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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두 얼굴] 위선과 허위의 바다-어니스트 헤밍웨이(7)
1953년-1954년 겨울에 있었던 헤밍웨이 최후의 성대한 사파리에서는 더 치욕적인 일이 있었다. 그는 스스로 보기에도 너무 더러워져 있었다. 그의 텐트는 벗어던진 옷가지와 빈 위스키 병이 뒤엉킨 난장판이었다. 개인적인 윤리관과 연계된 이해하기 힘든 이유들 때문에, 그는 원주민 의상을 차려입고 머리를 빡빡 밀고는 마사이 족처럼 오렌지-핑크로 옷을 물들였다. 심지어는 창까지 들었다. 게다가 그는 데바라는 토착 와캄바족 여자를 데리고 잤다. 수렵구 관리인 데니스 자피나가 묘사한 바에 따르면, 데바는 “캠프를 따라다니는 악취 나는 여자였다” 그녀와 그녀의 여자 친구, 헤밍웨이가 헤밍웨이의 텐트에서 축하 파티를 여는 동안 침대 하나가 무너져 내렸다. 메리가 적은 일기에 따르면, “낮이나 밤이나 늘 반복적인 대화가 낮은 목소리로 윙윙거렸다.” 1959년에는 스페인에서 최후의 성대한 원정이 있었다. 헤밍웨이 패거리는 80개에서 90개의 짐을 끌고는 여름철 투우를 쫓아서 여행을 다녔다. 더블린 건축가의 딸인 발레리 덴비-스미스라는 열아홉 살의 아가씨가 벨기에 통신사의 비상근 통신원 자격으로 헤밍웨이를 인터뷰하러 왔다. 그는 그녀에게 빠졌다. 어쩌면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메리는 늙은이를 보살피는 데 더 훌륭한 아내였고, 당연히 “석별의 한 잔”을 나눌 마지막 아내였다. 월급 250달러를 받기로 하고 헤밍웨이에게 고용된 발레리는 패거리에 합류해서 헤밍웨이의 귀염둥이가 앉는 자리인 자동차 조수석에 올라탔다. 메리는 뒷자리에 앉았다. 발레리가 무해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헤밍웨이를 유쾌하게 만들면 폭력을 덜 행사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메리는 이것을 참아냈다. 헤밍웨이가 사망한 후에도 발레리의 고용관계는 계속됐다(그녀는 결국 그레고리 헤밍웨이와 결혼했다). 그렇지만 그 사건은 그해 여름을 “소름 끼치고 오싹하며 비참하게”만드는 데 일조했다.
메리는 톨스토이 백작부인보다 인내심이 더 컸던 것일까? 아마 아닐것이다. 헤밍웨이는 톨스토이와는 달리 가정 지향적이었고, 야생을 향해 훌쩍 떠나려는 의향 같은 것은 없었다는 관점에서 그렇다. 스페인어를 배운 메리는 헤밍웨이의 살림을 잘 꾸려갔고, 그의 스포츠 여행에도 대부분 참여했다. 헤밍웨이는 어느 단계에선가 그녀의 특징들을 정리해 놓은 “현황 리포트”를 작성했다. “뛰어난 낚시꾼, 솜씨가 제법인 총잡이, 튼튼한 수영선수, 정말 훌륭한 요리사, 우수한 와인 감별사, 뛰어난 정원사…….보트를 몰 줄 알고 스페인어로 집안 살림도 할 줄 안다.” 그렇지만 그는 야생 원정에서 그녀가 종종 부상을 입었을 때는 조금의 동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부상을 당한 후에 그와 나눈 인상적인 대화를 기록했다. “조용히 좀 해.”, “노력하고 있어요.” “군인들은 그러지 않아.” “난 군인이 아니예요.” 사람들 앞에서 대판 싸운 적도 있었고, 아무도 없을 때 무시무시한 폭력이 자행된 사건들도 있었다. 언젠가 그는 그녀의 타자기를 땅바닥에 내팽개치고 그녀가 아끼는 재떨이를 부쉈으며, 그녀의 얼굴에 와인을 끼얹고는 그녀를 “매춘부”라고 불렀다. 그녀는 그가 그녀를 제거하려고 애를 쓴다면 그녀는 집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대꾸했다. “당신이 내가 떠나도록 일부러 못살게 굴려고 노력하면, 당신은 성공할 수 없을 거예요…..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짓을 하건 나를 죽이지는 못할테니 상황만 복잡해질 거예요. 나는 당신이 술 한 방울 안 마시고 아침에 나한테 와서는, 진짜로 솔직히 내가 떠나는 걸 원한다고 말하는 날이 오기전까지는 당신의 핀카에서 집안 살림을 하면서 계속 머무를 거예요.” 타산적인 헤밍웨이로서는 응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헤밍웨이가 결혼 생활에서 얻은 자식들은 대체로 말이 없었고, 가끔은 두려움에 떨기도 했다. 어쨌든 그들은 그의 결혼 생활의 목격자였다. 어렸을 때 그들은 해밍웨이 패거리가 세계를 누비고 다닐 때 유모나 집안 일꾼들에게 맡겨졌다. 보모 중 한 명인 에이다 스턴은 레즈비언으로 알려져 있다. 