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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dred Ella "Babe" Didrikson Zaharias (/zəˈhɑːriəs/; June 26, 1911 – September 27, 1956)
was an American athlete who achieved a great deal of success in golf, basketball
and track and field.
20세기 스포츠 여제(女帝) 베이브 자하리아스
1954년 베이브 자하리아스가 US여자오픈 우승당시
골프 역사를 통틀어
베이브 자하리아스(Babe Zaharias)의 놀라운 업적과 견줄만한 여성 골퍼는 없을 것이다.
골프 클럽을 쥐기 오래 전부터
밀드리드 디드릭슨 자하리아스(Mildred Ella Didrikson-Zaharias)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성이었다.
별명인 베이브는
그녀가 어렸을 때
야구선수 베이브루즈처럼 홈런을 쳤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활달하고 집요하고 때로는 무모했던 한 여성 덕분에
1920년대 텍사스 주 포트 아서에서 태어난 그녀는
미국 전역에 이름을 날렸다.
베이브는
미국 육상 챔피언십에서
3시간 동안 네차례나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여섯 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1932년 올림픽 때
베이브는 허들과 투창에서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땄으며,
높이뛰기에서도 세계신기록을 세웠으나 은메달에 그치기도 했다.
안 해본 운동이 뭐냐는 질문에 그녀는 '인형놀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녀는 모든 스포츠 분야에서
최고의 선수로 활약했던
20세기 최고의 스포츠 우먼이었다.
베이브는 골프를 시작하자 마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스포츠기자(그랜트랜드 라이스. Grantland Rice)의 권유로
골프에 입문한 자하리아스는 그
녀는 탁월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당대의 최고 골프 코치였던 토미 암으로부터 레슨을 받았다.
US여자오픈 3회 우승을 포함,
생애통산 프로로 41승을 따냈고
LPGA투어 창립자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1938년 스폰서 초청으로 출전한 로스앤젤레스 오픈에서
컷 탈락한 자하리아스는
7년간 칼을 갈아 1945년 이 대회에 컴백,
남자들과 똑같은 조건에서 치른 예선을 통과한 뒤
당당히 36홀 컷 오프를 통과했으나
3라운드에서 79타를 치는 바람에 54홀 컷 오프에 걸렸으나
같은 해 출전한 3개 PGA투어 대회에서 모두 36홀 컷을 통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47년 8월
프로 전향에 앞서 참가한 브리티시 여자 아마추어 선수권에서
미국 여자 선수로 이 대회 최초의 우승을 차지했다.
투창 금메달리스트 답게
파워가 엄청났는데,
540야드 파5홀에서 드라이버에 이어 4번 아이언으로 2온에 성공하는 장타를 보여줬다.
그녀는 경기내내 특유의 익살로
영국인들을 즐겁게 해줬다.
그녀는 담배를 손으로 쳐서 입에 물었고,
공 뒤에 성냥을 가져다 놓고 드라이버로 불을 붙였다.
이런 식의 모든 행동들이 관중들을 즐겁게 해줬다.
그녀는 허풍쟁이와 가깝다고들 했다.
언제나 자신을 과대 선전했고,
자신을 알리는데 매우 뛰어났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들이
여자 야구나 여자 육상, 그리고 여자 골프에서 대중들의 이목을 끄는 계기가 되었다.
언제나 쇼를 보여줬기 때문에
언론이나 대중들의 눈길을 끌고 다니게 된 것이다.
1950년은 세계 여자프로골프는 물론 자하리아스에게도 뜻깊은 한 해였다.
그해 자하리아스는 12명의 멤버와 함께
여자프로골프협회(LPGA)를 설립했다.
44년 설립된 WPGA(Women’s Professional Golf Association)가 있었지만
이 단체는 예산 부족에다 선수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해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여자 골퍼들은
남자 프로골프협회(PGA) 못지않은
제대로 된 조직을 갖추자는 의견을 내놨고,
자하리아스가 그 선봉에 섰다.
그 결과
LPGA는 현재 미국 내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여자 프로 스포츠 기구로 자리 잡았다.
설립 첫 해인 1950년 LPGA투어에는 14개 대회가 열렸다.
14개 대회에 걸린 총상금은
5만 달러.
LPGA투어 최고의 선수이자 설립자인 자하리아스는
그해 여자골프 3개 메이저 대회를 모두 휩쓰는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
(지금은 메이저 대회가 4개지만 당시엔 메이저 대회가 3개였다).
