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하강변의 손돌(孫乭)
최중호
수필가(1991 수필문학),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대전문학 수석부회장
수필집 『장경각에 핀 연꽃』, 『한국인의 두 얼굴』, 『보일 듯 말 듯』
강가라서 그런지 안개가 자욱하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의 안개다. 자동차 속도를 줄여 서행을 해야 했다. 그렇게 안개 속을 달려서 도착한 곳이 김포에 있는 염하강(鹽河江) 하류다. 염하강은 강화군과 김포시를 가로질러 서해로 흐른다. 이 강은 예로부터 많은 애환을 안고 흘렀다. 고려 시대에는 몽골군의 침략으로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로 천도하는 애달픈 사연과 조선시대에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그리고, 운요호 사건 등을 겪으면서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웠던 우리 조상들의 용감한 기개를 보면서, 말없이 흘렀던 강이다.
대명항 옆에 있는 함상공원으로 가 상륙함인 운봉함과 그 내부에 있는 전시실을 구경하고 시간이 있어 인근에 있는 덕포진으로 갔다. 이곳은 조선 시대에 서해에서 배를 타고 쳐들어오는 외적을 막기 위하여 한양의 관문에 설치한 전략적 요충지이다.
덕포진 전시관에서 전시된 자료들을 관람한 후 주변 관광지를 더 보기 위해 관광 안내 지도를 펼쳤다. 안내 지도에서 ‘손돌묘’라 표시된 곳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 선인들의 묘를 자주 찾는 편이라 더욱 관심이 갔다. 손돌이란 분은 과연 어떤 분일까? 처음 들어 본 이름이지만 안내지도에까지 표기된 걸 보면 이 지역에선 꽤 유명했던 인물인 것 같다.
손돌의 묘로 가기 위해 전시관 뒤쪽에 나 있는 길을 따라가 보았지만, 안내 표시가 없어 더 가지 못하고 망설였다. 되돌아와 광장에 있는 문화관광안내소로 갔다. 그곳에는 나이든 남자 두 분이 계셨다.
손돌의 묘가 있는 곳을 물었더니 한 분이 선뜻 나서며 자신이 그곳을 안내해 주겠다고 했다. 그는 김기송이란 분으로 전에는 김포문화원장을 지냈고 지금은 이곳에서 관광해설사로 일하고 계셨다. 그가 안내해주는 대로 광장 아래 굽이진 길모퉁이를 지나니 덕포진 포대(砲臺)가 나왔다. 그는 이곳에 있는 덕포진 포대를 발굴하는데 많은 공로가 있었다.
어느 가을날이었다. 그는 내일 벼를 베기 위해 인부들을 미리 사 놓고 저녁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날 밤 꿈에 하늘에서 오색영롱한 서기가 산언덕으로 비치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이상한 꿈이었다. 찬란한 서기도 상스러울뿐더러 장소가 현실처럼 너무 선명했다. 이튿날 그는 벼 베는 일을 포기하고 인부들을 데리고 어젯밤 꿈에서 봤던 곳으로 갔다. 그러고 나서 인부들에게 그곳을 파 보라고 하였다. 그러자 인부들은 물론 마을 사람들까지 “왜, 이렇게 바쁜 때에 인부들을 데리고 벼는 베지 않고 산등성이에 와서 땅을 파라 하는가?”라며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였다. 땅을 얼마나 파 내려갔을까. 한 인부의 삽 끝에 시커먼 물체가 걸리며 삽이 더는 땅속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일하던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모였다. 삽 끝에 걸린 물체는 시커멓게 녹이 슨 원통형 쇳덩이였다. 이렇게 해서 오랜 세월 동안 땅속에 묻혔던 포(砲) 12문과 더불어 15곳에 있는 포대를 함께 발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분을 따라 덕포진 포대를 지나 염하강이 내려다보이는 산언덕으로 갔다. 그곳에는 잘 단장된 묘가 한 기 있었다. 비에는 ‘舟師孫乭公之墓(주사손돌공지묘)’라 새겨져 있었다. 뱃사람들의 스승 손돌 공이란 뜻일 것이다.