장남인 범비는 훔친 술로 그녀를 매수했고, 패트릭은 그녀를 지옥ㅇ 보내 달라고 기도했다. 반면 막내 그레고리는 그녀가 떠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레고리는 결국 아버지에 대해 많은 것을 폭로하는 상당히 신랄한 책을 썼다. 그레고리는 젊은 시절 캘리포니아 경찰과 사소한 마찰에 휘말렸다. 헤밍웨이와 오래전에 이혼한 사이였던 어머니 폴린은(1951년 9월 30일) 헤밍웨이에게 전화를 걸어 소식을 전하면서 아이를 잘 다독여서 바른 길로 인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그녀를 비난 -“당신이 애를 어떻게 키웠는지 봐”-했고, 그들은 미친 듯이 다퉜다. 폴린은 “전화기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걷잡을 수 없이 흐느꼈다.” 그날 밤, 그녀는 심한 복통으로 잠에서 깨어났고, 이튿날 부신종양으로 수술을 받던 중에 5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떴다.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해 지병이 악화된 탓인지도 모른다. 헤밍웨이는 아들의 비행을 탓했다. 아들은 아버지의 분노를 탓했다. “어머니의 몸을 상하게 만든 것은 내가 일으킨 소소한 말썽이 아니라,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여덟 시간을 통화하는 동안 아버지가 했던 잔인한 말이었다.” 그레고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전했다 “건강한 사람이기만 하면 그런 위압적인 사람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것도 괜찮다. 그런데 그 사람의 영혼이 말라비틀어졌다면, 그 사람이 풍기는 악취 때문에 죽겠다는 말을 어떻게 꺼낼 수 있겠는가?”
물론 진실은 헤밍웨이가 말라비틀어진 영혼 때문에 고통을 겪거나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알코올 중독은 그의 인생과 작품에서 정말로 중요하다. 약물 중독이 콜리지의 삶과 작품에서 차지하는 비중만큼이나 말이다. 헤밍웨이는 진행성 알코올 중독의 교과서적인 사례다. 고질적이고 만성적인, 그리고 아마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듯한 우울증으로 인해 촉발된 알코올 중독이 우울증을 악화시키는 악순환이 거듭됐다. 언젠가 그는 매클리시에게 이런 말을 했다. “문제는요, 살아오는 동안에 상황이 정말 안 좋았을 때, 술 한 잔 탁 털어 넣으면 그 즉시 상황이 나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는 10대 시절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동네 대장장이 짐 딜워스가 비밀리에 그에게 사과주를 대 줬다. 그의 버릇을 감지한 어머니는 아들이 알코올 중독자가 될까 봐 늘 두려워햇다(그가 어머니와 처음으로 대판 싸운 후로 과음을 하기 시작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마시는 술이 와인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밀라노의 장교 클럽에서 처음으로 독주를 마셨다. 육체적 부상과 불행으로 끝난 연애는 과음을 부추겼다. 병원에 있는 그이 옷장에는 빈 코냑 병들이 그득했는데, 이것은 불길한 징조였다. 1920년대 파리에서 그는 와인협동조합에서 적포도주를 갤런 단위로 구입해서 끼니 때마다 대여섯 병을 마셨다. 그는 스콧 피츠제럴드에게 와인을 병나발 부는 법을 가르쳤다. 그는 병나발이 “계집애들이 수영복 없이 수영하러 가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에서 그는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를 계약한 후 “며칠동안 인사불성”이었다고 말했다. 이것이 아마 그가 며칠 동안 떠들썩하게 술을 마신 첫 경우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는 “들이키게”라는 20줄짜리 노래를 작사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를 술 사는데 인색한 인간이라고 비난하는 버질 톰슨 같은 사람들도 일부 있지만, 헤밍웨이는 1950년대 쿠바에서 케네스 타이넌에게 그랬듯이 친구들이 자기를 등쳐먹는다고 항상 욕을 해 댔다.
