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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산전우회 귀하
인제 현리는 내린천이 흐르는 곳이었고,
풍광이 아름다웠지.
현리에서 진다리는 걸어서 30여분 거리.
진다리 7971부대 앞에는 개울이 흘렀고,
진다리에서 귀둔을 지나 가리산까지
7971부대125야전공병대대여!
“인제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
머나먼 길 고개 고개넘어 다리건너 유격대를 지나 오르막 가리산중턱의 7971부대125야전공병대대의 추억을 반세기가 지나 기억에 올리다.
세월과 함께 옛 125야전공병부대가 쓰던 막사는 703특공연대가 들어와 가리산산악특공대로 바뀌었다.
오 멀고도 머나 먼 오지 가리산이여!
그시절이 생각 나 소감을 피력해 보다.
영하30도를 오르내리는 가리산의 겨울은 춥기도 추웠지.
난방 기름통이 어는 추위도 있었고.
전우님들이여 내말이 틀린말은 아닐것이요?
김만일전우 안영한전우 김근태전우 김종덕전우 고광철중대장님 2019. 11월 모일의 통화,
옛 추억을 느끼게 해주어 고맙수.
김만일전우는 나와 같은날 철도공사를 퇴직했구먼.
“인제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의 구전처럼 오지의 가리산 7971부대!
7971부대의 내가 찾고자 했던 사람들 장비과 구레이다운전원 박경원, 급수대 김천섭, 곽진희
어디에서가 황혼의 시절을 보내고 있을줄 알고 열락을 취해 보았으나 이미 저승길로 가버렸다는 소식들으니 인생무상 아니런가!
아무리 인생이란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라지만 이세상과 작별은 슬픈이야기라네.
2019년도 달랑 달력 한 장 남겨놓고 세월의 빠름을 실감하는 때에 새로운 삶의 역사를 이룩합니다.
가리산 전우님들 소식이라도 오고 간다면 자유인 나그네는 즐거운 마음 간직하며 행복할것이요.
감사합니다.
2019.12.2.
자유인 인생 나그네 조동화
1972-1975진다리와 가리산을 기억하다.
5016-7971부대125야전공병대대-2
자유인 인생 나그네 군시절 진다리와 가리산을 기억하다.
“당백” 의무대 조병장입니다.(부대인사구호)
가리산 7971부대 125야전공병대대에 복무하였던 추억이 그리워 7971부대의 위병소앞 부대표지판과 7971차량 표시가 선명한 그시절을 추억하다.
가리산 유격대(간부교육대) 올빼미 유격 훈련장 모습이 담긴 사진도 추억하고 싶다요.
가리산 유격대는 PT체조, 외줄타기 두줄타기 힘든 지옥훈련 모두가 추억!
자유인 인생 나그네가 가지고 있는 사진과 안영한전우님이 가리산전우회카페에 올려놓은 사진, 김종덕전우님이 올려놓은 사진을 허락도 받지않고 가져와, 가리산 7971부대의 추억을 되세기고자 합니다.
추억 44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가리산 유격 도하훈련장에서 나(조동화 좌측) 남동현유격대 조교(우측)⇓
나무는 푸르러 유격대 남동현조교와 제대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 기념으로 남긴 사진 같네구랴.
유격대 남동현조교는 구례가 집이었다고 하는데, 제대후 만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있다.
둘이서 다정히 포츠를 취하고 사진을 찍은 장면만큼이나 가까웠는데, 직장생활에 쫓기고 바쁜일상에 찾을 여유가 없었을까?
군시절의 인연들과 관계를 맺지못한 지난 세월이 후회가 되는구랴.
사진배경을 보니 유격중대장 경고 주의표시가 있구먼
가리산 유격 도하훈련장 남동현조교(좌측)와 우측 유격조교는 서울이 집인 이병장유격대조교 서울에서 북가좌동에서 우연히 한번 만났음⇓
차량에 7971마크가 보이는구먼.
오 가리산 7971부대의 추억이여!
위병소 앞 가리산 7971부대 간판을 추억하여 안영한전우님 사진을 가져와 올렸음⇓
7971부대의 위병소 앞 “7971부대의 간판” 추억이 새롭구먼
감사하우!
위병소 앞 7971부대 간판을 추억하여 김종덕전우가 올려놓은 사진을 가져왔음⇓
사진에 김근태전우님 사진이 선명하네구랴.
