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아빠 우리아빠
8월의 어느 일요일, 딸에게 늦은 아침을 챙겨주고 있는데 평화를 무심히 깨는 전화 벨소리. “미선아 아빠가 목욕하다가 넘어졌는데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지선이도 전화를 안 받고.” “알았어 갈께 기다려.” 전화를 끊고도 바로 출발하지 않았다. 깨어진 평화를 애써 이어붙이려는 듯 나는 딸아이의 아침 시중을 마저 들었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앞만 바라보았다. 하늘은 마치 가을 하늘처럼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하늘색을 띄고 있었다. 친정에 도착해서 현관문을 열고 눈에 들어온 광경은 처참했다. 아빠는 아무 옷도 걸치지 않은 채 다리를 변기위에 올려 놓고 목욕탕 바닥에 누워 있었고, 엄마는 옆에서 낙심한 채 그냥 서 계셨다. 나는 무심한 얼굴로 아빠한테 다가가서 어디 다친데 없냐고 묻고 두 팔로 내 목을 감싸라고 했다. 뼈밖에 안 남은 앙상한 몸이지만 꽤 무거웠다. 아빠를 목욕의자에 앉히고 엄마가 건네주는 아빠의 옷을 하나씩 입히면서 외면했던 아빠 얼굴을 보았다. 부끄러움이나 수치심 같은 것은 없는 그렇다고 미안해하는 얼굴도 아닌 얼굴에서 나는 아무 감정도 읽어내지 못했다. 무척이나 낯설었다.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난 뒤에 동생과 제부가 도착했다. 그제서야 엄마는 푸념하듯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원래는 간병인이 오는 평일에 목욕을 하는데 오늘 유난히 아빠가 목욕을 하겠다고 고집을 피워 목욕을 하다가 미끄러졌고 엄마 혼자서 이렇게 저렇게 용을 쓰다가 안되어 어쩔 수 없이 자식들한테 전화를 했다는 것이었다.
작년 4월에 81세이던 아빠에게 뇌경색이 왔다. 그날 동생이 같이 있었는데 말투와 행동이 어눌해 보여 병원에 가자고 얘기했는데 그 특유의 경상도 똥고집으로 괜찮다고 안간다고 하신 후, 다음날 엄마에게 병원에 가자고 하더란다. 병명은 뇌경색, 흔히 말하는 골든타임을 놓쳤고, 그 후로 2번의 뇌경색이 더 왔다. 그러는 사이 아빠의 상태는 점점 나빠져 혼자서는 거동이 힘들어졌고, 그때부터 1년여가 넘는 기간동안 지난한 병원생활이 시작되었다. 엄마는 병원의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자고 식사도 부실하게 해결하며 아빠의 병간호를 했다. 간병인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엄마 역시 70대 후반의 노인으로 1년여의 병원생활은 엄마를 눈에 띄게 노쇠하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재활병원은 3개월까지만 입원할 수 있어서 더 이상 근처병원을 찾을 수 없었고 엄마는 집에서 간병하겠노라고 선언한 후 집에 온지 한달 여가 지났다.
아빠에게 뇌경색이 처음 발병했을 때만 해도 가족들 모두 의지가 충만했다. 재활운동을 열심히 하면 완벽하지는 않아도 지팡이로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매주 병원에 가서 아빠를 응원하고 격려했다. 병원비도 형제들끼리 매달 조금씩 모은 곗돈으로 충당하면서 서로 격려했다. 그러나 그 후에 2번의 뇌경색이 더 오고 의사도 이런 경우는 흔치 않다고 했다. 그 와중에 아빠가 코로나에 걸려 일주일동안 집에 와 계시면서 상태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이것저것 서류를 구비하고 신청하는 행정업무는 70대 노인이 하기에는 알아듣기 어려웠고, 자식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서로에게 떠 넘기고 있었다. 간병인 알아보는 일도 번거로웠고 게다가 사설 간병업체에서는 몇 주간의 간단한 교육만 받으면 받을 수 있는 자격증을 획득한 60대 이상의 연변출신의 여성분이 대다수다.
노령인구가 급격히 상승하고 있는 대한민국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간병시장과 비용을 철저히 민간과 개인에게 전가하고 있다.
아빠의 지지부진한 상태, 주변인에게 내는 짜증, 재활의지 저하는 남은 가족들도 지치게 만들었다. 일면, 아빠의 행동이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었다. 운동을 하고 싶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얘기하는데 목소리가 제대로 안 나와 상대방이 못 알아들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긴 병에 효자없다’ 라는 말에 기대어 우리는 우리를 옥죄던 자식의 의무를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아빠는, 추석이 지난 후 요양원에 들어가기로 했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