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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 성서연구 – 제21B강 역대상하 메시야왕국의 대망 -
(78) 하나님의 교훈이 끊어지면 역대하 24:17-27
오늘 본문은 그의 고모부 여호야다가 130세로 장수하여 왕의 묘실에 장사되는 것과 사뭇 다른 요아스의 행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왕이 되면서부터 성전을 향한 열심히 남달랐던 요아스가 서른 살이 되어 여호와의 성전을 이전처럼 견고하게 잘 보수하고, 성전의 그릇들을 잘 만들어 두었던 요아스가, 오늘 여호야다의 죽음을 기점으로 타락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본문이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며”(대하24:2)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계산을 해보니 놀라운 내용이 있었습니다. 요아스가 40년을 통치하고 오늘 본문에 읽으신 것처럼 신하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데, 많이 양보해서 요아스가 죽기 직전에 여호야다가 죽었다고 하더라도, 오늘 여호야다가 목숨을 걸고 요아스를 구해낸 때는, 90세 이후가 되는 것입니다. 제일 빠르게 잡으면, 90세에 요아스를 구해서 성전에서 7년을 양육하고 97세에 오늘 그를 왕으로 세워내었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하나님이 부르시기까지 오늘 요아스를 계속해서 말씀으로 양육하고, 하나님의 전에서 번제를 드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육아는 90세에도 계속 되어야 합니다. 나는 노인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90세에 갓난쟁이를 시작으로 7살까지 성전에서, 그리고 최소 30살이 될 때까지 그에게 말씀을 가르쳤던 것을 기억하시고, 90세부터 가정에서는 물론, 교회에서 더욱 영유아부 아이들로 시작하시어 최소 30년은 교회학교 근속교사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여러분, 그래요. 오늘 저와 여러분의 헌신이, 하나님의 전을 사랑하고, 다음세대를 지키고 양육하는 사명이, 나이와 조건에 멈추지 않으시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 부르시는 날까지 무엇보다 건강하게 하나님께 예배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전할 수 있는 복된 분들이 되시고, 그렇게 오늘 우리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우리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우리의 자녀가 나이가 얼마가 되었든 말입니다.
왜요? 오늘 여호야다 죽으면서 그 교훈이 끝나게 되면서, 오늘 저 요아스, 성전에서, 말씀으로 자라난 요아스도, 그렇게 성전을 향해 열심을 내었던 요아스도 타락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백성들의 말을 듣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렇게 수십 년 들어온 말씀이 온전히 그의 것이 되지 못하고, 내내 여호야다의 것이었던 까닭입니다. 다시 말해 여호야다의 입술에서 전해질 때는 내 말씀인 것 같았는데, 돌아서고 나면, 여호야다가 곁에서 멀어지고 나면 이내 그 말씀은 내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잔소리처럼 들리고 다 아는데 또 이야기한다고 짜증도 내지만, 정말 아느냐, 내 실생활에 적용되고 있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학(學)에서 그치면 안되고, 습(習)에 이르러야 합니다. 반복하고 훈련해서 내 것이 되어야 합니다. 더욱 말씀을 가까이 하시고, 내가 기억하고 내가 암송하고 내가 힘을 얻는 복된 말씀이시길 축복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놀랍게 지키시고 돌봐오신 요아스입니다. 저 아달랴의 살육으로부터 보호해주신 왕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고발하고 있습니다. 요아스는 어릴 때부터 여호야다의 영향력 아래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왕이 될 때 그 손에 하나님의 언약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자기 자신의 참된 믿음을 갖지 못했던 왕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오늘 이 성전을 수리하고자 하는 열심도, 자신의 왕권을 위한 것이었나? 지도력의 강화를 위해 성전을 그렇게 수리하고자 했나 의심이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옛날 대부분의 왕들은 자신의 정치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거대한 신당을 세웠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왕들이 민심을 붙잡기 위해서 큰 절을 세우고 큰 절을 보수해왔듯 말입니다. 또 그러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맞아 떨어지는 것이 오늘 요아스의 행보 때문인 것이지요? 여호야다의 교훈,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산당을 남겨둔 채 바알과 아세라를 함께 섬기던 요아스는, 그때부터 하사엘의 공격을 받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뜻대로 쓰임받았던 예후가 범죄하기 시작할 때, 하사엘을 들어 땅을 잘라내기 시작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본문 23절입니다.