김종덕전우님 때문에 김근태전우와 통화를 할수 있었음을 감사드리고 추억할수 있어 다시한번 감사하구먼.
가리산 유격훈련장 부근 차량 7971부대마크가 보이고 차에 타고 있는 전우는 누구일까?⇓
유격대 훈련장과 차량의 7971부대 마크를 추억 감사드리고, 김종덕전우 고맙네그랴.
가리산 유격훈련장 부근 좌로부터 나(조동화) 강경일전우(진안이 집) 우측 두사람은 유격대 조교임⇓
가리산 유격중대 앞 막사이구먼.
강경일전우는 35사단 훈련소에서 춘천에서 2주간 후반기교육 강원도 인제 현리 가리산까지 군 동기생 아니었던가!
강경일전우 진안이 집이었던 군동기생의 인연을 사회에서는 망각하고 지내었으니 세월이 원망스럽소.
가리산 유격대 훈련장에서 구급낭을 멘 위생병은 나(조동화)입니다.⇓
긴급 응급환자 발생시 조치하라고 파견 나간 것 같소이다.
호랑이 담배피던 이야기 같은데 구급낭속에 별약이나 들어 있다고, 겨우 소독약, 소화제, 해열진통제, 핀센트, 압박붕대, 무좀약 상처에 바르는 연고등이 고작이었지요.
의무대 위생병 조병장 부대에서 선망의 대상이었으리라.
가리산 유격대 외줄타기 코스의 병사는 김근태전우같소이다.⇓
김종덕전우가 올려놓은 사진으로 가리산 유격대 줄타기 추억을 느기고파 올렸소이다.
김근태전우의 사진은 김종덕전우가 여러장 올려놓아다우.
김근태전우는 김종덕전우한테 고맙다고 인사해야 도리같소이다.
유격 안영한전우가 총까지 메고 외줄타기하는구먼⇓
유격대 외줄타기 추억을 느끼고자 안영한전우가 올려놓은 사진을 가져왔다오.
안영한 전우님!
군시절 인연들과 두루 사회에 나와서도 연락하고 좋은관계를 유지한 모습이 아름답네요.
가리산 부대들어가는 입구 다리에서 찍은 사진이군요!⇓
김종덕전우가 올려놓은 사진을 가지고 왔수다.
가리산 추억을 느끼고 싶은 마음에 김종덕전우 감사하우.
자유인 나그네 조병장도 옛 군시절 가리산의 추억이 그리워 가리산을 찾아 보았으며, 지금은 이다리의 모습도 많이 변해 있으리요.
추억을 느낄수 있는 귀한 사진을 남겨주어 그시절 가리산의 입구의 추억을 느낄수 있다니 즐겁지 않겠는가. 김종덕전우 다시한번 꾸뻑
1974년 125야전공병대대 1중대1소대원들 한계령도로 보수공사를 나가다. 김종덕전우가 올려놓은 사진을 가져오다.⇑
맨 좌측이 김종덕전우같구먼
사진속의 얼굴들은 김종덕전우가 댓글로 남겨주오.
험산준령을 뚫고 만든 “한계령 길”
7971부대 125야전공병대대 한계령길 개척자들
1974년-1975년 김종덕전우가 1중대1소대 소대원들과 한계령보수작을 위해 수시로 출동한 군시절이 생각이 나 가리산전우회 카페에 실린 글을 가져왔습니다.
대전에 사는 김종덕전우는 대전에 자리를 잡아 삶을 여행하고 있네요.
김종덕전우의 무궁한 건승을 기원합니다.
인생길처럼 굽이굽이 굴곡이 심한 한계령 길!
강원도 인제군에서 한계령을 넘어 양양군 오색에 이르는 ‘국도 44호’ 한계령 구간은 최근 건교부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뽑혔다. 내설악과 남설악을 잇는 이 길은 7형제봉과 주전골 등 남설악의 빼어남을 감상할 수 있는데다 한계령 정상(한계령 휴게소)에서 바라보는 비경이 매우 뛰어나 연중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이 도로는 1966년 4월 육군 모 군단 공병부대가 첫 삽을 뜬지 71개월 만인 1971년 12월 13일 최 난공정인 한계령의 암벽을 꿰뚫음으로써 완공됐다. 개통식은 1971년 12월 27일.
