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것들
김 경 옥
얼마 전 핸드폰을 새로운 것으로 바꿨다. 오래 써서 그런지 배터리에서 열이 많이 났다. 수명이 다한 것 같아서 바꾸긴 하였지만 오래 쓴 정도 있고 내 것에 대한 애착과 몇 년을 같이한 익숙함에 헌 핸드폰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새것을 써보니 기본으로 제공되는 데이터도 많고 속이 시원하게 속도도 무척 빠르다. 전에 없던 기능도 있고 카메라 화질도 좋다. 새것이 좋긴 좋은 것 같다.
새것이라고 다 좋은 것만 있을까? 오래되고 낡은 것에는 나름의 애정과 이야기가 서려 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내가 쓰던 물건에 마음을 두게 된다. 예전엔 싫증 나서 버리고, 유행 지났다고 버리고, 걸리적거린다고 버리고 훌훌 잘 내버렸는데 지금은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간직하는 것들이 많아졌다.
장은 묵을수록 맛이 있고, 벗도 오래된 벗이 좋다는 옛말이 있듯 내 집엔 오래된 것이 많다. 비싸고 값나가는 것들이 아닌 나의 손때와 정이 잔뜩 묻은 추억의 물건들이다. 물건 하나에 깃들은 사연과 어쩌면 많은 시간을 함께해서 나의 혼이 담겨있을지도 모를 것들, 이들은 세월과 추억을 담고 있다.
어느 날 서랍장에서 조그마한 거북이 장식이 달린 목걸이를 발견했다. 벌써 까마득한 세월이 흘렀다. 작은애가 초등학교 5학년 때쯤 수학여행을 갔다가 사 온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 집 식구들은 모두가 마음 표현하는 것이 어색하고 서투르다. 그런데 작은애만은 어릴 때부터 살갑고 곰살맞았다. 기념품 가게를 지나다가 엄마 생각이 나서 샀다며 목에 걸어 주었다. 용돈으로 과자나 사 먹지 이런 걸 왜 사와, 하면서도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엄마 외출할 때 꼭 걸고 다녀,” 아이의 당부 아닌 당부에도 원래가 치렁치렁한 것을 못 하는 성미라 서랍장에 무심코 두고선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러다 문득 눈에 띈 거북 목걸이, 그 당시 오래 장수하는 신령스러운 동물이라고 유행했었던 듯하다. 아이의 해맑은 얼굴이 떠올랐다.
용돈 아껴 산 이 목걸이는 관광지 기념품 가게에서 판매하는 흔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찬찬히 들여다보니 세상 어떤 보석보다도 귀하게 여겨진다. 값을 매길 수 없는 것. 그 속에 녹아 있는 아이의 사랑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 그 이면의 마음도 이제는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세월이 흘러도 빛이 바래지 않는 건 진실한 마음이다.
우리 집 거실 벽에는 쉬지 않고 돌아가는 시계가 걸려있다. 이 시계는 셋방살이 탈출에서 벗어나 처음 내 집 마련을 했을 때 친구가 입택 선물로 사준 것이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시간의 더께가 덧입혀져 한층 더 고풍스러워졌다. 고장 나지 않는 세월처럼 한 번의 멈춤도 없이 신기하게 잘 돌아가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친구의 마음 같다.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시계를 보면서 늘 친구의 모습을 그려 보게 된다,
오랜 세월을 함께한 친구이다. 내가 실수를 해도 따져서 묻지 않고 ‘그럴 만했겠지.’ 라며 마음을 읽어 주는 사이, 구구한 설명 없이도 날 알아주는 사이, 오랜만에 만나도 마음이 편안한 사이, 침묵하고 있어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 미주알고주알 온갖 허물까지도 다 알고 있는 친구, 내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편안하다. 많은 친구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나를 믿어주고 편이 되어 주는 친구 서넛이면 족하다.
사십여 년을 쓴 투명 플라스틱 양념통이 하나 있었다. 이것 역시 친구들이 갓 결혼한 내게 오면서 선물해 준 것이다. 흔하고 흔한 것이 플라스틱이고 세월 따라 모양도 재질도 좋아져서 버리고 새것으로 바꾸어도 좋으련만, 나의 성정은 누가 선물해 준 것은 함부로 버리지 못한다. 준 사람의 성의와 마음까지 저버리는 것 같아서, 선물이란 그 사람의 정성과 마음이다. 마음 가는 곳에 물질도 간다는 말처럼 누군가를 위한 선물 고르는 일은 가슴 설레고 기쁜 일이다.
그러다 이사하면서 이별했다. 플라스틱은 오래 쓰면 좋지 않다고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오랜 세월 함께했다. 내 손을 떠나 분리 수거장으로 던져질 때 지나간 세월이 눈앞을 스쳐 간다. 이런 소소한 것 하나로 인하여 그 속에 담겨있던 정감 어린 사연을 떠올릴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매운 고춧가루 보듬어 안고 음식 맛을 내는 데 일조를 한 그 양념통, 버리고 나니 얼마나 아쉽던지,
둘 살림에 전기세가 많이 나오는 것을 본 큰애가 노후화된 냉장고가 주범인 것 같다고 한다. 전자 제품은 오래 쓴다고 좋은 것은 아니니 전기세를 아끼려면 바꾸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한다. 이십 년이 넘도록 우리 집 먹거리 신선도를 책임져 준 애를, 어디 아프단 소리도 없는데 하루아침에 갈아 치운다는 건 내 마음이 영 내켜지지 않았다. 아이엠에프가 막 시작되던 해에 우리 집으로 와서 강산이 두 번이 바뀌고도 몇 년을 더 나와 함께 보냈다.
사람도 물건도 나이가 들면 소리를 내게 되나 보다. 조용한 집에 뚝딱거리는 요란한 소리를 내서 깜짝 놀라게 했다. 모터 소리도 높아지고 냉각기에도 문제가 생겼는지 희한한 소리를 낸다. 저도 이제 지쳐서 그만 쉬고 싶다는 표현이리라,
얼마 전 그 애를 떠나 보냈다. 드르륵 사다리차에 실려 멀어져 가는 모양새를 보며 저것이 생명이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나를 원망했겠나 싶다. 잔뜩 정이 든 유형의 것들과 이별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든지 간에 짠하고 서운하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다 인연이 되어 나에게 오지 않았을까! 내게 오는 모든 것들은 소중하다.
이렇게 나에겐 오래된 것이 많다. 떠나보내기도 했지만 묵은 것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고 싶다. 묵은 것이라고 다 낡고 버려져야 할 것은 아니다. 낡은 것엔 정이 묻어 있다. 새로움은 또 다른 역사의 시작이고. 시간은 쌓아 가는 것이다. 그래야 그 속에 옳은 값어치 건실한 조화가 자리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