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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여호수아 5장 1-15절
할례와 유월절
오늘 성찬식을 행하게 되는데, 성찬은 세례와 함께 그리스도께서 신약 교회를 위하여 제정하신 성례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참고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구속의 유익들을 전하시는 외적 수단들로 말씀과 성례와 기도를 주셨는데(88문), 말씀을 읽고 들음으로, 그리고 성례에 참여함으로, 나아가 기도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속의 유익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때 말씀과 성례, 기도가 외적 수단들인데, 외적 수단들은 내적 수단의 효력 없이는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럼 내적 수단은 무엇인가? 성령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외적 수단으로써 말씀과 성례와 기도가 효력이 있기 위해서는 내적 수단이신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성령 하나님께서는 외적 수단으로 주신 말씀과 성례와 기도를 보편적인 수단으로 사용하셔서 구속의 유익을 주시는데, 이런 점에서 오늘날 성령의 일하심을 어떤 초월의 방식으로 몰고 가고자 하는 것은 결코 건전한 신앙의 내용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말씀을 읽고 들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재정하신 성례를 행함으로, 또한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구하는 기도를 통해 성령의 일하심을 나타나길 소망해야 합니다.
어쨌든 말씀과 성례, 기도가 구속의 유익들을 준다고 할 때 오늘 행하게 되는 성찬의 성례는 성례 자체나 성례를 시행하는 사람의 덕에 의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91문). 만약 성례 자체에 구속의 유익들이 있다면 성례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구속의 유익을 받아야 하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예로 든다면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유익이 있는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그 말씀이 어떤 이들에게는 보배로 작용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성례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성례를 시행하는 사람의 덕에 의한 것도 아닌데, 말씀의 예를 다시 들어 설명하자면 만약 말씀을 전하는 자의 덕에 의해 구속의 유익이 나타난다면 그리스도께서 말씀을 전하셨을 때는 누구도 예외 없이 그 말씀으로 인하여 구속의 유익이 나타났어야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덕은 우리와 같은 부패함이 없으며 점과 흠도 없이 완전하신 분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를 배척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성례를 통해 우리의 구원의 유익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오직 그리스도의 복주심과, 성례를 믿음으로 받는 자들 안에 계신 성령의 일하심이 있어야 합니다(91문). 성경의 증거로 말하자면 고린도전서 3장 6절과 7절로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이때 성례에 참여하는 자들은 믿음으로 참여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믿음 없이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히11:6).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믿음,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례를 통해 약속하신 바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필 내용은 여호수아서 5장에 있는 말씀인데,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범죄로 인하여 광야 40년을 보내고 난 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가나안으로 들어가 정복하고 정착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여호수아 3장에서 요단강을 건너 요단 서편에 이르게 되는데, 여호수아 3장 15절에 보면 이때가 곡식을 거두는 시기입니다. 곡식을 거두는 시기가 되면 요단강이 항상 언덕에 넘칠 정도가 되는데, 그런 강을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로 건너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요한 서편의 가나안 사람들이 매우 놀랐다고 기록합니다.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 여호수아 2장에 보면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기 전 두 명의 정탐꾼을 여리고 성으로 보냈는데, 거기서 하나님의 섭리로 라합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라합을 통해 여리고 성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게 하셨는데, 그들은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부터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넌 사건을 들었기 때문이요, 또한 요단 동편에서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을 들었기 때문입니다(수2:10). 요단강을 건너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들을 보면서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이제 요단강을 건넌 것입니다. 그것도 물 수위가 가장 높을 때, 그래서 건널 수 없는 시기에 건넌 것입니다. 흘러내리던 물이 위에서 멈춰 그 아래로는 마른 땅이 되게 하심으로 건넌 것을 들은 것입니다. 이러니 놀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다고 되어 있는데, 저들 편에서는 매우 심각하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넌 것 자체가 저들에게는 공포로 다가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도록 하는 역사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면 가나안 땅에 대한 공의의 심판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찍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내용 속에서 드러나는데, 창세기 15장 13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창15:13-16) 이미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애굽에서의 400년과 이후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땅에서의 정복의 역사가 하나님의 공의의 시행과 맞물러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가나안 땅에는 여러 족속이 살고 있었는데, 창세기 15장 19절 이하 21절에 보면 겐 족속, 그니스 족속, 갓몬 족속, 헷 족속, 브리스 족속, 르바 족속, 아모리 족속, 가나안 족속, 기르가스 족속, 여부스 족속으로 말씀합니다. 