강원도 동해 양양에서 진부령을 넘어 인제에 이르는 1백20km의 설악산 우회도로 대신 영동과 영서를 46km로 가로지르는 ‘설악산 횡단도로’는 6년 동안의 난공사 끝에 동서는 56km가 단축됐다. 해발 1천m의 높은 산줄기를 뚫고 도로를 닦는 일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연인원 30만 명이 동원된 이 공사에는 10만 달러의 외화와 1억5천만 원의 원화가 들었다. 동원된 차량장비만도 2만2천3백대, TNT 폭약 53t에 뇌관 10여만 발을 터뜨려 20여만 입방m의 바윗돌을 깨었고 4만5천부대의 시멘트가 소요됐다.
양양에서 한계령 방향으로 2.5km. 흘림골 입구를 조금 지나 도로 오른쪽에 ‘공병 125대대’라는 비(碑)가 보인다.
‘개척의 완결점. 개척정신은 표고 험한 설악에 도전하여 동서를 잇는데 승리하였노라. 육개성상의 대역사가 오늘 여기서 완결되나니 자연의 신비 속 여기에 우리의 개척정신을 영원히 기념하노라. 최후의 연결점에서 - 1971년 11월30일 제125야전공병대대개척자들’
대설악을 ‘뚫은’ 이들이 세운 기념비다.
자그마한 비(碑)가 세워진 ‘자리’에는 남다른 사연이 숨어있다. 한계령을 정점으로 외설악 쪽에서 길을 뚫고 오르던 7971공병부대 1중대장 정모 대위와 내설악 쪽에서 도전하던 2중대장 반모 대위가 감격의 악수를 나눈 장소다. 군장병들은 설악 횡단도로가 마지막 연결된 이 지점에 시문이 새긴 돌을 세웠다.
이 횡단도로는 공사의 편리보다 아름다운 설악의 ‘살점’을 보호하는데 역점을 뒀다. 자연의 모습을 살리기 위해 석축을 쌓고 ‘꼬부랑길’을 많이 만드느라 공사는 더욱 어려웠다. 공사의 40%가 암반을 부수는 작업. 난 공사 중에서도 난 공사였다.
사진 한 장 남긴 중대 연락병 안길선전우!⇓
익산이 고향이던 전우 안길선은 제대후 몇 번 만났으나 소식이 끊기였고, 이사진은 1973년 안길선전우 이등병때 신남 부교 놓은 훈련장 같소이다.
신앙심이 깊었던 안길선전우는 아마 목사가 되었으리라.
김종덕전우가 가리산전우회카페에 올려놓은 사진이 올시다.⇓
가리산 피나무 바둑판 사건과 관련있는 소대장얼굴이 나와 있기에 옛시절이 생각나 가리산 피나무 바둑판 사건을 고백함.
가리산에서 말년이 되어가는 때, 피나무 바둑판 또는 박달나무 바둑판을 제대기념으로 가지고 가는 시절이 있었다.
자유인 나그네 가리산 조병장도 1975년 피나무바둑판을 구하여 화물로 집으로 보내었는데, 한번은 1중대 창고에 들러 피나무바둑판이 있었기에, 말하자면 쎄비하여 위병소 밖 옷수선집에 맡겨놓았으니 1중대 소대장이 어떻게 의무대 조병장이 가져간줄 알고 난리가 난적 있지롱.
소대장도 기념으로 집으로 보내고자 피나무바둑판을 소대원에 부탁하여 만들었겠지만, 조병장 잽싸게 창고에 있는 것을 살알짝 쎄비했으니 뿔따구 많이 났겠지.
몇일 지난후 나를 불러서 몽둥이로 팰라고 하기에 도망을 쳐 모면한적 있수다.
여기까지만 그시절 피나무바뚝판사건 고백하나이다.
이사진속에 3사 나온 키가 큰 그 소대장이 보이는구먼.
솔직허니 반세기가 흘러간 지금에사 고백하나이다.
야들은 나와 35사 훈련소에부터 현리까지 따블백메고 같이와서 가운데 배정수는 보안부대장숙소 당번으로 가고 좌측 강경일은 진안이 집으로 중대 이발병을 하였제. 진안사람 강경일동기 전우는 명찰에 이름도 선명하네.
자유인 나그네 나(병장 조동화)는 좌측에 있소이다.⇓
제대 몇일전 75.5.31 현리에서 기념촬영까지 하였고, 배정수는 제대하여 두어번 만났는데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강경일은 꼭 찾고싶은 동기였는데 찾을길 막막하다.
