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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구문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동민
고대 이집트의 도자기 그림
고대 이집트의 니르메르 팔레트 - 인체 표현을 여러 시점에서 그렸다.
고대 이집트 벽화 - 인체 표현이 나르메르 팔레트와 같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 다 시점으로 그렸다.
16) 아는 것을 그렸다.
신석기 시대에는 마을을 이루어서 집단 생활을 영위함으로 자연스럽게 부족사회로, 왕조사회로 이행하였다. 일반적으로 문자를 해독함으로 그 시대의 상황을 이해하게 되면 역사시대라고 말한다. 왕조 시대가 되면 역사시대로 접어드는 길목이 된다.
문자는 어느 날 신이 선물을 주듯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신의 선물이라고 믿었다.) 오랜 세월 동안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의 문자가 되었다. 고대 문명의 발상지 중의 하나인 이집트 미술에서 미술과 문자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6~7000년 전에 이집트 도자기 벽에는 갈색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의 모양은 바위그림이 도자기 그림으로 옮겨 온 것임을 보여준다. 고대의 그림은 감상용이 아니고, 의미와 이야기를 담고 있으므로 문자의 역할을 하였다.
나일 강의 하류 지역에서 5~6000년 전에 만든 도자기를 발굴하였다. 도자기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사진) 그림을 글을 읽듯이 하여 그 내용을 알아보자. 우선 그림의 모양이 바위그림을 그대로 닮고 있다. 이 그림이 그려졌던 시기에는 바위그림도 많이 그려지고 있었다.
연갈색의 도자기 바탕에 짙은 갈색으로 강의 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항아리의 주둥이 부위에는 지그지그 선으로 나일 강의 물결을 나타내었다. 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것이 아니고 문양화하여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강에는 부메랑 모양의 배가 떠있다. 형태의 단순화로 그림과 문양의 중간 단계쯤이라고 할까. 학자들의 설명에 의하면 이 배는 삶과 죽음 사이를 운행하는 배로서 시신을 담은 관을 싣고 있다고 했다. 배의 앞쪽에는 세운 기둥에 꽂혀 있는 나뭇가지가 뒤로 굽어 있다. 바람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배의 방향을 나타낸 것이다. 배의 옆구리에는 노를 나타내는 직선 형태의 선 문양이 줄지어서 그려져 있다. 배의 갑판 위에는 두 개의 선실이 있고, 앞쪽 선실 위에는 조금 크게 그린 남, 녀가 있고, 뒤편 선실 위에는 조금 작게 그린 두 사람이 있다. 앞쪽 선실 위의 여자는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려서 둥근 호를 만들므로 애도를 나타내고 있다.(이집트 전통 관습이다.) 앞쪽 선실 위의 남자와 뒤쪽 선실 위의 두 사람을 손을 뻗혀 애도하는 사람 쪽으로 향하고 있다. 정확한 의미는 모른다. 그러나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어떤 감정을 표현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그림은 마치 속기 글씨를 쓰듯이 단순화하여 간략한 그림으로 표현하였지만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전달하는 데는 조금의 부족한 점도 없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 그림에 비하면 한 단계 발전하였다. 이집트의 오랜 전통을 참고하면 이 그림은 죽은 자를 싣고(혹은 영혼을) 나일 강을 건너서(서안으로) 사후세계로(또는 영적 세계로) 떠나가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죽음을 애도하는 장례 의례를 나타낸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도자기 그림이 갖고 있는 양식적 특성을 살펴보자. 고대 이집트 미술은 미적 감상이 목적이 아니고 실용적인 기능성을 갖추었다. 피라미드도 미적인 목적이 아니고 파라오의 시신이 훼손되지 않고 영구히 보존하기 위한 기능성을 목적으로 만들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이집트에서 순수하게 미적 동기로 만든 조각상도 초상화도 없다. 설사 아름답게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미적 표현은 부수적으로 따라온 것이다.
도자기 그림 뿐 아니라 많은 이집트 그림이 의사 소통(메시지의 전달)이라는 기능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고대 이집트의 문헌에 의하면 상류 나일강 지역과 하류 나일강 지역이 서로 언어 소통이 잘 일어나지 않았다. 이들 사이에는 소통을 위한 기호나 문자가 절실하였을 것이다. 이집트인들은 그림에서 문자로 발전하는 독특한 상형문자를 만들었다.
지금 살펴본 도자기 그림은 단순히 사진을 찍듯이 한 순간을 표착하여 기념비성으로 그린 것이 아니다. 그림에는 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집트 그림에는 그들의 종교관과 세계관을 담고 있다. 종교 의식, 장례 의례, 그 밖의 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이집트 미술은 종교나 신앙과 관계되는 미술의 일반적인 특성인 지속성과 동질성을 뚜렷이 지니고 있다. 영원히 타당성을 유지하는 종교적 관념과 유효성을 확고히 해야 하는 속성을 지닌다. 종교적인 그림은 현세와 내세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고대 이집트 미술품은 대부분이 무덤에서 발견한 것이다. 무덤 그림에서 이집트인들은 죽음 이후에도 생전의 삶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염원을 그렸다. 개인의 신앙도 무덤 그림의 표현에서 이와 같은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죽고 나서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을 바란 것이 아니고 그들의 생전에 살았던 방식대로 사후 세계에도 이어지기를 바랐다.(繼世思想) 그러므로 훼손되지 않는 육신이 필요하였다.
