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절에서는 유홍준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창작과 비평사, 1993년 1권, 1994년 2권)를 예로 삼았다.
유교수는 책에서, 가람이나 건축물을 볼 때 그것을 품는 주변 자연과의 '행복한 조화'를 통해 아름다움의 해법을 찾는다.
그 해법의 도구로써 산맥체계를 끌어왔을 경우,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여러 문제점들을 지적할 예정이다.
밝혀둘 일은, 지적하고자 하는 모든 잘못의 책임은 산맥에게 있다는 것이다.
산맥이 지형인식의 기본개념으로 교과서에서 가르쳐지는 한, 이러한 잘못은 누구에게나 계속될 수밖에 없다.
먼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첫째 권을 읽겠다.
이런 수덕사 대웅전을 두고 문화재관리국에서 안내표지판이라고 세워둔 그 글귀를 읽어보면
세상에 이처럼 망측스러운 글이 없다.
국보 제49호...
맞배지붕에 주심포 형식을 한 이 건물은 주두 밑에 헛첨차를 두고 주두와 소로는 굽받침이 있으며,
첨차 끝은 쇠서형으로 아름답게 곡선을 두어 장식적으로 표현하고,
특히 측면에서 보아 도리와 도리 사이에 우미량을 연결하여 아름다운 가구를 보이고 있다.
이게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인가?
말인 즉슨 다 옳고 중요한 얘기다.
그러나 이것은 전문가들끼리 따지고 분석할 때 필요한 말이지
우리 같은 일반 관객에게는 단 한 마디도 필요한 구절이 없다.
그런 사정 속에서 나는 이 시대 문화의 허구를 역설로 읽게 된다.
(1권 99-100쪽)
백 번 맞는 말이다.
소동파가 말했듯 "물 긷는 아낙이 읽어서 모르는 글은 글이 아니다."
유홍준교수는 소위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전문성을 티내기 위해 일반 관객에게 부렸던 횡포를 시원하게 일갈해 주었다.
나만 해도 그런 안내판을 볼 때마다 "나쁜... 무식한..." 욕을 해댔을 바에야,
아름다움을 먹고 사는 저자로서는 그 이상의 분노를 느꼈음이 분명하다.
글을 쓰는 데는 목적이 있다.
목적을 잊은 글은 이미 글이 아니다.
문화재 안내판에 적힌 글들은 '일반 관객에게 알려준다'는 목적을 잊은 것이므로, 무식한 글이다.
그런 전제 하에 유교수의 다음 글을 읽는다.
태백산에서 출발하여 소백산,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을 이루며 호기있게 치닫던 노령산맥의 끝자락이
망망한 남해바다를 내다보고는 급브레이크를 밟아 주춤거리면서 이루어낸 분지평야가
삼산벌이며 문득 정지한 지점이 대둔산인 것이다.
(1권 65쪽)
이게 무슨 말인가.
말인 즉슨 청산유수다.
문화재관리국의 전문가들과 달리 티내지 않고 부드럽게 썼다.
그러나 글이 부드럽게, 읽히기 쉽게만 쓰이면 그 목적을 다하는 것인가?
몇 번을 다시 읽어도 나는 "태백산에서 출발하여 소백산,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을 이루며
호기있게 치닫던 노령산맥의 끝자락"을 그려낼 수 없다.
(대둔산은 백두산에서 태백산으로 흘려내려온 백두대간이 호남정맥, 땅끝기맥에 이어져 마지막으로 빚어올린 산이다.)
대체 이 글은 무엇을 말하기 위함인가.
노령산맥이 단순히 삼산벌과 대둔산의 아름다움을 수식하기 위한 시적(詩的) 형용구로써 동원되었을 뿐이라고
변명하기에는 서술이 너무 구체적이다.
읽고 있노라면 정말 노령산맥이 '태백산에서 해남까지' 줄달음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문화재 안내문이 '일반인에게 알린다'는 목적을 잊은 글이라면,
이것은 '사실대로 알린다'는 목적을 잊은 글이다.
노령산맥은 아마도 소백산맥의 잘못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단순한 착각이라 치고,
지리산까지 내려온 산맥이 어디서 느닷없이 정지하여 해남 대흥사 땅의 대둔산을 일으켰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여기서 돋보이는 것은 사실과는 상관 없는 저자의 글솜씨뿐이다.
태백산맥 전체를 절집의 정원으로 끌어안은 부석사 가람배치의 장대한 기상...
(1권 머리말, 5쪽)
실은 첫째 권이 발간된 후 저자에게 "부석사를 지을 당시 태백산맥은 그 이름조차 없었다"는 요지의 편지를 드린 바 있다.
그러니까 고려인들이 절집의 정원으로 끌어들인 산줄기의 기상은 태백산맥이 아니라 백두대간이었다는 뜻이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은 고려 현종 7년인 1016년에 건립되었다.)
부석사를 논하는 글에서 '태백산맥'의 장대한 기상을 말하는 것은, 이웃집 정원을 내집에 끌어다 잡자랑하는 꼴이다.