어디에선가 행복하게 잘살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판이여.
나의 초년인생 경험담
1970년 鐵道에 入門하여 40여년을 철도에 젊음을 불사르고, 무엇하나 만족스럽게 이룩 한 것 하나 없이 흘러간 歲月!
1970년2월20일 목포기관차사무소 기관조사 초임발령으로 사회 초년생이 되어 목포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당시 철도는 증기기관차(영국의 조지스티븐슨 1829년발명)의 운행에서 디젤전기기관차로 동력이 바뀌어가는 과정에 있었으며, 목포-광주간을 운행하는 몇 개열차는 증기기관차사업이 있었으므로 신규발령된 기관조사에게는 증기기관차승무로 지정되어 기관사1인 본무기관조사1인 보조기관조사1인 3명이서 하는 근무형태로 기관사는 운전만담당하고 기관조사는 교대하여 석탄을 투척하여 증기를 가열시켜 증기기관차가 움직이므로 석탄을 투척하는 작업이 기술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힘을 쓰는 작업이었기에 어려운 작업이었다.
칙칙폭폭, 철컹철컹 한밤의 정적을 깨며 기적소리를 직접울리면서 달렸던 추억어린 시절이 있었음을 추억삼아 이야기 해보았습니다.
시골의 어른들은 기차소리에 깨어 많은 자손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허구한 이야기는 아닐것이요, 그래도 인정있고 살기가 좋았던 시기는 그때 그옛날이 좋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순천철도국 목포기관차사무소 기관조사의 사회초년생은 2년6개월의 반복되는 임무후 1972.8.29. 군에 입대, 전주 35사단에서 6주간 훈련을 마치고 후방기 교육을 춘천에서 2주간의 훈련후 강원도 인제 현리 공병부대 의무실 위생병으로 자대 배치되었다.
군생활중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35사단 훈련병때 모악산KBS송신소 건설 작업시 모악산아래에서 세멘 한포대씩 등에 메고 정상까지 오르던일이 가장 내인생에서 힘들었던 일이었답니다.
자유인 趙東和는 黃金萬能主義의 核家族 개인주의 세상에서 옛시절의 인정은 찾아볼수 없고 하루면 수도없는 갖가지 사건사고 홍수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속에 나자신도 예외가 될수 없듯 바쁜일상으로 어영부영 하루가 흘러간다.
자유인 조동화 그는 누구인가?
전쟁의 포성이 한창인 6.25 시대에 태어나, 인생의 삶이 무엇인가 고뢰하며 즐거운 인생을 꿈꾸고자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쉼없이 흘러가는 세월속에 지나온날들이 아쉬움만 가득하지만 흘러보낸 세월은 다시오지 않기에 지나간 시간들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무상한 삶의 여정을 자연에 순응하며,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기 위하여 나날이 최선을 다하자.
인간의 삶이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왔으니 삶에 이유가 없고, 그냥 태어났으니 사는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정답이 없는 것이 정답인 것 같다.
정답없는 인생, 내가 하고자 하는것 하면서 행복 느끼며 살면 그것이 행복아닐까 생각해본다.
조동화의 벗님들!
자유인 조동화의 신조는 삶의 여로에서 이세상 살아가는 것이 모두가 “부질없다” 하면서 그냥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누가 속세를 가리켜 잠깐의 꿈속세상이라 했던가?
인생은 한조각 뜬구름 같은것이며 자연에 순응하며,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자.
오늘 해야 할일이 있다면 바로 시행하고,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행복의 자원임을 꼭 기억하며 사리라.
과거는 지나갔고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닐수도 있기 때문이다.
행복이 뭐 별거 있습니까? 그냥 내가 하고 싶을거 하면 그게 행복입디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사는일
사는 일이 너무 바빠
봄이 간 후에야 봄이 온 줄 알았네
청춘도 이와 같아
꽃만 꽃이 아니고
나 또한 꽃이었음을
젊음이 지난 후에야 젊음인 줄 알았네
인생이 길다 한들
천년만년 살 것이며
인생이 짧다 한들
가는 세월 어찌 막으리
봄은 늦고 여름은 이른
칠월과 같은 사람들아
피고 지는 이치가
어디 꽃 뿐이라 할까...
-익산역 서부역 선상 통로의 액자에 있는 글이 좋아 옮겨옴-
인간의 진정한 행복(happiness)이란 무엇인가?
