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일차(2005.10.17.)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여행은 항상 기대감에 부푼다. 거기다 평소 가보고 싶었던 곳, 갈망하던 곳을 찾아 떠남의 기쁨은 새벽밥을 차려주는 집사람에게 미안함을 넘어선 환희요 희열이다. 잔잔한 어둠에 싸인 다섯 시 반에 집을 나서 남해고속도로를 질주해 섬진강을 넘어서니 아침이 밝아오고 당진에 도착하니 참 때는 된 듯 하다. 강진군청 옆의 시인 영랑의 생가를 들렀다.
아름다운 시어를 토해내던 시인은 세월의 흐름에 무심히 귀천을 하였지만 우리에게 남긴 아름다운 향기와 여운은 영원할 것이리라. 고요한 가을날 시인이 머물고 거닐었을 그 자리에 서서 아름다운 삶을 반추하며 시공을 초월하여 교감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특히 관리소장님의 상세한 안내와 친절은 나그네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 주기에 충분했다.
영랑 생가를 떠나 다음으로 찾은 곳이 다산 초당. 이곳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너무 유명한 곳으로 다산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며 목민심서를 비롯한 500여권 명저의 산실이다. 한낮임에도 어스름 같은 나무그늘사이로 살며시 고개를 내미는 햇살이 오탁악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지표를 제시했던 智人의 모습으로 다가선 선생을 대하는 듯 반갑기 그지없다. 다만 유물복원의 원칙이 원형복원이 기본원칙일진데 관리의 번거로움을 핑계로 와당으로 복원하여 소박한 초당의 유배생활을 맘으로 느껴야 하니 참으로 안타깝다.
다산초당을 뒤로하고 해남 땅에 들어서 처음으로 찾은 곳이 두륜산 대흥사. 고즈넉한 명찰의 고목에 내리는 가을빛이 고와 전각들을 휘적휘적 둘러보며 참배를 하고 두륜산의 원경을 살피니 참으로 아름답다. 낙산사의 화재에 놀란 탓인지 빨간 소방차가 3대나 있다. 유비무환을 누구나 알면서도 나라의 보물을 잃고서 얻은 소중한 경험이리라. 해남 땅을 밟았으니 조선조의 유명한 문신이요 오어가로 유명한 시조시인 고산의 녹우당을 어찌 둘러보지 않고 발길을 돌리랴. 마을 초입에 들어서니 영랑생가와 마찬가지로 노란 잎으로 치장한 은행 노목이 버티고 서있다. 사진으로만 보아온 곳이지만 막상 찾아오니 아늑한 뒷산과 앞으로 보이는 넓은 들판이 참으로 풍요로운 곳이다. 동구 초입엔 향기를 취하려는지 들국화 따는 아낙들의 손길만 바쁜데 혼자 찾은 나그네에게 녹우당의 고요는 혼자 즐기기 아깝다. 바쁜 일상을 살아가다보니 내게 주어진 고요와 여유가 오히려 부담이다. 왔던 길 돌고 묻고 물어서 찾아간 곳이 갈두산 사자봉……. 우리나라 육지 땅 마지막 봉우리에 서다. 기념관을 둘러보고 산뜻하게 새로 꾸민 나무계단을 내려가니 땅끝 탑이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육지의 끝에서 바라보는 바다풍경이 아름답다. 오늘의 일정은 계획대로 소화를 했으니 내일을 위해서 해거름이지만 담양으로 가서 숙박을 해야지 싶어 담양으로 방향을 정해 가면서도 천불천탑으로 유명한 화순의 운주사를 돌아보지 못함이 참으로 안타깝다. 지도를 보며 찾아간 담양 땅엔 어둠이 내리고 죽록원 위치를 확인하고 잠자리를 찾으니 보이질 않는다. 할 수 없이 담양군청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퇴근길의 젊은 친구에게 물으니 민원실의 박근주님. 상황을 설명하니 내일의 일정을 위해서 소쇄원 근처가 좋겠다며 비상등을 켜고 선도를 해주니 참으로 고맙다. 낮선 객에게도 이럴진데 본연의 업무로 만나는 군민들에게 얼마나 선한 모습으로 비치랴. 소쇄원 입구에서 저녁을 먹고 주인집에 민박으로 여행의 첫날밤을 맞다.
