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으로 여행
이승영
동창들과 1박 2일로 고향으로 여행하기로 한 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신도림역 1번 출구에서 버스가 기다린다기에 지하철을 타고 신도림역에 내렸다.
버스로 향해 가니 먼저 온 동창들이 재미나게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서울에서 18명이 탑승하여 버스는 출발 했다. 김밥으로 아침 요기들을 하고 가는 동창들의 모습이 모두 밝다. 분당 팀들이 죽전에서 3명이 탔다.
버스가 떠나고 있을 때 비가 올 것 같다. 우산도 준비 하지 않았는데 비가 오지 말았으면 좋으련만…. 나의 기대치와는 달리 차창 밖에는 빗방울이 한 두 방울 창가로 떨어지고 있다.
소백산자락 길로 접어들었을 때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나 밖을 보니 차창 밖에는 가랑비가 계속 내린다.
계곡물이 흐르는 소백산자락 식당에 버스는 정차했다.
운치가 있는 식당에서 산채 비빕밥을 먹고 있으려니 한 동창이 한 잔 술이 생각났던지 이런 곳에서는 동동주 한 잔이 있어야 제격이라며 동동주를 시켰다. 정경 좋은 곳에서 동동주 한 잔 곁들어 밥을 먹으니 꿀맛이다.
버스가 선비 문화가 흐르는 영주로 지나가게 되자 그냥 지나치지 않고 소수서원에 정차했다. 비는 그쳐 있었다.
소수서원은 풍기군수였던 신재 주세붕선생이, 고려 말의 유현인 안행선생의 연고지이다. 중종 37년(1542) 사묘를 세워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다음해에는 학사를 건립하여 백운동서원을 창간한데서 비롯되었다. 명종5년(1550) 퇴계 이황선생이 풍기군수로 재임하면서 나라에 건의, 왕으로부터 소수서원이란 사액을 받게 되어 최초의 사액서원이자 공인된 사립고등교육기관이 되었다.
소수서원 주변에는 겉과 속이 붉다하여 적송이라 부르며 3백년에서 길게는 천년에 가까운 적송나무 수백그루가 서원 주변을 뒤덮고 있다.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참선비가 되라고 이 소나무들을 학자수라고 부른다. 그래서인가 소수서원에서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버스가 영주를 떠나 울진 진입로로 들어서고 있을 때였다. 고향으로 휴가를 떠난 동창 하나가 휴가를 마치고 올라가는 길이라며 동창들을 만나고 싶으니 불영사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불영사는 우리학교 다닐 때는 여승들만 모인 사찰은 아니었으나 언제부터인가 여승들만 뿌리내려 불공을 드리는 곳이다.
버스가 불영 계곡으로 들어서자 고향에 다 왔다는 기분에 마음이 들뜨고 있다. 차창 밖에서 바리 본 불영 계곡. 그 절경이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예전만 못하지만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정경이 아닐 수 없다.
불영사에 도착하니 휴가를 마치고 천안이 집인 동창 내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이었기에 반가웠다. 그동안 쌓인 서로의 회포를 풀며 불영사 절로 들어가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창들의 마음은 마냥 즐거워 보인다.
내가 불영사를 마지막으로 왔을 때가 생각난다. 그를 만나고 그와 헤어지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 허허로운 내 마음 달랠 길 없어 홀로 불영사를 찾은 적이 있다. 벌써 36년 전이니 세월이 유수와 같이 빠르게 흘러갔다.
우리가 중학교 다닐 때였다. 수학여행으로 불영사로 가기로 했으나 수학여행가다 버스가 사고 나는 학교가 더러 있어 문교정책상 버스를 타고 수학여행을 가지 못하게 했다. 우린 버스를 타고 가지 못하면 걸어서라도 가겠다고 우겨 불영사로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다.
불영사는 우리사는 지역에서 걸어가기에는 먼 거리였음에도 우리의 발걸음은 마냥 즐거웠다. 산길로 질러가다 길을 잃어버렸다. 산길에서 길을 잃어버리면 흐르는 계곡 물을 따라 가면 길이 나온다기에 우린 계곡물 흐르는 물길 따라 걸었다. 정말 옛말 그대로 길이 나왔고 불영사에 무사히 도착했었던 기억이 난다.
불영사로 들어서니 그날이 아련한 추억이 떠오른다. 불영사는 옛 건물은 그대로 남아 있으나 새로운 건물도 입구에 들어서 있었다.
불영사를 둘러보고 연못가에 잠시 머물렀다. 우거진 나무숲 사이로 걸어 나오니 맑은 공기가 우리의 마음을 상쾌하게 했고 계곡물의 청량한 소리는 하나의 음률로 아름답게 들렸다. 불영사를 둘러보고 그 곳에서 만난 친구와 아쉬움 속에 헤어졌다.
우리가 꿈과 희망을 갖고 맘껏 뛰놀던 고향인 죽변으로 향했다. 고향 바다가 보이고 있다. 이제 고향에 당도했다는 안도감에 어머니 품속처럼 포근해진다. 맑고 푸른 동해바다. 은은히 들려오는 파도 소리. 많은 꿈을 안은 채 청소년기를 보낸 고향.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 내 삶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 그 때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글을 쓰며 살아간다.
