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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가주에 고성선원을 설립하고 수행하는 진월스님
전현자
진월스님과 반기문 유엔총장
질문: 스님 안녕하십니까? 스님의 출가이후의 교육과 수행이력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진월스님: 소납은 1968년 초겨울 해인사에 입산하였다. 그 무렵 해인사는 전년도에 정화이후 한국에서 첫 번째 총림으로 운영을 시작하여, 선원, 강원, 율원, 등을 갖추고, 결제를 엄격히 시행중이었다. 애초에 출가를 의도하고 갔던 것은 아니었지만, 초행길이었는데도 가야산입구부터 홍류동을 거쳐 사찰에 이르기까지의 자연환경과 일주문부터의 도량 분위기가 긴 방랑여행 끝에 고향에 돌아온 기분으로 환희심과 함께, 그 곳에 머물러야할 숙명을 느꼈다. 전생에 그 곳에서 수행했었던 것으로 짐작 된다. 행자과정에 들어가서, 사찰규범과 예절 및 의식을 익히면서, 밤마다 도사(주지)이신 지월선사로부터 『초심』과 『발심』 및 『자경문』을 차례로 배웠다. 이어서 강원의 중강스님으로부터 『치문』을 배웠고, 다음해 음력9월 수계 살림때에 고암선사로부터 도원(道元)이란 법명으로 득도되어, 자운 율사로부터 사미계와 보살계를 받아 사미승이 되었다. 지금 진월(眞月)로 부리는 것은 법호로서 1976년부터 사용된 것이다. 행자시절 한 철 동안 방장 성철선사를 시봉하며 참선을 배웠다. 1969년 동안거부터 해인총림의 법보전문강원(현재 해인승가대학)에 입학하여 지관스님으로부터 『서장』을 시작으로 사집과정을 수학하기 시작하였다. 사교와 대교과정은 각성스님께 수업을 받고 1974년 10월에 강원을 졸업하였다. 같은 해 음력 3월 범어사에서 석암스님께 비구계를 받고, 구족계를 수지하며 완전한 수행승의 자격과 품계를 갖추게 되었다. 이때까지 출가이후 6년 여간, 한국의 대표적 전문 선지식이라 할 수 있는 큰스님들, 이를테면, 조계종정 고암대종사와 해인총림 방장 성철 대종사 및 주지 지월대선사 등으로부터 참선수행법을, 강주 지관스님과 각성스님 등으로부터 교학 이력과정을, 자운율사와 일타율사 및 석암율사 등으로부터 계율을 배움으로서, 선ㆍ교ㆍ율과 계ㆍ정ㆍ혜 삼학을 두루 섭렵할 수 있었음은, 그 이후 수행 생활의 기초를 다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1974년 통도사 극락암 호국선원에서 경봉선사를 조실로 동안거를 시작으로 다음해 하안거를 마치고, 1975년 조계총림 송광사 수선사에서 구산선사와 혜암선사를 방장과 유나로 동안거를 시작하여 1977년 조계산정 인월정사에서 하안거를 홀로 마치고, 그해 비슬산 도성암에서 성찬선사를 조실로 동안거를 하였다. 1978년 사불산 대승사에서 도반들과 하안거를 하였고, 그해 불암산 불암사에서 동안거를 시작으로 다음해 겨울까지 정진하였다. 이는 극락암부터 불암사까지 6년여간 선원에서 안거와 토굴생활을 하며 참선정진에 집중하였고, 그 사이에 한국의 대표적 선사들 이를테면, 경봉, 성철, 서옹, 구산, 서암, 춘성, 혜암 등 당시 선원의 법주들을 참방하였으며, 적명, 무문, 무여, 정광, 혜국, 연수, 인각 등 현재 선원을 이끌어 가는 스님들과 함께 정진 탁마함으로서, 전통적 선수행자의 길에 매진하고 체험을 깊게 할 수 있었다. 이로서 소납의 늦은 10대부터 20대 전부를 교학과 참선 등 전통적 수행에 전부 바쳤고, 그럴 수 있었음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법희선열의 보람을 가득 누렸던 시절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질문: 스님은 조계종 국제교류위원회, WFB, URI 등에서 많은 국제 활동을 하였습니다. 구체적인 국제불교활동을 알고 싶습니다.
