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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3:1-10, 에이도, 블레포, 에페코
성경을 보면 특별한 기사와 능력을 힘입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평범한 일상 중에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시간이나 장소가 아닌 어제와 다를 것 없는 동일한 공간과 시간에서 갑자기 일어난 것입니다. 목사의 모든 일과와 숙제는 거의 주일에 맞추어집니다. 기도하며 하나님께 말씀을 구하는 이유도 주일 때문입니다. 그리고 항상 소원하는 바는 그 주일이 특별한 날이 될 것을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 전 주에도, 그리고 그 전주에도 그래도 오늘 만큼은 평범한 날이 아니라 특별한 날이 될 것을 기대합니다. 설령 오늘 특별한 만남과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분명히 언젠가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 날 것입니다. 이왕이면 오늘이 그날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 속사람이 새로워지고 인생 문제가 시원하게 해결되는 그 날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읽은 본문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거지가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다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 일어난 특별한 사건입니다.
이 앉은뱅이는 4장22절에 보면 나이를 40여세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이를 말해주는 그가 지난 40 여 년 동안 한 일이라고는 그 곳에 앉아 구걸하는 것이 전부였고 또 앞으로 죽을 때까지 해야 할 일도 그것뿐이라는 절망적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앉아 있는 곳은 성전에 들어가는 여러 개의 문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문 앞이었습니다. 당대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전하길 미문은 황동으로 겉 문을 하고 금과 은으로 덧씌운 2 중문의 구조였다고 합니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문이었습니다. 이토록 화려한 성전 문 앞에 앉은 앉은뱅이거지를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극과 극을 보여주는 구조입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경건한 몸가짐과 깨끗한 옷을 입고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큰 복을 기대하며 그 문을 통과해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리고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죄 사함의 기쁨과 응답하심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미문의 화려함과 함께 그 곳은 이 세상에서 가장 생명의 활기와 기쁨으로 넘치고 있습니다. 거기에 앉은뱅이는 40 년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40 년 동안 가장 아름답고 복된 장소에 있으면서도 그는 가장 비참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는 미문을 들어 가본적이 없습니다. 병자 들은 저주 받은 사람들로 성전에 들어갈 수 없다는 유대의 율법에 따라 그는 그 자리에 고개를 쳐박고 세월만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아름다운 미문은 결코 아름다운 미문이 아닌 고통의 문이요 저주의 문이었을 뿐입니다. 그가 앉아 있는 곳은 활력과 생명의 장소지만 그는 그곳에서 아무런 희망 없이 40 여 년 동안 죽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 날도 별 다를 것이 없이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아침 시간부터 누구가가 던져 줄 돈을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일상적인 날이었습니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었습니다. 3시와 9시 기도가 지나고 해가 중천을 넘긴 오후 제 9 시 기도 시간이 되었습니다. 우리 시간으로 9시면 오후 3시입니다.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3절을 봅시다. 거지가 먼저 봤습니다. 여기서 보다라는 동사는 원어로 에이도입니다. 에이도는 see 그냥 보다는 뜻입니다. 그냥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의미없이 목적없이 본 것입니다.
흐리멍텅한 눈을 뜨고 늘 하던 대로 “ 불쌍한 사람에게 한푼 주십쇼 ” 하고 구걸하기 위해 본 것입니다. 이 앉은뱅이 거지의 요청에 대해 베드로와 요한도 그에게 시선을 줍니다. 4절입니다. 주목하여 - 블레포입니다.(look straight ) 집중하라, 경험하여 알라는 뜻입니다. 거지는 베드로를 건성으로 봤지만 베드로는 거지를 응시했습니다. 에이도는 보지만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상태요 블레포는 대상을 확실히 보고 그것을 틀림없이 경험하여 알다는 뜻입니다.
작년에 제가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을 경유하여 키르키즈스탄을 갔을 때 보았던 광경이 잊혀지질 않습니다. 알마티 공항에서 키르키즈 국경선을 넘어가는 8시간 동안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황폐했습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 없는 광야였습니다. 자갈과 모래 뿐 온통 세상이 옅은 회색이었고 하늘만 유난히 파랗습니다. 그곳이 바로 성경에 나오는 광야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나온 광야가 바로 그런 곳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광야로 이스라엘 백성을 내모셨을까요 ? 확실하게 블레포 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자마자 성령께 이끌려 유대 광야로 나가셨습니다. 그 또한 하나님과 시선을 맞추기 위함이었습니다. 시선을 고정하는 것은 훈련입니다. 주님은 틈틈이 새벽에, 한 밤중에 기도하시며 하나님께 대한 시선을 떼지 않았습니다.