이들을 대표해서 말할 때 방금 읽어드린 말씀에서도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으로 표현하는 것처럼(창15:16) 가나안 땅의 대표적인 족속이 아모리 족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요단 동편에도 있었고, 요단 서편에도 있었는데, 앞서도 말했지만 요단 동편 시혼 왕과 옥 왕이 다 아모리 족속들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절에서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지금 가나안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넘으로 인해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저들은 모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저들을 공의로 심판하실 목적으로 이스라엘을 건너게 하신 것인데, 그런 이스라엘에 대하여 공포로 떨고 있는 것입니다. 전쟁도 하기 전에 이미 가나안 땅의 족속들은 사기(士氣)가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 말은 역으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데 있어 더욱 강하고 담대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1장에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세워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도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한다고 말씀하실 때(수1:9) 그 말씀의 확실함을 이런 식으로 드러내고 계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인 목적을 확인하자면 여호수아 4장 23절과 24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서 마르게 하사 너희를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즉 홍해 사건이나 요단강 사건이나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데,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할 목적과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자들, 다시 말해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게 하심으로 두려워 떨게 할 목적으로 그 일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시면 곧바로 전쟁에 돌입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 앞서 하나님께서 한 가지 행하라고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가나안 땅 족속들은 사기가 떨어졌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기충천이기에 곧바로 전쟁하는 것이 좋은 것 같지만 전쟁에 앞서 그동안 행하지 않았던 할례를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게 됩니다. 2절과 3절을 보시면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할례는 구약의 성례로 신약의 세례와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그 시작은 아브라함으로부터인데, 이스마엘 사건 이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은혜언약을 맺으십니다. 창세기 17장 7절 이하를 보면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창17:7-9) 그리고 난 뒤 할례를 명하십니다. 10절 이하를 보면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창17:10-12) 할례가 언약이라고 표현되기도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언약의 표징입니다. 언약은 내가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것이고, 그 언약에 대한 표로 할례를 명하신 것입니다. 이런 할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리시는 것이 14절에 나오는데,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할례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할례를 받지 않을 경우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는 것 때문에 할례 자체가 구원의 유무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만약 할례 자체가 구원의 유무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구약 여성들의 경우는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할례는 남자에게만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할 경우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는 것은 할례 자체보다는 하나님의 언약의 표에 대하여 가볍게 여기는 것, 그리고 그것이 언약을 배반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까지를 염두 해 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는 구원의 표이지 구원 자체는 아닙니다. 세례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없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과 상관없다고 해서 세례를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구속의 유익들을 전하시는 외적 수단으로 성례를 재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그리스도께서 재정하신 성례를 행함으로 분명 우리의 구원에 유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의 유익을 위해 주신 것을 가볍게 생각해도 되는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말씀, 성례, 기도가 중요합니다.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 4절 이하 7절을 보시면 할례를 시행하게 된 까닭을 설명합니다.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죽었는데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다만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음성을 청종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이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사십 년 동안을 광야에서 헤매었더니 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 오늘 본문 2절에서 ‘다시 할례를 행하라’고 명하시지만, 이때 ‘다시’는 세례를 받은 자가 다시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을 한 제세례파의 입장과 같은 그런 뜻은 아닙니다. 할례를 행하고 있었지만 다시금 할례를 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죽었습니다. 