그 후 그분으로부터 손돌 공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몽골족의 침략으로 고려 조정은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로 옮기게 되었다. 임금은 개경에서 강화로 가기 위해 배를 타고 예성강 벽란도를 거쳐 뱃길을 남쪽으로 돌렸다. 아마 그날도 염하강에는 오늘 아침처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을 것 같다.
임금을 태운 배가 어느덧 강화의 광성진과 김포의 대곶면 신안리 사이를 지날 때 갑자기 강폭이 좁아지면서 급류가 굽이돌고 앞에는 물길이 막힌 것 같이 보였다. 게다가 강에는 여기저기 암초가 물 위로 솟아 있어 자칫 잘못하면 배가 파선 될 위험까지 있었다. 여기서 앞으로 나가야 할 손돌의 배는 좀처럼 나가지 않고 흔들리며 갑자기 선회하는 것이 아닌가. 임금은 뱃길을 안내하던 손돌에게 뱃길을 바로 잡도록 명하였다. 이에 손돌은 “이곳은 보기에는 앞이 막힌 듯하오나 조금만 나가면 뱃길이 트일 것이오니 염려하지 마시옵소서”라고 아뢰었다. 몽골군의 침략으로 강화로 천도하는 임금은 신경이 예민할 대로 예민해져서, ‘저놈이 나를 이곳에서 해치려는 것이 아닌가?’하고 의심해 “손돌의 목을 베라”고 명하였다. 하지만 염하강의 뱃길에 밝았던 손돌은 굽이도는 강 하류의 뱃길을 훤히 알고 있었다.
손돌은 죽기 전에 “바가지를 강물에 띄워 바가지가 흘러가는 방향으로 따라가면 안전하게 강화에 도착할 수 있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과연 그의 말이 맞았다. 바가지가 흘러가는 방향으로 따라가 보니 강폭이 넓어지면서 앞이 확 트인 넓은 염하강 하류가 나타났다. 무사히 강화에 도착한 임금은 자신의 실수로 손돌을 죽인 것을 후회해 그의 장례를 후하게 치러주도록 하고, 넋을 위로하기 위해 사당까지 세워주었다고 한다.
손돌의 묘에서 나와 손돌목을 보기 위해 강 건너편에 있는 강화도 광성보에 도착한 것은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다. 산언덕에 있는 손돌목돈대에서 내려와 용두돈대(龍頭墩臺)*쪽으로 가는 데 돈대의 입구 근처에서 울음소리가 들린다. 흐느껴 우는 소리가 아니라 통곡하는 소리다. 이건 분명 남자가 통곡하는 소리다.
손돌은 충정으로 임금을 안전하게 모시려 했으나 임금은 그의 충심을 알지 못하고 그를 죽여 버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통곡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까이 가 보았다. 그곳엔 사람은 없고 강물만 거꾸로 흐르고 있을 뿐이다. 밀물이 들어올 때라 바닷물이 거꾸로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역류하는 밀물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곳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용두돈대 아래서 두 줄기 물길이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강 속에 있는 거친 암초와 밀려오는 물길이 서로 부딪쳐 내는 소리였다.
이곳이 바로 ‘손돌목’이다. 뱃사공 손돌의 목이 이곳에서 베어졌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강물이 많이 불어서일까, 아니면 후세 사람들이 자신을 추모하며 제사까지 지내줘서 손돌 공의 한도 풀렸을까? 이젠 통곡 소리도 물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 손돌의 전설 : 강화군과 김포시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의 내용은 같으나, 시대적 배경이 강화군에서는 조선조 인조 때 이괄의 난으로, 김포시에서는 고려 고종 때 몽골의 침략으로 강화로 천도할 때로 서로 다르게 전해 내려오고 있다.
* 돈대(墩臺) : 평지보다 높으면서 두드러진 평평한 땅 위에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벽을 쌓아 놓고 수비하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