“일 주년 말에 아람 군대가 요아스를 치려고 올라와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이르러 백성 중에서 모든 방백들을 다 죽이고 노략한 물건을 다메섹 왕에게로 보내니라”
여호야다가 죽고 스가랴가 죽고, 자신의 범죄함에 진노한 자신을 향해 아람의 군대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손에 들고 하나님의 율법책을 귀에 듣고 자란 왕이었으니 어떻게 해야 될까요? 얼른 무릎끓고 하나님을 향해 기도를 드려야 하는 것이지요? 자신의 악함과 범죄함을 냉큼 깨닫고, 이제서라도 깨닫고, 하나님께서 자신과 나라와 성전을 지켜주시고 돌봐주실 것을 기도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때 그가 결정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아람 군대가 침략해서 다 노략해 간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열왕기서는 전혀 다른 사실을 증언하고 있지요? 평행본문 확인합니다.
“유다의 왕 요아스가 그의 조상들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여호람과 아하시야가 구별하여 드린 모든 성물과 자기가 구별하여 드린 성물과 여호와의 성전 곳간과 왕궁에 있는 금을 다 가져다가 아람 왕 하사엘에게 보냈더니 하사엘이 예루살렘에서 떠나갔더라”(왕하12:18)
그렇게 성전의 모든 성물들을 성전과 왕궁에 있는 금을 다 하사엘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그의 증조 할아버지 때부터 하나님께 드렸던 모든 것, 그리고 자기가 서른 살에 정신차리고 백성들과 함께 드린 것까지 전부 다 저 아람왕 하사엘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인간적인 외교로 정확하게는 돈과 약조로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온 백성들이 마음을 모아 하나님께 드린 것을 사람에게 주었던 것이지요. 그랬던 그는 어떻게 되었다고요?
“요아스의 신복들이 일어나 반역하여 실라로 내려가는 길 가의 밀로 궁에서 그를 죽였고”(왕하12:20)
오늘 본문에서 확인해보니, 저 신하들이, 전투에서 중상한 왕을 치료하고 돌보질 못하고, 오히려 밀로궁의 침상에서 쳐죽인 것입니다. 자기의 신복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의 삶을 마치게 되었던 것이지요. 나이많아 늙어 죽었던, 왕들의 묘실에 장사되었던 저 여호야다와는 너무 다른 최후를 맞는 것입니다.
자,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고요? 그 자세한 내막을 오늘 본문에서 찬찬히 확인해보죠. 요아스는 여호야다의 신앙적 지도가 없어도 한결같이 하나님의 언약에 충성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요아스는 누구의 말을 들었어요? 오늘 본문이 시작부터 고발하고 있습니다.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들의 말을 듣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으므로 그 죄로 말미암아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사 다시 여호와에게로 돌아오게 하려 하시매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경고하였으나 듣지 아니하니라”(대하24:17-19)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유다방백들의 말을 듣습니다. 그 말을 듣고 어떻게 했다고요?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자신의 존재이유가 되었던 성전을 버립니다. 자기 정체성의 근간이 되는 성전을 버립니다. 그리곤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기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그게 안되어 다시 선지자들을 보내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했다고요? 듣지 않습니다. 자기만 듣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도 듣지 못하게 했던 것이지요. 마침내 다른 선지자가 아닌, 바로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는데, 저 요아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오늘 그 일로 요아스가 신하들에게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의 영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그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하지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나 무리가 함께 꾀하고 왕의 명령을 따라 그를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로 쳐죽였더라 요아스 왕이 이와 같이 스가랴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베푼 은혜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의 아들을 죽이니 그가 죽을 때에 이르되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하니라”(대하24:20-22)
그리고 나서 일주년 후에 하사엘이 일어났고, 요아스가 마주싸웠지만, 별것도 아닌 적은 무리의 군사에게 남유다의 대군이 패하고, 요아스는 적들이 버리고 갈만큼 중상을 입었고, 내어준 것을 넘어 이제 나머지 모든 보물들도 다 약탈 당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후 저희들이 기대하는 그 어떤 반전도 없었습니다. 회복되어 다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저 열조의 묘실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비참한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확인해볼까요? 오늘 본문 23-25절입니다.