그들은 다 할례를 받았지만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태어난 자들은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즉 할례를 받지 않은 자에게 지금 할례를 행하라고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조금 더 엄밀하게 말하면 군사라고 할 때 20세 이상으로 계수된 자를 말하는데, 출애굽 당시 20세 이상으로 계수된 자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다 죽었습니다. 20세 이하로 계수된 자들만 지금 남아 있고, 또 그들 혹은 그들의 부모를 통해 태어난 자만이 지금 남아 있는 상황인데,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하라고 할 때 출애굽 당시 20세 이하로 계수 된 자는 이미 할례를 받은 상태입니다. 그들도 할례를 행해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5절에서 증거 하는 것처럼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난 자, 그들은 할례를 받지 못했는데, 그들에게 지금 할례를 행하라고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조금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분명 할례는 중요한 예식입니다. 은혜언약의 표인 만큼 중요합니다.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고 말씀하실 만큼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토록 중요한 할례를 왜 모세는 광야 40년 동안 행하지 않았는가? 몇몇 견해들이 있지만 가장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한 가지만 말씀드리면, 광야 40년 자체가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한 벌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칼빈에 따르면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과실과 이에 대한 처벌이 동시에 명백하게 표현되고 있는 셈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광야 자체만으로도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내리시는 벌로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까지 가는데 4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출애굽 1세대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40년 이라는 시간을 벌로 주신 것입니다. 특히 이때 할례조차 행하지 않은 것은 모세가 할례의 중요성을 잊었다기보다는 자기 몸에 하나님의 백성의 표를 지녀야 할 자들이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하고 계시다는 것을 더욱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광야 40년 동안 출애굽 1세대는 다 죽었습니다. 20세 이상으로 계수된 자들이 다 죽었습니다. 할례를 받았던 20세 이상의 사람들이 다 죽은 것입니다. 살아 있는 자들은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20세 이하에 속한 사람들과 광야에서 태어난 자들입니다. 이들이 전쟁을 앞두고 있으며, 바로 이들에게 지금 하나님께서는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광야 40년 동안의 벌을 이제는 거두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광야 40년이 벌이요,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는 것이지만, 그것조차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선을 이루시는 방편으로 사용하시는데, 우리가 잘 아는 신명기 8장 2절과 3절 내용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거절하여 광야 40년을 걷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광야 40년 동안 철저히 그의 말씀으로 살도록 그들을 훈련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훈련 이후 이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시되 그동안 행하지 않았던 할례를 전쟁에 앞서 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광야 40년이 벌이었다면 이제는 그 벌을 거두시고 거룩한 전쟁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인 친다는 의미에서 할례를 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할례 없는 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할례를 행함으로 그들의 하나님의 백성임을 인치기 위해서 할례를 명하고 계신 겁니다.
이런 측면에서 지금 여호수아에게 할례를 명하신 것은 끊어졌던 대를 잇게 하신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할례를 행하지 못했을 때는 마치 끊어진 것처럼 여길 수 있었습니다. 광야 생활이 그것입니다. 광야 생활, 다시 말해 고난의 생활 속에 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죄로 말미암았다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끊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도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인하게 됩니까? 그래서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총의 보증을 당분간만 철회하셔서 조상들이 죽기까지 열쇠를 채워 놓으셨을 뿐이었다. 비록 그 조상들이 죽기까지는 할례를 행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자녀들에게도 언약이 깨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보류의 의미였지 언약 자체가 깨어진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광야와 같은 생활일 때 그럴 수 있습니다. 가정이 광야일 수 있고, 학교가 광야일 수 있고, 직장이 광야일 수 있습니다. 부부와의 관계, 그리고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물질적인 형편 등으로 좋지 못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학교 폭력이 이슈가 된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심리학에서는 사춘기를 아동기에서 벗어나면서 큰 변화를 겪는 시기로 보지만, 그래서 신체적 변화와 함께 자아에 대한 어떤 변화로 이해를 하지만, 이때도 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죄에 대하여 더 밝아지는 시기가 사춘기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언약을 맺으신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깨뜨리는 법이 없습니다. 깨뜨린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 나타날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이 맺은 언약을 깨뜨리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한동안 깨뜨린 것처럼 보이는 현상 속에서도 자신의 은혜와 긍휼을 나타내시며, 또한 약속하신 바를 이루시는 신실하심을 보이십니다.