진월스님: 소납의 국제 활동은 1986년도부터라고 볼 수 있다. 소납의 나이가 서른이 되면서, 그동안의 학문과 수행의 결과를 세상에 회향하는 것이 불은과 시은에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되었다. 우선 세상을 이해하고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상황과 실정을 직접 겪어 보아야겠다는 판단에, 그를 위한 방편으로 현대교육을 파악하여야겠고, 하여 1980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승가학과(선학과를 거쳐 현재 불교학부로 통합), 1984년 서강대학교 문과대학 종교학과로 가서, 불교학과 종교학 과정을 거쳤다. 그를 통해 종교계를 중심으로 현대 학문세계의 지성적인 흐름을 인식할 수 있었다. 1986년 하와이 대원사로부터 법사로 초청되어 가서, 현지의 불교계 및 다른 종교계의 인사들과 교류하며, 국제적인 안목을 갖게 되었다. 먼저 하와이국제불교도협회(Hawaii Association of International Buddhists, HAIB)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고, 수련담당부회장을 담당하였다. 당시에 일본, 중국, 태국, 월남, 미국 등의 사찰 및 스님들과 재가 지도자들이 참여하였고, 종교 및 학술회의 등의 각종행사와 의식을 통하여 소납은 한국불교의 위상을 세우는데 노력했다. 아울러, 하와이대학 종교학과에서 석사과정을 밟는 동안, 다른 종교인들과 어울리며, 특히 불교와 기독교 관련 학술 및 종교행사에 참여하였고, 나중에는 불교-기독교학회(Society for Buddhist-Christian Studies, SBCS)의 한국지역 국제자문위원(International Advisor)로 현재까지 소임을 보고 있다. 1987년 로스앤젤리스에서 미국불교의회(American Buddhist Congress, ABC) 결성당시에도 참가하였고, 1988년 8월, 몽고 울란바토르에서 열린 아시아불교평화회의(Asian Buddhist Conference for Peace, ABCP)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여 몽고, 중국, 일본, 월남, 태국, 인도, 티벳 등 불교계 지도자들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92년 가을에 버클리대학 박사과정 입학으로 캘리포니아로 옮기기까지 대만에서 개최된 국제선학대회(International Conference on Chan/Seon/Zen)와 하와이대학 평화연구소의 '평화를 위한 불교와 지도력 국제세미나 (International Seminar on Buddhism and Leadership for Peace)' 및 태국의 참여불교국제연대(International Network of Engaged Buddhism, INEB) 참여 등 내외의 각종불교관련 학술대회와 행사에 참석하고 국제적 활동을 이어갔다. 1994년 켄터키 RPT세마니에 토머스 머튼이 주도했던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불교-기독교 수도자대화(Buddhist-Christian Inter-monastic Dialogue)에 대승불교권을 대표해서 참여했고, 스위스의 러셀하우스에서 열린 불교-기독교학회 유럽대회에도 참석했다. 1998년 버클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귀국할 때까지, 매년 미국에서 열리는 미국종교학회 (American Academy of Religion, AAR)와 불교-기독교학회에 대부분 참여하였고, 버클리대학 주도의 전자불전협회(Electronic Buddhist Text Initiative, EBTI) 국제학술대회 및 달라이라마와 틱낫한 스님 등의 각종 지역행사에도 참여하였다.