안병욱 교수는 행복이란
첫째는 낙천적 인생관이다.
인생의 모든 것을 밝게 긍정적으로 보고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는 생활 태도다.
인생은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마음가짐에 달렸다.
극락과 지옥은 내 마음 속에 있다.
감사와 기쁨의 눈으로 인생을 보면 모두 즐겁고 기쁘다.
둘째는 사랑이다.
사랑은 인생의 주성분이다.
인간의 주성분은 사랑으로 되어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때, 우리는 견딜 수 없는 허무주의와 고독감과 절망감에 빠져 살아갈 수가 없다.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동물이 아니고 사랑을 먹고 사는 동물이다.
셋째는 보람있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일하는 것이요, 일 하는 것은 사는 것이다. 일을 하되, 보람있는 일을 해야 한다. 자기가 하는 일에 아무 보람을 못 느낄 때, 인생은 참을 수 없는 고역으로 변한다.
건강, 돈, 명예, 성공, 신앙,지혜, 자유도 물론 중요하지만, 행복의 핵심적 요소는 아니다.
부자의 대부분은 불행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낙천적 인생관, 사랑, 보람있는 일.
3가지 행복관을 가지고 살면 행복하다.
중국속담에 행복은
할 일이 있는 것,
바라볼 희망이 있는 것,
사랑할 사람이 있는 것, 이 세가지다.
할 일이 없다는 것, 아침에 눈을 떠도 갈 곳이 없다는 것,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는 것만큼 비참한 사실은 없을 것 같다. 죽을때까지 일을 놓지 않는 사람이 건강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일은 행복의 필수조건 중 하나다. 존 록펠러 3세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행복으로 가는 길에는 두 가지 단순한 원칙이 있다. 먼저, 당신이 관심 있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라. 그 일을 찾았다면 당신이 가진 에너지, 야망, 능력 등 모든 영혼을 쏟아 부어라."
행복( happiness)은 어디에!
독일의 철학자 칸트(1724.4.22-1804.2.12)는
" 인간 행복의 3가지 조건으로
첫째 어떤 일을 할 것,
둘째 어떤 사람을 사랑할 것,
셋째 어떤 일에 희망을 가질 것'이라고 했다."
그 세 가지를 충족할 수 있다면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으로 일생을 보낸 대철학자가 제시한 행복의 세 가지 조건이 범인들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평범한 과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우선 놀라게 되고, 그러면서도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이 이 세가지 조건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노동뒤의 휴식은 순수한 기쁨 행복의 원천
노동 뒤의 휴식이야말로 가장 편안하고 순수한 기쁨이다.- 칸트
근로는 매일을 풍부하게 하며, 휴식은 피곤한 나날을 더욱 값있게 한다. 뿐만 아니라 근로 뒤의 휴식은 높은 환희 속에 감사를 불러일으킨다. -보들레르
휴식은 단순히 일을 중단하고 노는 것이 아닙니다. 좀 더 많은 일을 좀 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재충전의 기회가 바로 휴식이라는 사실을 우리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휴식과 행복은 그대가 바라는 것, 그러나 그것은 오직 근로의 결과에서 얻을 수 있다'- 토마스 A. 캠피스 -
첫댓글 위생병<조병장>무좀약발라주소...?고작무좀약가지고3년군대생활?장하도다...ㅋㅋㅋㅋ
자유인나그네<조동화>일생기*자서전*1970년 목포 옴팡집은생각해보시게..감동이지롱..?
늘건강챙기며사시게....카페지기대장님!화이팅! <고맙습니다>*짱이요*
황혼의 여정 건강과 행복을 비오.
목포의 추억도 아주 먼 옛날이 되였고 좋은일만 가득하길 바라겠네.
35사 훈련병 시절 박영길 박재천 생각이 나는구먼
동화친구의 생생한 군생활을 읽어보니 나의 군생활도 파노라마처럼 생각이 스치네
병참학교 졸업후 양구 21사단 병기중대 보급부에서 근무하다 72년7월에 월남에 갔지 73년에 귀국하여 잔여기간을 부산군수기지사령부에서 근무하다가 제대했네
군생활이 생각나네
정묵이 친구가 군 고참이로세.
월남까지 갓다와 구사일생 국가를 위해 수고 많았네.
남은 인생여정 건강하고 행복하시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