그러므로 언약이 깨어진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있다고 해서 언약이 깨어졌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언약이 깨어진 것이 아니라 잠시 보류해 두신 것입니다. 보류해 두심으로 광야에서 훈련을 받게 하시는데, 어떤 훈련입니까? 신명기 8장 3절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 본문을 통해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는데, 할례를 행하게 되면 적어도 할례를 행한 자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전투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할례를 어디서 행하느냐? 요단강 건너 가나안 백성들이 살고 있는 적진 앞에서입니다. 여러분, 할례를 행하게 됨으로 한 족속이 진멸된 일이 창세기 34장에 나옵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히위 족속 하몰의 아들에게 좋지 못한 일을 당했을 때 여차여차해서 하몰의 백성들이 다 할례를 받게 됩니다. 당시 이방인들은 할례를 행하지 않았는데, 야곱의 딸 디나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할례를 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할례를 행하고 난 뒤 3일 째 되는 날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할례로 인하여 고통이 가장 극심할 때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하몰의 성을 습격해서 모든 남자를 다 죽이게 됩니다. 그만큼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전투력이 상실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는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 즉 적진 앞에서 할례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8절과 9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그 모든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마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머물며 낫기를 기다릴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우선 낫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방금도 말했지만 모든 전투력을 상실할 정도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전쟁을 앞두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도록 만든다는 것은 이 전쟁의 승패가 누구에게 속한 것인가?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속한 것임을 뜻합니다. 때문에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특히 여기 보면 ‘애굽의 수치’라고 말씀하시는데, 애굽의 수치란 애굽에 속하여 있을 때의 모습입니다. 애굽의 종으로 있을 때 그것이 그들에게는 수치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 그리고 가나안이 영적으로 구원과 관련되어 있다고 할 때 애굽의 수치란 죄의 신분으로 있을 때를 말합니다.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그런 죄에 신분으로부터 떠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출애굽 자체가 죄의 신분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 길을 걸었다는 것은 죄의 신분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애굽의 수치 가운데 있는 그런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는 할례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가나안 전쟁을 앞두고 할례를 행하면서 애굽의 수치를 떠나게 하십니다. 광야 40년이 마치 애굽의 수치와 같은 상태로 있었다면 가나안 전쟁은 결코 그렇지 않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할례를 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말은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 너희는 내 백성임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한 내 백성으로 구별하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세례의 의미가 이와 같습니다. 로마서 6장에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즉 세례 안에 연합의 의미가 있는 것이고, 그런 연합 안에서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그와 함께 장사되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그 안에서 살아나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롬6:3-4).
이런 사실이 오늘 본문 13절 이하에서 증거 되는데, 그 사이에 유월절에 대한 내용까지 나옵니다. 10절을 보시면 “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할례가 신약의 세례의 의미와 같다면, 유월절은 신약의 성찬과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월절에 대한 규례는 출애굽기 12장에 나오는데, 그 배경은 열 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재앙인 장자의 죽음과 관련해서 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애굽 가운데 재앙을 내리시되 마지막 재앙으로 모든 장자, 사람만이 아니라 짐승까지를 포함한 처음 난 모든 것이 죽게 될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런 죽음 가운데서도 생명이 보존되도록 하시는데, 그것이 유월절 규례입니다(출12:27). 간단히 말하면 구원의 의미를 나타냅니다. 이때 흠 없는 어린 양을 잡도록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로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도록 하시는데, 이것을 보고 죽음의 재앙이 건너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죽음에서 피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런 유월절에 대하여 할례를 받은 이후 길갈 지역에서 진 치고 난 뒤 그 달 십사일 저녁에 여리고 평지에서 지키게 되는데, 어떤 이들은 할례처럼 지키지 않았다는 직접적인 표현이 없다는 것으로 인해 광야 40년 동안 유월절 규례는 지켰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출애굽기 12장 42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비록 광야라 할지라도 유월절을 지켰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할례처럼 광야 40년 동안 유월절 역시 지키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민수기 9장에 보면 애굽 땅에서 나온 다음 해 첫째 달 시내 광야에서 유월절을 지킨 기록 외에 여호수아서까지 지켰다는 내용은 아무데도 나오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출애굽기 12장 25절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정상적으로라면 출애굽기 12장에서 지키고 난 뒤 1년이 안 되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호렙 산에서 세일 산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까지 열 하룻길이라는 성경 기록에 따르면(신1:2) 한 달도 되지 않아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출애굽 할 당시에 지키고 가나안에 들어가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40년을 광야 생활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민수기 9장의 경우 출애굽하고 난 뒤 1년 뒤에 광야에서 지키긴 하지만 그것이 꾸준히 지킨 것이라고 할 만한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결정적으로 출애굽기 12장 4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와 함께 거류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 하여 지킬지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한 마디로 무할례자는 유월절 잔치를 떼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모서 5장 25절에도 보면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는 말씀이 있습니다. 