자하리아스는
US여자오픈과 타이틀홀더스 챔피언십에 이어
웨스턴 오픈 등 3개 메이저 대회에서 모두 우승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가 LPGA투어에서 10승을 거두는 데 걸린 시간은
1년20일.
20승을 거두는 데는 2년4개월이 걸렸다.
물론 여전히 깨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깨지기 힘든 값진 기록이다.
자하리아스 등이 LPGA를 설립한 뒤
이 조직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설립 3년째를 맞는 52년엔 대회 수가 21개로 늘어났다.
63년엔
US여자오픈 최종 라운드가
지상파인 ABC방송을 통해 미국 전역에 중계됐다.
여자 메이저 대회 전 경기가 중계된 것은 82년.
나비스코 다이나쇼 토너먼트의 1~4라운드가 지상파 방송의 전파를 타면서
LPGA투어의 인기도 더욱 올라가기 시작했다.
자하리아스가
LPGA의 산파 역할을 맡았다면
그 뒤를 이은 것은 주디 랜킨(Judy Rankine)과
낸시 로페스(Nancy Lopez)였다.
랜킨은
76년, 단일 시즌 사상 처음으로 개인상금 100만 달러 고지를 돌파했다.
78년엔 로페스라는 걸출한 신인이 등장해 돌풍을 일으켰다.
로페스는
데뷔 첫해인 78년 5개 대회 연속 우승 기록과 함께 그해 9승을 거두는 기염을 토했다.
비약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PGA의 위세에 눌려있던 LPGA는
90년대 들어서면서 국제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94년 애니카 소렌스탐(Annika Sorenstam, 스웨덴),
96년 캐리 웹(Karrie Webb, 호주) 등
걸출한 골퍼들이 속속 투어에 합류하면서
LPGA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여자 투어로 자리 잡았다.
특히 웹은
데뷔 첫 해인 96년 신인으론 처음으로
단일 시즌 상금 100만 달러를 돌파하는 또 하나의 기록을 세웠다.
LPGA의 국제화에는
한국 선수들도 한 몫 했다.
98년 LPGA에 데뷔한 박세리(32)가 선두 주자였다.
박세리는
데뷔 첫해에 US여자오픈과 LPGA챔피언십 등
메이저 대회에서 2승을 거뒀다.
특히 US여자오픈에서 보여준 박세리의 샷을
사람들은 잊지 못한다.
워터해저드에 빠진 공을 쳐내기 위해
양말을 벗고 들어가 샷을 한 것은
LPGA 역사에 남을 만한 명장면이었다.
자하리아스는
남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예쁜 스윙을 거부했다.
대신 거리에는 거리로,
퍼팅에는 퍼팅으로 당당하게 맞섰다.
“거추장스러운 속옷은 풀어버리고 볼을 세게 때려라
(Loosen your girdle and let the ball have it).”
자하리아스의 이 한마디야말로
지금도 살아있는 LPGA의 정신이자 현 시대에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 월간<위드골프> 창간준비호 옮김
자하리아스의 영광을 재현한 '침묵의 암살자' 박인비
골프 역사에 길이 남을 대기록들을 쏟아내는
여자골프 세계랭킹 1위 박인비(27)를 볼 때마다
‘사람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 생각하게 된다.
주니어 시절 최고의 재목이던 박인비는
2008년 US여자오픈에서 최연소 우승한 뒤 오히려 깊은 슬럼프에 빠졌다.
자신감을 모두 잃은 채 “골프를 그만두고 싶다”고 부모님에게 울먹이곤 했다.
그러던 그가 지금은 메이저 대회 3개 대회 연속 우승(2013년)과
메이저 대회 3년 연속 우승(2015년)이란 기록을 수립하며
여자골프의 전설로 우뚝 섰다.
느릿느릿 클럽을 치켜 올리는 것 같은 독특한 스윙이지만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가장 정확한 샷을 날리고,
그린 어디에서라도 모두 성공할 것 같은 퍼팅 능력은
세상에 없던 기록을 만들어내고 있다.