□ 제2일차(2005.10.18.)
낮선 잠자리 탓인지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 여섯시에 일어나 걸어서 찾아간 곳이 살포시 내려앉은 안개가 아름다운 소쇄원. 자연과 인공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조선중기 원림의 대표 격인 소쇄원은 양산보가 스승 조광조의 죽음을 보고 출사를 포기하고 가꾼 정원이다. 이곳에선 많은 학자들이 모여 문학과 학문을 토론한 이 땅 선비정신의 산실이기도 하다. 제월당과 광풍각 옥류문을 둘러보며 선인들의 풍류를 느껴보려고 하지만 아둔한 나그네에겐 아름다운 풍광만이 눈에 가득 들어올 뿐이다. 소쇄원을 둘러보고 걸어서 지근거리에 있는 가사문학관을 가면서 송강 정철이 걸었다는 마을길을 걸으며 여유로움을 만끽했다. 마을 안길은 시멘트로 포장을 한 탓에 어색했지만 길가의 느티나무 고목만은 그 자리에 서서 송강이나 나그네를 한결같이 맞고 있어서 참으로 포근하게 느껴졌다.
이른 시간이라 기다릴 수 없어서 가사문학관의 겉모습만 보고 식영정을 향하는 발걸음엔 아쉬움이 가득하다. 현대적 건물에 아름다운 토담을 두른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담양은 정자문화가 발달한 지역이다. 두루 산재한 정자들을 다 둘러보고 갈수는 없으니 가까운 곳이나 길목의 정자들은 둘러보고 싶은 생각에 식영정과 송강정을 둘러보며 이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하며 풍류를 즐겼던 선인들이 마냥 부럽기만 하다. 송강정을 둘러보고 담양에 오면 누구나 들러 간다는 죽록원을 찾았다. 자연친화적인 개발을 목표로 담양군청에서 조성하여 최대한 자연의 모습 그대로를 살리려고 한다는 담양군청 문화레저관광과 이면형계장님의 설명에 지역적 특성을 잘 살리면 궂이 환경을 훼손하지 않고도 명물관광지로 개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기관장 개인의 판단이 후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까지 고려하여 개발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말에 “눈 덮인 들을 가도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걷는 발자국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지니…….”라 하신 서산대사님의 시가 스쳐 지나간다.
죽록원을 구경하고 메타스퀘어 가로수가 심어진 도로변에서 사진 몇 장을 찍고 있는데 낮선 번호의 전화가 와서 받아보니 어제 길을 안내해줬던 담양군청의 박근주님이다. 군청에 잠시 들렀다 가라기에 민원실에 들렀더니 그 바쁜 와중에도 관광 지도를 꺼내서는 상세히 설명해 주니 얼마나 고맙든지……. 민을 대함에 표상으로 삼을만하여 정말 감명을 받았다. 담양을 둘러보고 장성의 고불총림 백양사를 찾았다. 단풍이 들었으면 천하절경이련만 아직은 푸르름 그대로이니 아쉬움이 남는다. 해질녘의 산사는 항상 맘이 포근하다. 거기다 평소 존경하던 서옹스님의 거처였으니 어찌 감회가 남다르지 않으랴. 서옹스님은 간곳없고 범종각의 현판만이 평소 꼬장꼬장할 정도의 원칙주의자였던 스님의 기품을 보는듯하여 남들이 스쳐 지나가는 종각아래서 멍하니 올려다보기만 하였다. 백양사의 산문을 나서니 어느덧 해는 서산을 향해 기울고 있다. 열심히 달려 산마루에 이르니 전라북도 고창군이란 표지판이다. 드디어 전남을 둘러보고 전북으로 향한다는 생각을 하니 혼자만의 여행에 따른 외로움도 잠시 잊을 수 있다.
□ 제3일차 (2005.10.19.)