대한불교조계종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국제 활동은 1999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총무원장의 국제보좌역을 하며, 2000년도에 출범한 국제교류위원회의 설립부터 부위원장으로 활동에 참여하였고, 태국의 세계불교도우의회(World Fellowship of Buddhists, WFB)에 참석하여, 조계종의 재가입을 신청하였다. 2002년 쿠아라룸푸대회부터 정식지부로 승인된 이후, 집행위원(Exactive Committee Member)으로 피선되어 2012년 한국대회에서 부회장으로 직책을 바꾸기까지 10여년을 봉사하였다. 2005년 태국에서 개최된 유엔베삭절행사(United Nation Day of Vesak, UNDV)에 참석하고, 이후 매년 개최되는 이 대회에 국제위원회 (International Council of UNDV, ICDV)에 위원으로 현재까지 참여하며, 아울러 국제불교대학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 of Buddhist University, IABU)의 집행위원으로도 봉사하고 있다. 2013년 인도 뉴델리에서 창설된 국제불교연맹(International Buddhist Confederation, IBC)에도 참여하였고, 운영위원(Governing Board Member)의 직책을 맞고 있다. 2015년 인도 델리에서 창설된 세계불교문화와 보리달마 우의회(World Fellowship of Buddhist Culture and Bodhidharma, WFBC&B)에 회장으로 피선되어 소임을 보고 있다. 이로서, 가장 오래된 WFB를 비롯하여, UNDV, IABU, IBC 및 최근의 WFBC&B 등 국제적 혹은 세계적 불교조직 단체의 회장단이나 중앙집행위원회의 임원 등의 주요직책에 선출 피임되어 중추적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URI (United Religions Initiative 종교연합) 는 종교적 UN(United Nation)을 자임하는 세계적인 초종교 조직으로, 새천년의 여망이 컸던 2000년에 정식 출범하였다. 그 배경을 보면,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World War II) 직후, 다시는 그 같은 전쟁을 막고 세계평화를 구현하자고, 세계지도자들이 모여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연합(UN)을 창설하였고, 그 50주년을 맞으며 그를 기념하는 연합종교행사의 개최를 유엔본부로부터 요청받은 샌프란시스코 성공회(Episcopal Church)의 윌리암 스윙 주교(Bishop William Swing)가 그 행사를 준비하기 위하여 약 2년 동안 여러 종교지도자들을 만났고, 많은 협조 속에 199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그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그 뒤에, 스윙주교는 평화를 주장하고 가르치는 종교가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성찰 속에, 유엔과 같은 종교적 국제기구를 통해 세계평화를 이루는데 기여하고자, 다시 아시아와 유럽 등지의 세계적 종교지도자들을 방문하여 자문을 듣고, 1996년부터 그 기구창설을 준비하는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해 가을, 샌프란시스코 성공회로부터 준비모임에 초청을 받은 필자는 그 뒤로부터, 1997년부터 2000년도까지 매년 200여명의 세계종교지도자들이 모이는 정상회의(URI Summit)에 불교 또는 아시아지역 대표로서 헌장기초 및 조직준비에 참여하였고, 2000년도 헌장조인식(Charter Signing Ceremony)에도 참석하여 서명하였으며, 세계위원회(Global Council Trustee)의 아시아 지역대표로 선출되어 2008년까지 복무하였다. 한국에서는 1999년 5월 동국대학교에서 한국종교연합(URI Korea)를 창설하여 대표로 피선된 뒤로 2008년까지 회장의 소임을 맡아왔으며, 그해에 아시아종교연합 (URI Asia)의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어 금년 초까지 역할 하였고, 지금은 명예직과 지역협조관(Regional Coordinator)으로 봉사하고 있다. 종교연합은 세계 각 지역에서 최소 세 종교 이상이 모여서 구성되는 협력조직(Cooperation Circle)을 기초로 국가적 및 대륙 지역적, 나아가 지구적인 연대로 조직되어 있는데, 현재 세계의 8개지역 95개국 800여개 지부에 100여개 종교가 참여하고 있으며, 수 백 만 명의 회원들이 세계평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는 범종교 최대기구이며, 앞으로 더욱 확대 발전되어 나갈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제교류위원회 활동에 대하여>
국제교류위원회는 조계종의 종령기구의 하나로서, 새천년을 기대하는 국제적 여망 속에1999년도에 조계종의 국제적 위상제고와 역할확대를 목적으로 기획되어 2000년도에 출범하였다. 조계종 총무원 사회부장 (국제부문주관부서장, 당연직 위원장), 포교원 포교부장을 당연직으로 포함하여, 국제분야 관련 교수급의 학자와 국제기구 활동가 등 전문적 식견과 경험이 있는 스님들과 재가자 등 10명 내외로 구성되며, 국제교류관련 종책 및 사업 관련 자문을 하고 있다. 분기별로 정기회를 가지며, 사안과 필요에 따라 수시로 회의를 열 수 있다. 연초와 연말에 사회부 국제팀의 사업계획과 경과보고를 전제로 심의 요청사항에 대한 논의를 하고 제안을 할 수 있다. 위원들은 해외지원사업 심의와 국제행사 준비 및 진행에 대한 자문도 하고, 건의와 참여도 할 수 있다. 임기는 2년으로 총무원장이 임면하는데, 업무성격상 국제팀의 요청과 사회부장의 추천과정이 선행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소납은 위원회 창립이후 금년까지 계속 연임되었으며, 호선인 부위원장으로 봉사해 왔다. 아울러, 2012년부터는 총무원장 국제특보로 피임되어 소임을 다해왔지만, 아쉬운 점은 종단의 국제활동에 대한 인력과 재정적 지원 부족으로 기대치를 이루는 데는 많은 제약과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국제교류는 일종의 외교적 사업이므로 공신력을 갖고 일관성 있게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유지해 나가야 하며, 그 것도 일종의 투자라고 본다면, 누구라도 그 성패의 가능성을 나름대로 짐작해 볼 수 있을 줄 안다. 결국 제한된 인력과 예산의 분배에 있어 우선순위가 문제인데, 이는 실질적으로 책임있는 최고위지도자의 상황인식과 소신의 설득력 및 정책적 결단이 요청된다고 볼 수 있다.