앞선 구절에서는(암5:2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그들의 성들을 기뻐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함으로 이 구절에 대하여 혹 광야 40년 동안 희생과 소제물을 드렸을지라도 그것을 열납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지만, 너희 조상이 광야 40년 동안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리지 않은 것처럼 지금 너희가 드리는 것도 이와 다를 바 없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광야 40년 동안 유월절을 지키지 못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또 현실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누룩 없는 빵을 유월절에 먹게 되는데, 광야 40년 동안 그들은 하나님께서 매일 내려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습니다. 빵을 만들어 먹을 수 있었다면 빵을 만들어 먹었을 것이지만,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다는 것은 그럴 여유 자체가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광야 40년 동안 할례를 행하지 않았던 것처럼 유월절 역시 지키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단을 건넌 후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행할 것을 명령하시고, 이제 유월절까지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영적인 의미가 분명 있는데, 할례의 의미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남으로 새로운 생명을 가지게 된 것과 같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과 불화했지만 이제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광야 기간 동안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광야는 징계의 성격으로 있습니다. 그런 징계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심으로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의에 대하여 산 자로 출발하게 하십니다. 당연히 이 의식은 한번이면 족합니다. 왜냐하면 죽고 사는 문제는 계속해서 반복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유월절 의식은 계속해서 지킬 것을 명하십니다. 그리고 그 때 어린양을 잡을 것을 명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실제로 신약에서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의미하고, 그것은 구약의 유월절의 의미와 다르지 않습니다. 특별히 요한복음 6장에서는 오병이어 사건을 말씀하시면서 구약의 만나와 연결시키기도 하시고 또 성찬과도 연결시켜 말씀하시는데, 요한복음 6장 53절 이하 57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결국 유월절을 영원토록 시행할 것을 명하신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 그분이 주신 생명을 유지할 수 있듯 유월절 역시 그런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이런 할례와 유월절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어디서부터 출발하는지, 그리고 누구로부터 유지되는지를 알리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살이라는 말에서처럼 스스로가 생명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리고 그 반대로 그 스스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도 예외 없이 다 죽은 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우리를 살리시는 이가 누군가? 하나님이십니다. 살리시고 살리신 생명을 유지하시는 분도 누구시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십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전쟁을 하게 되고 거기서 싸우게 되겠지만 이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의 주인이 누구시냐?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알도록 하기 위해 지금 할례를 행하도록 하시고, 또한 유월절도 행하게 하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 11절과 12절로 오면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고 말씀합니다. 할례가 다시금 시행되고, 유월절이 시행되면서 이제 광야 40년 생활이 다 마무리 됩니다. 광야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리시어 저들을 먹이셨지만, 이제 그런 기적의 역사는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광야 40년 동안 만나를 내리신 분은 하나님이신 것이지, 그저 우연적인 사건만은 아니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요단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오게 하셨을 때 계속해서 내리던 만나가 그친 것은 단순히 우연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손길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 이후의 역사는 기적의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노력이 들어가기 때문에 주체가 ‘나’로 변하는가? 기적은 내가 아무런 노력도 안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라는 걸 쉽게 인정할 수 있겠는데, 농사를 해서 땅의 열매를 맺는 것은 인간의 노력과 열심이 들어갔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라고 말해선 안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만물을 주장하시는 것이 하나님이요, 심지어 인간의 노력과 열심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고는 내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미리 이런 말씀을 주셨던 것입니다. 신명기 8장 7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17절과 18절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광야 40년과 가나안 땅에서의 생활은 분명 다릅니다. 간혹 광야 40년이 기적의 연속으로 있기 때문에 그런 생활이 더 나은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두 가지를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죄에 대한 징계로 광야 40년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징계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도록 하시는데, 만나와 메추리기를 매일 기적처럼 먹는다 할지라도 주의 백성은 그것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자임을 알도록 하기 위한 광야 40년입니다. 반면 가나안 땅에서는 이런 의미에서의 기적은 없습니다. 전쟁을 행함에 있어서 기적과 같은 일은 있지만 먹고 마시는 데 있어서는 분명 사람이 노력해야 합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거둘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때 조심해야 하는데, 노력을 우리의 공로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것까지 주의 은혜로 알고 모든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키고 난 뒤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군대 대장을 만나게 되는데, 13절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여호수아 6장에서 여리고 성 전투가 일어나게 되는데, 전쟁을 앞두고 여호수아 홀로 여리고 쪽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서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리고 쪽으로 가다가 만났기에 여리고에서 나온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는데, 그런 그를 향하여 여호수아가 묻습니다..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쉽게 말해 아군이냐, 적군이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그 사람이 대답하는데, 14절입니다.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그는 누구인가? 여호와의 군대 대장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라고 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정리해 두어야 하는데,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쉽게 여호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천사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열왕기상 22장 1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의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다는 내용이 있는데, ‘하늘의 만군’이 천사인 것처럼 천사들 가운데 대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유다서 1장 9절에서는 ‘천사장 미가엘’이라는 표현도 있기 때문에 그런 천사장이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약 천사로 해석하게 요한계시록 19장 9절과 10절에 걸리게 됩니다.