고창에서 처음으로 찾은 곳은 세계문화유적으로 지정된 고인돌 군이었다. 야산에 넓게 분포한 고인돌과 재현해 놓은 움막집을 둘러보고 주변을 살펴보니 앞은 온통 넓은 들판이고, 따스한 가을 햇살이 곱다. 역사 이전에도 사람이 살아가기에 가장 적합한 지형이었기에 이곳에 터를 잡지 않았나 싶다. 아름다운 산천을 구경하며 찾은 다음 목적지가 동백 숲으로 유명한 고창 선운사. 16,000㎡의 넓이에 5~600년생 3,000여 그루의 동백은 천연기념물 184호로 11월부터 5월까지 피고 지기를 계속하며 절경을 이룬다는데 나그네가 찾았을 땐 초록의 무성한 잎뿐이었지만 그래도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보물290호인 대웅전의 불보살님께 배례를 하고 남들이 무심코 눈길조차 주지 않는 부도 숲을 찾았다. 부처님 사리를 모신곳이 탑이라면 이땅의 청정한 수행승들의 사리와 영혼이 머무는 곳이 부도들이며 그곳은 통상 고요한 곳에 있기 마련이다. 근세의 청담스님 부도가 단아한 모습으로 생전의 모습을 대하는 듯하여 보기 좋았고, 백파선사의 비석의 유명한 추사글씨가 글씨를 잘 모르는 무식한 백성의 눈에도 힘이 있어 보인다. 선운사의 풍광을 눈에만 담고서 다음 찾은 곳이 미당의 생가와 미당문학관 이었다. 변산반도의 절경을 멀리 두고 가까이 넓은 들판의 완만한 경사지에 위치한 생가는 인적이 끊긴 듯 적막만 흐르고 있었다. 인걸은 지령이라 했던가? 이런 풍광을 보면서 자랐으니 그런 아름다운 시를 쓰지 않았나 싶다. 바로 옆에 위치한 미당시문학관은 폐교된 초등학교를 개조하여 평소 시인이 쓰시던 유품과 자료들을 모아 놓은 기념관으로 시인의 숨결을 느끼기에 충분했으며, 특히 창문으로 보이는 변산반도의 원경은 액자속의 그림인 냥 아름답기 그지없다. 미당생가 다음으로 들른 곳이 인촌 김성수 생가였다. 굳이 명소를 둘러본다는 기분보다 이 나라 총리를 2명이나 배출한 터가 어떤 곳인가 싶은 호기심이 발동한 탓이다. 미당의 생가가 그러하듯 인촌의 생가도 넓은 벌판과 변산의 절경을 앞에 두고 야트막한 산을 뒤로 하고 있었다. 미당의 생가가 초가인 반면 인촌의 생가는 대궐 같아 극한대비를 이루었다. 사람이 거처하지 않아서인지 적막강산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요즘의 시절이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어찌 그 후손들만을 탓하리.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며 찾은 곳이 내소사……. 일주문을 지나 전나무 가득한 산길을 보물291호인 대웅전을 비롯한 색 바랜 전각들이 참으로 정겹고 창살의 아름다운 조각이 아름답다. 요사채인 듯싶은 건물에 오래된 현판이 아름다워 공양주 보살님께 사진 한 장을 찍어 달랬더니 흔쾌히 응해주면서 저녁공양을 하고 가라며 한사코 나그네의 발길을 잡는다. 이른 저녁공양을 마칠 쯤 한 이십여 년 전에 인연을 쌓았던 스님께서 하룻밤 묵어가라는 청을 하지만 뿌리치고 변산의 절경 채석강을 찾아 낙조를 보기위해 길을 재촉했다. 시간상으로는 충분할 것 같았는데 지도와 이정표에 의지한 초행길이라 허겁지겁 달렸는데도 도착하니 해는 서해의 작은 섬 위에 걸쳐져 있다. 낙조의 아름다움에 취해 멍하니 바라보는 눈빛에도 이정도인데 정녕 중국의 채석강이 술 마신 이태백이 물에 뛰어들 만 하구나 싶어 그 심정을 동감할수 있었다. 사진촬영만 하다가 채석강으로 내려갔다. 해는 기울고 물이 들어올 시간이라 멀리 안쪽까지는 못들어갔지만 그래도 절경의 먼모습을 보기엔 충분했다. 여행하는 나그네는 해지면 일출 일몰이 모든 행동의 기준이니 또 하루를 낮선곳에서 여장을 풀 수밖에 아쉽지만 하루가 지나고 말았다.
□ 제4일차(2005.10.20.)