<동국대 강의에 대하여>
소납은 1998년 봄에 버클리대학에서 불교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에, 그해 가을부터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에서 선불교 관련 및 종교심리학 강의를 시작했다. 2005년 봄부터 2006년 여름까지 서울캠퍼스 정각원장으로 개교100주년행사를 진행하였고, 그해 가을부터 교수가 부족했던 경주캠퍼스 선학과(현재는 불교학부로 통합)로 옮겨 한국선종사, 한국선사상, 선전강독, 종전강독, 선문화, 좌선실수 등의 학부강좌와 한국선전통연구, 조사선연구, 현대선불교연구 등의 석사와 박사과정 세미나를 지도했고, 선연구소와 차문화연구소 등을 이끌며 특강과 국제학술회의 및 관련행사에 참여하다가 2015년 봄학기를 끝으로 정년퇴임하게 되었다. 이는 선불교의 사상과 역사, 수행 및 문화를 인도와 중국을 거쳐 한국에 이르는 전통과 현대의 사회적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그 동안의 학문적 연찬과 개인적 체험을 결합하여 젊은 세대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바로서, 소납의 학교와 종단을 위한 마지막 봉사였다고 볼 수 있겠다.
질문: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서는 해외에서 활동하다가도 모국이나 고향을 찾는데 스님은 이와는 반대로 많은 활동을 하였던 한국을 떠나 북가주에 자리를 잡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진월스님: 학교를 정년으로 퇴임 하고나니, 현실적으로 나이가 들었음을 실감하고, 그에 합당한 살림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동안 학교나 종단 등의 공적인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였었는데, 앞으로는 자신에 필요한 시간을 더 많이 가져야겠다고 작정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18년을 가정과 일반 사회에서 지내다가, 출가입산으로 회향하여 12년간 자신을 위해 수도하다가 다시 사회로 회향한지 35년이 지났으니, 이제 다시 산중으로 재회향하여 여생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만약 국내에 머물게 되면 여러 가지 반연으로 번거로움이 많아질 것 같아서, 해외에 나가 있는 편이 더 자유로울 것 같았다. 불교의 황무지인 아프리카나 남미로 가서 불법을 펼쳐볼까도 생각해 보았으나, 은사 고암스님께서 생전에 “현대 불국세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미국포교가 우선이니, 다음 생에는 미국에 태어나 수행전법 하여야겠다”고 하신 발원과 유지를 되새기며, 소납은 다음 생으로 미루기 보다 금생의 여년을 미국에서 보내야겠다고 작정하고 미국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아울러, 작년 가을 인도로부터 태동하여 금년 봄부터 출범한 ‘세계불교문화-보리달마우의회(World Fellowship pf Buddhist Culture and Bodhidharma, WFBC&B)의 회장으로 피선된 이후, 인도로부터 중국을 거쳐 한국에 이른 선불교의 법맥을 미국으로 펼쳐야겠다는 책임감도 중요한 동기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막상 어디로 갈 것인가 고려중에, 그 동안 연고가 있던 샌프란시스코 배이 지역이 발길을 끌었다. 근래 그 곳의 한국불교 상황이 시급함을 알고는, 우선 그 지역에 가서 사정을 알아보고 가능한 조치를 해 보아야겠다는 의무감이 생겼다.
진월스님과 달라이라마
고성선원
21810 Mines road, Livermore, CA 94550
Tel. (408) 897-0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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