여자골프 세계 랭킹 1위 박인비(27). /롯데·KB금융그룹 |
3개 메이저 대회 연속 우승
2013년 3개 메이저 대회 연속 우승(나비스코 챔피언십·LPGA 챔피언십·US여자오픈)은 1950년 베이브 자하리아스(미국) 이후 63년 만에 나온 대기록이고, 올해 시즌 두 번째 메이저 대회인 KPMG 위민스 PGA 챔피언십(지난해까지는 LPGA챔피언십) 3연패(連覇) 기록은 LPGA 투어 사상 세 번째로 나온 기록이다.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40·미국)도,‘골프 여제’ 안니카 소렌스탐(45·은퇴·스웨덴)도 메이저 대회를 박인비처럼 종(縱)과 횡(橫)으로 각각 3연승하는 진기록을 세우지는 못했다.
골프 담당 기자를 하면서 박세리의 1998년 US여자오픈 우승을 보며 꿈을 키운 세리 키즈들인 박인비·최나연·신지애·김인경, 또 리틀 세리 키즈라 불리는 김세영·김효주·장하나의 성장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이들을 만나면서 골프는 결국 마음의 운동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됐다. 스윙이 아무리 뛰어나도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골퍼는 성장하지 못했다. 큰 생각, 단단한 생각이 있는 골퍼들이 결국 고비를 넘기고 우승컵과 키스했다.
박인비가 3개 메이저 대회 연속 우승을 하던 당시 타이거 우즈의 스윙 코치였던 션 폴리는 “박인비의 미소는 달라이 라마(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를 떠올리게 한다”며 “그녀는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찬사를 보냈다. 그녀의 미소에서 깨달음을 얻은 고승(高僧)의 이미지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폴리는 박인비의 미소를 “아름다운 자신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세계적 스포츠 심리학자인 밥 로텔라 박사는 “그녀는 결정적인 순간에도 별일 아닌 것처럼 해내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며 “박인비의 미소와 템포는 그녀가 지닌 균형감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미국 언론은 필드에서 무표정하게 한 홀 한 홀을 점령해가는 박인비에게 ‘침묵의 암살자’라는 별명을 붙였다.
이런 칭찬을 들을 때마다 2008년 싱가포르 국제 대회에서 만난 박인비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는 골퍼들이 호환마마보다도 무섭다고 하는 드라이버 입스(yips·샷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불안 증세)에 빠져 있었다. 박인비의 목소리는 가까이 다가가야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았다. “공이 어디로 날아갈지 정말 자신이 없어요”라고 했다. 플레이를 시작하는 단계인 드라이버샷이 똑바로 날아가지 않으니 나머지 다른 샷이 뛰어나도 좋은 성적을 내기 힘들었다.
기술이 아니라 마음이 문제였다. 세계 최고대회인 US 여자오픈에서 어린 나이에 우승한 뒤 그에 걸맞은 실력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그녀를 괴롭혔다. 초등학교를 마친 딸의 골프 유학을 위해 영어를 잘하지 못하면서도 미국 땅을 밟은 어머니와, 국내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다가도 딸의 시합이 있으면 미국으로 건너가 캐디를 맡던 아버지의 헌신에 보답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미움도 컸다. 이런 심리적 강박에서 오는 슬럼프는 어린 시절부터 골프에 모든 것을 건 한국 골퍼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슬럼프 유형이기도 하다.
박인비는 남편 남기협씨를 만난 뒤 공을 치는 능력이 크게 향상됐다. |
지금 생각해보면 박인비의 인생 역전은 극적 반전으로 보이지만 골프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던 2008년부터 지금까지 서서히 조금씩 자신의 힘을 키운 결과였다. 주변의 많은 도움이 있었지만, 스스로 노력하는 자세가 없었다면 그는 잠시 반짝한 골퍼로 팬들의 기억 속에 희미한 존재가 됐을 것이다. 박인비가 다시 일어서는 데 결정적인 힘을 준 사람은 스윙의 기본을 다시 가르쳐준 스윙코치이자 지금은 남편이 된 남기협(34)씨다. 박인비는 “남편을 만난 뒤 공을 치는 능력이 300% 이상 향상됐다”고 했다.
남씨는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 선수 출신인데 국내 대회서 8등을 한 게 최고 성적이었다. 국내 골프장의 경기 운영과장도 하고, 골프 아카데미에서 일을 거들기도 했다. 현역 시절 드라이버는 300야드 가까이 나갔는데 퍼팅이 영 안 됐다고 했다.