헤밍웨이는 여자들과 술 마시는 것을 특히 좋아했는데, 여자들이 어머니의 허락을 대신해 준다고 여겨서 그랬던 듯하다. 그와 엄청나게 술을 마신 헤이들리는 이렇게 적었다. “나를 술꾼으로 숭앙할 정도라고 했던 당신의 말을 나는 지금도 간직하고 있어요.” 아바나에서 그와 1930년대를 함께한 어여쁜 제인 메이슨이 똑같은 불운한 역할을 맡았다. 그는 그녀와 진을 마신 후에 입가심으로 샴페인을 마시고는 얼음을 넣은 다이커리를 커다란 잔으로 마셨다. 그의 음주행각은 쿠바에서 보낸 이 시절부터 통제권을 완전히 벗어났다. 쿠바의 어떤 바텐더는 헤밍웨이가 내가 아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마티니를 많이 마신다”고 말했다. 친구 소월드 산체스의 집에서 그는 술 취한 싸움꾼으로 변했다. 창문 밖으로 옷가지를 벗어 던지고는 값나가는 바카라 잔 세트를 박살냈다. 겁에 질린 산체스의 아내는 비명을 지르면서 집사에게 헤밍웨이를 가두라고 애걸했다. 사파리에서 그는 술을 마시기 위해 새벽 다섯 시에 텐트에서 슬금슬금 기어나왓다. 그의 동생 레이체스터는 1930년대 말엽 키웨스트에서 헤밍웨이가 하루에 스카치 앤 소다를 열일곱 잔 마셨고, 밤에 침대에 들 때 샴페인 병을 들고 간 적도 많았다고 밝혔다.
이 시기에 그는 간이 상해서 생긴 통증을 처음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의사는 그에게 술을 완전히 끊으라고 충고했고, 그는 저녁식사 전에 위스키 세 잔만 마시는 것으로 주량을 제한하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오래 가지는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그의 주량은 꾸준히 늘어났다. 1940년대 중반에 그는 아침 식탁의 첫잔에 진을 부었다고 한다. 1948년에 <코스모폴리탄>을 위해 그를 인터뷰했던 A. E. 호치넌은 더블사이즈의 파파 더블스(아바나에서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술로, 럼과 그레이프프루트, 마라스키노를 섞은 것이다) 일곱 잔을 재빨리 먹어치운 헤밍웨이가 식사가 끝나고 운전을 하러 가기 전에 여덟 번째 잔을 비웠다고 말했다. 헤밍웨이는 “여기서 하루에 열여섯 잔을 마신 적도 있소”라고 주장했다. 헤밍웨이는 압생트를 마시면서 저녁을 시작한 후, 저녁을 먹으면서 와인을 한 병 뚝딱해치우고, 보드카로 전환한 다음 “새벽 3시까지 위스키하고 소다를 퍼붓는다”고 출판업자에게 자랑했다. 그가 저녁 전에 먹은 술은 쿠바에서는 럼 위주의 칵테일이었고, 유럽에서는 마티니 위주의 칵테일이었는데, 혼합 비율은 15대 1이었다. 1950년대 초반의 언젠가, 나는 그가 몽파르나스의 돔 카페의 야외 테라스에서 이런 술 여섯 잔을 빠르게 비우는 것을 본 적이 있다-그는 술 마시는 것으로 사람들 눈길을 끌고 싶어 했다. 그의 아침 반주는 진, 샴페인, 스카치, 또는 그의 또 다른 창작품으로 네덜란드산 진과 라임주스를 카다란 잔에 섞은 “멕시코만의 죽음”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는 그 어떤 술보다도 위스키를 즐겼다. 아들 패트릭은 아버지가 말년 20년 동안 위스키를 하루에 1리터 정도 마셨다고 말했다.
술을 이겨내는 헤밍웨이의 능력은 놀라웠다. <뉴요커>를 위해 헤밍웨이의 프로필을 쓴 릴리언 로스는 얘기를 나누는 중에도 그가 술에 취했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적이 많았다. 데니스 자피로는 헤밍웨이의 마지막 사파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내내 취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낌새를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량을 팍 줄이는, 심지어는 단기간 동안 술을 끊어 버리는 비범한 능력도 보여 줬다. 그는 타고난 건강 체질에 더해진 이런 능력 덕에 연명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만성적인 알코올 중독은 결국 이겨낼 수 없는 것이었다. 술은 그가 당한 두드러지게 많은 사고의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발터 벤야민은 언젠가 지식인을 “코 위에는 안경을, 마음에는 가을을 얹은”사람이라고 정의했다. 헤밍웨이는 확실이 마음에 가을을 품고 있었다(한겨울인 적도 자주 있었다). 그렇지만 할 수만 있다면 안경을 되도록 오래 코에서 떼 놓았다. 어머니로부터 시력이 약한 왼쪽 눈을 물려받았음에도 그랬다(어머니 역시 허영심 때문에 안경을 쓰는 것을 거부했다).
