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산계곡 가득 메운 부처님, 어디서 오셨나요”
천불천탑, 淨土 열려는 민중의 소망 담겨있어
천년 세월 지켜온 90여구 불상 새세상 발원
운주사의 마애여래좌상은 마치 바위 속에 법신을 감추고 있는 것만 같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그 모습을 대할 수 없을 만큼 마멸이 심하여 겨우 얼굴의 형태와 우뚝한 콧날 그리고 귀만이 뚜렷하다.
휘황찬란하게 번쩍이던 네온도 꺼지고 도시가 막 잠을 자려는 시간, 홀연히 떠난 공부방으로부터 납자의 푸른 눈빛과도 같은 별을 쫓아 다다른 이곳, 금풍(金風)에 온 몸을 고스란히 드러낸 나무들과 더 이상 서 있기를 거부하며 스러져 간 풀잎들이 도열해 있었다. 풀밭에는 밤새 내린 서리가 내놓는 겨울 냄새만이 묻어났으니 코끝은 알싸했고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어느덧 반쪽이 되어버린 달빛에 눈이 시렸을 뿐 몸을 숨길 안개조차도 없었다.
새벽바람에 드러난 순례자의 몸은 한기를 이기지 못하고 한번 씩 진저리를 칠 때 마다 움츠러들었지만 부처님 당신은 그렇지 않았다. 새벽부터 산중회의라도 하시려는 것인가. 한두 분도 아니고 수많은 부처님이 산골짜기에 모이셨으니 말이다. 짙은 그늘이 벗겨지지 않은 만산계곡에 들어서자마자 맞닥뜨린 여여한 부처님들의 모습은 언제나 그랬듯이 장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모습에 숙연해진 순례자는 언제나처럼 몸과 마음을 숙여 그 장면에 예경의 마음을 갖추지 않을 수 없었다.
부처님의 모습이라고 해서 반드시 장엄한 것만은 아니다. 그의 존재는 그렇지 않되 그 모습은 피폐할 수도 있으니 바로 이곳의 부처님들이 그렇다. 찬란한 전각을 마다한 부처님들이 산기슭에 기대어 서 있기도 하고, 들판에 앉기도 했으며, 산마루에 누웠는가 하면 이 생 다하신 것인지 몸 잃어버리고, 머리 잃어버린 채 순례자를 반기는 곳, 그 모습 앞에서 누군들 숙연해지 않을 수 있으며 처연한 마음 붙들지 않을 수 있을까.
마치 구름 같기도 한 화염문을 광배에 두른 것이 마애불과 가장 많이 닮아 있는 부처님이다.
더군다나 이곳은 모든 연역(演繹)과 귀납(歸納)을 동원해도 쓸쓸한 절터일 뿐 절은 아니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번듯한 전각이 들어섰으니 다시 절이다. 그렇지만 내 마음 속에서는 또 다시 절이 아니다. 이곳으로 처음 걸음을 나누었던 1984년 봄의 장면들이 너무도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때도 스님들이 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여염집과도 같았으며 부처님들이 논틀밭틀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장면들은 청년의 마음을 사로잡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쯤 이야기했으면 짐작하겠지만 이렇듯 혼란스러운 이곳은 천개의 불상과 천개의 탑이 솟아 있었다는 운주사(雲住寺)이다.