세계 최고 골프 교습가들이 운영하는 아카데미를 다닌 박인비가 이렇다 할 레슨 경력이 없던 남씨에게 배우게 된 것은 인연이 아니면 이뤄지기 힘든 일이었다. 2010년 스윙도 마음도 무너져 있던 박인비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오빠’인 남씨에게 도와달라고 했다. 남씨는 “‘정말 나한테 배워도 되겠느냐’고 했다”고 한다.
박인비가 2015 롯데 챔피언십 1라운드 9번홀에서 뱅커샷을 하고 있다. |
골프는 마음의 운동
박인비는 자기 스윙이라고 할 만한 게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무너져 있었다. 오른쪽으로 밀리는 샷이 근본적인 문제였는데 그걸 손동작으로 억지로 막으려다 왼쪽으로 급격히 당겨지는 샷도 자주 나왔다. 골프에서 가장 고치기 어렵다는, 일정한 방향 없이 공이 날아가게 치는 스윙이다.
남씨는 클럽이 공을 맞히고 지나가는 ‘임팩트’에 대한 설명을 했고, 박인비도 그 길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알고 보면 처음 골프를 배울 때부터 강조되는 기본적인 스윙 궤도에 대한 내용이었다. 남씨는 “아마 인비가 바닥까지 떨어지지 않았다면 시큰둥하게 받아들였을지 모른다”고 했다. 남씨와 함께 투어 생활을 하며 노력한 지 2년 만에 박인비의 공은 다시 똑바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일정한 수준에 오른 선수가 처음부터 다시 기본기를 다지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두 사람의 믿음과 사랑이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남씨와 박인비가 연습하는 장면을 지켜보면 흥미롭다. 박인비가 좋은 샷을 할 때마다 남씨는 “좋았어, 바로 그거야”라고 칭찬한다. 그 칭찬을 듣고 싶어 박인비는 좋은 샷을 재현한다. 연습 시간은 짧은 편이지만 이 학습법은 엄청난 효과를 발휘했다. 결국 실제 대회에서도 연습 때처럼 칠 수 있게 되면서 박인비는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정리된 생각을 조리 있게 말하는 요즘의 그는 예전의 안절부절못하던 모습과 대조된다.
박인비는 2008년부터 박태환·양학선·손연재 등의 멘탈 트레이너로 도움을 준 스포츠 심리전문가인 조수경 박사에게 정기적으로 멘탈 트레이닝을 받고 있다. 심리적으로 쫓길 땐 주변의 빨간색이나 파란색 등을 바라보며 초조함을 잊는 법부터 배웠다. 대회 때마다 하나의 ‘화두(話頭)’를 받는데, “어깨 턴을 충분히 하자”와 같은 단순한 동작에 집중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을 잊고 이 한 가지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그는 심리 상담을 받으면서 완벽한 스윙과 우승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골프를 못 쳐도 자신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
박인비가 2014년 KB금융 스타챔피언십 공식 포토콜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고 기념 촬영하고 있다. |
자신감을 되찾기 위해 2010년부터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에서도 뛴 박인비는 US여자 오픈 우승 이후 4년 만인 2012년 에비앙 마스터스에서 우승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그래도 한동안 스폰서가 없었다.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하지만 박인비는 “골프가 안 돼서 걱정한 적은 있어도 스폰서가 없어서 걱정해본 적은 없다”고 했다. 박인비는 한 방송에 출연해 “외모 때문에 불이익을 받은 적은 없다. 물론 내가 더 예쁘고, 날씬하면 좋겠지만 내 외모에 80% 정도는 만족한다. 외모가 사람의 다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박인비는 슬럼프에 다시 빠질까 봐 두렵지 않을까. 그는 “이겨낸 경험이 앞으로 올 것에 대한 두려움까지 없애줬다”며 ”앞으로 그런 시기가 다시 온다고 해도, 한번 해봤으니까 이젠 쉽게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박인비도 늘 우승하지는 못한다. 얼마 전 대회에선 1년여 만에 컷을 통과하지 못해 2라운드 만에 짐을 싼 적도 있다. 하지만 박인비가 코스에 서면 믿음이 생긴다. 그는 언제 끝날지, 바닥이 어디인지 모르던 4년간의 슬럼프를 사랑과 믿음으로 기본기부터 다시 다지며 이겨낸 사람이다. 그리고 우승하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을 갖추었다. 결과에 대한 두려움 없이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을 온전히 집중할 수 있어서 그는 세계 최고의 골퍼다.
- 조선일보(민학수 글)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