그러나 부석사가 본격적으로 거론된 둘째 권에서도 논지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부석사의 아름다움은 모든 길과 집과 자연이 이 무량수전을 위하여 제자리에서
제 몫을 하고있는 절묘한 구조와 장대한 스케일에 있는 것이다.
... (중략) ...
부석사는 태백산맥이 두 줄기로 나뉘어 각각 제 갈 길로 떠나가는 양백지간(兩白之間)에 자리잡고 있다.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 봉황산 중턱이 된다.
... (중략) ...
무량수전에 이르면 자연의 장대한 경관이 펼쳐진다.
남쪽으로 치달리는 태백산맥의 줄기가 한눈에 들어오며 그것은 곧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서막을 보여주는 듯하다.
(2권 76-77쪽)
저자는 부석사 터를 설명하기 위해 '양백지간(兩白之間)'이라는 말을 끌어왔다.
끌어온 건 좋으나 그것을 "태백산맥이 두 줄기로 나뉘어 각각 제 갈 길로 떠나가는 사이"로 해석한 것은 경솔한 일이다.
양백지간은 <감결>에 나오는 풍수용어로,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의 남쪽 지역이 천하의 명당임을 가리키는 말이다.
양백지간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태백산맥이란게 있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양백지간을 '두 줄기 태백산맥 사이'로 쓴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어디서 인용했는지는 모르겠으되, 아마도 저자의 풍부한 상상력이 '양백(兩白)'을 '양(兩) 태백산맥'으로 추정하게 했고,
그 생각에 지형을 꿰맞추다보니 태백산맥을 두 줄기로 갈라놓은 것이리라.
그렇다 치고, 저자 임의로 두 줄기로 나누어놓은 태백산맥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갈라진 태백산맥 중의 하나는 얼마 전 저자가 대둔산을 설명하기 위해 지어낸,
"태백산맥에서 출발하여 소백산,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을 이루며 호기있게 치닫던 노령산맥"과 겹치는 것이다.
그 노령산맥이 오자(誤字)였다고 변명한다면, 이번에는 소백산맥과 겹친다.
<나의 문화...>는 소설이 아니다.
시는 더욱 아니다.
그것은 국토박물관의 바른 길눈이를 자처한 인문지리서다.
국토가 저자의 글과 상상력을 위해 마음대로 늘었다 줄었다하는 물건 또한 아니다.
우리의 문화유산은 우리의 산줄기 개념으로 보았을 때 비로소 바르게 떠오른다.
그것은 글솜씨와 상관 없는 일이다.
인문지리서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덕목일 뿐이다.
류인학은 <우리명산 답사기>에서 부석사를 품는 봉황산의 위치를, 백두대간의 눈으로 보았다.
태백산에서 강원도와 경상도를 가르며 힘차게 서쪽으로 뻗어가던 백두대간이
태백산과 소백산 중간쯤에 선달산을 솟아 올렸다.
선달산에 선 산줄기 하나가 백두대간과 갈라져 남쪽으로 향한다.
이 맥이 수십번 솟구쳐오르며 달리다가 우뚝 멈춰서서 크게 힘을 모아 봉황산이 된다.
강연회 등을 통해 이런 의견이 개진되면 반론이 나오곤 했다.
"유교수의 글은 아름다움을 설명하기 위해 쓰였으므로,
아름다움만 느끼면 됐지 구체적 사실이 확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요지였다.
집의 아내까지도 그랬다.
그처럼 많은 지지자를 확보하고 있는 교수의 글이 매력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매력은 최소한 "피카소는 피카소다"고 말하는 사실성에 바탕을 둔 후 얻어지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피카소의 그림을 고갱의 것이라 하면서 설명되는 아름다움은,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게 들리더라도 여간 공허한 게 아니다.
튼튼하고 아름다운 집이 한 채 있다.
그 집의 안내문에 쓰여진 건축년대가 '1016년'이라면 관객들은 "옛날 집인데도 탄탄하네" 하고 감탄한다.
행여 오자(誤字)에 의해 건축년대를 '1916년'이라 써 놓는다면 안목 없는 관객으로서야
"과연 요즘 지어진 집이라 탄탄하군" 하고 감탄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감탄하더라도 감탄만 하면 된다는 것일까.
부석사 무량수전에 오르면 과연, 저자의 말처럼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서막이요,
소스라치는 기쁨이며, 놀라운 감동"이다.
그러나 그 감동을 말하기 위해 끌어들인 절집 정원이 태백산맥이다.
태백산맥의 정기를 끌어들인 것이라면 오욕의 역사를 끌어들인 것이요,
태백산맥의 산세를 끌어들였다면 왜곡된 지형개념을 끌어들인 것이다.
사실을 모르는 독자들이 여전히 "아름답다"고 말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2백년 전 그곳을 다녀간 이중환은 그처럼 왜곡된 사실을 동원하지 않고도 부석사터의 장쾌함을 이렇게 말했다.
경상도 전체를 한눈에 제압한다.
모든 것이 다 산맥 탓이다.
산맥 아니었다면 이런 잘못은 생겨날 수 없다.
다시, 태백산맥은 1903년에 태어났고 무량수전은 1016년에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