서산 지역을 둘러보기 위하여 만경평야를 지났다. 우리나라에서 지평선을 볼 수 있는 지역이라는 사전정보를 갖고 갔지만 오로지 지도에 의지해 길을 찾는 나그네에겐 사방을 둘러보아도 오직 황금빛 물결의 논뿐이니 길 물을 곳 조차 없다. 무작정 앞으로 나아가며 찾아간 곳이 만경강 하구의 망해사. 지난번 벽화이야기로 소개한 적이 있는 부설거사가 671에 잡았던 터는 파도에 씻겨갔지만 진묵대사가 1589년 현재의 자리에 터를 잡았다니 그 이후로도 400년을 넘었다. 전각들은 장엄함은 없지만 종각 옆에서 바라보는 서해의 절경이 아름답다. 서해를 바라보는 절이라는 망해사 사명을 왜 지었는지 설명없이도 이해가 된다. 망해사를 둘러보고 익산의 미륵사로 향하는 길가에도 역시나 끝없는 평야. 잘 닦인 도로를 따라 한참을 달리니 익산이요 시내를 통과하여 미륵사지를 찾는데 한참을 헤맸다.
겨우 찾은 미륵사엔 근간에 새로 세운 하얀 돌탑이 우뚝 솟아있다. 백제시대에 창건하였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있다니 오랜 역사에 남은것이라고는 당간지주와 일제가 보수 하느라고 온통 시멘트로 발라놓은 것을 복원한다고 해체해놓은 서탑과 일부 건물의 주춧돌 뿐이다. 그래도 가람이 차지했던 규모만으로도 그 엄청난 규모를 짐작할수 있었다. 관리사무소 직원들의 안내로 전시관을 둘러보며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가람의 본모습을 감상할 수 있었다. 장엄한 우리조상의 유물을 보존하고 지켜야 함에도 모형으로 볼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을 어찌 말로 다하랴. 아쉬움을 뒤로하고 충청도 땅 논산으로 길을 재촉하여 은진미륵으로 유명한 관촉사를 찾았다. 결코 높지않은 산임에도 그 기품을 잃지 않는 품안에 1006년 혜명대사가 조성했다는 사진으로만 보았던 은진미륵이 18m의 국내최대석불이라는 규모에 어울리지 않는 환한 미소로 나그네를 맞는다. 참으로 세상에 태어나 한평생을 머물다 가면서 이런 선물을 남기고 세세생생 이름을 남기는 아름다운 삶도 있구나 싶었다. 관촉사를 둘러보고 수덕사를 가는 길에 부여 내산면의 미암사에 들러 쌀바위와 세계최대의 와불을 찾았다. 방방곡곡 조상의 숨결 스미지 않은 곳이 있으랴만 쌀바위의 전설을 읽으며 탐욕이 만화의 근원이 됨을 다시한번 되새겼다. 다음 들린곳이 1308년 건립되어 나라의 보배로 오늘에 이르는 국보제49호 수덕사대웅전을 간직한 고찰 덕숭총림 수덕사를 찾았다. 근래에 새로 세운 당우도 많지만 그래도 고졸하고 단아한 대웅전이 옛멋을 잃지 않고 제자리를 지킨다. 우리 사는 사회도 젊고 활기찬 모습과 꼿꼿한 선비처럼 제자리를 지키는 선인들이 제몫을 다할 때 참으로 조화로운 사회가 되지 않을까. 수덕사 참배후에 드넓은 서산간척지를 지나 만공스님의 수행처였던 간월암을 찾았다. 물이 날때는 걸어서도 들어갈수있지만 물이 드는 시간이라 나룻배같은 쪽배를 타고 건너가니 친구의 사숙되는 주지스님이 친절히 설명을 해 주신다. 참으로 인연이란 뜻하지 않는 곳에서 만나니 어찌 살면서 남에게 악행을 하리...만공스님의 흔적을 ‘간월암’ 현판으로나마 만나볼 수 있어 좋았고, 그림같은 서해의 풍경을 뒤로하고 친구가 주지로있는 부석사를 찾았지만 한양땅 조계사에 종무를 맡아 주말에만 온다니 허탈함에 힘이 풀리지만 후일을 기약하며 밤길을 도와 강화도까지 밤늦게까지 달렸다.
□제5일차(2005.10.21.)