일주문을 들어서면서부터 번듯한 길을 못 본 체 했다. 마애여래좌상이 새겨진 산신각 뒤의 바위 앞으로 대뜸 향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대신 키 큰 탑 주위를 맴돌며 서리 가득한 풀밭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왜 하필 탑과 불상이 천 개씩 이었을까. 그렇다고 해서 나는 과거 장엄겁(莊嚴劫)과 현재 현겁(賢劫) 그리고 미래 성수겁(星宿劫)의 삼세삼천불(三世三千佛) 중 현겁의 천불신앙을 끌어 들여 현학(玄學)의 허세를 떨어가며 풀어가는 건조한 해석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운주사에게 잘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숫자에 있어 동양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장 큰 수는 9, 99, 999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천.지.인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이 우주의 근본을 만드는 것이기에 그 3과 그것이 다시 세 번 곱해진 9를 서수(瑞數)라고 여겼던 것이다. 서수는 대개 홀수이며 전통사상에서 환영을 받았지만 짝수는 홀대를 받기 마련이었다. 가장 큰 기와집은 99칸이었고 임금은 궁궐의 아주 깊숙한 구중(九重)에 계셨으며 차도 아홉 번은 덖어야 귀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짝수는 사용하기를 저어하는 기수(忌數)였다. 그럼에도 이곳은 천불천탑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니 그 의미 또한 허튼 마음으로 스쳐 지나 가버릴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아홉이라는 수로 상징되는 한 세상이 끝나고 다른 세상이 열린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천(千)이라는 수는 999라는 수와는 다른 세상인 것이다. 한 세상이 끝나고 곧 다른 세상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천이라는 숫자는 단순히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가장 작은 수일 수도 있다. 아직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 전인 공(空)의 상태, 곧 영(零)의 상태이니까 말이다. 그 칠흑 같은 어둠의 세상으로 부처님들이 모여 들었으니 이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자유로우며 아름다운 삶으로 가득 찬 부처님의 세상을 열려던 민중들이 간절히 청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곧 미륵상생경이 아니라 미륵하생경의 용화세계를 꿈꾸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두툼한 탑의 지대석에 기대 앉아 이제 막 해가 비쳐들기 시작한 만산계곡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또 하나의 생각이 떠오른다. 절 아래 있었다는 중장터에 갖가지 모습을 한 스님들이 모여 들었듯이 만산계곡 또한 각양각색의 부처님들이 모여 들었다. 마치 전시장이라도 된 듯이 좌불과 입불 그리고 쌍배불(雙背佛)과 와불(臥佛)로부터 마애불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1990년 미술사가인 이태호의 조사에 따르면 붙박이인 마애불을 포함하여 좌상은 10구 남짓하며 와상은 2구 그리고 22구의 편(片)을 제외하면 현재 남아 있는 90여구의 불상 중 56구가 입상이다.
불상의 수는 서로 다를 지언 정 그 비율은 1941년 천태초등학교 교사였던 박형진, 미술사가인 성춘경의 1979년과 1984년의 조사 그리고 1990년 이태호의 조사에 이르기까지 달라지지 않았다. 대략 입상이 좌상보다 4~5배가량 많은 것이다. 한 장소에 조성된 불상 중 입상이 많다는 것은 더 이상 누워있거나 앉아 있기보다 일어나려는 욕구를 강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가 와불이라고 부르는 만산 꼭대기의 부처님 두 분은 미리부터 열반상인 와불을 염두에 두고 조성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 일어서지 못한 부처님인 것이다. 누워 있는 채 조각을 하고 그것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여하한 까닭으로 마무리를 하지 못한 것인 셈이다.
그것은 알듯 모를 듯 탑에 새겨놓은 기호와도 같은 문양과 함께 순례자에게 덩치 큰 생각을 하게 해 준다. 많은 사람들이 기호의 근원을 과거로부터의 전래설을 주장하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들에 대한 불가사의함을 표하곤 했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운주사는 미완성이기 때문이다. 운주사는 미래를 향한 현재진행형일 뿐 과거완료형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 문양들은 과거로부터 전래되어 온 것이 아니라 당시에 창조 된 것이며 아직 사용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만산 꼭대기의 부처님이 일어서서 비로소 용화세계가 출현하였음을 알리는 날부터 그 문양은 하나의 완성된 의미로 민중들에게 다가 갔을 것이다.
점점 계곡을 밝히던 햇살이 들머리의 탑에까지 왔을 때야 몸을 움직였다. 한 분, 한 분 그 모든 부처님들에게 두 손 모으고 허리 굽혀 절을 하곤 산 중턱으로 올랐다. 탑이 세워졌다간 스러져 간 자리에 두 발 디디고 서서 마치 내가 탑이라도 된 양 머물렀다가 다가 간 곳에는 둥근 쟁반과도 같은 모양을 한 바위 일곱 개가 흩어져 있다. 칠성바위, 곧 북두칠성이다. 부처님 계신 곳에서 난데없이 칠성바위를 만난다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절집에 칠성각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불교가 민간신앙을 포용한 것일 뿐 칠성신앙은 본디 우리 고유의 신앙이었다. 하늘의 옥황상제가 머무는 북두칠성을 신체로 삼고 칠성을 향해 무병장수와 생기복덕(生氣福德)을 비는 행위가 곧 칠성신앙인 것이다. 그런데 눈앞의 바위는 별자리와 같은 배치로 놓여 있으니 의아하기 짝이 없다. 더구나 돌 하나의 크기 또한 만만치 않아서 허튼 마음으로 깎아 놓은 것이 아님은 분명하며 곁에는 칠층석탑이 호위 하듯이 서 있으니 말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운주사의 불상이 조성되었을 무렵인 고려중기만 하더라도 나라에서 북두에 백성들이 두루 평안하며 임금의 장수를 바라는 기원을 절에서 올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규보가 쓴 ‘나라에서 북두(北斗)에 연명 도액(延命度厄)하기를 기원하는 도량문’이 바로 그것인데 절에서 북두칠성을 향한 훈연(熏筵)을 열었으며 제를 주관한 사람은 청정한 비구를 뜻하는 계류(戒流)라고 밝히고 있다. 그렇지만 그가 지은 또 다른 글인 ‘북두하강(北斗下降) 초례문(醮禮文)’에서는 도가(道家)의 결재(潔齋) 규칙에 따른 제의인 선록(仙)을 행한다고 했으니 칠성신앙은 불가와 도가 그리고 왕실과 민간을 가리지 않고 성행했음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로 미루어 보면 운주사의 이 모든 돌조각은 불가와 도가 그리고 민중들의 마음이 서로 습합된 결정체인 셈이다.