그 시선으로 거센 악의 세력들의 유혹과 협박을 이기시고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던 것입니다. 사람이 블레포 할 때에 드디어 마음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 사람의 눈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눈 앞의 것만 보는 육신의 눈과 또 하나는 ‘마음의 눈’이요 그리고 영적인 눈인 영안도 있습니다. 그냥 씨하면 마음의 눈은 열리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블레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보라( look at)말합니다.
이것도 블레포 하라는 말입니다. 블레포의 또 다른 뜻은 ‘마음의 눈으로 보다 ’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자신들을 보라는 것은 단순히 육신의 눈을 보라는 것이 아닌 마음의 눈을 뜨라는 말인 것입니다. 사람이 성공하고 불행하게 되는 것은 좋은 환경이나 조건보다는 마음의 문제요, 바라봄의 문제에서 영향을 받는다 합니다. 유명한 헨델의 메시야라는 곡은 두시간 짜리의 대작입니다. 그 엄청난 곡을 헨델은 병상에서 죽어가며 열흘 만에 썼습니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병석에서 하나님께 블레포했을 때 음악사에 길이 남는 대작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 역사 드라마 왕건에서 보면 궁예가 애꾸눈이었습니다. 영국의 해군 제독 닐슨도 애꾸였습니다. 카르타고의 명장 하니발도 애꾸눈이었습니다. 이들은 애꾸눈으로 천하를 호령하던 명장들이었습니다. 세계 3 대 서사시를 쓴 호메로스와 밀턴과 단테, 이 세 사람은 모두 맹인들었습니다.
육신의 눈이 잘 보이거나 조건이 좋아 이른 업적이 아닙니다. 육신의 눈과 상관없이 마음의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블레포하면 소중한 것이 보입니다. 블레포하면 사랑이 보입니다. 부모를 향해 블레포하면 부모님의 은혜가 보입니다. 부부가 블레포하면 남편이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는지 아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게 됩니다. 삶의 위기는 환경보다는 마음의 문제입니다. 진짜 위기는 영적 침체요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 어느 시대보다 번쩍 거리며 발전하고 삶은 윤택해졌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은 멀어졌습니다. 아름다운 황금 빛 문에 소중한 것들이 가려졌습니다. 그래서 늙은 부모들이 버려지고 소중한 가정들이 깨지고 있습니다. 결국 원망도 못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늙은 부모와 자괴감으로 고통받는 이혼부부와 비관하는 자녀들이 얼마나 많은 줄 모릅니다. 영적 앉은뱅이요 거지가 널려 있습니다. 육신의 배부름 속에 사랑의 배고픔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거지 앉은뱅이의 근본적인 문제는 육신의 장애가 아니었습니다. 감동과 소망이 꺼져버린 마음이 문제입니다. 마음으로부터 기대가 없습니다. 기대라고 한다면 오직 한푼 얻어 목구녁에 빵 몇 조각 밀어 넣는 창자가 채워지는 것 뿐입니다. 베드로는 정확하게 이런 마음의 장님인 그를 블레포 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눈으로 자신을 블레포 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자동차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어디입니까 ? 엔진입니다. 다른 것은 조금 부족해도 엔진은 잘 돌아가야 합니다.
사람의 엔진이 어디입니까 ? 마음입니다. 마음의 엔진이 잘 돌면 뜨겁습니다. 마음이 식어진 예배는 곤욕입니다. 마음이 식어진 기도는 미신입니다. 마음이 은혜로 뜨거워졌을 때 모든 기도가 응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생활은 마음의 뜨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외쳤습니다. 블레포 마음의 눈을 뜨라, 나를 쳐다보라 , 마음으로 기대하라!
그러자 5절을 봅시다.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돈밖에 기대할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 베드로와 소경 사이에는 굉장한 간격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자기를 쳐다보라는 것은 돈 주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거지 앉은뱅이는 돈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습니다. 서로의 요구와 필요가 다릅니다. 이것도 극과 극입니다.
