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청담 스님의 오도송悟道頌은 견성見性인가
먼저 ‘청담 스님은 깨달음을 얻어 극락에 가지 않아도 되었는가?’에 대해서 보기로 한다.
1) 오도송과 견성
비문에 보면 “32세에 정혜선원에서 주공做工의 힘을 얻고 만공 스님의 인가를 얻고 이어 시로 게송을 지었다”고 했고, 도선사 홈페이지 청담대종사 행장에는 “1934년(33세)에 덕숭산 수덕사 정혜선원定慧禪院에서 3년간 용맹정진 후 만공滿空 대선사로부터 견성 인가를 받고 올연兀然이란 호를 받음”이라고 되어 있다. 이 기록대로라면 이때 청담은 깨달음을 얻고 만공스님이 견성했다는 것을 인가를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오도悟道란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고, 견성이란 성품을 봐 성불했다는 뜻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미 확철대오를 하고 생사 문제를 여의었기 때문에 극락을 가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입적한 해인 1971년 70살의 노승은 마지막으로 그때 본인은 깨닫지 못했었다는 것을 솔직하게 기록을 남겨 놓고 입적하였다.
“이윽고 선방의 수좌들 사이에서는 내가 견성했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만공 스님께서도 견성했다는 인가(印)를 해 주시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나 자신 속에 너무 많은 미혹의 그림자가 꿈틀거리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랬으므로 그 인가를 받을 수 없었다. 겸손히 사양하고 오대산의 적멸궁寂滅宮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퇴락해 가는 불법의 중흥과 세계의 평화와 안락을 위해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이러한 태도는 다만 겸손만은 아니었다. 견성을 한 승려들은 대개 게송偈頌을 지어 그의 해탈의 깊이를 나타내는 법인데, 나는 그것을 짓지 않았다. 그만큼 철저하게 그 미혹을 쫓아내려고 버둥거렸다. 백일기도를 하러 오대산에 들어갔다는 사실도 그 미혹의 그림자를 쫓기 위한 구실로 봐야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그 어느 날 나로부터 게송을 지어 받고 싶다고 한 동료가 어떻게나 심하게 조르는지 그것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예부터 모든 불조佛祖는 어리석기 그지없으니
어찌 현학의 이치를 제대로 깨우쳤겠는가
만약 나에게 능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길가 고탑(塔)이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하리.”
엮은이는 1934년 만 32살에 썼다는 이 오도송을 엮은이는 아주 찬찬히 뜯어보며 나름대로 우리말로 옮겨 본 적이 있다. 그리고 거기서 깨우침이 무엇인지 찾으려고 애썼으나 이루지 못했다. (②가 엮은이가 옮긴 것임)
❶ 上來佛祖鈍痴漢
➀ 예부터 모든 불조佛祖는 어리석기 그지없으니,
➁ 예부터 붇다나 조사들 굼뜨고 어리석고 못나,
❷ 安得了知衒邊事
➀ 어찌 현학衒學의 이치를 제대로 깨우쳤겠는가?
➁ 도붓장사(行賣)나 길가 예삿일 어찌 제대로 알았겠는가!
❸ 若人間我何所能
➀ 만약 나에게 능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➁ 사람들이 나에게 할 줄 아는 게 무어냐고 물으면,
❹ 路傍古塔傾西方
➀ 길가 고탑(塔)이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하리.
➁ “길가 낡은 탑 서쪽으로 기울었네”라고 하리.
그러다가 청담 스님이 입적한 해에 “그 오도송은 번뇌를 완전히 벗어난 상태가 아닌 상황에서 써 준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2) 견성과 파계 사이
그리고 이어서 「견성과 파계의 사이」라는 제목으로 파계한 사실을 아주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다. 앞에서 오도송을 써주고도 미혹이 남아 있어 “백일기도를 하러 오대산에 들어갔다는 사실도 그 미혹의 그림자를 쫓기 위한 구실로 봐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거기서 진주 연화사의 요청을 받고 법회 설법하러 가서 파계하게 된다.
