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6년에 태어나서 언제 돌아가셨는지는 불분명한 박잉걸이라는 사람은 조선 후기의 자선가로 정읍 지역을 중심으로 하천에 다리를 놓고 고갯길을 닦았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곡식과 옷을 나누어주었던 박잉걸의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여웅(汝雄)으로 현재의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만년에 이르러 활발한 자선활동을 폈는데, 그 당시 가장 큰 보시는 다리를 놓아주는 것이었다. 태인면 거산리 하천에 대각교(大脚橋)라는 다리를 놓았고, 태인 고을 육방(六房)에 많은 토지를 희사하여 아전들이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하였다.
영조 21년인 1745년에 칠보면 시산리의 구절재(구절치) 고갯길을 닦았고, 이듬해 봄에는 굴치의 잿길을 닦았다. 그 디 정유재란 때 불에 탔던 석탄사(石灘寺)를 중건하였다. 춘궁기에는 집의 곳간을 열어 밥을 제공하고, 곡식을 나누어주었더 박잉걸은 원백암에 있는 남근석(男根石, 전라북도민속자료 제13호)을 세우기도 하였다.
지금도 정읍시 칠보면 백암초등학교 주변을 ‘걸치기’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 이유는 박잉걸이 가난한 이들을 위해 언제라도 옷을 가져갈 수 있도록 나무에 옷과 신발을 걸어놓은 데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그와 비슷한 이야기가 최명희의《혼불》제3부, ‘아소 님아’에 실려 있다.
“신 새벽에 귀설은 빗자루 소리 들리면, 오늘은 또 누가 와서 마당을 쓰는고 싶더니라. 인제 후제 내가 죽더라도 그렇게 이 마당을 찾는 사람을 박대하지는 말아라. 그것이 인심이고 인정이다. 이 마당에 활인(活人) 복덕(福德)이 쌓여야 훗날이 좋지. 태장(笞杖) 낭자하면 안택(安宅) 굿도 소용이 없어. 집안이 조용하지를 못한 법이다.”
청암 부인은 이기채에게 이렇게 이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소설 속에서 누구든 곡식이 떨어져 먹을 것이 없게 되면 가난한 가장은 빗자루 하나 들고 청암 부인의 집을 찾아가 마당을 성심껏 쓴다. 마당쇠는 그것을 본 뒤 청암 부인에게 가서 “마님 아무 아무가 와서 오늘 아침에 마당을 깨끗이 쓸어 놓았습니다.”라고 말하면 청암 부인은 광으로 가서 자루에 쌀이나 보리 혹은 다른 곡식을 들고 갈 수 있을 만큼 담아내어 그가 다른 성을 가진 사람이면 직접 가지고 가게 주었고, 문중의 일가라면 마당쇠한테 가져다 드리라고 시켰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재미난 광경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