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즉 천사들은 엎드려 경배할 대상이 아니란 것입니다. 성도들과 같이 종일뿐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천사에게 엎드려 절하려고 할 때 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왜냐하면 경배를 받으실 뿐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14절에서 여호수아가 땅에 대고 엎드려 절했다고 할 때 경배를 받고 있는 이상 천사가 아니라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오신 분은 하나님이심이 분명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실체로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어느 위격이라도 나타날 수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말씀합니다. 여호와, 즉 스스로 계신 분께서 자신의 뜻을 알리기 위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위격으로 하자면 성자 혹은 성령일 수 있는데, 성자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례와 관련해서 말씀하신 이후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여호와의 군대 대장은 누군가? 성육신하기 전 성자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가 칼을 들고 서 있다는 것은 여리고 성을 함락하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이 그의 싸움이라는 것을 나타냄과 동시에, 자칫 이스라엘 백성도 죽을 수 있다는 경오를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죽음의 경고를 피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오늘 본문 1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났을 때 하신 말씀과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데(출3:5 참조), 장소 자체가 거룩해서 거룩하다고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거기에 하나님께서 임재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때 신을 벗으라는 것은 우리가 어른 앞에서 모자를 벗는 것처럼 경외함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보자 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할례와 유월절이 바로 장차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반드시 중보자를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더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고, 또한 그가 우리와 연합하여 함께 하신다고 할 때 우리는 그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로 경외함을 가져야 합니다. 경외함 없이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죽음 외에 기다리고 있는 게 없습니다.
여호수아 5장에 이어 6장부터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내용으로 연결되는데, 이때도 하나님에 대한 경외 없이 승리가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리고 성 전투, 그리고 아이 성 전투 등 여호와를 경외할 때는 승리가 보장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죽음밖에 기다리는 게 없습니다. 특히 여리고 성과 아이 성 전투를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이 그의 말씀대로 행하는 데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그의 말씀 그대로를 행하는 데 있습니다. 작은 부분이라도 그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을 때 그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아니며, 거기에는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키는 것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것으로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말씀에 더욱 순종하는 것으로 열매가 나타나야 합니다. 세례의 경우 평생 한번 행하지만 성찬은 교회가 정한 수에 따라 1년에 여러 번 행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를 위해 주께서 죽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만을 먹고 마심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께서 재정하사 그의 몸을 의미하는 떡을 먹음으로 또한 그의 피를 의미하는 포도주를 마심으로 그가 내 안에 또한 내가 그 안에 거하여 그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어떻게 거룩과 먼 자로 살 수 있겠습니까? 그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그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어떻게 말씀과 상관없이 살 수 있겠습니까? 성찬을 행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그가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그의 뜻을 따라 살겠다는 마음을 다시금 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찬을 통해 이런 다짐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특히 눈에 보이는 떡을 먹음으로, 또한 눈에 보이는 포도주를 마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가 승천하시면서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이 사실로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떡이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것을 먹음으로 내 몸의 영양분이 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영혼의 영양분이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것을 먹음으로 활력을 얻고 기쁨을 얻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영혼의 활력이요 기쁨이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는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가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우리는 그의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의 뜻을 따라 그와 동일한 형상을 이루기까지 날마다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그가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 또한 그로 인하여 거룩해지기를 소망해야 하고, 소망해야 하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의 거룩을 위하여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즉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말씀에서 먼 자들인지 살펴야 하고, 또한 우리의 힘으로 거룩을 이룰 수 없기에 철저히 하나님께만 구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여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거룩이 우리의 삶을 통해 나타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있는 그 자리가 나만 있는 자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거룩이 가정에서 나타나야 하고, 학교에서 나타나야 하고, 직장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부부 사이에, 부모와 자식 사이에, 친구와 동료 사이에, 상사와 하사 사이에 거룩함이, 구별됨이 나타나야 합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사실이 나타나야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 대하여 주께 하듯 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주를 경외하는 자로서의 열매로 있는 것이고, 이런 열매가 없다면 여호와의 군대 대장 모양으로 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칼을 들고 서실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긍휼이 넘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언약을 깨뜨리는 법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의 백성으로 살지 못할 때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징계하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