그 결과, 그리고 어색할 정도로 큰 그의 체격 때문에, 헤밍웨이는 평생동안 사고를 달고 살았다. 그가 당한 사고의 목록은 사람들 기를 죽일 만큼 길다. 어렸을 때, 입에 몽둥이를 물고 넘어지는 바람에 편도선이 파여 나갔다. 등에 낚시 바늘이 꽂혔고, 미식축구와 권투를 하느라 몸에서 부상이 떠나지를 않았다. 1918년에 전쟁터에서 폭발로 사고를 당했고, 주먹으로 유리 진열장을 쳤다가 부상을 입었다. 2년 후, 깨진 유리 위를 걷다가 발이 찢어졌고, 보트의 밧줄걸이 위에 넘어져서 내출혈이 일어났다. 뜨거운 주전자를 박살내는 바람에 심한 화상을 입었고(1922), 발목인대가 찢어져 나갔으며(1925), 시력이 괜찮았던 눈의 동공을 아들이 찢어 놓기도 했다(1927). 1928년 봄에는 첫 음주 사고가 일어났다. 집으로 오던 기렝 그는 채광창에 달린 끈을 화장실의 물 내리는 끈으로 착각하고 잡아 당겨서 커다란 유리 구조물이 통째로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는 뇌진탕을 입고는 아홉 바늘을 꿰맸다. 사타구니 근육이 찢어졌다(1929), 펀치 백을 치다가 검지가 부러졌으며, 말이 날뛰는 바람에 상처를 입었고 자동차 사고로 팔이 부러졌다(1930). 술에 취한 상태에서 상어를 갈고리로 끌어 올리려다가 스스로 쏜 총을 다리에 맞았고(1935), 닫힌 문짝에 발길질을 하다가 엄지 발가락이 부러졌으며, 발길질로 거울을 깨다가 시력이 안 좋은 눈의 동공에 상처를 입었다(1938). 1944년에는 필름이 끊긴 상태에서 물탱크로 차를 모는 바람에, 그리고 도랑으로 오토바이를 처박는 바람에 두차례 뇌진탕을 당했다. 1945년, 메리를 시카고 공항으로 데려다주겠다면서 운전석에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가 길에서 미끄러져 길옆 제방을 박는 바람에 갈비 세 개와 무릎이 부러졌고, 이마에는 함몰상을 입었다(메리는 앞 유리를 뚫고 나갔다). 1949년에는 사자와 장난을 치다가 심하게 할퀴었다. 1950년에는 보트에서 넘어지면서 머리와 다리에 깊은 상처를 입고 동맥이 끊기면서, 다섯 번째 뇌진탕을 당했다. 1953년에 차에서 나가 떨어지면서 어깨가 빠졌고, 그해 겨울에는 아프리카에서 일련의 사고를 당했다. 술에 취해 들불을 끄려다가 심한 화상을 입었고, 비행기 사고 두 번으로 인해 또 뇌진탕을 당하면서 두개골이 부서졌고, 허리 디스크 두 곳이 찢겨나갔으며, 내상을 입었고, 간과 비장, 신장이 파열됐으며, 화상을 입었고, 어깨와 팔이 빠졌으며, 괄약근이 마비됐다. 대체로 음주 후에 따라다닌 사고는 계속해서 그를 죽음 직전까지 내몰았다. 울타리를 넘다가(1958), 그리고 또 다른 자동차 사고(1959)로 인대가 끊어지고 발목을 삐었다.