다시 사진의 그림을 읽어 보자. 이집트인은 나일강의 동쪽은 생전의 삶을 상징하고, 서쪽은 사후 세계가 있는 곳이라고 믿었다. 서쪽으로 지는 해는 죽음의 세계로 여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배를 타고 나일강을 건너 서쪽 강안으로 가는 것은 삶의 세계에서 죽음의 세계로 여행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도자기의 그림은 이와 같은 내용을 이야기로 담고 있다. 이야기는 시간과 공간을 필요로 한다. 그림은 시간이 정지된 평면성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을 어떻게 조화하여 표현할 수 있을까. 문자로 문장을 만들어서 이야기로 하듯이 그림을 단순화하고, 상징화하고, 문양화하여 평면화함으로 이야기를 담아냈다.
이집트의 분묘 벽화에는 풍요로운 일상생활을 많이 그렸다. 분묘 벽화는 생전의 삶을 표현한 것이 아니고, 사후 세계의 삶이 그림처럼 풍요롭기를 기원한 것이다. 벽화의 풍요로운 모습은 실제의 삶일 수도 있지만, 당시의 이집트인들이 생각한 유토피아의 표현일 것이다.
벽화에 흔히 그려지는 소재는 풍성한 식탁 앞에 무덤의 주인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식탁 위의 음식은 상위에 펼쳐 둔 것이 아니고, 겹겹이 쌓은 듯이 그렸다. 현대의 서양식 그림은 보이는 것만 그렸다. 벽화는 옆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그렇다면 식탁 위의 음식물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현대의 서양화 기법으로는 식탁 위의 모든 음식물을 그려 낼 수 없다. 이집트 인들은 모두 그려내는 방법으로 층층이 쌓듯이 그렸다. 위에서 식탁을 내려다 볼 때의 모습을 편법으로 그렸다. 무덤의 주인은 옆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그렸다. 말하자면 그림을 오늘의 서양화처럼 일시점으로 그리지 않고, 다시점 방식으로 그렸다. 이집트 그림의 특징은 여러 방향에서 바라본 모습을 한 화면에 표현해내는 다시점으로 그리는 것이다. 인체의 표현도 그렇게 하였다.
이집트 초기의 그림 양식을 보여주는 석판을 보면서 이집트 미술의 특징을 더듬어 보자. 고대 이집트 신전에서 발굴한 나르메르 팔레트(사진)는 이집트 미술애서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먼저 나르메르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부터 알아보자. 나르메르는 이집트 상형문자의 특성을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메리를 ‘나르’라고 부르고, 끌을 ‘메르’라고 말한다. 메기와 끌을 그림으로 그려놓고 읽기를 나르메르라고 읽었다. 이것은 그림을 그려놓고 음 즉 소리만 따와서 읽는다. 산과 머루의 그림을 그려서 ‘산 머루’라고 읽으면서, 실제의 산머루를 나타내는 것과 같다. 상형문자이면서 소리만 차용하는 문자이다.
문자의 기원은 그림이라고 한다. 중국 한자어의 초기 형태는 도자기에 그려져 있는 그림 형태의 문양이다. 즉 도문(陶文)이다. 다시 갑골문으로, 금문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면 그림이 문자화하는 것을 잘 보여준다. 어쨌거나 초기에는 그림의 형태로서 문자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중국과 이집트에는 차이가 있었다.
이집트의 상형문자는 나르메르에서 보듯이 각각 음성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한자는 문자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집트 그림은 음의 역할을 하지만 그림에서 문자가 유래하였음은 같다. 이집트 상형문자는 발전도, 변화도 않고 이어져 내려왔다. 왜냐면 이집트인들은 문자를 신의 선물로 믿었으므로 인간이 함부로 고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나르메르 조각판에 얕은 부조로 새겨져 있는 조각상을 통하여 이집트 미술의 특성을 추적해 보기로 하자. 그림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읽기는 쉽다. 적을 격파한 왕의 업적을 나타내고 있다. 이 조각판은 신석기 시대에 왕조가 건립되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집트 고대사는 왕조의 문을 연 제 1왕조부터, 제 2왕조, 제 3왕조, ---로 이어진다. 이집트를 통일하여 제 1왕조를 건설한 메네스 왕의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상형문자가 나타내는 나르메르는 곧 메네스 왕(BC3150-BC3125)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상, 하 이집트를 통합하였다. 그는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최고 권력자가 된 인물이다. 이제 권력이 종교적 지도자에서 정치적 지도자로 이동함으로 신-왕이라는 존재가 등장하였다. 미술도 자연히 정치 권력자를 조명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메르네르 팔레트는 그와 같은 역사적, 문화적 배경이 반영된 미술작품이다.