“일 주년 말에 아람 군대가 요아스를 치려고 올라와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이르러 백성 중에서 모든 방백들을 다 죽이고 노략한 물건을 다메섹 왕에게로 보내니라 아람 군대가 적은 무리로 왔으나 여호와께서 심히 큰 군대를 그들의 손에 넘기셨으니 이는 유다 사람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라 이와 같이 아람 사람들이 요아스를 징벌하였더라 요아스가 크게 부상하매 적군이 그를 버리고 간 후에 그의 신하들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들의 피로 말미암아 반역하여 그를 그의 침상에서 쳐죽인지라 다윗 성에 장사하였으나 왕들의 묘실에는 장사하지 아니하였더라”(대하24:23-25)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아스를 위해서 얼마나 일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여호야다가 죽었을 때에도 그의 마음을 바알과 아세랑에게 돌렸을 때에도 선지자들을 보내 주셨던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통해서 말씀을 다시 주시건만, 그것도 여호와의 전 뜰에서, 돌로 쳐서 죽여버릴만큼 그는 하나님을 떠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호야다의 신앙적인 지도가 없어도 하나님 앞에 한결같이 믿음으로 잘 있을 수 있을까요? 선지자와 선지자들의 경고와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우리에게 있을까요? 아니요, 그렇지 못할 거라고, 교만하거나 착각하지 말라고, 오늘 성경은 어려서부터 성전에서 말씀으로 자라난 요아스, 그의 타락과 범죄함, 그리고 그의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최후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힘들어도 어려워도 듣기 쉬운 말씀, 귀가 즐거운 말씀이 아니어도, 늘 이렇게 주님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들려주시는 경고와 말씀을 청종해야 합니다.
왜요? 오늘 우리 역시 이 생명의 교훈이 끊어지면 어느새 요아스의 길을 걷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못 듣게 만드는 악한 길을 말입니다. 바른 말을 하는 사람들을 돌로 쳐 죽이고 없애버리는 길을 말입니다. 그렇게 내 소견대로 살아가는 길을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평생에 늘 영적인 여호야다를 곁에 두시고, 늘 하나님의 교훈을 받으시며, 성전을 향한 열심과 내게 주신 사명을 더욱 힘있게 감당해 나가시길 축복합니다. 여호야다가 없으면 선지자, 선지자라도 없으면 저 스가랴의 말을 들으며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니 스가랴마저 없어도, 내 손에 허락하신 언약책을 붙들고 우리의 걸음을 지켜내는 분들이 되셔야 합니다. 우리 생애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까지 다른 것은 몰라도 반드시 말씀 만큼은 끊어지는 일이 없는 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특별히 주변의 사람 때문에 환경 때문에 그로 말미암는 분노와 미움 때문에 말씀과의 거리가 멀어지지도, 말씀이 끊어지지도 않으시길 축복합니다. 그것을 핑계삼고 이유삼는 어리석음은 더더욱 없으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사람 때문에, 하나님을 환경 때문에 멀리한다고요? 그게 제일 시절입니다. 목사가 미워도 목사가 싫어도 목사가 짜증나도, 말씀은, 하나님은 반드시 사랑하시길 축복합니다. 목사의 손은 놓아도, 하나님의 손은 꼭 붙드시길 축복합니다. 바라옵기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늘 좋은 분들과 좋은 교제, 좋은 만남 속에 말씀이 안전하게 들려지는 삶, 말씀대로 준행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게 되시길 축복합니다. 누구처럼? 가정예배의 저 엘리야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저 악한 하사엘이 힘을 갖고 일어나는 일도 우리의 것을 빼앗아가는 일도, 내가 부상을 입는 일도, 침상에서 신복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도, 죽어 왕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도 하나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내게 찾아와 내게 절하는 저 방백들의 말을 듣지 마세요. 그 방백들 17절 요아스의 마음을 돌렸던 방백들, 23절에서 다 죽습니다. 또한 그 중에 제일 가까운 신복들은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말씀 앞으로 돌아오시길 축복합니다.
부디 우리 하일교회 성도님들은 모두 저 여호야다처럼, 가장 악한 사람 아달랴 곁에 있을 수밖에 없었더라도, 가장 중요한 영혼 하나를 살리는 일을 잘 감당하시고, 나이와 조건을 넘어서서 멋지게 사명을 감당해내시는 분들, 그렇게 하나님께서 평생을 지켜주사 하나님의 전에서 쓰임받고, 부르시는 날까지 하나님 앞에서 번제를 드리게 하시는 분들, 건강과 힘을 여상하게 하시고, 총명과 지혜를 늘 더해 주셔서, 늘 능력있는 말씀으로 주변의 사람들을 교훈해 나가시는 분들, 그렇게 백발이 면류관이 되는 복된 생애를 사시다가 아주 나이 많아 늙어 열조의 묘실, 그것도 왕의 묘실에 그 이름이 기억되며 묻히는 복된 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주신 말씀대로 이 복을 다 누리게 되시길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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