고향에 당도 했을 때였다. 바다낚시를 하는 사람을 보니 바다낚시를 즐기던 아버지의 모습이 그리워진다. 십일년 만에 와본 고향이다.
고향에 도착하여 동창이 하는 횟집으로 갔다. 동창 집에는 이미 우리가 먹을 저녁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방에 있는 동창들도 한 둘 오기 시작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만난 고향 동무들이 31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환한 웃음을 지으며 회와 매운탕을 먹으며 한잔 술을 건하며 즐기는 가운데 어두움 속에 등대불이 반짝이고 있다. 고향에서 공무원하던 친구들은 정년 퇴직을 하고 집에서 쉬는이도 있었다. 덤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동창도 눈에 띤다. 벌써 우리가 이런 나이가 되었나 싶다.숙소로 오니 넓고 깨끗하다. 우린 샤워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고기잡이배들이 정착한 부둣가에 동창들이 빙 둘러 앉아 정겨운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학창시절로 돌아가 아이 엠 그라운드 나무이름 차, 차. 하면서 어릴 때 즐겨 하던 놀이도 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틀리면 벌칙으로 엉덩이로 자신의 이름을 쓰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는 가운데 우리는 학창시절에 즐겨 부르던 노래를 합창하며 맘껏 흥을 돋우며 부푼 가슴을 활짝 열고 어두움 속에 고요한 바다와 벗하여 즐겼다. 칠흑처럼 어두움이 짙어갈 무렵 숙소로 돌아와 잠에 깊이 취해 꿈나라로 갔다.
편한 휴식을 취하고 잠에서 깨어나 바닷가를 거닐었다. 바다 낚시하는 사람이 고기를 잡아 올리는 모습이 보인다. 바다 특유의 짠 내가 코를 찌른다. 고향의 짠 내, 오랜만에 맡아본다. 짐을 챙겨 버스에 올랐다. 아침을 먹기 위해 예약된 집으로 가기 위해서다. 오빠가 고향에 살고 있지만 시간이 없어 들리지 모하고 갈 줄 알았는데 한 시간의 여유가 있어 들리게 되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꿈 많은 소녀 시절을 보낸 나의 고향집으로 들어서니 올케가 오빠의 아침밥을 준비하고 있었다. 엄마는 치아를 치료 받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 했다. 나는 고향 집에 잠시 머물다 나와 고향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많이도 변한 고향이었다. 방파제도 나아가 보았다. 고향바다의 정취를 맘껏 느끼고 있으려니 고깃배가 하얀 분말을 일으키며 먼 바닷길을 항해 해 가고 있다. 수평선 쪽에 고기잡이 배들이 보이기도 한다. 판장에는 고깃배가 잡아온 골뱅이를 아줌마들이 작업하고 있는 모습은 얼마 만에 보는 고향의 풍경이던가.
예약된 집에서 대구탕으로 아침밥을 맛있게 먹고 버스에 올랐다. 지방에 있는 동창들이 올라가다 저녁이라도 사 먹으라고 봉투에 찬조금을 준다. 고맙기 짝이 없는 동창들이다. 우리는 그들과 헤어지기 섭섭했지만 아쉬움을 남긴 채 덕구 온천으로 향했다. 덕구온천에 도착하여 계곡에서 좀 놀다 가자기에 우리는 계곡으로 갔다. 남자들은 윗도리를 벗고 계곡 물 속으로 들어가 천진스럽게 물놀이를 한다. 여자들은 남자들의 물세례에 옷 입은 채로 계곡 물속에 빠져들기도 했다. 고향 특산물인 골뱅이를 안주 삼아 시원한 계곡물 속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동심의 세계로 들어가 물장구도 치는 동창들의 모습이 천상 어린아이 같다. 계곡에서 놀만큼 놀다 덕구온천에서 온천을 하고 나왔다. 날아갈 것처럼 몸이 개운하다.
고향으로 여행 갔다오면서 살아오면서 슬프고 가슴 아픈 기억들 고향바닷가에 모두 침수 시켰다. 맑고 푸른 동해 바다처럼 나의 생을 새롭게 단장하여 맑고 깨끗하게 수놓으며 살아가리라고 다짐하며 고향을 뒤로하고 떠나온 고향. 그날의 추억은 잊지 못하리라.
첫댓글 이승영선생님의 진실한 글을 보고싶어 다시 들어왔습니다. 저 기억하시는지 ,,이미선수필가입니다,진솔한 선생님의 글 잘 보고 있습니다,건강하셔야 해요 선생님,
고맙고 감사합니다. 덕분에 건강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동창들과 고향여행! 참 즐거웠겠습니다. 우리 삶중에 그런 좋은추억거리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니지요.
짠내가 물씬 풍기는 푸른 동해안 죽변에서 학창시절을 보내시고 그곳에서의 자란 감성이 문학적
소양이 되신듯 생각 되어집니다. 건강 하시고 좋은 글 마니 쓰시기 바랍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잘 내려 갈 수 없는 고향이지만 그림움 속에 살아가고 있는 고향을 그리며 살아가는 것도 행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