베드로가 보라 그랬는데 무엇을 보라는 것일까요 ? 베드로 자신의 행색일까요 ? 그도 가난한 어부였습니다. 베드로가 요구하는 블레포는 자신 안에 계신 어마 어마한 분이셨습니다.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여러분 저를 보세요, 어마 어마한 분이 저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오늘 기대하세요, 하나님 주실 은혜를 기대하세요, 하나님을 기대하세요, 속상한 모든 것 내려놓고 하나님을 기대하십시요. 엄청난 은혜를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상상도 못한 굉장한 역사가 여러분의 삶에 일어날 것입니다. 할렐루야 베드로가 블레포한 것은 이거였습니다. 그런데 이 소경은 전혀 다른 것을 기대하고 눈을 들었습니다. 어째든 두 사람의 시선이 블레포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는 말 “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 기대하고 눈을 들었던 거지에게 베드로는 돈부터 없답니다. 기대하고 쳐다봤는데 “ 나 돈 없다 ” 약 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딴게 있답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니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무조건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돈은 없지만 내가 어떤 사람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름은 얼마 전에 죽은 예수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으로 걸으라 명령하고는 자신의 손을 잡아 일으킬 때에 발과 발목에 힘이 생기고 걷고 뛰게 된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 일이 일어났는지 자신도 모를 일입니다. 다만 시선이 블레포하고 짧은 말이 선포된 것뿐인데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앉은뱅이였던 그가 증언할 수 있는 사실은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할 때 일어났다는 사실 뿐입니다. 20 년 전 군에 입대했을 당시 훈련소에서 친척중에 군대나 정부기관에 고위직이 있으면 적어 내라고 합니다.
고위직의 줄이 있는 사람들은 좋은 곳으로 자대 배치받고 비교적 군 생활이 편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날 동기 하나가 적어 내지 않고 머뭇거리며 소대장에게 ‘이런 분의 이름도 적어야 하냐’고 물었습니다.
군대나 정부의 고위직하고는 상관없지만 소대장님이 아실만한 분이라서 적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소대장이“ 누군데 ”그랬더니 저희 큰 아버지 성함이 “ 최 규하 쓰십니다. ” 그 날부터 훈련도 안시킵니다.
얼 차례도 다 빼주고 훈련병 때는 면회도 안 되는데 가족 면회까지 시켜 줍니다. 그리고 더 기막힌 것은 제가 대대 선임이어서 훈련 마치면 받기로 되어 있던 29 연대 연대장 상을 그에게 빼앗겼습니다.
그 상 받으면 자대 배치 받고 2박 3일 포상휴가거든요. 전직 대통령의 이름은 강력한 힘이었습니다.
전직 대통령의 이름보다 예수의 이름은 비교할 수 없는 파워가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생사를 가릅니다. 세상에서 가장 실력있는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절대적인 이름입니다. 이 이름이 통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먹히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예수 이름은 하늘과 땅의 모든 세계가 복종하며 영적 세계도 굴복하는 위대한 이름입니다.
요한복음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릉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 중 세상 살기가 너무 어려워서 냉냉한 심령으로 이 곳에 오신 분이 계십니까?
오늘 예수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믿음과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길 축복합니다.
가정이 경제적으로 어려우십니까? 사업이 어려우십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업아 일어날지어다. 몸이 병들어 있습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병의 고통에서 일어날지어다.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열정이 살아나고 우리 가정들과 사업이 이 일을 위해 일어날지어다.
우리는 이 앉은뱅이가 일어난 기적을 주목해 봐야 합니다. 5절을 보면 앉은뱅이가 바라보았습니다.
보라 해서 본 것입니다. 블레포 하라 했으면 블레포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 바라보거늘 ” 이 단어는 불레포가 아닙니다. 룩 엩이 아닙니다. 블레포가 아닌 다른 단어가 쓰여졌습니다.
원어로 에페코라는 단어가 쓰여졌고, 영문으로 보면 give attention으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에페코라는 단어의 의미는 못 떠나게 굳게 붙잡는다는 뜻입니다.
이제 용어를 확실하게 정리를 해 보십시다. 헬라어에서 본다라는 단어가 3가지가 있는데 그냥본다는 에이도가 있고 집중해서 본다는 블레포, 그리고 마음안에 꽉 붙잡아 둘 정도로 본다는 에페코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우리를 블레포하라는 것은 베드로와 요한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것을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거지는 돈을 얻을까하여 블레포했습니다. 바로 그 때입니다. 짧은 순간입니다.
그 순간 앉은뱅이는 베드로의 시선 속에서 지금까지 보았던 시선과는 전혀 다른 시선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 시선은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 찬 예수 그리스도의 따뜻한 시선이었습니다. 거지 앉은뱅이에게 마음의 눈이 열린 정도가 아니라 또 다른 눈인 영안이 열려 버린 것입니다.
생명의 시선을 발견한 앉은뱅이는 그 짧은 순간 예수님의 시선을 블레포한 것이 아니라 에페코 한 것입니다.