오대산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있던 나에게 어느 날 한 장의 편지가 왔다. … 내용인즉 진주로 내려와서 훌륭한 부처님의 법을 들려 달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나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에게는 너무나 많은 미혹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정혜사의 만공 스님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부처님의 법을 설하여 주라는 명령이었다.
법회法會가 있던 날의 연화사蓮花寺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 때문에 나의 설법이 거의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 나로서 잊을 수 없는 것은 그 법회가 끝난 뒤에 나를 찾아와 내 장삼 자락을 잡고 눈물을 흘리시던 어머님의 모습이었다.
“네가 중이 된 것도 좋지만 집안의 혈통만은 이어야 되지 않겠느냐.”
이혼한 뒤에도 집에 남아 어머니를 봉양하는 아내와 그들이 처해 있는 생활이 나로서는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강압이 되었다. 나는 ‘무간지옥(地獄)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아내의 방으로 들어갔다.
날이 밝아오기 전에 집을 나와 동구길을 걸었다. 그리고 다시 1년의 세월이 흘러간 뒤에 나는 오대산 상원사에서 아내가 보내온 ‘여식을 낳았다’는 편지를 받아 읽었다. 나는 그 죄업을 말없이 받아들여야 했고, 그것을 씻기 위하여 다시 적멸보궁으로 들어가 백일 참회 기도를 했다. 그때 태어난 그 파계의 씨는 20의 젊은 나이로 삭발을 하고 나의 길을 좇아와 수도정진修道精進한 결과, 지금은 전국 비구니 강원에서 법설을 가르치고 있는 강사가 되었다.
청담 스님이 “여식을 낳았다고 편지를 받았다”라고 한 여식이 바로 유명한 묘엄 스님(속가 이름 이인순)이다. 묘엄 스님은 1931년 1월 17일에 태어나 1945년 성철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았다. 또 율사 자운 스님으로부터 율장을, 대강백 운허 스님으로부터는 경학經學을 배웠다. 인순의 출가는 1945년 해방 직전 일본 위안부나 강제징용을 피하기 위해 어머니가 딸을 아버지 청담 스님에게 보내면서 시작되었다. 청담 스님은 딸을 성철 스님에게 부탁하여 출가시키고 가까운 윤필암에 머물게 하여 음으로 양으로 출가 생활을 도왔다.
그리고 그 딸은 훌륭한 비구니가 되어 동학사 · 운문사 강원의 최초 비구니 강사이자 한국불교 최초의 비구니 율사가 되었다. 이런 묘엄 스님의 활동을 청담 스님도 아주 대견해하였다는 것을 앞에서 보았다. 청담 스님이 입적한 뒤 묘엄 스님은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고승들에게 배운 선 · 교 · 율 3장의 맥을 후학들에게 전하였다. 1974년 개원한 봉녕사 비구니 강원은 봉녕사 승가 학원을 거쳐 1984년 봉녕사 승가대학으로 승격됐다. 1999년에는 국내 ‘최초’ 비구니 율원인 금강율원을 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출가 수행하는 데 가장 큰 번뇌였던 할머니(청담의 모친)와 어머니를 모두 출가시켜 염불하게 하였으니 청담에게 딸 묘엄은 업이 아니라 업을 수습해 주는 보살이었다.
청담 스님은 이렇게 회고하였다.
개인의 길에서는 언제나 정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함께 세상에 태어났다는 인연 때문에 사해대중들을 깨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아니다. 이렇게 말할 것이 아니다. 차라리 불교는 사해대중의 구제에 더 큰 뜻이 있을지 모른다. … 죄악과 번뇌와 고통 속에 잠긴 인간을 참인간이게 하는 것. 그들로 하여금 죄악과 번뇌를 버리고 진정한 안락을 누리게 하도록 하는 것. 지혜롭게 하는 것. 자비로운 협조자이게 하는 것. 이것이 불교의 참뜻인 것이다. 그것을 원효는 오직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염원하고 보리(菩提), 즉 진정한 의미의 평화를 향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원효가 설총을 낳아 신라에 공헌하고, 청담이 묘엄을 낳아 한국 비구니 불교를 중흥한 것과 비견되는 장면이다. 청담은 자신의 주변 인연을 버리지 않고 모두 염불하여 함께 극락에 가서 성불하는 대승을 실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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