고, 유럽에 가서 문화가 되었고,
미국에 가서 기업이 되었고 한국에 와서 대기업이 되었다‘(마이클 모어) 저는 공감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당시의 베드로처럼 자기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계3장의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기 사랑의 교회입니다(라오스디케아)
자기들의 뜻대로 백성을 다스리는 겁니다. 지금 천주교가 뭔가요?
베드로 전ㆍ후서의 베드로의 거듭나서 주님을 간증하고 고백하고 찬양하는
그 베드로의 전승을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하는 그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 바로 천주교입니다.
어쩌면 변화된 베드로에게 사도시여 천주교의 제1대 교황이 되어주소서 하면,
그는 두 손을 크게 흔들고 최대한으로 멀리 도망을 가버렸을 겁니다.
그리고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나는 교황하려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야.
내가 주를 위하여 내가 따르겠습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겠습니다 하다가
납작코가 된 사람이야.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이야. 오직 주님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거야. 이 사람들아 나는 절대로 교황이 아니야 할 겁니다.
그렇지만 계3장의 빌라델비아 교회는 형제 사랑의 교회요, 서로 문이 열린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열려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처럼 바코드를
문에다 들이대야 출입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 간다면 그건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처음 사람이 오면 이 사람이 뭐하다가 여기 온 사람이냐 이렇게 보지 말고
교회가 좀 열려 있기를 바랍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닫힌 문 교회로서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밖에 세워 둡니다. 문을 열어주지를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음성만 항상 듣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주님 언제나 거기 계실거지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거기 계실거지요. 거기서 우리를 잘 지켜 주세요. 이러는 겁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요13장의 영접이란 문제를 꼭 깊이 생각하셔야 됩니다.
그래야만 주님이 말씀 하시기를 “내가 새 계명을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하는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이제 새 계명이 무엇인지 새 언약이 무엇인지 우리는 이해를 해야 합니다.
새 언약이 제대로 전파되지 않으니 어느 쪽에서는 계시록을 새 언약이라 우기는
웃지도 못할 진풍경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건 이단도 아니라 그냥 쓰레기일 뿐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다 팔아서 우리를 사시고 우리를 영접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을 그 이름 그대로 몽땅 영접해야만 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새 계명이라는 겁니다. 이 새 계명을 우리에게 주셔서 너희도
사랑하라는 겁니다. 주님이 우리를 영접해 주시고,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는
이 새 계명 없이 서로 사랑하려고 하는 것만큼 답답한 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과 생명 없이 사랑하는 것 이것만큼 어려운 일이 세상에 없습니다.
교회에 가면 쑥스럽게 사람보고 “주안에서 사랑합니다” 인사를 시킵니다.
마음에 없는 거짓말을 연습하니까 교인들의 얼굴에 주름이 푹 파이잖아요.
하얀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하며 거짓 웃음을 지으니까 입가에 주름이 파이는 겁니다.
장사를 오래한 사람치고 입가에 주름이 푹 파이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손님이 오면 무조건 “어서 오세요” 아이가 와도 “어서 오세요”
100 원짜리가 와도 “어서 오세요” 하다 보니까 파여 가는 것입니다.
어쩌면 권사 생활 오래하다가 보면 입가에 주름이 푹 파일 지도 모릅니다.
미워도 얄미워도 골치 덩어리가 와도 “어, 김 집사 왔어. 나는 김 집사가 너무 좋아.”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입가가 푹 파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얀 거짓말의 계급장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없어서 사람들이 그러고 있는가?
바로 새 계명을 갖지 않고 사랑해 보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서로 사고팔고 하는 영접함 없이, 이 새 계명 없이 서로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자기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입가에 주름이 푹 파인 얼굴입니다.
그것을 성경을 통해 지적하고 싶은 것입니다. 요16장에서 말씀드리겠지만,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 오순절 이후에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신 후에 해산의 수고를 통해 본성이 교체되고 난 이후부터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때 다시 요13장을 뒤돌아보기로 하십시다. 할렐루야!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
할렐루야 주께 찬양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