타고난 건강체질에도 불구하고, 알코올중독은 1930년대 후반에 간을 망가뜨리는 것을 시작으로 그의 건강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했다. 1949년에 콘티나 담페조에서 스키를 타다가 눈에 조그만 티끌이 들어갔는데, 술과 결합한 이 티끌은 아주 심각한 단독(丹毒)으로 진행돼서 이후 10년 동안 그를 괴롭혔다. 단독으로 인해 콧날부터 입까지 검푸르면서 작고 빨간 흉터가 생겼다. 1959년 스페인에서 거창한 술판을 벌인 뒤인 이 무렵에, 그의 신장과 간은 심각한 상태였다. 혈액 색소 침착증(청동색 피부, 당뇨병), 발목 부종, 경련, 만성적인 불면증, 혈전과 요독, 피부병 등이 그를 괴롭혔다. 기력을 잃은 그는 너무나 빨리 늙어 버렸다. 그가 아이다호에 구입한 저택 근처를 걷는 모습을 담은 그의 마지막 사진은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는 여전히 살아서 두 발로 걸어 다녔다. 그런데 그는 그렇다는 사실을 참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그의 아버지는 불치병에 대한 공포 때문에 자살했다. 반면, 헤밍웨이는 자신의 질병이 치명적이 아닐 것이라는 사실에 겁을 먹었다 1961년 7월 2일, 우울증과 편집증을 치료하려는 노력에 여러 차례 실패한 후, 그는 아끼던 영국제 이중총신 엽총에 산탄 2발을 넣고 두개골 전체를 날려 버렸다.
헤밍웨이는 왜 죽음을 갈망한 것일까? 그것은 작가들 사이에서는 이상한 일이 전혀 아니다. 그와 동시대를 살았고, 동시대 영국 문학계에서 그와 비견될 만한 작가였던 이블린 워 역시 유사하게 죽음을 갈망했다. 그런데 워는 지식인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머리로 삶의 법칙들을 개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교회의 전통적인 규율에 순종하면서 5년 후 자연사했다. 헤밍웨이는 명예, 진실, 충실함에 바탕을 둔 나름의 규범을 창안했다. 그는 세 가지 모두에 실패했고, 그 실패는 그를 망가뜨렸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가 스스로 자신의 예술을 망치고 있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헤밍웨이는 극악한 잘못들을 저질렀지만, 단 한 가지 점에서는 부족함이 없었다. 바로 예술적 완벽함이었다. 이 점만큼은 그의 생애 내내 봉화처럼 빛을 발했다. 그는 영어, 그리고 소설을 쓰는 새로운 방식을 창출해 내는 작업을 스스로에게 부여했고, 임무 완수에 성공했다. 그것은 영어의 역사에서 두드러진 일대 사건이었고, 현대인들은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는 창조적 재능과 에너지, 참을성이라는 어마어마한 자원을 갖고 이 임무에 헌신했다. 그 자체로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더 어려운 것은, 그가 발견했듯이 스스로 설정했던 높은 창조적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 중반에 분명해진 이런 상황은 그의 습관적 우울증에 짐을 보탰다. 이후로 그가 발표한 몇 안 되는 성공작들은 기다란 내리막길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에 불과했다. 헤밍웨이의 예술가적 기질이 조금 덜했다면 그것은 인간 헤밍웨이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많은 작가들이 그랬듯이, 그도 열등한 소설들을 쓰고 발표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생각하는 최선의 수준을 밑도는 작품을 집필할 때, 그는 그렇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각은 그에게는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술의 힘을 빌리려 했다. 심지어는 집필 중에도 그랬다. 그가 “럼 세인트 제임스” 잔을 앞에 두고 글을 쓰는 모습이 처음 목격된 것은 1920년대였다. 처음에는 보기 드문 광경이던 이 습관은 간간이 누에 띄다가는 결국 빼놓을 수 없는 광경이 돼 버렸다. 1940년대, 그는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즉시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선 채로 글을 썼다. 한손에는 연필이, 다른 손에는 술이 있었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그 결과로 나온 작품은 비참했다. 숙련된 편집자는 알코올의 도움을 받아 창작된 작품을 언제나 알아볼 수 있다. 상대가 아무리 재능있는 작가라고 해도 말이다. 헤밍웨이는 출판할 수 없는 작품들, 또는 스스로 설정한 최소기준에 미달된다고 느끼는 작품들을 다량 써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작품은 출판이 됐고, B급이라는 평가를, 심지어는 초기작의 패러디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두 가지 예외는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노인과 바다>였다. 그 작품 안에도 자기 패러디적인 요소가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일반적인 수준은 저하됐고, 곤두박질쳤다. 재능을 발전시키기는커녕 그 재능을 다시 포착하 ㄹ수도 없다는 깨달음은 우울증과 술로 이뤄진 악순환을 가속시켰다. 헤밍웨이는 그 자신의 예술에 의해 살해당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삶에는 모든 지식인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교훈이 담겨 있다. 예술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교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