피곤한 탓에 눈을 뜨니 동창이 밝다. 문을 열고 바깥을 보니 살포시 고개를 내미는 햇님이 곱다. 오늘 돌아볼 강화는 수없는 외침의 현장으로 전지역이 박물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려궁지를 둘러보려니까 아직 문도 열지를 않아서 담장을 따라 한바퀴 돌며 눈구경만 한후 제일 북단의 진을 찾아가며 북방식 고인돌을 둘러보고 북으로 북으로 달렸더니 해병 초소에서 민통선 안이라 출입이 불가하단다. 허탈감에 초병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사정을 설명했더니 절대 정차와 하차, 사진촬영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차량으로 한바퀴 둘러 해안도로를 따라서 다다른 첫 번째 목적지인 갑곳돈대. 강화유물전시관과 함께 있는데 막 출근한 직원과 차 한 잔을 나누며 꼭 들러볼 곳과 순서를 설명 들었다. 조선후기 바닷가 해안의 부대는 곶, 보, 진, 돈대로 구분되어있는데 곶은 대대급의 병력이 상주하던 곳이란다. 이곳에서 장렬히 산화한 조선군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싶어 포문에 고개를 내밀어보니 망국을 목전에 둔 그 시절 국운마냥 흙탕물만 온통 앞을 막고 있다. 갑곶돈대에서 멀지않은 곳에 있는 광성보에 들렀다. 신미양요때 48시간동안 미군과 사투를 벌였던 역사의 현장이라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기보다 숙연한 마음에 옷깃을 여민다. 광성보에서 남으로 달려 전등사에 들러 전각들을 둘러보고 유명한 대웅전 추녀밑의 나부상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가을이 살포시 내려앉은 한가로운 산길의 여유를 즐긴 후 외포에서 석모도행 배에 차를 싣고 보문사를 찾아가 산사의 아름다움과 강화 앞바다의 원경을 뒤돌아보며 눈썹바위에 올랐다. 장대한 마애불도 장관이지만 부처님의 눈길이 머무는 앞바다의 풍경은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석양을 보고 내려오기에는 피곤이 밀려와 일찌감치 강화도로 나와서 숙소에 들었다.
□ 제6일차(2005.10.22)
언제 다시 올지 모를 강화에 와서 북단과 남단을 보았으니 마니산을 오르지 않을 수 있으랴. 늦은 아침을 먹고 왕복 두시간이 넘게 걸린다는 마니산을 올랐다.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길 468m라는 높이라 우습게 생각을 했는데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겨우 참성단에 오르니 훼손이 심하여 등산객들의 출입을 금한다는 안내판과 함께 휀스가 철조망을 이고서 막고 있다. 건너편의 정상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강화도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황금빛 가득한 가을 들판이 참으로 장관이다. 오늘은 부산으로 돌아가는 날이라 일정을 빡빡하게 잡지는 않았어도 발길을 제촉하여 하산해 마지막 여행지인 초지진을 찾았다. 조선 효종8년(1686년)에 해상방위를 위하여 구축한 요새로 각종 외세침략에 맞서 싸웠던 현장이다. 특히 운양호 사건으로 인하여 강화도수호조약을 맺었고 조선 망국의 단초를 제공한 전투로 유명하다. 초지진 순례를 마지막으로 일주일간의 국토순례를 마치고 초지대교를 건너 부산으로 돌아오니 총 여행거리2,154km의 대장정이었다.
일주일간의 국토순례를 하면서 짧은 기간이었지만 평소 가보지 못했던 서해안 지역을 남쪽 땅끝에서 북쪽 강화도 끝까지 살펴볼 기회를 가질 수 있어 참으로 행운으로 생각하며 역사 이전의 시대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까지 두루 볼 수 있어 좋았다. 다만 의욕이 앞선 나머지 지역의 범위를 너무 넓게 잡아 여유를 가지고 마음으로 느끼고 몸으로 체험해야 할 것들을 눈과 사진으로 담아오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직은 아름다운 우리들의 삶의 터전을 턱밑까지 올라온 상가들에 점령당한 고찰같은 숨막히는 공간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단체장의 의지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확인한 좋은 기회였다.
첫댓글 덕분에 앉아서 무임승차한 느낌이네요...저도 얼마전 마니산을 다녀왔는데 꽤나 험한 암릉으로 이뤄져있더군...
감사합니다. 자주 들러 보도록 노력하고 싶은 느낌은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