이윽고 다다른 와불, 그러나 나는 탑돌이 하듯이 그 곁을 돌기만 했을 뿐 서둘러 마애불 앞으로 내려섰다. 나무에 기대어 그윽한 눈길로 바위 속에 모습을 감춘 부처님을 바라보다가 부처님 당신에게 물었다. 만산 골짜기를 가득 메우고 있는 이 부처님들은 어디서 오신 것이냐고 말이다. 아무 대답 없으시기에 내가 대답했다.
조금 전 곁을 맴돌았던 만산 꼭대기의 부처님이 일어서는 날, 이 골짜기에 앉아 계신 모든 부처님들 벌떡 일어 날 것이며 바위벽에 아로새겨진 부처님 당신 또한 바위를 박차고 나올 것만 같다고 말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세상 열어 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말을 해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을 뿐 더러 표정 또한 그대로였다. 비록 오늘 나의 생각이 허황될지라도 나는 믿으련다. 이 골짜기의 모든 부처님이 미륵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곧 바위를 박차고 나온 부처님이 용화수 아래에 연 법석에 참석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으련다.
이지누 / 기록문학가
■운주사 마애여래좌상은
마모 심해 얼굴.코.법의자락등 희미
수많은 불상 중 광배 새긴 것 두 곳뿐
앞에 보이는 것이 보물 제797호인 석조불감이며 가장 왼쪽 끝에 있는 탑이 보물 제796호인 9층석탑이다.
운주사는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에 있다. 경내에 보물 제796호인 9층 석탑, 두 부처님이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 계신 보물 제797호인 석조불감이 있으며 보물 제798호인 원형다층석탑이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운주사답게 하는 것은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부처님들이다. 크게 여섯 군데의 장소에 부처님들이 계시지만 모두 노천에 있다.
1991년의 조사에 따르면 석불편을 제외하고도 모두 70여 구에 가까운 불상들이 있는 셈이다. 크기가 5m에 달하는 마애여래좌상은 따로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으며 대웅전 오른쪽 뒤인 산신각을 에워싸고 있는 검은 바위벽에 새겨져 있다. 그 모습은 일주문을 지나 들어가다가 왼쪽 들판에 세워져 있는 광배와 한 돌에 새겨진 여래좌상과 유사하다. 운주사의 그 많은 불상들 중 광배를 지닌 것은 그것과 마애여래좌상이 유일하며 몸을 에워싸고 있는 화염문 또한 같은 양식으로 표현되었다.
수인 또한 두 손을 가슴께로 올려 모은 운주사 특유의 그것과 같으며 머리 주위로 둥근 두광이 표현되어 있고 목에 삼도가 분명하게 보인다. 마모가 심하게 되어 얼굴 부분의 코와 귀 법신을 에워싼 화염문 그리고 어깨와 무릎을 덮은 법의 자락만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눈과 입은 운주사의 몇몇 다른 불상들처럼 새겨지지 않았던 것 마냥 아예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와 같은 모습을 한 마애불은 드물지만 보물 제1123호로 지정된 지리산의 정령치의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의 주불(主佛)과 친연성이 있어 보인다. 운주사의 천불천탑은 신라말의 국사(國師)인 도선(道詵, 827~898)이 하룻밤에 조성했다고는 하지만 불상의 양식은 도선의 생존시대보다 훨씬 후대인 11세기~12세기 정도로 추정된다.
찾아가는 길
호남고속도로 송암톨게이트를 지나 용산교차로 다음에 나오는 지원교차로로 나간다. 우측으로 접어들어 화순 이정표를 보고 고속화도로를 따라 화순읍을 지나 능주나들목으로 내려가 평리사거리와 골프클럽을 지나면 이내 도암삼거리에 닿고 운주사이다. 광주에서 대략 50분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