메르네르 조각판에 새겨져 있는 조각상들은 여러 가지 상징과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다만 이집트 미술의 특징만 살펴보도록 하겠다. 문자나 그림은 신이 준 선물이므로 사람이 함부로 바꿀 수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양식의 변화 없이 수 천년을 지속할 수 있었다. 우선 사람을 표현한 그들의 양식을 보기로 하자.
사람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방법으로 묘사하였다. 사람의 얼굴은 옆면으로 그렸다. 콧날의 표현은 측면으로 그려야 윤곽선을 뚜렷이 나타낼 수 있다. 얼굴의 특징은 옆면이 제일 나타낸다. 문제는 눈이다. 측면으로는 눈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가 없다. 이집트인들은 눈은 정면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그렸다. 그들은 동일 화면에 얼굴은 측면으로, 눈은 정면으로 그렸다. 이런 방식에 의하여 몸은 측면으로 그리면서 가슴은 정면으로 그렸다. 양측 다리와 팔은 측면으로 그려고, 양쪽 발은 모두 안쪽을 그렸다. 한 화면에 인체의 특징을 가장 잘 볼 수 있도록 그렸다. 이집트 인들은 보이는 것만 그린 것이 아니고,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그렸다.
어린이의 그림도 이와 유사하다고 한다. 그러나 어린이의 그림은 일관성이 없기 때문에 일회성으로 끝난다. 이집트 화가들은 규범성에 의하여 그리므로 일관서을 지니게 되고, 양식이라는 것이 형성되었다.
그림이란 대상을 재현한다는 것이 상식적인 해답이다. 이집트 인들은 재현을 대상을 아름답게 되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상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보이는데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엄격한 규칙에 의하여 그가 알고 있었던 사실을 근거로 그렸다. 그렸다기 보다는 지도를 그리듯이 제작하였다는 말이 더 적절하다. 고대 미술의 일반적인 규범이지만 이집트 미술은 신분이 높은 사람을 낮은 사람보다 더 크게 그렸다. 나르메르 팔레트에서도 왕의 뒤에 있는 시종은 더 작게 그렸다.
지금까지 예로 든 도자기의 배 그림과 무덤 벽화의 식탁 그림 그리고 나르메르 팔레트의 조각상 사이에는 내용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 단순히 차이라기 보다는 그림의 배경이 되는 시대가 변하였기 때문이다. 배 그림이 종교적인 내용을 담았다면 팔레트의 조각상은 왕의 권능을 표현한 것이다. 신권 시대에서 왕권이 강화된 왕조 시대로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우홍’은 미술의 기념비성을 주장하였다. 왕권이 강화되면 궁궐이나, 군사장면 등 왕권을 상징하는 예술이 발전한다고 하였다.
내용이 아닌 양식에서는 변화가 없다. 이집트 화가는 미술이 창작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림의 규칙만 배워서 그렸으므로 양식은 변하지 않고 수 천년을 이어져 왔다.
우리는 르네상스부터 오늘까지 발달해온 서양 미술에 익숙하다. 원근법과 명암법을 도입하여 착시 현상을 일으키는 그림에 익숙해지므로 이집트 미술을 낯설어 한다. 그렇더라도 미술을 제작하는 규범성은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 미술의 규칙성과 레오나르드의 인체 비례표는 대표적인 규범성이다. 오늘에 미술공부를 하는 학생이 필수로 시행하는 뎃상까지 모두 규범성에 속한다.
이집트 미술이 현대 미술에 직접적인 영향도 주었다. 1907년은 미술사에서 꼭 기억해야 할 년도이다. 이 해에 피카소가 ‘아비뇽의 처녀들’을 발표함으로 입체파 미술의 효시가 될 뿐 아니라 현대 미술의 문을 연 사건으로 간주하고 있다. 피카소의 그림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한다. 피카소는 인체를 그리면서 여러 곳에서 바라 본 모습을 한 화면에 담았다. 예로서 얼굴을 그릴 때 앞에서, 뒤에서, 옆에서 본 모든 모습을 평면의 한 화면에 모두 담았다. 말하자면 코와 뒤퉁수는 전통 회화에서는 도저히 동시에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피카소는 한 화면에 두 개를 모두 묘사하였다. 그는 보이지 않더라도 존재하는 것은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고안해낸 방법이 바로 이집트 미술 방식인 다시점 회화이다.
피카소는 서양 회화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그러나 피카소가 창안해 낸 것이 아니고 이집트 미술을 차용해 온 것이다. 다시점 회화로는 동양의 산수화에서 삼원(三遠)법도 3시점인 다시점 회화이다.
이집트 인들은 아주 일찍부터 보이는 것을 그린 것이 아니고,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