주목한 정도가 아니라 굳게 붙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못 떠나게 굳게 붙잡다’는 에페코를 써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라 보거늘’ 예수님의 시선을 절대로 놓칠 수 없도록 자기의 마음에 꽉 붙들어 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베드로에게 잡힌 오른 손도 더 이상 베드로의 손일 수 없었습니다. 그 손은 앉은뱅이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린 손이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과 그 분의 피 묻은 손에 잡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먼저 한없이 따뜻한 생명의 시선을 주지 않았던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앙은 주님의 선행된 시선에 인간이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 시선이 떠나지 않도록 꽉 붙잡는 것입니다.
따스한 햇볕같이 쏟아지는 주님의 시선에 인간이 에페코 할 때 평범한 일상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설교 때 마다 저를 블레포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는 베드로 만큼이나 허물이 많습니다. 그러니 저를 블레포 하지 마시고 저를 통해 말씀하고 계신 예수님을 에페코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할 때 평범한 예배가 여러분 각자에게 놀라운 체험과 기적을 만드는 역사를 이룰 것입니다. 복잡한 인생길에 많은 문제가 있다고 해결의 열쇠를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능키는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이신 주님께 에페코하면 그것으로 인생은 승리하게 되어있습니다.
요즘 다 차를 몰고 다니는데요. 차를 다 아는 사람만 운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르는 사람도 운전 잘합니다.
저희 아내는 자동차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시동키면 가는 줄 알고 브레이크 밟으면 서는 줄만 압니다.
자동차의 원리나 구조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운전을 기가 막히게 잘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인생을 잘 모릅니다. 인간관계도 잘 하지 못합니다. 말 주변도 없습니다. 소심합니다. 믿음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대속이 뭐고 삼위일체가 뭐고 은혜 언약이 뭔지 잘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예수님께 에페코 하면 받드시 복을 받는다. 믿음 생활 잘하면 복을 받는다.’ 이것만 붙들면 됩니다.
대구 서부 교회에 아멘 교수로 불리는 조동식 집사님이라는 분이 계신답니다.
그 분의 어머니께서 큰 며느리를 보시던 해가 마흔 다섯 이었답니다.
구역 예배를 드리면서 목사님께서 며느리에게 축복하기를 “ 다윗같이 신앙 좋고 다니엘처럼 뛰어난 아들 낳기를 축원합니다. ”하더랍니다.
그럼 아멘해야 잖아요. 그런데 이 며느리가 아멘을 안 합니다. 시어머니가 자꾸 눈짓을 하는데도 안하는 겁니다.
그러자 다급한 시어머니께서 대신“아멘“해 주었는데 그만 시어머니가 임신을 해 가지고 늦동이를 나았답니다.
그 목사님이 축복한데로 다윗같이 신앙 좋고 다니엘처럼 뛰어난 머리를 가진 교수 조동식 집사가 태어난 겁니다.
신앙을 머리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무슨 말씀을 주시든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에페코 하면 그대로 되는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앉은뱅이가 눈을 뜨자마자 한 일이 무엇입니까 ? 8절을 보세요. 성전으로 들어가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성전에 들어갑니다. 그에게도 드디어 미문이 아름다운 문이 되었습니다.
단순히 건축물인 성전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이 활짝 열렸다는 뜻입니다.
이 시간에 주께서 이곳에 계신 여러분을 뜨거운 사랑과 생명의 눈으로 응시하고 계십니다.
자기 욕망과 감정에 휘둘리며 마음의 눈이 먼채 밥그릇만 쳐다보고 있는 우리에게 블레포 할 것을 요청하시고 계십니다.
세상에서 밀려나 영적 앉은뱅이로 주저앉은 그 다리를 일으켜 세워주시려고 피 묻은 손으로 우리 손을 잡으려 하십니다. 그 분을 향해 에페코 하고 싶지 않습니까 ? 그 분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고 싶지 않습니까 ?
활짝 열린 축복의 성전을 향해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며 찬양하며 나아가고 싶지 않습니까 ?
참된 생명도 , 참된 사랑도, 참된 능력도, 참된 위로도, 참된 소망도, 참된 성공도 오직 그 분께만 있습니다.
이 시간 나를 위해 피흘려 주신 주님의 뜨거운 사랑의 시선에 에페코 하고 싶지 않습니까 ?
저를 블레포 하십시오. look at me , 믿음의 눈을 열어 저를 보십시오.
그리고 저를 통해 찾아오신 예수님을 에페코 하십시오. 굳게 잡아 결코 놓치지 마십시오. 잡으셨습니까 ?
이제 선포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날 지어다.
예수의 이름으로 가정과 사업이 불 같이 일어날 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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